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64)
라파엘라와 다르게 예레미아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제물로 오른 것이 가브리엘이 아닌 ‘리코’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아가 에반젤린에게 가브리엘의 행방을 알린 다음 날, 테네브레이 황녀와 함께 감옥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에반젤린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감옥 안의 내용물은 거짓말처럼 뒤바뀌어 있었다.
테네브레이가 없을 때 자신을 리코라고 소개한 가짜 가브리엘은 예레미아에게 쥐를 보내어 대화를 시도했다.
예레미아는 리코로부터 가브리엘 경이 무사히 감옥을 빠져나갔음을 전해 들었다. 은인을 도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크게 안심했다.
리코는 오늘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황실의 감옥에서 이송되었다. 무슨 이유인가 했더니 희생제의 제물로 선정되었을 줄이야.
혹시 이미 들킨 게 아닐까 무서웠으나 다행히 이송 과정에서도 가브리엘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능력이다. 아자젤의 육신으로도 원래의 가브리엘과의 차이점을 쉬이 찾아낼 수 없었다.
제단 위에 올라간 가짜는 어쩐지 가브리엘과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껴지던 부분도 사라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에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걸까?
‘리코’는 감옥에 있을 때처럼 넝마가 아닌 제대로 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 예레미아가 입고 있는 옷과도 비슷했다.
제복을 입혀놓은 이유야 뻔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상대가 가브리엘임을 더 쉬이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가브리엘을 알아본 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저건… 가브리엘 경?”
“파라로스 기사단장이잖아.”
“아, 소문의 그?”
작은 숙덕임이 회장을 가득 채웠다. 귀족들께서 모인 장소치고는 꼭 시장 바닥을 연상케 했다. 소란스러움을 틈타 테네브레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자젤 경, 저기 좀 봐.”
옆에 있던 테네브레이가 세상 우스운 볼거리를 봤다는 듯이 흥겹게 말하며 턱을 까딱댔다. 테네브레이의 시선 끝이 향하는 곳은 황제였다. 황제는 마리크 주교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테네브레이는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주교님의 행사에 방해가 되기에 참았으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내려갈 줄을 몰랐다.
황제는 마리크 주교가 자신과 가브리엘이 혈연 관계임을 밝힐까 걱정되는지 무척이나 초조해했다. 아마 가브리엘을 죽여서라도 제 과오를 땅속으로 파묻고 싶겠지. 의자 팔걸이를 툭툭 치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곧 내게 물려줄 자리인데도 어쩜 저렇게 미련이 그득하실까.”
테네브레이가 황제를 한심하다는 투로 비난했다.
테네브레이에겐 한때 황태자만큼이나 황제가 무섭던 때가 있었다. 태어날 적에 황제가 선물해 준 목걸이를 꼭 붙잡고 황제에게 용기 내 아버지의 학대를 알리려 했을 때, 그 앞에서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테네브레이는 무언가 달라지리라, 황제가 조처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태자를 말리기는커녕 예레미아를 불러들였다.
황제가 황좌 뒤에 숨어있으라 명령했기 때문에 테네브레이는 둘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다. 테네브레이는 그때의 대화를 아직도 선명히 복기해 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너에게 손찌검을 하느냐?
그럴 리가요. 아버지는 무척이나 자상하신걸요.
절대 제게 손을 올리지 않으세요.
그럼 테네브레이에게는?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테네브레이가 조심성이 없어 자주 다치고 걱정하셨는걸요.
아주 다정한 조손 간의 대화였다. 예레미아가 돌아간 후 황제가 물었다.
정말 네 아비가 널 학대하느냐?
테네브레이는 고개를 팍 숙인 채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테네브레이를 보는 황제의 눈이 무감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목이 콱 막혀와 흑옥이 박힌 목걸이를 잡아 뜯을 것처럼 확 움켜쥐었다.
황제가 테네브레이의 말을 신뢰하지 못해 되묻는 게 아니었다. 그냥 황태자의 학대를 묵인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테네브레이는 입도 벙긋대지 못했다.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당장 그때 입고 있던 드레스의 밑단만 올리더라도 종아리의 자국을 볼 수 있을 텐데. 소매 춤만 걷어도 멍 자국이 드러날 텐데.
