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54)
로한슨 백작이 뭘 꾸미는지 살펴봐 달라는 내 부탁에 푸딩은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푸딩은 기분이 불편한지 꼬리를 탁탁 쳤다.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뭐지? 상황이 안 좋은가?
푸딩이 물어올 소식을 기다리면서 흘끔 하녀를 살폈다. 푸딩이 백작을 사찰하는 사이에 하녀를 밖으로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푸딩은 지금 고양이 모습이니까, 적대 관계인 휘켈 자작가 하인 앞에서 괜히 고양이가 말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다행히 방 안에 외부인은 자작가의 하녀 한 명뿐이었다. 하녀만 바깥으로 내보내면 될 일이다.
“늦으시는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을 열자 내 눈치만 살피던 하녀가 흠칫 놀랐다.
“…금방 오실 겁니다.”
“조금 전에도 조금만 기다리면 아버지가 오실 거라 하지 않았니. 도대체 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지?”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굴며 하녀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네가 나가서 상황을 좀 살피고 오거라.”
“제…가요?”
“그래. 아니면 내가 다녀오기라도 할까?”
“아닙니다! 다녀올게요…!”
일부러 어깃장을 놓으며 표독스럽게 말하자 하녀가 지레 겁을 먹고 방을 나섰다. 그 와중에 혹시 내가 화를 낼까 걱정됐는지 문은 조심스럽게 닫더라. 원치 않는 갑질을 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하녀가 나가고 발걸음 소리도 멀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 다급하게 푸딩에게 물었다.
“푸딩 어때?”
푸딩 역시 하녀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도로 눈을 떴다.
“로한슨 백작이 오고 있어요.”
드디어 백작이 무거운 엉덩이를 뗐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푸딩이 하고 싶은 말을 그다음 이야기일 것이다. 대체 뭘 봤길래 우리 푸딩의 심기가 불편해졌을까.
“에반젤린 님. 로한슨 백작 곁에 그게 있어요.”
“그거라니?”
“아자젤의 편지에서 나왔던 그 사라카요.”
순간 턱 숨이 막혔다. 정신을 한번 놓쳤다가 겨우 붙잡았다.
“…마리크 주교.”
푸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크 주교가 로한슨 백작 곁에 있어요.”
이름이 나오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을 뻔했다.
여기서 갑자기 최종 보스 등장이라니? 곧 있으면 희생제인데 거기서 결판을 내는 거 아니었어? 방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다니 악당이 무슨 상도덕도 없어!
푸딩이 굳이 사라카를 먼저 언급한 거로 봐서는, 마리크 주교가 사라카라는 하녀의 신분으로 변장하여 백작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리라. 설마 백작이 늦었던 것도 마리크 주교와 계책을 짜서 그랬던 건가?
속이 울렁댔다. 마리크 주교도 백작과 함께 오고 있는 것이다. 마리크 주교와 곧 마주한다는 생각에 절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푸딩이 자신이 있으니 긴장을 풀라는 듯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나 손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지자 오히려 더 근심만 커졌다.
“푸딩, 잠깐 나가 있을래?”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고 소식조차 듣지 못한 젤리가 푸딩의 위로 겹쳐 보였다.
백작저 하인들과 예레미아가 증언했던 젤리의 부상이 내 숨통을 옥죄었다. 젤리마저 속수무책으로 당해 크게 다쳤는데, 푸딩마저 해를 입으면 어쩌지?
악마가 아닌 가브리엘마저 내 측근이라는 이유로 다쳤는데 푸딩이라고 안전할까?
마리크 주교는 희생제 때까지 날 죽이지 않을 거다. 마리크 주교의 최종 목표는 날 죽이는 거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니까. 고로 희생제까지 안전한 건 나뿐이라는 소리였다.
푸딩까지 다치면 난 내가 한심해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에반젤린 님.”
푸딩이 날 불렀다. 부드러운 꼬리가 살랑대다가 내 손에 엉켰다. 푸딩이 꼬리로 내 손을 감은 것이다.
“제게 도망치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마리크 주교 손에 찢겨 죽는 한이 있어도 에반젤린 님 곁에 남아있을 테니까요.”
“푸딩.”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푸딩이 순한 고양이인 척 시치미를 떼며 냥냥댔다. 사춘기 고양이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평범한 고양이인 척 있을게요.”
