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51)
역시 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상쾌해졌다. 어제 저지른 추태가 부끄러워 이불을 발로 차고 싶었으나 칸나가 옆에 있어서 속으로 꿍얼대기만 했다.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칸나가 평소보다 더 다정한 눈으로 아침 기상을 도왔다. 날 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따스한 게 ‘이젠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듯해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었다. 칸나의 시선을 피해 푸딩을 찾았다.
“푸딩은?”
“푸딩 님은 가브리엘 경과 같이 계세요.”
둘이 많이 친해졌구나 하는 감상과 함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듣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어젯밤의 흑역사가 목을 조여왔다.
칸나 앞에서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가브리엘의 앞에 서면 난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 파고 들어갈지도 몰랐다.
‘쥐’한테 함락 당했던 전적이 있으니 공작저에 쥐구멍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법하잖아.
“가브리엘 경이 깨어나셨어?”
“아, 네. 아침 일찍부터 깨어계셨어요.”
몸도 아픈데 좀 늦잠 좀 자면 얼마나 좋아. 목이 막혀 칸나가 내어 준 차를 호로록 마시며 결심했다. 좋아, 뻔뻔하게 나가는 거야. 나는 부끄럽지 않다. 태연하게 굴자. 자신을 되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조찬은 들지 않으셨겠지?”
“네? 네. 아직이세요.”
“그럼 가브리엘 경과 함께 들어야겠다.”
“네.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칸나가 주방으로 식사를 가지러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브리엘은 다친 이후로 감옥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소화가 쉬운 수프를 먹어야 했다.
게다가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 먹여 주는 수밖에 없지. 환자를 굶게 둘 수는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
바로 옆 방으로 가는 짧은 동선 내내 자신을 되뇌었다. 나는 사심 같은 거 전혀 없다. 밥 먹여 주는 거? 여태 내가 해 오던 일들과 별다를 게 없어. 어장 속 물고기한테 떡밥을 던지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런데 이제 그 물고기가 아프니까 조금 더 공을 들이겠다, 이거지.
“들어오십시오.”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답이 들렸다.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활짝 문이 열렸다. 푸딩이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연 것이다.
“에반젤린 님!”
해맑게 날 맞이하는 푸딩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내가 어제 다른 방 가서 자라고 했으니 가브리엘의 방에 있었나 보다. 못난 주인 때문에 우리 고양이가 고생이 많다. 푸딩을 지나 방 안으로 눈을 돌렸다.
“…가브리엘 경?”
그리고 말끔한 행색으로 서 있는 가브리엘을 보며 순간 눈을 의심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는데도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뺨을 때릴 수는 없으니 살짝 입 안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문 것인지 알싸한 고통과 함께 비릿한 맛이 혀끝을 적셨다. 꿈이 아니다.
“영애님.”
기사단의 정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가브리엘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걷는 모습에는 한치의 뒤틀림도 없었다. 가브리엘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인사했다.
“지난밤 편안한 꿈자리 되셨는지요.”
지난밤? 어젯밤을 말하는 거면 내가 새벽 감성에 못 이겨서 일기에나 써야 할 일을 가브리엘한테 한탄하던 그거 말하는 거 맞지? 너무 놀라서 이제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게 어제가 맞다면 대체 가브리엘은 하룻밤 만에 어떻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거지?
진짜 이거 꿈 아니야? 어떻게 하룻밤 만에 가브리엘이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데?
가브리엘은 성수가 들지 않았다. 치료를 위해 몇 번씩이나 시도해 보았으니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아 동요한 걸 들키지 않으려고 눈을 살짝 접으며 물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혹시 리코랑 다시 바꿔치기 된 건가? 아니, 그럼 어젯밤 일을 알 리가 없잖아. 가브리엘은 남이 수치스러워할 만할 일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거라고. 그리고 리코로 바뀌었으면 보자마자 알아차렸을 거다. 몇 번이나 의심하며 살펴봐도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은 가브리엘이 맞았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순전히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는 의미였는데 고맙다는 답만 돌아왔다. 내가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어쩐지 답을 알고 있을 것만 같은 푸딩에게 눈을 획 돌렸다.