테네브레이는 그 이후로 제가 아버지에게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황제에게 말했다는 사실이 들켜, 황태자는 되려 더욱 주도면밀해졌다. 밖에서는 더욱 다정한 아비가 되었다. 예레미아는 그 옆에서 천진하게도 웃어댔다.
테네브레이는 그 이후론 제 자매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예레미아도 모든 걸 알고 묵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알고 있었을까? 아니, 그 애는 죽기 전까지는 세상이 온통 하얀 줄로만 알았을 테니 몰랐을 수도 있겠네. 예레미아를 죽이기 전에 물어볼 걸 그랬다며 테네브레이가 잠시 아쉬워했다.
물론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세상에서 테네브레이가 믿는 것은 마리크 주교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소란이 가시지 않자 사제 하나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다시 회장이 조용해졌다.
사제가 칭찬을 바라듯 마리크 주교를 바라보았다. 마리크 주교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자 사제는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듯이 미소가 만개하며 환희로 피어났다. 입이 얼마나 헤벌쭉 벌어졌는지 이빨의 개수조차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천박하기는. 테네브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제의 꼴을 보고 있자니 설마 주교님 앞에서 자신도 저 모양이 되는 건가 싶어 잠시 자기반성을 할 수 있었다.
다시 경건한 침묵으로 가득 찬 회장에서 마리크 주교가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희생제를 여는 까닭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랜 평화에 잠식되어 죄를 망각한 자들도 나오기 마련이죠.”
마리크 주교가 못내 안타깝다는 듯 한탄하며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 경은 죄를 답습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가브리엘 경에게는 속죄가 되겠지요.”
누군가 물었다.
“가브리엘 경은 무슨 죄를 저지른 겁니까?”
젊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시작된 방향으로 온 시선이 꽂혔다.
바로 옆에 앉은 남자가 여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그만하라 말리려 하였으나 이목이 쏠리자 제게도 화가 끼칠까 두려웠는지 서둘러 손을 뒤로 뺐다. 여인은 따가운 눈초리에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으나 용기를 냈다.
얼마 전에 여인의 남편이 이단이란 명목하에 살해당했다. 남편뿐만 아니라 여인도, 어린 자식들도 함께 죽을 상황이었으나 겨우 가브리엘에게 구해져 목숨을 건졌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브리엘 경은 신실한 기사이지 않습니까. 자바니야 주교님께서 직접 천거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마리크 주교님 곁에 있는 자바니야 주교님의 안목도 잘못되었다는 말씀입니까?”
회장에 자바니야 주교가 함께 있었다면 뒷목을 잡고 넘어갔을 법한 말이었다. 더불어 이단과 관련이 있다면 친족이건 이웃이건 한데 묶어 번제하는 신전의 행태를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여인은 답을 구하는 듯 마리크 주교를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마리크 주교 역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분명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도 어쩐지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 들어 모골이 송연해졌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폐부가 죄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섬뜩한 시선이 겉과 속을 전부 샅샅이 파헤쳐 헤집어댔다. 그러나 정작 마리크 주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어 그 속내를 알아내기 어렵다.
상대의 심정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불안을 더욱 야기시켰다. 미지의 것을 앞에 둔 공포였다.
베일을 걷어낸다면 그 아래, 마치 끔찍한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여인은 마리크 주교에게서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의 괴물을 연상해냈다.
짐승의 흉측한 이빨을 가졌지만, 새들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어 사냥감을 유혹하는 괴물이다.
마리크 주교가 입을 열었다.
“신도님의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였다.
마리크 주교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괴었다. 팔이 들어 올려지며 드러난 손에는 화상 흉터가 그득했다.
“어찌 가브리엘 경의 죄가 자바니야 주교님의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자바니야 주교님께서는 믿음을 증명하신 분이신걸요.”
여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 여인 자신과 그녀의 자식들은 믿음이 없으므로 끌려갔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여인은 성기사들의 손에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도 태양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아, 맞아. 가브리엘 경의 죄를 물었죠.”
충분한 답이 되었으리라 여긴 걸까, 마리크 주교는 여상스럽게 다음 질문을 찾았다.
