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46)
“조부님, 저 에반젤린이에요.”
“들어오거라.”
오늘도 공작은 서류의 산에 포위되어 있었다. 공작의 책상에는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쌓인 양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어째 더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얼굴도 퀭한 게 제대로 숙면도 취하지 못한 듯했다.
공작은 소파 쪽으로 눈을 흘끗댔다. 저건 말하기 싫으니 알아서 앉으라는 비언어적 표현이다. 공작저 생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물론 내가 3년간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난 배움이 빠르니까 그냥 넘어가자.
푹신한 자리에 앉아, 괜히 뜸 들일 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부님은 곧 희생제가 열린다는 걸 아시나요?”
“…희생제?”
일필로 단숨에 움직이던 공작의 손이 멈추며 흐름이 끊겼다. 공작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진다는 식으로 날 바라봤다.
“가브리엘 경이 깨어나셨거든요.”
“…그건 잘됐군.”
“희생제 이야기도 가브리엘 경이 꺼낸 거예요. 열흘 후라던데 조부님은 소식 들으신 거 없으신가요?”
“열흘 후라면 분명 초대장이 왔을 텐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희생제에 대해서 모르는 투였다.
“리코라드카, 편지를….”
공작이 습관적으로 리코를 불렀다가 멈칫했다. 대충 공작이 왜 서류의 산에 둘러싸여 폐인처럼 과로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유능한 집사인 리코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공작은 리코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중요한 편지 같은 것들도 리코가 전부 확인하고 공작에게 주었을 거다. 그런 보조 업무를 할 사람이 없으니 공작이 소식이 느렸던 거고.
공작은 직접 편지들이 쌓여 있는 더미를 뒤적이다가, 하나를 빼 들었다.
“여기 있었군….”
공작은 거칠게 편지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공작은 미간을 팍 찌푸리며 읽더니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화가 나 편지를 박박 찢어댔다. 그것도 모자라서 찢긴 종이를 난로에 던져 불태웠다.
아니, 나도 보고 싶었는데…. 마리크 주교가 아게라를 두고 협박이라도 한 건가?
내용이 궁금했으나 아무래도 내게 설명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씩씩대던 공작은 아직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채로 내게 설명했다.
“초대가 온 것은 나뿐이다. 네가 공작저에 머무른다는 걸 알면서 내게만 보낸 것을 보면, 네 편지는 그 빌어먹을 로한슨 놈에게 간 모양이지.”
“백작에게요?”
아차. 습관적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백작이라고 말해 버렸다. 다행히 백작을 혐오하는 공작은 내 호칭을 지적하기는커녕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래. 대외적으로 넌 빌어먹을 로한슨이 아니냐. 내 딸의 자식이니 그냥 공작저로 보내면 될 것을!”
공작이 구시렁거리며 편지를 쓴 자를 욕했다. 딸의 자식이라…. 손녀라는 말이 어지간히 입에 달라붙지 않나 보네.
그래도 나까지 싸잡아서 빌어처먹을 로한슨으로 보던 공작이 이제는 날 유사 호사퀸으로 보는 게 조금은 우스웠다.
“희생제에 참여할 생각이냐? 로한슨 놈이 머무르는 곳은 내가 알고 있으니 사람을 보내 편지를 받아오라 하마.”
공작이 로한슨 백작의 행방을 어떻게 알고 있지? 감시를 붙여놓은 건가? 물어봐봤자 공작이 말해 줄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말하려고 했다면 진작 백작의 행방을 밝혔을 거다.
백작의 위치를 알고 있고, 편지까지 가져다준다면 나야 고맙지.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제가 제물로 선정되었을 테니, 참여할 수밖에 없겠죠.”
공작은 제물이라는 말에 끙 머리를 앓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희생제 의식이 치러졌던 게 지금 황제가 즉위하기 직전이라고 했지. 가브리엘은 지난 제물 역할을 맡은 사람을 몰랐으나, 공작은 알지 않을까?
“조부님께서는 지난 의식에서 제물 역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래. 알고 있다.”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뜸을 들였다. 60초 광고를 넣을 것도 아니면서 그냥 바로 공개해 주면 좋겠는데. 드디어 공작이 입을 열어 제물의 정체를 밝혔다.
“이전의 제물은 폐하의 동생이었다.”
“네?”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참으로 독한 분이시지. 그분이 황위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제물이었던 오르페오 황녀는 살아남았으니 결국 행운아라 할 수 있지.”
“제물의 역할을 했는데도요?”
“그러니 행운인 것이다. 폐하가 오르페오 황녀를 아꼈거든. 제물의 역할을 하는 자는 권력에 닿을 수 없다. 황권에 위협이 될까 봐 손을 써야 하는데 죽이기 싫어 그러신 것이다.”