푸딩은 그렇게 말했으나,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마리크 주교는 헤나에게서 푸딩에 대한 정보도 전부 전해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푸딩이 고양이 모습을 한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푸딩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딩, 도망치라는 게 아니야. 너는 밖에 있어도 날 지켜볼 수 있잖아. 계속 날 보며 지켜 줄 수 있지?”
그러니 굳이 내 곁에 붙어 있지 않아도 된다. 푸딩이 지켜보는 이상 나는 안전하다며 몇 번을 재차 설득했다.
푸딩이 고집을 부리며 남아있으려는 이유도 이해 갔다. 마리크 주교 앞에 나만 두고 가기 불안한 거겠지. 애초에 푸딩을 대동한 것도 혹시 모를 위험에 빠질까 우려해서였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푸딩이 걱정됐다. 마리크 주교와 대면할 줄 알았다면 푸딩을 데려올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을 거다.
“마리크 주교가 널 해칠까 두려워.”
덜컥 무거운 진심이 입 밖으로 토해졌다. 푸딩은 내 말을 듣고 한참을 조용히 침묵하며 날 빤히 바라만 보다가 결국 내 손길을 따라 창문을 넘어갔다.
“마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푸딩.”
푸딩이 창가에서 멀어지는 걸 보고 안심한 후, 다시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됐다. 이제 마리크 주교를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
“로한슨 영애님! 백작님께서 곧 오실 거라고 하셔요.”
때마침 내가 갑질을 하며 내보냈던 하녀가 들뜬 채 되돌아왔다. 수확을 가지고 돌아와 내게 쓴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쁜 모양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했다고 답하자 눈에 띄게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하녀가 예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드디어 로한슨 백작이 온 것이다.
“에반젤린.”
방 안을 휘적이며 둘러보던 백작이 날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하고, 말라서 그런지 인상이 퍽 사나워 보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얼굴 하니만큼은 참 잘났다. 그러니 저런 인성을 가지고도 아마란스를 꼬신 거겠지.
그러나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건 로한슨 백작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하녀였다.
‘마리크 주교….’
‘사라카’라는 가명을 쓰는 하녀는 황태자의 탄신연에서 잠깐 마주쳤던 그 하녀가 맞았다. 그때 봤던 하녀가 마리크 주교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예레미아가 사라카의 정체를 알려 주면서 그토록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베일로 가려져 하관만 보일 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면사포를 걷어낸 얼굴은 상당히 앳되어 도통 마리크 주교의 연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가브리엘과 젤리를 해친 사람이다. 울분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마리크 주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으나 억누르며 참아냈다.
“아버지와 둘만 이야기하고 싶구나.”
그러니 자리를 비켜 달라는 의미였다.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는데도 마리크 주교는 자리를 비워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리크 주교 대신 백작이 내 말을 잘랐다.
“됐다. 오래 이야기할 생각도 없어.”
혹시 마리크 주교라는 걸 아는 걸까? 슬쩍 백작을 살폈다. 그러나 백작의 태도로 어림짐작해, 백작은 상대가 마리크 주교임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백작도 이상할 정도로 하녀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아랫사람이라고 낮잡아 보는 게 확실히 보였으니까.
마리크 주교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백작이 앉은 소파의 뒤에 서 있었다. 눈을 돌려 부러 백작에게만 시선을 주려고 노력했다.
귀족들은 굳이 하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리크 주교를 너무 신경 쓰면, 내가 당신의 정체를 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자기 세뇌를 했다. 나는 사라카가 마리크 주교라는 걸 모르는 거다. 사라카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예레미아가 내게 편지를 부친 것은 비밀이다. 마리크 주교에게 내가 사실을 안다는 걸 밝혀서는 안 된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 아비를 귀찮게 하는구나.”
다행히 때마침 백작이 내 관심을 돌릴만할 쓰레기 발언을 내뱉었다. 덕분에 신경을 백작 쪽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그사이에 제대로 예의를 차리는 법도 망각한 모양이야.”
“그럴 리가요. 오랜만에 뵈어요, 아버지.”
