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53)
“여보. 우리 딸이에요.”
로한슨 백작은 어느 날, 자신의 딸이라는 에반젤린을 만났다.
딸이라는 에반젤린은 제 어미의 손을 잡고 있는 세 살짜리 아이였다. 사실 백작은 처음에 아마란스가 미쳐서 본인을 똑 닮은 인형을 가져왔다 착각했다.
만드는 데 퍽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겠군,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붉은 눈이 데구루루 굴러가고 나서야 저것이 살아 있음을 알아챘다.
붉은 눈만 빼면 얼굴은 아마란스를 꼭 빼닮았다. 눈이 삔 게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혈연임을 의심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러나 백작의 혈연은 아니었다. 저것은 제 자식이 아니다. 백작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로한슨 백작은 처음에 아마란스가 외도를 했다 생각했다. 열이 뻗쳐 대뜸 공작을 찾아갔다. 공작에게 문란한 여인을 딸로 두셨다는 말을 전하고 뺨을 얻어맞았다. 돌아와 아마란스에게 화풀이를 했다.
백작이 한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그랬는지 아마란스는 에반젤린을 주제로 공작과 몇 번이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친가와 절연했음을 선언했다. 그 사실을 들은 백작이 물었다.
“뭐라고? 호사퀸 공작가와 절열은 해? 제정신이오?”
백작은 아마란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저것’ 때문에 공작가의 막대한 유산과 드높은 명예를 포기한다고?
백작이 본 에반젤린은 미숙아였다. 세 살짜리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감정조차 없는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제 남편을 챙기지는 못할망정, 어디서 데려왔는지도 모를 저런 모자란 아이를 위해 호사퀸 공작가와 절연을 하다니. 아마란스는 더 이상 공작과의 연줄로도 못 써먹는 패였다. 백작이 아마란스에게 더욱 소원해진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아마란스를 아내로 고르지 말 것을! 잘못된 선택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식마저 만들어냈다.
백작은 에반젤린이 끔찍했다. 공작과의 혈연으로 묶인 연줄이 되기는커녕! 자신이 이륙한 로한슨의 부흥이 저것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교류하는 다른 귀족들은 백작에게 다른 자식을 보라 권했다. 그러나 백작은 아마란스와 동침하기도 싫었고, 귀족된 도리로서 아마란스처럼 천박하게 외도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작은 두 모녀가 꼴도 보기 싫어 홀로 영지로 내려갔다. 어쩌다 수도에 올라올 일이 생긴다면 로한슨 저택이 아닌 다른 사택을 구해 머물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년 전. 아마란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수도로 올라왔다. 아마란스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성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며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했다.
말라가는 아마란스의 옆에는 전과 달리 활달한 아이가 있었다. 백작은 경악했다. 생김새가 아니었다면 같은 아이라고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란스의 곁에 있는 아이는 순진해 보였고 천진해 보였다. 사랑스러웠다. 백작가에서 일하는 아랫것들조차 아이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이것이 그때 시체 같던 에반젤린이라니. 백작이 놀라워하자 아마란스는 제가 일궈낸 아이를 자랑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아이예요. 어여쁘지 않나요?”
백작은 아마란스의 말이 이상하다 여겼다. 더군다나 아이를 대하는 아마란스의 태도 역시 미심쩍었다. 단순히 딸을 대하는 부모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마란스는 제 자식을 사랑했다. 헌신을 넘어서 가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사랑은 오히려 신앙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보는 이들은 둘을 ‘참 사이좋은 모녀’라고 칭했건만, 백작은 모녀의 사랑이 역겹게 느껴졌다.
묘하게 섬뜩했던 아마란스의 말의 의미는 아마란스가 죽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제 어미가 죽은 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삶의 목적을 잃은 듯, 죽은 날만을 앞둔 시한부처럼 무기력해졌다. 백작은 곧 에반젤린이 아마란스를 뒤따라갈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에반젤린이 7년이나 버틴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에반젤린은 마침내 아마란스를 따라 죽었다. 신이 목숨을 거두지 않아, 스스로 생전 아마란스가 아끼던 벚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백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벚꽃으로 담금주를 만들어 축배를 들지 않는 것이 백작의 마지막 배려였다.
하지만 백작의 기대를 배신하듯, 축제와도 같은 장례식에서 그것은 다시 눈을 떴다.
저택의 모자란 것들은 제 아가씨가 뒤바뀐 게 분명하다며 호들갑을 떨어댔으나 백작은 알았다. 저것은 아마란스에게 교화되기 이전의 에반젤린과 똑 닮아 있었다고.
영롱한 색채는 붉은 보석을 떠올리게 한다. 무기질 같은 눈동자는 꼭 세공된 유리알 같다. 죽은 것이 분명하다 살아 움직이니 기괴하게 짝이 없다.
그러나 손을 뻗는다면 생각과 다르게 말캉한 감촉과 표면의 축축한 점액질이 만져질 것이다. 그 후에야 붉은 색채가 보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피의 빛깔임을 떠올렸다.