친아들인 가브리엘도 성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던 무정한 황제였다. 제 나름대로 자매를 아꼈다는 증거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르페오 황녀는 한적한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고 황성을 떠난 후,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오라토리오 님이 오르페오 황녀를 닮았지. 폐하께서 오라토리오 님을 유독 어여뻐 하셨던 것도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군.”
공작은 그리 말하며 마리크 주교가 아니었다면 오라토리오가 틀림없이 다음 대의 황위에 올랐을 거라 이야기했다. 공작은 옛날 얘기에 심취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황족도 제물이 될 수 있는 거라면, 가브리엘 경이 제물로 쓰일 수도 있겠네요.”
물론 진짜 가브리엘은 빼돌렸기에, 제단에 서는 것은 리코가 되겠지만. 내가 불안해하며 말하자 공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리크 주교라면 널 고를 거다.”
가브리엘도 그렇고 공작도 제물이 나임을 확신하는 투였다. 공작은 오히려 그 이유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며 내 얼굴을 한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레아를 닮았기 때문이다.”
“레아?”
태양신한테 반기들다 건국 왕한테 뒤통수 맞았다는 그 레아? 제물 역할의 원조인 그 레아? 나는 아마란스를 똑 닮았는데 그럼 아마란스도 레아를 닮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공작이 아마란스를 욕되게 할 발언을 할 리 없었다.
“그 붉은 눈 말이다. 레아가 그리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 목이 잘리고 나서도 원한이 넘쳐, 부릅뜬 눈과 마주친 자들은 모두 숨이 멎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이 레아와 닮았다고 말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내 눈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아마란스는 나 같은 붉은 눈이 아니었다. 아마란스의 눈은 공작과 같은 호박색 눈이다.
그러고 보니 로한슨 백작도 눈 색이 그냥 검은색인데, 에반젤린의 붉은 눈은 어디서 온 거래? 설마 추측만 했던 진짜 사생아는 아니겠지…?
“레아가 붉은 눈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사실 나는 레아에 대해서도 희생제 이야기를 하며 처음 들었다. 태양신의 존재감이 워낙 컸어야지. 이제 레아는 악신 그 이상의 악독한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단들이 그토록 혐오 받는 것도 레아의 탓이라고.
공작은 고개를 주억이며 덧붙였다.
“레아가 붉은 눈을 가졌다는 건 그리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니까.”
“조부님께서는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그건…. 아. 전에 로한슨 백작 사람들이 도피처를 알아봐 달라지 않았느냐? 지금 이야기해 주마.”
공작은 껄끄러워하며 답을 해 주는 대신 티가 나게 화두를 돌렸다. 공작이 엉망이 된 책상 위로 지도를 쫙 펼쳤다.
“희생제에서 일을 벌일 생각인 것 같으니 그 전에 대피시키는 게 안전할 테지.”
공작은 지도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계속 주절거렸다. 공작이 가리킨 곳에는 지도 원본 위로 공작이 덧붙인듯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 덕에 더욱 안전할 거다. 숲 자락에 있어 위험하지만 파라로스 기사단도 함께 간다면 안전이 보장되겠지.”
공작령을 넘어서, 숲 안으로 아주 깊이 들어가면 마을 하나가 있단다. 공작령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변방이었다. 공작은 그곳을 짚어주었다.
살짝 시선을 내려 위치를 잘 새기면서도, 그 외에는 말없이 공작을 지켜만 보고 있자 공작이 결국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레아의 눈 색을 아는 이유를 밝혀 주었다.
“레아를 직접 본 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레아를 직접 봐? 어떻게? 레아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당시 기록이 남겨진 걸 읽고 들었다고 말하는 건가…?
공작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또 무언가에게서 눈을 돌리고 외면하는 듯한 행동이다. 공작은 답답한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수차례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아게라와 만날 생각은 없느냐?”
“아게라 님이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아에 대해 물어봤는데 뜬금없이 아게라라니, 또 말을 돌릴 셈인 걸까?
“내게 아마란스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했지. 너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난 부족한 아비였기에, 아마란스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나보다는 아게라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을 거다. 레아의 붉은 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하. 대충 가닥이 잡혔다. 아게라도 어디서 땅 파서 주술을 사용해 악마를 소환해댄 건 아닐 거다.
그리고 아게라가 소환한 악마가 레아의 영향을 받은 거라면, 악마를 불러내는 소환진에 대해 알고 있는 아게라가 레아에 대해서도 더 유식할 거다.
소환한 악마로부터 레아에 대해 들은 걸까? 아게라의 과오와도 연관이 있다면 공작이 레아에 대해 입 밖에 꺼내기 싫어한 것도 이해가 갔다.
“좋아요. 찾아가 볼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게라를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마침 아게라가 기억이 돌아온 참이 아닌가. 이 기억이 다시 아게라를 떠날 수도 있으니 지금이 묻고 싶은 걸 물어보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공작도 그리 생각한 듯했다. 공작의 깊은 한숨 소리를 뒤로 한 채 지도를 챙기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