“어떻게 하루 만에 해내지? 잡초보다 질긴 자식.”
하지만 푸딩은 질린다는 듯이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나랑 눈을 마주치자마자 퍼뜩 놀라며 유순한 미소를 지었다.
“푸딩?”
“네. 에반젤린 님.”
흑심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깨끗한 미소였으나 어쩐지 수상쩍었다. 설마 푸딩이 염력으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푸딩이 뛰어난 술사라는 건 알았지만 겉으로 보면 가브리엘이 다쳤다는 것도 모를 지경이다. 얼마나 섬세한 컨트롤인거야.
“푸딩 네가 가브리엘 경에게 도움을 준거니?”
염력으로 보좌하고 있냐는 말이었다. 푸딩이 고개를 저었다.
“상처가 나은 건 아닙니다. 그냥 널브러진 채면 불편할 것 같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손을 써 뒀어요. 가브리엘 자식… 아니 경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염력을 쓰는 방법은 아니었다. 다른 방법을 썼다고? 무슨 수인족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기를 쓴 건가?
푸딩이 무어라 가브리엘이 움직이는 방법에 관해 설명을 했는데 복잡한 건 흘려들으니, 대충 꼭두각시라는 것만 알아듣겠다.
그러니까 그냥 몸을 움직이는 거랑 다른 방법을 써서 움직이는 건 맞다는 거네. 상처가 낫는다면 제일 좋겠지만, 성수가 들지 않는 이상 가브리엘이 자의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상황이긴 하지.
“환자분, 기상하셨나…요?”
그때 하필 벌컥 문이 열렸다. 히솝이 방에 들어왔다가 멀쩡히 서 있는 가브리엘을 보고 손에 들린 화분을 놓쳤다.
대체 왜 화분을 들고 왔는지는 뒤로하고,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대체 왜 노크를 안 하고 들어온 건데!
“아, 히솝 씨.”
가브리엘이 난감하다는 투로 히솝을 불렀다. 히솝은 눈을 비비며 현실을 부정했다.
“…아직 잠이 안 깼나. 헛것이 보이네.”
히솝이 허실허실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성수가 들지 않는 가브리엘이 하루 만에 멀쩡히 서 있는 모습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직감한 모양이다.
“아가씨 식사를 가져 왔어요.”
도망갈 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때마침 조찬거리를 들고 온 칸나가 히솝의 뒤를 막았다. 의도치 않았으나 사면초가로 만들어 버렸다.
“어라? 저,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역시 우리 칸나는 조금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눈에는 귀엽기만 했지만, 히솝 눈에는 공포 그 자체였을 거다.
히솝이 창백한 낯으로 칸나를 두렵게 바라봤으나, 칸나도 화분을 깨 먹으며 벌벌 떠는 이를 보며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칸나, 막 와서 미안하지만 청소할 도구를 가져와 주겠니?”
“네. 금방 다녀올게요.”
칸나가 조찬거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서둘러 떠났다. 그리고 히솝에게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히솝이 딸꾹질했다.
“히솝.”
“…히끅…. 네, 네!”
“우선 들어오도록.”
도망칠까 봐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더니 히솝이 냉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내 앞까지 걸어왔다. 아니, 누가 무릎을 꿇으래! 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거지?
전에 히솝이 혹시라도 도망가서 마리크 주교에게 가브리엘에 대해 밝힐까 봐 작은 협박을 했던 게 잘못인가?
히솝이 새파랗게 질려 흙과 깨진 화분 그릇 위로 절을 하려 들기에 그럴 거면 차라리 바닥이나 치우라고 독촉했다. 숨만 쉬어도 살려 달라고 외치던 로한슨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 버티면서 대충 대처법을 익혔다.
여기서 오해를 풀어 주고자 친절하게 대해 주면 더 무서워하니 그냥 일이나 시키는 게 낫다.
“…….”
칸나는 언제 오려나? 그저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고 있고 히솝 혼자 깨진 화분을 치우고 있으니 꼭 히솝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같이 치워주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기겁할 테고, 다른 사람한테 시키기도 좀 그랬다.
