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52)
로한슨 백작에게는 나와 푸딩만 가는 걸로 결정했다. 칸나는 자기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남아 있어야 하냐며 볼을 부풀리며 매달렸다.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칸나를 두고 가는 것이었지만 솔직하게 답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칸나가 위험한 일에 자신이 어째서 빠져야 하냐며, 날 돕겠다고 악을 쓰고 매달릴 게 뻔했다. 가브리엘을 혼자 두기 염려된다는 핑계를 대며 칸나에게 잘 지켜봐 달라 부탁했다.
칸나는 자신에게 막중한 사명이 달려 있다는 것처럼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 경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러니 아가씨도 절대 다쳐오시면 안 돼요.”
푸딩이 같이 가는데 다칠 수가 있나. 심지어 내 몸은, 음…. 다른 사람들보다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칸나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겨 있던 푸딩이 사이에 껴서 짓눌린 풍선 되자 갑갑한 듯 마구 날뛰었다. 푸딩한테 한대 얻어맞은 칸나가 여전히 미련이 절절 넘치는 얼굴로 놓아주었다.
“아가씨께서 다쳐오시면 전 똑같은 상처를 낼 거예요.”
…그게 뭔데? 우정 상처? 우정 타투도 아니고…. 그건 좀 과하지 않나? 하긴, 우리 칸나가 약간, 아주 약간 광신도 같은 면모가 있긴 하지.
칸나는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번복한 적이 없다. 이제 내 몸은 곧 칸나 몸이라고 생각하다. 나는 다시 한번 절대 다치면 안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공작가 하인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서자 한구석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공작은 내가 백작을 찾아간다는 말에 바로 마차를 준비해 줬다. 로한슨 백작의 거처 역시 공작이 언질 줬다.
들어보니 이전부터 로한슨 백작에게 꼬리를 붙여 놓았다고 했다. 어지간히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 밖에도 백작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알고 있길래 고맙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로한슨 백작을 감시했나요?”
“네 그 멍청한 장례식이 열리기도 전이다.”
안 그래도 내가 껄끄러울 텐데, 죽었다 되살아났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첫 만남에 대뜸 와인잔을 집어던진 공작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물론 폭력이 용납되는 건 아니고, 내가 와인 잔을 맞아도 싸다는 건 더더욱 아니고, 공작의 심정이 이해만 갔다고.
마부는 공작저에서 일하는 시종이었다. 내가 얼굴이 익숙할 정도니, 아마 공작의 측근 정도는 될 것이다.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바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휘켈 자작의 사저였다.
백작은 휘켈 자작에게 더부살이 중이었다. 마리크 주교의 끄나풀, 백작한테 접근해서 단검을 선물하고 나를 황태자 시해 용의자로 몰고 가게 만든 그 휘켈 자작이 맞다.
공작은 로한슨 백작이 휘켈 자작저에 머무른다는 이야기를 해 주며 온갖 욕설을 해댔다. 험악한 비속어들을 들으며, 공작이 그래도 백작보다는 나를 조금 더 좋게 쳐줬음을 깨달았다.
공작 앞에 로한슨 백작이 나타난다면, 백작은 와인 잔이 아니라 썩어 녹아내리는 치즈 폭탄을 맞을 거다.
푸딩은 내 무릎 위에 누워있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세계를 불문하고 교통수단에 타면 졸린 건 똑같나 보다. 가브리엘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려고 밤을 새웠을 테니 충분히 피곤할 만했다.
“로한슨 영애님, 곧 도착입니다.”
푸딩이 번뜩 눈을 떴다. 조금 더 자라고 속삭이며 푸딩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짧은 힐링 타임이었다.
마부의 말대로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휘켈 자작의 사저는 수도의 한복판에 있었다. 자작의 신분만으로는 이런 노른자 땅을 구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마리크 주교에게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마부에게는 먼저 돌아가라 이른 후, 발을 뗐다. 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선 것을 확인한 하인 한 명이 서둘러 나와 내 앞을 막았다.
“누구십니까?”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들여보내 주겠어?”
“아버지요?”
휘켈 자작은 미혼에 자식이 없었다. 하인은 뜬금없이 나온 아버지라는 말에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그러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호들갑을 떨며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아마 휘켈 자작과 닮은 구석을 찾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찾을 수 없겠지만. 하인은 그러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 그…. 로한슨 영애님…이십니까?”
“그래.”
“로한슨 백작님을 뵈러 오신 거라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인은 바로 나를 저택 안으로 들였다.