“가브리엘 경은 악마를 불러냈답니다.”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반향은 무척이나 컸다. 무려 마리크 주교의 입에서 토해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탄식인지 기겁인지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인의 입도 다물어졌다. 자칫 한발 더 나아갔다면 겨우 산목숨이 도로 불길에 처박힐 뻔했다.
“우리 사이로 숨어든 악마는 시체에 들어가 되살아난 척 연기하며 태양신의 품에 안겨야 마땅한 고인의 삶을 능욕하였고, 고인의 부친마저 속였지요. 제 보금자리를 불살랐으며, 테네브레이 황녀의 눈을 가려 아버지인 황태자 전하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만들었습니다.”
황태자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딘가에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가 천장에 매달려 뚝뚝 피를 흘리던 장면은 쉬이 잊히지 않았던지라 언급한 것만으로도 당시 상황이 생생히 되살아난 탓이다. 그리고 시체를 상기시켜 충동질한 구역질 나는 감정은 뒤이어 떠오른 인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
“로한슨이다.”
“에반젤린 로한슨이야.”
마리크 주교가 정답을 맞혔다는 듯 침묵했다.
안타깝게도 에반젤린을 옹호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호사퀸 공작은 약속한 대로 침묵했으며, 바알 공작은 제 아들을 설득해 냈고, 토텐 후작 부인의 품에는 아이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로한슨 백작은…. 로한슨 백작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며 구석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바로 옆에 후덕한 휘켈 자작이 로한슨 백작을 가리고 있었다.
휘켈 자작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몸을 비키자 로한슨 백작이 훤히 드러났다.
이러려고 참석을 요구했군. 난데없이 불똥이 떨어져 백작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제타의 협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려면 무슨 증언이든 해야 했다.
“주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딸의 몸에는 악마가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장례를 치러주었는데도 숨이 끊겼던 시체가 다시 살아났지요. 저택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악마는 아비인 저를 속이려 들었고, 정체가 들키니 저택을 불태워 자신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었습니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셨으나 결국 더러운 악마의 손아귀에 안타깝게 죽고 말았지요.”
로한슨 백작이 절절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영애를 꼬드겨낸 전적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혀가 퍽 유려했다.
길을 오고 가며 로한슨 저택을 감시하던 기사들을 보았던 사람들은 이제야 까닭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악마에게 입막음을 당했다가 주교님 덕분에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 고얀…!”
앞쪽에서 노인의 노성이 들렸으나 로한슨 백작은 그냥 바람이려니 무시하기로 했다. 호사퀸 공작의 유산을 받는 일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미련 따윈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자신의 안위다.
“로한슨 백작님. 믿음을 택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진실을 밝혀주셔 감사합니다.”
마리크 주교가 만족해하며 백작을 치하했다.
로한슨 백작은 제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쿵쾅댔다. 옆자리의 휘켈 자작이 참 잘하셨다며 로한슨 백작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백작은 마리크 주교의 앞이었기에 휘켈의 무례를 눈감아주었다.
반면 앞쪽에서는 호사퀸 공작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바알 공작이 곁에서 진정하라고 부채질을 하며 달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싫어하는 것이 비슷해 꽤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호사퀸 공작이 속으로 에반젤린을 찾았다. 자신이 또 그것을 찾게 될 줄은 몰랐으나 어서 튀어나와 저 망할 로한슨 놈의 얼굴을 뭉개줬으면 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분명 저 베일을 뒤집어쓴 여우의 수작임이 분명할 테지만.
공작의 속마음이 들렸다면 마리크 주교는 분명 억울해했을 것이다. 라파엘라나 호사퀸 공작만큼이나 마리크 주교도 에반젤린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라카’를 써서 에반젤린을 직접 초대하기까지 했는데 정작 에반젤린이 회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잃어버린 개라도 찾고 있는 걸까? 잡아 온 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에 가둬놨으니 에반젤린이 찾기 어려울 텐데 말이다.
악마들은 성수에 지독히도 약했다. 아자젤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닿기만 해도 녹아내렸으며, 성수 근처에선 제대로 능력도 발휘해 내지 못한다.
특히 성수가 흐르는 대신전에서는 더욱. 신전에서는 고양이를 이용해 개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기도 어려울 텐데 설마 신전의 모든 문을 열어보느라 늦는 걸까.