환자인 가브리엘은 당연히 제외다. 푸딩은 히솝이 들어오자마자 고양이로 변해있으니 안된다. 히솝의 앞이니 푸딩이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좋게 생각하자. 화분 깬 건 히솝이니까 자신의 실수를 책임지는 거다. 그러니까 누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래? 거추장스럽게 화분은 왜 들고 와? 전부 히솝이 빌미를 제공한 거다. 절대 내가 괴롭히는 거 아니다.
히솝은 우선 흙과 깨진 유리 사이에서 식물을 구출해 냈다. 손길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관상용으로 들고 온 건 줄 알았는데 저리 소중히 여기는 걸 보니 의문이 들었다. 식물에는 일가견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약초라도 되는 걸까?
“무슨 화분이지?”
“얼른 치, 치우겠습니다.”
종을 물어본 건데 히솝을 자신을 채근하는 줄 알았는지 더 허둥대다가 깨진 그릇에 손을 찔렸다. 아, 괜히 말을 걸어서 피를 봤다.
“조심해야지. 부주의하게 굴다 흉이 남으면 어쩌려고.”
“절대, 절대 신전에 알리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이거 봐. 친절하게 걱정해 주니까 더 무서워하잖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다 악녀 설정 때문이 아니라 내 체질인가 보다. 태생부터 위압감이 남달랐던 거 같기도 하고.
“입 다물고 있으면 다치진 않겠지.”
물론 내가 입을 다물어준다는 이야기였다. 조용히 해줄 테니 다치지나 말아라. 히솝은 제게 말한 줄 알았는지 지레 겁을 먹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히솝이 침몰했다. 히솝은 바싹 시들어서 조용히 바닥을 치웠다. 조용히 하는 건 하는 거고, 내가 무슨 식물이냐고 물어봤는데 그건 답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에도 친절히 물어보면 히솝이 딴 길로 셀 테니 조금 우회해서 말하기로 했다.
“히솝 네가 화분을 들고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다 네 잘못이구나.”
일부러 더 비아냥댄 건 히솝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답을 얻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 히솝이 반박하려는 듯 큰소리를 쳤다.
“이, 이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이걸 왜 들고 온 거지?”
히솝이 분한 듯 주먹을 꽉 쥐다가 한 번 더 손을 다쳤다. 아니, 그냥 왜 들고 온 건지, 무슨 식물인지 설명 좀 해달라고!
심하게 다친 건 아니겠지? 가브리엘을 치료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의사인데 손을 크게 다친 건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히솝은 상처가 크지 않았다. 그냥 살짝 베인 정도인가 보다.
내가 히솝을 살피자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히솝이 걱정됐나 보다. 가브리엘은 무릎을 굽혀 앉더니 히솝을 도와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 것 같은데…. 역시나 히솝이 기겁하며 가브리엘을 말렸다.
“기사님. 제,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상처에 흙이 들어갈지 모르니까요.”
가브리엘이 다친 히솝을 뒤로 물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렇게 착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지?
저러니까 나한테도 이용당하고, 마리크 주교한테도 이용당하고 자꾸 휘말리는 거 아니야. 자기 몸이나 좀 잘 챙기지! 지금 자기는 푸딩의 능력이 아니고서야 몸도 못 움직이면서, 고작 손 베인 사람을 걱정하고 있어.
“칸나가 빗자루를 가져올 테니, 가브리엘 경은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하면서 말리자 가브리엘이 화분을 치우던 손을 멈췄다. 혹시 너무 고압적이었나? 가브리엘이 불만을 느낄까 싶어 가만히 내려다보니, 가브리엘은 예상과 다르게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행히 자신이 환자라는 자각은 있는지 걱정하며 말리자 내 말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칸나가 빗자루를 가지고 돌아와, 남은 흙더미와 자잘한 조각들은 금방 청소할 수 있었다.
센스 넘치는 칸나는 흙과 약초를 다시 담을 화분도 따로 챙겨 왔다. 히솝은 언제 칸나를 보고 떨었냐는 듯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칸나 덕분에 약초는 무사히 옮겨 심었다.
“…산그로라고 합니다.”