번거롭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하인의 태도로, 저택 내에서 백작의 처지가 어떠한지 짐작이 갔다.
보통 귀족들은 방문을 미리 알리며 약속을 잡는 편이었다. 가족 사이라고 해도 예의는 철저히 지키는 법이다. 그런데 하인은 백작에게 내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바로 안내해 준다고 했다.
백작이 귀족 대우를 받고 있기는커녕, 날 반기는 하인의 태도로 보아하니 백작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 작자를 누가 좋아하겠냐는 만은…. 아마란스는 사랑에 눈멀어 속은 거니까 넘어가자.
“휘켈 자작님께 방문을 알리지 않아도 되나?”
“아. 지금 자작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셔서요. 하지만 로한슨 백작님께서 남아 계신지라, 혹시 백작님을 찾는 손님이 오시거든 성심성의껏 응대하라며 미리 일러주셨습니다.”
역시 내가 로한슨 백작을 찾아오게 만든 건 마리크 주교의 수작질이 맞았다. 하지만 휘켈 자작도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휘켈 자작님께선 참 자상하시죠. 백작님께서 불편하게 지내시지 않도록 무척 배려해 주고 계십니다.”
로한슨 백작의 뒤통수를 쳐 놓고 배려는 무슨. 하인은 휘켈 자작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 보였다. 뭐, 생각해보면 그저 고용된 신세이니 당연했다.
하인은 계속해서 휘켈 자작의 칭찬을 해댔다. 휘켈 자작은 대외적인 이미지가 무척이나 좋긴 했다. 사교성 좋고, 발이 넓으며 신사적인 귀족. 게다가 신전에 우호적이며 기부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으레 손님이 오면 주인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게 보통이긴 하였으나, 휘켈 자작의 하인은 찬양이 지나쳤다. 더는 못 들어주겠다.
“그러게. 휘켈 자작님은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시지.”
“그렇죠?”
“내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아버지가 갈 곳이 없었는데, 자작님께서 거두어 주셔서 참으로 다행이지 않니.”
하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드디어 입을 앙다물었다. 제가 수다를 떤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조용하니 드디어 귀가 편해졌다. 진작에 이럴 걸 그랬다.
“그런… 헛, 헛소문을 믿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믿어주니 고맙구나.”
하인은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바짝 움츠러들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태도가 확 바뀐 것을 보면 방화범이라는 이야기 말고 다른 험악한 소문들도 함께 떠오른 모양이다.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지금 나에 대한 공포가 가득할 때 질문을 던지면 협조적으로 대답해 줄 것 같았다.
“휘켈 자작님은 네 말대로 훌륭하신 분이구나. 나중에 꼭 은혜를 갚고 싶어 묻는데, 혹시 아버지께선 언제부터 휘켈 자작에게 신세를 지셨지?”
“얼마 되지 않으셨습니다. 한 이주 전부터….”
“그사이에 아버지를 찾아온 건 나뿐인가?”
“아, 아뇨. 그… 손님이 한 분 오셨습니다.”
“손님? 그게 누구였지?”
누굴까? 마리크 주교의 사람인가? 하인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이길래 가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휘켈 자작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라 보였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가는 자기가 자작을 배신하고 정보를 팔아넘기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망설이는 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냈다.
“최근 아버지께 달라붙는 벌레 같은 작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내가 없는 사이에 아버지에게 누가 접근했는지 알고 싶은데.”
“그, 그건….”
“아, 물론 휘켈 자작이 벌레라는 말은 아니었어. 하지만 네가 솔직하게 답해 주지 않는다면 난 휘켈 자작이 아버지께 나쁜 친우를 소개해줬다고 오해할 것 같구나.”
“벌, 벌레라니요! 자작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 누가 내 아버지를 찾아왔는지 말하렴.”
휘켈 자작을 깎아내리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억울해하며 분통을 터트린 하인이 손님이 누구였는지 실토했다.
“황, 황태자 전하의 호위셨던 무제타 경이….”
하인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름을 밝혔다. 하필 내가 용의자로 엮인 황태자 시해 사건이라 더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무제타 경이 들리셨다고?”
“네, 네. 로한슨 백작님께 조사할 게 있다고 하시면서요.”
문득 예레미아가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테네브레이의 호위를 맡고 있던 무제타가 예레미아와 교대하며 자리를 비웠다고 했지.
마리크 주교가 시킨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사이에 백작을 찾아 회유했나 보다. 마리크 주교가 백작에게 수를 쓴 게 분명해졌다.