마리크 주교는 조금 더 에반젤린을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이 눈앞에 놓여 있는 제물이 에반젤린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브리엘 경의 부정을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니 우선 희생제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실은 재판정에서 가리면 될 일이지요.”
사실 여태까지의 발언들도 제단 위가 아닌 재판정에서나 다룰 법한 내용이었으나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마리크 주교의 말에는 재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아 님.”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를 불렀다. 테네브레이는 상석에서 내려와 제단으로 향했다.
일찍이 예행연습을 했었으나 역시 실전의 긴장감은 조금 달랐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건만 제단 위에 오르자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 때문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태양이 바로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감이 들었다.
“잔을 받으세요.”
테네브레이는 무릎을 꿇고 사제가 건네준 잔을 받들었다. 빈 잔을 치켜들고 있자 성수로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잔을 가져와 천천히 전부 마셨다. 전부 비운 잔은 다시 사제의 손에 들려진다. 성수를 머금는 이유는 기사들이 치루는 세례식과도 같았다. 왕의 역을 맡은 자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는 조치였다.
그다음으론 검을 하사받을 차례였다.
왕이 레아를 처단했던 기록에서 따와 희생제에서는 제물에게 서임을 하듯 검을 어깨와 머리에 가져다 댔다.
테네브레이가 사제에게 검을 받고 나자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에게 속삭였다.
“검에 성수를 뿌려두었답니다. 살갗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내릴 겁니다.”
마리크 주교가 한발 뒤로 물러나고, 테네브레이는 검을 잡아들고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목덜미에 겨누었다.
혈육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 몇 번째더라. 황제도 황좌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오른 후에도 혈육을 죽여나갔던 걸 보면, 어쩌면 몸에 새겨진 문양처럼 황족들은 제 살을 파먹는 행위를 반복해대는 걸지도 모른다.
테네브레이는 심호흡을 한 후 칼을 겨누었다. 퍼렇게 선 날이 당장이라도 가브리엘의 목을 칠 듯이 떨렸다.
그저 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테네브레이는 살짝 힘을 주었다. 살이 베여 옷감에 피가 묻어나왔으나 가브리엘은 아프지도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테네브레이였다. 주교님의 말과는 달리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예레미아 님?”
테네브레이가 의식을 계속하지 않고 그대로 굳자 사제가 테네브레이를 불렀다.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를 한번 흘끔거렸다.
면사포로 가려져 마리크 주교의 표정을 읽어내릴 수 없기에 테네브레이는 멋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실망하고 계셔. 어떻게 하지.’
손이 잘게 떨렸다. 흔들림은 잡고 있는 검에까지 이어져 검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안 돼. 이러다 주교님도 날 버리실 거야.’
테네브레이는 초조해졌다.
머리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귓가에 이명이 들렸다. 환청이 말했다.
“테네브레이, 넌 쓸모없구나.”
그건 황제가 했던 말이었나? 아니면 아버지가? 아니면 마리크 주교님이 방금 꺼낸 말이실까? 마리크 주교가 테네브레이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에 테네브레이는 벼랑 끝에 몰린 듯 심장이 덜컹했다. 한계를 모르고 몸집을 부풀린 강박은 이제 실현되지 않을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상상 속에서 주교님은 테네브레이를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가두었다. 그 곁에 아자젤이 테네브레이를 가만 지켜만 보고 있다.
굳이 감옥인 이유는 그것이 테네브레이가 잘 아는 훈육법이었기 때문이다. 성수를 부드럽게 발라주며 상처를 치료해주던 손길에 채찍이 들리는 모습이 선연했다.
주교님은 모질게 매질하고 나서는 테네브레이를 황궁에 버려두고 다시 찾지를 않았다. 테네브레이를 대신해 예레미아가, 오라토리오가, 가브리엘이 황위에 올랐다.
테네브레이는 거대한 황좌의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그건 안돼. 그렇게는 안 된다.
다행히 테네브레이에겐 아직 만회할 기회가 있다. 그렇지?
마리크 주교의 말은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했다. 테네브레이가 검을 놓지 않은 채 사제에게 다가갔다. 몸이 휘청였다. 검이 질질 끌리며 바닥을 긁었다.