백작이 가만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엉덩이가 무겁냐고 꼽사리를 줬다. 부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다시 자리에 앉자 그제야 백작은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자기가 마리크 주교에게 내다 팔 딸인데도 예의를 차린 인사는 받고 싶었나 보다. 체면치레에 환장한 사람다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작은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절대 굽히려는 법이 없고 휘두르려고 한단 말이지. 겁이 없는 건가?
“무탈하셔서 다행이네요. 아버지께서 저택에 난 불에 휩쓸렸을까 염려했거든요.”
백작을 일부러 긁어대며 환하게 웃었다. 태연하게 말하자 백작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렇게 보면 영 겁을 상실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저택에 불을 지른 것이 나라는 소문은 백작 역시 들었을 것이다.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범인을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백작은 흠칫 몸을 떨며 손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닦았다.
“…제 아비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자식 된 도리로서 오히려 아버지를 걱정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요.”
‘자식’에 힘을 주어 말하자 백작은 미간을 퍽 구겼다. 그 모습이 날 꺼림칙해하던 공작과 비슷해 보였다. 누가 보면 아마란스가 아니라 백작이 공작 아들인 줄 알 정도였다.
역시 백작은 당사자니만큼 내가 자신의 친딸이 아님을 알고 있는 듯했다. 괜히 내가 사생아가 아닌가 고민했던 게 아니라 이 말이지.
“왜 영지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휘켈 자작에게 신세를 지고 계시나요? 영지의 사람들이 서운해하겠어요.”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구나. 수도에서 할 일이 있어 그런다. 곧 희생제이니 참석도 해야 하고.”
백작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공작이 보여 준 희생제의 초청장 편지와 같은 편지였다.
“네가 찾아온 건, 이 편지 때문이겠지?”
“네. 전 지금 호사퀸 공작저에 있는데 왜 서신이 아버지께 갔는지 잘 모르겠어요. 신전의 정보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모양이죠.”
마리크 주교더러 들으라며 신전을 비꼬아댔다. 그러나 기분 나빠하는 것은 마리크 주교가 아니라 백작이었다.
백작은 혀를 차며 편지를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편지가 테이블 위를 스쳐 내 앞까지 미끄러졌다. 봉투를 들고 개봉해 안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초 청 장
자비로운 태양신께서 은혜와 평강을 내려주신바
보답하고자 다음과 같이 희생제를 개최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셔서 거대한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부디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에반젤린 로한슨 귀하
나와 가브리엘의 예상이 틀렸던 걸까? 형식적인 편지는 그 어디에서도 내게 제물의 역할을 해 달라는 언급이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읽어봤던 공작의 편지와 내용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집어넣고 있는데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퍼뜩 고개를 들자 눈을 감고 있는 백작이 보였다. 흉통이 규칙적으로 작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숨을 쉬는 거로 봐서는 죽은 건 아니었다.
짧은 글을 읽어내리는 사이에 백작이 잠이 든 것 같은데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사이에 잠이 든다고? 절대 흔한 일이 아니지.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차를 드시곤 긴장이 풀리셨을 거예요.”
백작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마리크 주교가 내게 문득 말을 걸었다.
피곤하기는 무슨. 네 눈에는 내가 바보로 보여? 수상한 태도를 보아하니 마리크 주교가 수면제 같은 걸 써서 백작을 재운 것이 분명했다.
백작이 마셨던 차는 나 역시 마셨으니, 응접실로 오기 전에 수를 썼겠지.
초청장은 역시 미끼였다. 백작에게 수면제까지 썼으니 빼도 박도 못하지. 그 이유야 뻔했다. 마리크 주교는 백작을 재운 후 내게 하고픈 말이 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속임수에 깜빡 속아 넘어간 듯한 느낌이라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나는 보란 듯이 부러 찻잔을 들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내게는 효능이 없는 모양이야.”
적어도 변명거리를 댈 거였다면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했어야지. 자작저에서 내놓은 차는 홍차였다. 카페인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마리크 주교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눈매가 미묘하게 휘어, 이 사람은 웃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싶었다.
“전에 봤을 때 말을 하지 않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사라카의 모습으로 한번 마주쳤던 기억을 되살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라카’의 말투는 마리크 주교의 것보다 훨씬 천진했으나, 정체를 알고 따지고 보자면 아주 비슷했다. 왜 황성에서 굳이 입을 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절 기억하시나요?”
“황태자 전하의 탄신연에서 만났던 기억이 나. 잊기 쉬운 얼굴은 아니지.”