“로한슨 백작님을 모셔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하인이 응접실로 날 안내한 후 근처의 하녀에게 백작을 데려오라 전했다. 하녀가 차를 내어줘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나름대로 천천히 여유를 가지며 기다렸는데 찻잔을 석 잔이나 비울 동안 백작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아버지는?”
“그,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하녀가 바들바들 떨면서 허리를 굽히며 양해를 구했다. 로한슨 백작이 내가 왔다는 얘기에 배짱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바람 맞히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심술을 부리는 건가. 날 함정에 빠트릴 준비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백작이 눈앞에 없으니 온갖 헛생각만 들었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내 무릎 위에서 졸고 있던 푸딩을 간지럽혀 깨웠다. 그리고 하녀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다.
“푸딩, 로한슨 백작이 뭘 하고 있는지 봐주겠어?”
날 골탕 먹이려고 안 오는 거면 가만 안 둔다 진짜.
로한슨 백작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 안을 돌아다녔다. 가만히 있으면 가시라도 돋는 마냥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백작이 이리 초조해하는 것은 하인으로부터 에반젤린의 방문을 연락받았기 때문이다.
“로한슨 백작님. 영애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보셔야지요.”
“시끄러워!”
백작은 절 재촉하는 하인에게 큰소리를 쳤다가 민망한지 괜히 헛기침했다. 하인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이나, 딸을 피하는 것이나 어딜 봐도 귀족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므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는 자각이 들어서 그랬다.
로한슨 백작은 귀족적인 표상을 매우 중시했다. 자택의 하인들에게는 자비로운 주인이었으며, 인색하게 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자 본성인 이기심이 드러난 것이다.
백작은 휘켈 자작의 사저에 더부살이하는 중이었다. 한번 휘켈 놈에게 속았으니 경계해야 마땅했으나, 휘켈 고놈의 간사한 혓바닥에 넘어갔다.
휘켈은 자신이 선물한 단검이 사달을 일으켰다는 사죄의 의미로 마리크 주교에게 연락책이 되어주겠노라 약조했다.
에반젤린이 성에 로한슨을 달고 있으니, 그 화가 백작에게까지 미칠 것이 분명했다. 백작은 자신도 에반젤린과 함께 이단으로 묶여 숙청될까 봐 초조해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휘켈 자작은 그 점을 꼬집어대며 백작을 회유했다.
“백작님께서는 죄가 없으며, 오히려 혈연으로 엮였음에도 삿된 존재 대신 신을 택하였음을 이 휘켈이 보증하겠습니다.”
휘켈은 자작저에 머무르면 주교님께서 백작의 뜻을 알아주실 거라며 설득했다. 에반젤린이 아니라 태양신을, 주교를 택하였음을 보여줘야 했다.
결국, 백작은 몸을 의탁했다. 로한슨 백작의 주위에 신전과 접점이 있는 것은 휘켈 자작뿐이었으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휘켈 놈. 애초에 백작이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기생충 같은 신세가 된 것은 다 휘켈 놈 때문이 아닌가.
휘켈이 백작에게 선물한 단검이 화근이었다.
하필 황태자의 탄신연 근처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을 선물하여, 그것을 에반젤린에게 들려주게끔 뒤 수작을 벌인 것이리라. 황태자를 살해한 흉기가 에반젤린의 단검과 같은 종류인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백작은 휘켈이 마리크 주교의 수족이며, 자신에게 수작질을 부렸음을 알아차렸다. 감히 뒤통수를 친 휘켈의 뺨을 내리치고 싶었으나, 지금은 휘켈이 그나마 남아있는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백작은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 처량하여 비참했다.
백작은 휘켈 자작저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다 이제는 저택까지 불에 타는 통에 돌아갈 수도 없어졌다. 망할, 저택에 불을 지른 게 에반젤린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인지.
휘켈은 상심한 백작을 위로하였으나, 백작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에반젤린이 괴이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저택에 불을 지를 이유가 없었다.
마리크 주교는 백작을 손아귀에 넣고 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살고 싶은 백작은 모른 척 따를 수밖에.
그러다 에반젤린이 백작을 만나러 왔다.
“쯧. 아비를 보는데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오다니.”
백작은 혀를 찼다. 대체 에반젤린이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줄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무제타 경이 불러들인 건가?”
백작의 의심은 마땅했다.
얼마 전 무제타가 다시 백작을 찾아왔다. 일전에 에반젤린의 필체를 확인하러 온 후로 오랜만이었다.