사제가 흠칫 몸을 떨었다. 테네브레이는 사제의 손에서 성수를 강탈하듯 뺐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브리엘에게 성수를 확 끼얹었다.
“예레미아 황녀님!”
사제가 돌발행동에 놀라 테네브레이를 불렀으나 그녀의 귀에 바로 꽂히지 않았다. 제 이름도 아닌 걸 불러봤자 제정신이 돌아올 리 없었다.
가브리엘에게 검을 박아넣은 것이 아니라 성수를 뿌린 것은 마리크 주교의 말만이 머릿속에 남아 맴돌기 때문이다.
“검에 성수를 뿌려두었답니다. 살갗에 닿으면 피부가 녹아내릴 겁니다.”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의 말을 되읊었다. 제 목소리의 위로 주교님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겹쳐졌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지. 이번엔 아예 성수를 뿌렸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왜, 왜 녹아내리질 않지?
그럼 다시 한번 해보는 거다. 이젠 아예 검을 박아넣는 거다. 테네브레이가 성수를 검에 뿌리려 들었을 때였다.
“예레미아 님.”
마리크 주교가 부르고 나서야 테네브레이가 반응했다. 마리크 주교는 한 손으론 어깨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검을 빼앗았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사제가 검을 받아 냉큼 뒤로 물러갔다.
마리크 주교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조금 이성을 되찾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타이르는 목소리가 차가웠다. 테네브레이는 오히려 물이 뿌려진 게 저 자신인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혼란에 빠진 테네브레이를 마리크 주교가 다독였다.
테네브레이는 손아귀에 넣고 굴리기 적당했으나 이렇듯 단점이 존재했다. 마구 조각난 것을 제 입맛대로 이어 붙였더니 조금의 충격만 받아도 다시 깨지기가 이토록 쉬웠다.
그러나 마리크 주교 역시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왜 성수가 반응하지를 않지?’
조금 전, 일부러 가브리엘의 목에 검을 대어 시험해 봤을 때만 하더라도, 날이 닿자마자 피부가 녹아내려 갔다. 가브리엘은 저주받은 몸이나 그 기반은 악마가 아니라 성수에는 녹지 않는다.
고로 성수에 반응하는 걸 보고 내용물이 바뀐 것임을 확신했다. 생각하는 것 마음으로도 애절한 마음이 들끓는, 그 영애님의 수완이겠지.
에반젤린은 사라카가 바라는 대로 ‘가브리엘’을 뒤바꿔준 것이다. 마리크 주교로서는 환영하는 일이었다. 오히려 가브리엘이 악마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모두 마리크 주교의 바람대로였다. 에반젤린 측에서 접근하기 쉽도록 신전이 아닌 황궁에 구속해두었고, 테네브레이를 써서 아자젤에게 가브리엘을 보여 주기까지 한 보람이 있었다.
에반젤린에게는 아자젤처럼 몸을 바꾸는 수족이 있으니, 가브리엘도 같은 방법을 써 구하리라 여겼다. 그리고 성수에 반응하는 피부를 보고 확신했다.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의 수족으로 대체되었다.
마리크 주교는 에반젤린이 제바람대로 가브리엘을 가짜로 바꿔치기 해 주었음에 안도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수가 들지 않다니? 혹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에반젤린이 성수에 무슨 수작이라도 해둔 걸까?
사라카는 성수를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더불어 에반젤린에게 빼앗겨버린 것을 처리할 차례였다.
마리크 주교는 테네브레이를 제단 아래로 이끌며 명령했다.
“테네브레이 님. 아자젤에게도 성수를 뿌리세요.”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의 입에서 ‘진짜’ 제 이름이 나오자 묘한 긴장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님이 직접 하명하신 일이다. 실수를 만회할 유일한 기회였다.
마리크 주교는 이어서 정신을 놓은 그녀가 실수하지 않도록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정확히 지시했다. 테네브레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다섯 걸음을 걸어간 후, 발이 걸려 넘어진 것처럼….
테네브레이는 마리크 주교가 속삭인 대로 제 손에 들린 성수를 모조리 ‘아자젤’을 향해 뿌렸다.
예레미아는 테네브레이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부축하려 움직였다가 제게 쏟아지는 물을 황급히 피했다.