“산그로?”
한참 전에 물었던 걸 이제 와서 대답하네. 대체 버퍼링이 몇 분 걸리는 건데.
“달여 드셔도 괜찮고, 찧어서 발라도 좋고 수면에도 도움이 되는 약초라….”
아하. 그래서 가브리엘을 위해 공수해 왔다는 이 말이구나. 아침부터 구해 오느라 참 고생이 많았다. 근데 그 고생한 의사를 협박하고 상처입히고 청소까지 시키고 있으니 면목이 없다.
“신경 써 주신 거군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가브리엘이 인사하자 히솝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마구 도리질했다. 이게 바로 인망의 차이인가?
내가 저 대사를 했으면 히솝은 지금쯤 신경을 못 썼다는 걸 이런 식으로 비꼬는 거냐며 적반하장으로 나왔을 거라고 확신한다.
“죄,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가브리엘 경을 치료하는 걸 거부했어요. 산그로는 그저 죄책감이 들어 챙겨온 것이니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열이 올랐을 때 밤새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절 치료해 주셨으니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히솝이 푹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죄책감이 그득해 보였다. 내가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 보이는데…. 이게 바로 당근과 채찍인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결국 따스한 햇빛이었던 거지.
“가져오신 약초의 효능을 물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히솝은 가브리엘의 성원에 힘입어 약초의 효능을 주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먹으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통증이 완화되며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만 들어보면 무슨 성수 뺨치는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었다. 히솝이 신전에 주시받는 건 다 저런 말들을 했기 때문 아닐까? 주의사항을 덧붙이던 히솝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아. 특히 동물에게는 유해하니, 고양이는 먹으면 안 됩니다.”
히솝이 거드름을 피우는 푸딩을 겨냥해 말했다. 푸딩이 히솝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려는 듯 털을 바짝 세우길래 어르고 달랬다.
푸딩아 네가 봐주자. 가브리엘 생각해 준 게 기특하니까 한번만 봐주자. 푸딩은 혀를 차고 내 무릎에서 식빵을 굽기 시작했다.
“…방금 고양이가 혀를 차지 않았나요? 역시 이건 꿈이었나?”
히솝이 귀를 톡톡 치며 물었으나, 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만 멍을 때리던 히솝이 번뜩하며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가브리엘 경은….”
“성수 덕분에 경께서 말끔하게 나으셨어.”
히솝이 용감하게 가브리엘에 관해 물어보려 들길래 바로 말을 잘랐다. 알아서 잘하겠지만, 입조심은 한 번 더 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브리엘에게 성수를 써 치료했다고 입을 막았다. 뻔히 상처를 달고 있으니 거짓말이라는 걸 히솝도 잘 알 것이다.
“신의 축복이지. 그렇지 않니?”
“하지만… 분명 가브리엘 경은 성수가….”
히솝의 눈치는 화분과 함께 쏟아버렸나 보다. 나는 히솝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히솝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치료할 약초가 담긴 화분을 깨버리는 부주의한 의사에게도.”
히솝이 내 시선을 피하지도 못했다. 히솝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의를 베푸는 성기사니, 태양신께서 살펴 주시는 거겠지.”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고 있고, 더 파고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서둘러 주제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유리에 찔렸던 게 생각나 히솝에게 성수 세 병을 건네주었다. 전에 가브리엘한테 쓰고 남아 있는 것들인데, 마침 가브리엘 방에 가져다 놓은 게 눈에 띄어서 화제도 돌릴 겸 준 것이다.
공작가에 남은 성수의 양도 꽤 있었고, 가브리엘에겐 어차피 성수가 들지도 않으니 기왕이면 히솝이 갖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브리엘을 치료하는 대금은 공작에게 받을 테니, 성수는 일종의 서비스인 셈이다. 음…. 가브리엘을 위해 아침 일찍 약초를 구해 온 값이라고 치자.
“이건….”
“다쳤잖아?”
히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의사라면서 성수랑 왜 저렇게 내외를 해? 귀한 거라도 받는 듯이 구는 행동에 의아했으나 갑자기 성수의 가격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우리 칸나도 성수를 구하지 못해 고생했다. 히솝이 의사라고 하지만 성수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거다.