내 대답에 마리크 주교가 얼굴을 더듬었다.
“아…. 제 얼굴이 이렇다는 걸 가끔 잊곤 하네요.”
그 신분을 알고 있으니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베일을 푹 눌러쓰고 다니니 남들에게 화상 흉터를 보일 일이 없어, 맨얼굴이 기억에 남을 줄 몰랐다는 이야기 같았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보낸 사람인가?”
“알아봐 주셔서 기뻐요. 네. 마리크 주교님께서 보내셨답니다.”
마리크 주교가 고개를 작게 숙여 인사했다. 신의 총아라는 주교님께서 머리가 참 가벼우셨다. 마리크 주교는 자신을 제삼자로 칭하면서도 거리끼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주교가 아니라 당장 극 무대 위에 올라도 될 것 같은 연기력이었다.
덩달아 상대역인 나 역시, 마치 촌극 위에 올라가 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마리크 주교도, 나도 대본을 읽었으면서 무대 위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떨며 극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본의 작가 이름에는 마리크 주교의 이름이 적혀있겠지. 번쩍, 조명이 켜졌다. 나와 마리크 주교를 제외한 주변이 어둠에 좀먹어갔다. 나는 태연하게 대사를 던졌다.
에반젤린: (사라카를 빤히 바라보며) 아버지께 편지를 맡긴 건 널 보게 하기 위해서겠고.
사라카: (감탄하듯이) 영민하시네요. 네, 맞아요. 마리크 주교님께서 로한슨 영애님께 저를 통해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에반젤린: 내게 전할 말이 있다고?
다만 마리크 주교가 무사히 연극을 끝마치고 커튼을 내리는 게 목적이라면, 나는 열심히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화려한 무대를 박살 내고 싶다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의 총아께서 내게 무슨 부탁이 있어서? 혹시 내게 제물의 역할이라도 맡기고 싶으신 건가?”
나는 마리크 주교가 준비한 무대에서 내려와 물었다.
내게 보내진 편지에 제물에 역할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건 분명 직접 만났을 때 제안하기 위해서겠지.
마리크 주교는 백작의 뒤에 서서 날 바라보았다. 백작이 잠들었음에도 자리에 앉는 대신 뒤에서 말을 해 오는 게 직접 나서는 법 없이 흑막처럼 구는 마리크 주교의 성정을 추측게 했다.
“잘 아시네요. 네, 마리크 주교님은 로한슨 영애님께 제물의 역할을 제안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마주쳐오는 얼굴이 무미건조했으나 눈빛만은 강렬했다. 마리크 주교의 눈에는 흥미와 열기가 누더기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청렴한 사제가 갖기에 어울리지 않는, 욕망이 그득한 눈이었다.
“마리크 주교님께서는 참으로 자애로우시네. 사특하게 여기시는 내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실 줄이야.”
물론 내게도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 어쩔수 없이 희생제에 참가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크 주교의 말을 곧이곧대로 수긍하기 불만스러웠다.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희생제에서 제물 역할을 한다는 게 마리크 주교의 손에 놀아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말에 트집을 잡자 마리크 주교가 나를 게슴츠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라카: (안타까운 존재를 연민하듯 바라보며) 진정 자애로운 것은 태양이시지요. 로한슨 영애님마저도 수행할 사명을 내려주시니 말입니다.
이미 약속된 말을 내뱉듯 규정적인 대사였다. 날 바라보는 시선마저 역겨웠다. 마리크 주교가 이단을 혐오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마리크 주교는 나를 삿된 것, 더 나아가 사람도 되지 못하는 반푼이처럼 여기고 있었다.
마리크 주교가 처단해야 할 숙적 취급하는 나 역시 극의 하이라이트를 위한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마리크 주교를 반면교사 삼아 내 지난 행적들을 반성했다. 나는 가브리엘을 저렇게 봤던 걸까? 가브리엘은 어떻게 저런 시선을 받아놓고서 내 곁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마리크 주교는 나를 도축장에 걸린 고기를 품평하듯 살펴보다가 싱긋 웃었다. 생전 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어색한 미소였다. 마리크 주교는 내 드레스를 가리키며 지적했다.
“고양이 털이 붙어 있네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등줄기가 섬찟했다.