거리가 가까워 미처 전부 피해내지는 못해 손을 뻗어 막을 수밖에 없었다. 성수가 닿자마자 살이 끓는 소리와 함께 예레미아의 피부가 녹아 타들어 갔다.
“윽….”
이를 악물었으나 고통 어린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예레미아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며 손을 뒤로 숨겼다. 다행히 소맷단이 긴 덕분에 주변인들은 예레미아의 살이 녹아내렸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아스타로트 경?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잠시 놀라서 그만….”
바로 옆의 사제가 화들짝 놀라며 예레미아를 살폈다. 또 한 번 갑자기 성수를 냅다 뿌리는 테네브레이의 기행에 정신이 팔린 데다가 손을 일찍 감추어서 성수를 맞은 예레미아의 손이 녹았다는 건 인식하지도 못한 듯 보였다.
사제가 지참하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어 예레미아에게 물기를 닦으라며 전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예레미아는 손수건을 받아들기만 했다. 손에 닿는 순간 손수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 게 뻔했다.
“아무래도 황녀님께서 피로하신 모양이군요.”
예레미아가 제게서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테네브레이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가만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마리크 주교가 태엽을 돌리며 해주었던 명령에 실패했으니 단단히 고장이 난 것이다.
“이래서 오라토리오 님께서 제대에 오르셔야 했는데.”
테네브레이는 심지어 오라토리오와 직접 비교당하는데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맹하니 굴었다. 가만히 멈춰선 테네브레이에게 사제가 빈 성수 병을 뺏어 드는데도 막아서지 않았다.
테네브레이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결국, 최후의 기회마저 망쳤으니 주교님이 당장 저를 버려도 변명할 말이 없었다.
넋을 놓아버린 테네브레이를 예레미아가 챙겼다.
“다시 자리로 가시죠.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럴게.”
테네브레이는 예레미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제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순종적으로 대답하는 모습은 꼭 예전의, 목에 흑색의 목걸이를 두르던 시절의 테네브레이 같았다. 테네브레이의 손에 아직 물기가 축축해 예레미아는 사제가 챙겨 준 손수건으로 테네브레이의 손을 닦아주었다.
저를 다치게 한 것이 테네브레이인데, 정작 동정심이 들다니 자신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수가 닿자 다시 피부가 따끔거렸으나 지켜보는 사람이 없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일 아래의 눈은 계속 ‘아자젤’을 쫓고 있었다. 아자젤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손이 녹아내리던 순간을 목격한 마리크 주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자젤을 가지고 시험해 본바, 성수가 빼돌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네요. 성수가 바뀐 것이 아닌데.”
마리크 주교는 여상스럽게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성수가 물방울 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이 매웠다. 성수가 끼얹어진 가브리엘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성수로 온몸을 적시고 있으니 제물이 아니라 세례라도 받은 줄 알 것이다.
“그럼 왜 통하지 않지?”
가브리엘은 아끼는 에반젤린이 그를 구해냈을 테니, 이곳에 있는 것은 악마여야 했다.
마리크 주교의 물음에 가브리엘이 눈을 내리깔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가린 천을 벗는 순간부터 가브리엘에게 강제로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가브리엘은 원래 단정하다 못해 결벽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물기에 푹 젖은 채 묶여있으니 어쩐지 형용할 수 없는 음심이 드는 것이다.
물에 푹 젖어 머리카락부터 착 가라앉아 있으나 물에 빠진 생쥐 꼴은커녕, 오히려 값비싼 보석을 갈아내어서 뿌려놓기라도 한 듯이 물이 빛에 반사되며 반짝거렸다.
가브리엘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 끝에 맺힌 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대로 미끄러져서는 턱 끝에서 추락했다.
열이 올라 붉게 물든 눈가가 더해지니, 마치 소리 없이 눈물이라도 뚝뚝 흘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가련하고 처연하게 짝이 없어 어디선가 앓는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뺨을 붙잡아 눈물을 쓸어 닦아내 주고 싶었다. 이 역시도 누군가의 취향에는 들어맞을 장면이다.
마리크 주교의 혼란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가브리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지 않았음에도 제가 이단으로 몰리고 에반젤린이 악마라고 매도당할 때마저도 굳게 침묵을 지키던 입이었다.