백작은 또다시 눈이 마주친 듯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백작이 머무르는 방의 벽면에서 ‘깜박’ 하고 눈이 감겼다가 뜨였다. 백작을 로한슨 저택에서 도망치게 만든 그 눈, 눈이었다. 백작은 숨이 멎은 듯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호흡이 가팔라 왔다.
이대로 정신을 놓을 뻔 한순간에 눈은 곧바로 자취를 감췄다. 굳어있던 백작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공포에 질린 로한슨 백작이 숨을 헐떡거리자 하녀가 차분하게 백작을 살폈다.
“로한슨 백작님, 괜찮으세요?”
다리가 휘청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백작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식은땀에 푹 젖은 등줄기가 축축했다. 옷자락에 닿자 유독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 너도 봤지?”
“무얼 봤다는 건가요?”
“눈 말이다, 눈! 벽에 붙어 있던 눈!”
백작이 소리를 쳤으나 하녀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눈이라니요…? 벽지의 무늬라도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었다. 로한슨 백작이 머무르는 방의 벽 무늬는 화려하긴 했지만, 딱히 눈과 헷갈릴만한 문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로한슨 영애님을 곧 만난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요.”
백작은 억울했으나 하녀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상대가 보지 못했다는 것을 자꾸 봤다고 주장하는 게 정신이상자와 다를 게 무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물며 상대는 무제타가 황실에서 데려온 하녀였다. 괜한 말을 했다 무제타에게, 황실에 허튼소리가 들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그래. 내 착각이었나 보군.”
백작은 하녀의 의견을 수용하는 척 말을 줄였다. 백작이 부쩍 티가 나게 불안해하자 하녀가 갑자기 번잡스럽게 품을 뒤지더니 무언가를 백작에게 내밀었다.
“백작님 이거 받으세요.”
하녀가 내민 것은 작은 병이었다. 백작은 무심코 성수 병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녀가 성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백작은 병의 외형이 일반적으로 성수를 담는데 사용되는 병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뭐지?”
“백작님께서 많이 긴장하신 듯싶어서요.”
백작이 묻자 하녀가 친절하게 답했다.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이에요. 원래는 무제타 경께서 드시는 약이라 제멋대로 백작님께 드렸다고 혼이 날지도 모르지만….”
하녀는 무제타가 혼을 낼 게 걱정됐는지 움츠러들어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로한슨 백작님은 마리크 주교님께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 백작님께 드렸다고 하면 무제타 경이 오히려 절 더 칭찬해 주시지 않겠어요?”
로한슨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제타가 쓰는 약이라…. 과연 이제 보니 병에 새겨진 음각들이 퍽 화려한 게, 무척이나 값비싸 보였다.
백작도 본 적 없으니 시중에서 도는 약이 아니라 귀한 분들 사이에서만 야금야금 나돌던 것이리라.
백작은 하녀의 갸륵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휘켈 자작에게 기생하듯 빌붙어있다가 귀한 대우를 받으니 그동안의 설움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백작이 선심 쓰듯 말했다.
“만약 무제타 경이 널 혼내려고 들면, 내가 앞을 막아서 주마.”
백작이 치하하듯 하녀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병을 건네받을 때였다.
“백작님, 이제 슬슬 가보셔야 합니다!”
밖에서 휘켈 자작의 하인 놈들이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며 재촉해댔다.
백작은 팍 인상을 구겼다. 건방진 것들. 저들 주인인 휘켈 자식에게는 배를 까고 굽실거리면서 백작에게는 건방지게 구는 꼴을 보라지!
자식 된 도리로 아비를 기다릴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에반젤린이 기다린다며 백작을 쏘아댈 수 있는가. 누가 보면 에반젤린이 백작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건방지다, 건방져.
그에 비하여 눈앞의 하녀를 보라. 과연 황실 출신은 남달랐다. 휘켈 자작 놈의 하인들보다야 무제타 경이 붙여 준 하녀가 훨씬 더 나았다.
적어도 제가 모셔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분간하고 있지 않은가. 이토록 영민하니 얼굴에 흉이 있음에도 무제타가 하녀를 쓰는 거겠지.
게다가 백작에게 순종적인 하녀의 태도를 보아라. 마리크 주교님께서 백작을 얼마나 중요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에반젤린을 잡는 데에 누구보다 내 증언이 중요하지 아무렴.’
백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백작은 하녀를 칭찬하려는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무제타가 하녀를 붙여 준 지 한참인데 아직까지도 하녀의 이름을 몰랐다.
백작은 ‘큼.’하고 헛기침했다. 머쓱했으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원래 아랫사람을 부리는 자들은 일개 부품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백작이 운을 떼자 하녀가 예의를 갖춰 답했다.
“사라카입니다, 백작님.”
사라카, 사라카란 말이지. 로한슨 백작은 속으로 사라카의 이름을 재차 부르며 머릿속에 이름을 박아넣었다.
백작은 사라카가 준 병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즉효성이었던 건지 약을 들이켜자 몸이 나른해지며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과연 황실의 호위기사였던 자가 먹던 약답게 효능이 좋았다. 백작은 훨씬 편안해진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지.”
품에는 무제타가 챙겨 준 미끼인 희생제의 초청장을 잘 챙긴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