“로한슨 영애님께서 짐승을 귀히 여겨 곁에 데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고양이의 털인 것 같은데, 고양이는 보이지가 않네요. 오늘은 함께 오지 않은 건가요?”
“야생고양이는 원래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법이지.”
마리크 주교는 내가 푸딩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말에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속으로 깊이 안심했다.
역시 푸딩을 내보낸 건 잘한 일이었다. 설령 마리크 주교가 푸딩을 해할 수 없다 해도, 내 신경 줄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런가요? 한번 보고 싶었는데 몹시 아쉽네요. 아, 그래. 짐승 하니까 생각난 건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최근 신전에 웬 짐승이 돌아다닌다지 뭔가요.”
마리크 주교는 다시 한번 화제를 돌렸다. 신전, 짐승. 그 단어들만 가지고도 마리크 주교가 무얼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마리크 주교가 꺼낸 주제는 다름 아닌 젤리였다. 내가 혹시라도 희생제에 참가하지 않을까 봐 염려하며 담보를 세운 것이다.
마리크 주교가 젤리를 이용할 셈으로 숨겨 놓아, 예레미아도 젤리의 행방을 찾지 못했던 거겠지.
“어쩌면 영애님께서 희생제에 참여하러 신전에 오실 때, 그 짐승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희생제.”
“물론 그 짐승은 어디서 무슨 변을 당했는지 얼굴이 다 녹아내려 운신조차 어려워 보였지만요.”
“…….”
“불쌍하게도 주인에게 버려지기라도 했던 걸까요?”
버려지긴 무슨, 자기가 숨겨 놓고 있는 주제에! 나는 당장이라도 마리크 주교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저 뻔뻔스러운 입이 얌전히 다물어진다면 폭력이라도 서슴지 않을 거다.
그러나 당장 마리크 주교에게 손을 올리기에는 젤리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손을 썼다가 젤리에게 보복이 가해질까 걱정되어 애써 분노를 참아냈다.
“그럴 리가. 분명 주인은 애타게 잃어버린 아이를 찾고 있겠지.”
이를 갈며 마리크 주교의 말을 반박했다. 마리크 주교는 뻔뻔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럴까요? 아, 주인은 몰라도 로한슨 영애는 짐승을 좋아하시니 분명 보고 싶어 하시겠지요.”
마리크 주교는 저열한 흥분을 숨기지 않으며 맞장구쳤다. 모름지기 들뜬다면 횡설수설 말이 두서없이 무너져야 마땅하지만 마리크 주교는 정반대였다. 말을 하면 할수록 천진한 하녀에서 예의를 갖춘 말투로 변해갔다.
“나에 대해 잘 아는 눈치구나.”
“다 백작님께 전해 들은 덕분이지요.”
헤나 대신 백작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저택에서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던 백작이 젤리나 푸딩에 대해서 알 리가 있나.
백작은 둘의 이름도 모를 것이다. 헤나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분명했다. 그러나 모르는 척, 마리크 주교가 언급한 대로 백작에게 눈길을 주었다.
“남의 집에 기생하고, 대화 중에 갑자기 잠든 것도 모자라 자식의 사생활을 떠벌리고 다니시다니, 아버지께서 자신하시는 귀족의 품위는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마리크 주교에게 갖는 불만을 가져다 백작을 헐뜯는데 보탰다. 아무튼, 백작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아마란스를 속인 것도 그렇고. 게다가 아무리 내가 자기 핏줄이 아니라고 해도, 로한슨의 성을 줘놓고서 마리크 주교한테 팔아치우기까지 했으니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아버지께서 헛소리하실까 걱정되는구나.”
“헛소리요?”
“그래. 예를 들어… 날 더러 당신의 딸이 아니라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시던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마리크 주교의 반응을 살폈다. 마리크 주교를 마주할 때면 베일을 걷어 그 아래 있는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민얼굴을 드러낸 마리크 주교는 표정이 죽어 감정을 읽어내리기 힘들었다.
“악마의 자식.”
“그래. 그런 소리를 들었다가 마리크 주교님께서 나를 오해하신다면 안타까운 일 아니겠어?”
집요한 시선을 느낀 듯 마리크 주교 역시 나를 바라보았다.
죽은 표정 중, 날 진득하니 마주하는 눈빛만은 살아남아 형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