성수를 구할 수 있는 자들은 히솝을 부르지 않을 테고, 감히 성수를 넘보지도 못하는 사람들만이 히솝을 찾았을 테니까. 하지만 의사를 부를 돈조차 없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진짜 성수입니까?”
“그럼 가짜라도 될까?”
“제가 받아도 되는 건가요…?”
“내가 준 걸 받지 않겠다고?”
“아, 아니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히솝이 성수 병을 품에 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유용하게 쓸게요. 제 능력이 닿지 않을 때 최후의 보루로 쓸 겁니다.”
당장 손을 치료하지 않는 걸 보면, 자기가 쓰기보다는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쓸 모양이었다.
히솝이 저걸로 장사하든, 환자를 치료하든, 뭘 하든 상관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히솝은 아마 치료를 하는 데 쓰겠지만.
히솝은 성수가 든 품을 계속 매만졌다. 나에겐 물과 다를 바 없는 성수를 소중한 걸 대하듯 받는 히솝을 보며 생각했다. 공작가에 남은 성수가 얼마나 있더라?
쥐를 처리할 일도 없을 테니, 공작을 설득해서 성수를 조금 남겨 두고 나머지는 히솝에게 기부할까? 칼미아나 노인 같은 다른 의사에게 주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아껴 쓰지 마. 가브리엘 경을 치료하러 성수를 꽤 많이 들여서 양이 꽤 된단다. 네가 경을 치료해 줄 테니, 남은 성수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겠지.”
히솝은 성수를 더 주겠다는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숙였다. 성수를 기부한 효과인가? 히솝은 두려움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잔뜩 예의를 차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럼 지금 가브리엘 경의 용태를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가브리엘이 허락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솝은 가브리엘의 몸을 진찰한 후 물었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시는 건가요?”
방법을 물어보기보다는 가브리엘의 몸에 경악한 것 같았다. 히솝은 끙끙 앓아댔다.
“환자를 상대로 할 말은 아니지만, 차라리 몸이 안 움직이시는 게 더 나았습니다. 이런 몸으로 계속 무리하다간 위험할 거예요.”
사실 몸은 손과 발이 마비된 그대로이고, 가브리엘이 움직일 수 있는 건 푸딩의 능력 덕분이다. 히솝은 가브리엘의 상태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걸 깨닫고 심각해졌다.
나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몸 상태는 똑같다고 해도 가브리엘이 상처하나 없다는 듯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부상의 심각성을 망각했다.
가브리엘이 평생 푸딩의 능력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푸딩이 능력을 거두면 가브리엘은 다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돌아가겠지. 히솝이 가브리엘을 치료할 수 있을까? 염려하며 슬쩍 히솝을 바라보았다.
히솝은 가브리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쉽지는 않으시겠지만 조금 자중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적어도 제가 약을 만들기 전까지만 이라도요.”
“약 말입니까?”
“네. 이래 봬도 신전에서 성수를 위협한다고 주시하는 천재가 바로 접니다. 그러니 성수에 맞먹는 치료 약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로한슨 영애님께 성수까지 받았으니, 값은 해야죠.”
히솝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히솝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실력으로는 신이 내린 축복을 대신할 만한 만병통치약 같은 건 절대 만들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현대 의학으로도 성수만 한 성능은 내지 못했다.
그러니 히솝이 굳이 저렇게 말을 꺼낸 것은 가브리엘을 걱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신전을 적대하며 확실하게 우리를 위해 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무리할 것이냐는 협박이기도 했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히솝의 협박을 못 이긴 가브리엘이 자신을 위해 애써 주는 상대를 향해 웃어 보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가브리엘이 장난치듯이 덧붙였다.
“가격은 어느 정도로 하실 생각입니까? 너무 값비싸면 파면된 이후에는 값을 못 치를 수도 있겠군요.”
“걱정하지 마시죠. 단돈 은화 한 닢으로 모실 테니까요.”
만담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칸나가 말을 얹었다.
“오, 은화 한 닢이면 저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겠네요.”