백작을 찾아온 무제타는 두 장의 편지와 함께였다. 그것은 희생제의 참석을 필요로 하는 초청장이었다. 하나는 로한슨 백작 자신에게, 다른 하나는 에반젤린에게 온 것이었다.
“…호사퀸 공작저에 보내면 될 것을.”
손녀한테 와인 잔을 집어던진 공작이, 태세를 바꿔 에반젤린의 편에 섰다는 이야기가 자자했다. 백작은 초대장을 그대로 호사퀸 공작저로 발송할 생각이었다.
괜히 에반젤린과 혈육이라며 묶였다가 함께 숙청될까 두려웠다. 에반젤린의 죄가 커, 로한슨 백작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호사퀸 공작이라는 아주 좋은 대체재가 생겼다. 마리크 주교의 입장에서도 백작보다 제국에 셋뿐인 공작가가 집어삼키기에 훨씬 먹음직스럽게 여겨질 것이리라.
그리고 백작은 딸과 장인이 사망한 뒤 그 유산을 받아오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래도 사위이니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작에게 접근하도록 지시한 것은 애초에 백작이었으니, 자신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무제타는 백작에게 직접 에반젤린을 만나 편지를 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공작저에 갔다간 공작한테 또 뺨이나 얻어맞겠지.’
백작이 거부하자, 무제타는 그렇게 되면 에반젤린이 먼저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작에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작님. 저는 구사 회생의 길로를 터드리는 겁니다. 딸과 함께 숙청당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얌전히 따라주시는 게 좋겠군요.”
건방진 자식. 로한슨 백작은 무제타에게 적의를 불태웠다. 황태자가 죽고 나니 곧바로 예레미아 황녀에게 붙었다지? 충정 깊은 기사는 무슨! 제 주인도 지키지 못하는 개 주제에!
“마리크 주교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죠. 로한슨 영애께 편지를 전해 주신다면 만남을 주선해 보겠습니다.”
신전 측의 전령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마리크 주교에게도 꼬리를 흔들어대고 있을 게 뻔했다. 그저 권력자에게 붙어 알랑대는 재주가 전부인, 혀만 잘 굴러가는 놈팡이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것이 한없이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이 달려있기에, 백작은 억지로 웃으며 그러겠다 답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은 마리크 주교와 만나 에반젤린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자신의 안전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마리크 주교는 에반젤린의 이상을 눈치채고, 그 애를 희생제라는 무대 위로 올려 처단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백작의 증언이 꽤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보다 에반젤린 로한슨을 사지로 몰아갈 수 있는 증언들 말이다. 끔찍한 이야기들이 친부로 여겨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신뢰성이 클 것이다.
무제타는 떠날 적에 백작이 에반젤린과 진짜 만나는지, 둘이 무슨 대화를 감시하겠다며 하녀를 남겨두고 갔다.
“백작님. 따님께서 악마도 아닌데 어찌 그리 겁을 먹으세요.”
무제타가 두고 간 하녀가 겁도 없이 백작에게 물었다. 백작은 자작가의 하인들에게 으름장을 놓듯이 하녀를 대하지 못했다. 황실에서 온 하녀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보면 볼수록 특이한 하녀였다. 하관의 흉도 그렇고, 낮잡아 볼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내 여식의 죄가 커, 내게도 불똥이 떨어질까 두려워서 그러네.”
그래서 백작은 하녀의 비아냥거리는 투에도 점잖게 답했다.
“죄요? 떠도는 소문들 말인가요? 혹시 그게 사실이에요? 소문에서는 로한슨 영애가 되살아났다고 하던데요. 백작님께서 딸을 꼭 닮은 사람을 데려와 대역 삼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심지어 하녀는 소문에도 빠삭했다. 헛소문을 잠재우려 에반젤린과 사이좋은 부녀 행세를 했던 백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에반젤린이 마녀로 몰릴 줄 알았다면, 그딴 흉내는 내지 않았을 것이다.
공작은 마리크 주교도 아니고 하녀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려줄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정보야말로 백작의 구명줄이 아닌가. 하지만 하나는 답해 줄 수 있었다.
“데려와? 대역? 그것은 틀림없는 에반젤린 로한슨이야.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지.”
멍청한 저택의 하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로한슨 백작은 잘 알았다. 장례식에서 도로 몸을 일으킨 그것과 다시 마주했을 때. 로한슨 백작은 ‘딸’과의 첫 대면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