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58)
“에반젤린 님.”
푸딩이 날 부르는 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들었었나 보다. 푸딩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그사이에 무슨 꿈을 꿨던 건지 머리가 무척이나 지끈거렸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기 전에 악몽과도 같은 마리크 주교도 만났고 잠자리 역시 불편했으니 아무래도 악몽을 꾼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에반젤린의 몸에 막 들어왔을 때도 자주 악몽을 꾸곤 했다.
꿈에서 엄마만 주야장천 나오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어 펑펑 울어댔다.
그러나 참 이상하지. 이제 와서 꿈을 회상하자니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희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뿐이었다. 에반젤린. 하고 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마저 환청처럼 들렸다.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도착했어?”
“네. 벌써 밤이에요.”
얼마나 잔 것인지 벌써 해가 지고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푸딩은 마차가 도착한 지 오래며, 내가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배려해 마부가 공작저 주변을 몇 바퀴나 돌았다고 이야기했다.
배려에 감사를 전하자, 마부는 당치도 않다며 손사래를 치며 식겁했다. 마부에게 팁으로 금화를 쥐여줬다.
원래 감사는 돈으로 하는 거다. 오늘 하루를 산값이라고 하자 마부는 황송해하면서도 금화를 챙겼다. 체면을 차리며 거절하기에는 큰돈이긴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호사퀸 공작저는 경비들이 서 있었다. 신전에서 이단의 학살을 자행하기 무섭게 호사퀸 공작이 경계를 강화한 덕이다.
잘 무장한 경비 사이에 머리 하나가 작은 사람이 끼어 있었다. 누군가 싶었더니 바로 칸나였다.
“아가씨!”
칸나는 푸딩이 그랬던 것처럼 내 품에 안겨들었다.
“추운데 들어가 있지 않고.”
“나와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어요!”
거짓말이다. 코끝은 붉었고, 몸도 무척 차가웠다. 한참 동안 밖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듯했다. 그사이에 나는 잠을 퍼질러 잤고.
자느라 마차가 공작저 주변을 돌았다고 했지. 칸나는 마차가 빙빙 도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겠네. 요즘 따라 바쁘게 일하는 양심이 다시 한번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러다가 양심에 너무 찔려서 뾰족한 끝이 닳아 문드러질 것 같았다.
내 죄가 크다. 어째 요새 내 주변 사람들에게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희생제만 끝나면 두고 보자.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게 해 주마.
“초청장은 잘 받고 오셨나요?”
“그래.”
“로한슨 백작님이 해코지는 하지 않았죠?”
그 로한슨 백작은 여전히 재수 없긴 했지만 내게 다른 말도 하기 전에 고꾸라져 코만 골았다.
조금 극성이긴 했으나 날 염려해 주는 것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푸딩이나 미샤, 칸나도 그렇고 이 세상에 날 걱정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내가 에반젤린임을 받아들이는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체 내 무엇을 보고 정을 주게 된 걸까. 이전의 나는 꼭…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 마리크 주교와 비슷했을 텐데 말이다.
칸나는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촛대에 불을 옮겨 붙이며 방에 불을 밝혔다. 주변 사물이 확 분간되며, 다시 현실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칸나는 내게 보고 싶었다, 많이 기다렸다, 등등 쫑알거리며 화롯불 근처에서 불씨를 쐬더니 졸린 지 눈을 끔뻑거렸다.
침대에 누우라 해도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칸나에게 담요를 둘러주고 방을 나섰다.
푸딩은 마브카에게 쥐를 돌려주러 갔다. 공작도 경비를 통해 내가 돌아왔음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사 귀환을 알려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가브리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리는 답이 없어 처음에는 가브리엘이 먼저 잠이 든 줄 알았다. 푸딩의 도움으로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고는 하나, 가브리엘은 환자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러볼까?
“가브리엘 경?”
“에반젤린 영애님?”
작게 묻자 화답하듯 문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온화하고 다정한 음색이다. 곧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확 열렸다.
“영애님.”
가브리엘은 내게 상처가 없는지 한번 훑어보고는 안도하며 나를 반겼다.
“잘 다녀오셨나요?”
“네, 다녀왔어요.”
가브리엘의 물음에 답을 하고 나서야 온몸의 독기가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확 풀린 듯했다.
슬쩍 엿본 방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작게 열린 창문 사이로 기어들어 오는 빛이 전부였다. 틈새로 불어온 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
“왜 불도 밝히지 않고 계셨나요?”
“별빛이 밝게 빛나 미처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은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브리엘의 답에 무심코 긍정했다. 그 말대로 이곳의 밤은 참으로 밝았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가브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완전히 걷었다. 이제는 방 안에 별빛뿐만이 아니라 달빛도 가득 찼다. 검은 머리끝으로 푸른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잠시 창밖에 시선을 두고, 밤하늘을 감상했다.
“영애님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솔직하게 마리크 주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지만 걱정할 게 뻔한데….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마리크 주교를 만났어요.”
정말 환자에게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되는 건데. 다 가브리엘이 내 푸념을 군말 없이 들어주는 탓이다. 자꾸 날 응석받이처럼 만드네.
어쩌면 각인일지도 몰랐다. 가장 처음으로 가브리엘이 내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가브리엘이 성수도 통하지 않는 몸으로 다칠 것을 감안하고 나를 지키려 들었기 때문에. 나는 무심코 가브리엘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전달받은 초청장은 평범했어요. 하지만 마리크 주교가 직접 제물의 역할을 제의하더군요.”
가브리엘의 말대로였다.
“제물….”
내 말에 가브리엘이 탄식했다.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나 막연하게 추론만 했던 것이 직접 눈앞으로 들이닥쳐 실감하게 되는 것은 또 달랐다.
“경. 저는 제물이 될 거에요.”
가브리엘은 말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이 가브리엘의 형태를 덧그렸다.
월광에 나부껴 흔들리는 머리칼 아래로 푸른 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에 이끌리듯 말했다.
“마리크 주교를 파멸시킬 제물이요.”
그림자조차 제대로 지지 않은 시린 밤이다. 나와 가브리엘의 그림자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아늑하고 몽롱해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순간이 허상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나는 혹시 깨어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도록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 숨쉬기 위해 마리크 주교를 파멸시킬 것이다.
관 속에서 눈을 뜨고 난 이후. 무지했던 시절에 가장 먼저 했던, 원작을 뒤틀고 악녀의 운명을 벗어던지고 사형 엔딩을 피하겠다는 막연한 결심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내가 누워 있던 관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았다. 마리크 주교를 이겨야겠다며 습관적으로 하던 말과도 달랐다.
온전한 내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