나는 눈을 떴을 때부터 금수저였기 때문에 약의 값이 은화 한 닢이라는 것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지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칸나의 반응을 보니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솝이 진짜 성수에 버금가는 약을 만들어 온다면 칸나에게 약을 얼마든지 살 수 있도록 은화 한 상자를 선물해 줘야겠다.
아니, 금화로 해. 약을 만드느라 수고한 히솝에게도 주는 거로 하자.
“다른 의사들에겐 제가 가브리엘 경의 용태에 대해 잘 말해 놓겠습니다.”
“부탁할게.”
히솝은 애초에 화분을 두러 온 것뿐이었으므로 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칼미아와 다른 의사에게도 대충 상황을 전달해놓겠다고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상태를 고려하면 굳이 히솝 한사람에게만 치료를 맡길 이유는 없다.
몸이 움직여진다고 하더라도 가브리엘이 낫지 않은 건 여전하니까. 기왕 공작이 약점을 잡아 온 유능하고 입이 무거운 의사들이니 의지하고 싶었다.
“소란스러운 아침이었네요.”
히솝이 방을 나서고, 뒤늦게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는 환자인 가브리엘을 배려한 소화하기 쉬운 수프였다.
칸나가 가져다준 식사는 차갑게 식었으나 푸딩이 전자레인지 뺨치는 솜씨로 다시 음식을 덥혀주었다. 가브리엘에겐 미안하지만 무인도에 단 하나만 가져가라고 하면 무조건 푸딩을 데려가기로 했다. 만능 푸딩을 어떻게 두고 가. 평생 옆에 데리고 살아야지.
가브리엘이 스푼을 들었다. 스푼이 계속 접시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몸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니 움직이는 게 아직 어려운 듯했다.
“금세 익숙해질 겁니다.”
가브리엘이 부끄러워하며 변명하다가 말을 돌렸다.
“영애님은 푸딩 씨께 제 상태를 전해 들으신 건가요?”
“아니요. 저도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렇습니까?”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겉으로 티 내지 않았을 뿐 마음속으론 깜짝 놀라서 입이 딱 벌어지는 줄 알았다.
“다름이 아니라. 영애님께서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주셔서요.”
“아, 그건….”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았다. 밥을 먹여 주려고 했다는 말을 어, 어떻게 해.
“영애님?”
“경께서 혼자 식사하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직접 먹여 주려고 했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말하지 않았어도 대충 이해했을 것이다. 차마 가브리엘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겠어서 시선을 피했다.
식사 시간은 평소보다 배로 걸렸다. 가브리엘은 움직임이 미숙하여 그랬고, 나는 가브리엘이 어설프더라도 스스로 수프를 한입씩 떠먹을 때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자각하며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천천히 먹은 덕분에 소화는 잘될 것 같았다. 입가심으로는 차를 마셨다. 진정 효과가 끝내주는지 울렁대던 심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가브리엘은 나와 다르게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내가 먹여 준다고 했다는 거에 별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왜 나 혼자만 창피하지? 조금 섭섭해지려던 찰라. 붉어진 귓가를 보았다.
“영애님께서, 계속 절 보고 계시기에.”
가브리엘이 변명했다. 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가브리엘을 빤히 보고 있었나? 어쨌든 적어도 부끄러워 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로한슨 백작을 보러 가신다고요?”
“네. 제 초대장이 백작에게 간 모양이라서요. 돌아오는 길에는 미샤의 의상실에도 들릴 예정이에요.”
“의상실에요?”
“네. 그때 미샤를 찾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잖아요?”
로한슨 백작에게 들렀다가 의상실에 다녀올 거라며, 위험한 일에 엮이거나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가브리엘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다. 게다가 마리크 주교는 분명히 로한슨 백작을 감시하고 있을 거다.
용도는 몰라도 백작을 미끼로 써먹을 게 분명했다. 내가 공작저에 있는 걸 알면서도 호사퀸 공작이 아니라 백작 편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부디, 몸 조심히 돌아오세요. 영애님께서 다치신다면 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날 바라만 보던 가브리엘이 푸른 눈을 빛내며 기도하듯이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