“저는 언제나 저였습니다. 당신과는 다르게요.”
그 순간 마리크 주교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건 어떻게….’
당황하는 것도 잠시였다.
‘아, 그래. 아자젤이 가짜였고 에반젤린과 내통했을 테니 내 신분이 넘어갔겠지.’
머리가 띵했다. 사라카는 뒤통수를 맞은 듯이 얼얼해졌다. 아자젤 앞에서 하녀인 사라카로 분장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자신이 알려 준 것과 진배없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밖으로 꺼내어져 지적받으니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나와 다르다고?’
그렇게 말한 상대가 가브리엘으로 변장한 것이 분명한 ‘악마’이기에 더욱 모멸감이 들었다. 분노로 몸이 떨려왔다.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나 그녀를 둘러싼 흉흉한 분위기만으로도 얼마나 화가 치밀어올랐는지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라카는 속으로 ‘가브리엘’이 한 말을 되 읊었다. 감히, 나와 저 자신을 비교했나? 신의 권능조차 하사받지 못한 덜떨어진 존재가 감히, 나를?
사라카는 알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분명 저 자신을 망각하고 마리크 주교의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사라카를 비아냥대는 것이 분명했다.
그야 마리크 주교가 아닌 사라카는 고작 이단의 자식일 뿐이니까.
감히, 감히! 사라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통의 역치를 모르기에 입술의 살점에 그대로 피가 고였다.
사라카가 이토록 분노한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언제였더라, 그래. 마리크 주교님께서 닷새 동안 사라카를 찾아오지 않는 바람에 배를 곪다가 팔로 기며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갔을 때였다.
굳게 걸어 잠긴 지하실의 문을 주먹으로 내려치려다가 밖에서 들려오는 동화의 낭독을 들었지. 마리크 주교님께서는 그녀가 아끼는 아이를 무릎에 얹고 동화를 읽어주고 있었다.
분명 마리크 주교님께서 더욱 신경 쓰고 들여다보는 것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사라카는 가브리엘을 노려보았다. 당장 저 목을 이미 끊어놓은 손목과 발목처럼 단숨에 끊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두 팔과 두 다리로는 부족했나 보지? 남은 거라곤 새하얀 목뿐인데,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
사라카의 시선이 가브리엘의 발목으로 향했다.
‘뭐지…?’
순간 사라카가 당혹스러워했다. 예상과는 달리 가브리엘의 발목은 비교적 상태가 말끔했다. 그래, 누군가에게 치료라도 받는 것처럼.
에반젤린이 인형처럼 가져다 둔 악마 같은 존재가 그 사이에 치료했을 리는 없다. 악마가 몸을 수복하기 위해선 필시 인간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라카가 전해 듣기론 지하 감옥에서 사라지거나 죽어 나간 인간은 없었다.
성수에 맞았는데도 이상이 없고, 조금 전에 났던 흉터는 온데간데없다. 마치 조금 전 보았던 게 환각이라는 마냥.
아, 그렇군. 무언가 감이 잡혔다.
사라카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짧은 순간 동안 수만 가지의 생각이 들고 마침내 호흡이 터져 나오는 순간 깨달음이 밀어닥쳤다.
과연 그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가브리엘은 계속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니 성수가 통할 리가 있나!
사라카는 정신을 놓은 듯 폭소하기 시작했다. 마리크 주교는 이렇게 천박하게 웃지 않으니 다른 사람이 봤을 때 머리가 돌아 버렸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괜찮다. 한 번 정도는 괜찮다. 이 정도는 무마할 수 있으니까.
“아하하하! 당신, 진짜로군요? 진짜 가브리엘 기사단장이야.”
평생 고고하던 주교가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자 사제들과 관객들이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사라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숨이 넘어갈 듯 웃어 재꼈다. 숨이 헐떡일 때까지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웃음이 멈췄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완벽하던 무대가 틀어졌다. 등장하기로 한 배우가 배역을 뒤집어쓰지 않았다. 사라카가 준비했던 각본은 한순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사라카가 마리크 주교로 발돋움하기 위해 완벽했어야 할 무대가 망가져 버렸다.
가쁜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사라카가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한 방 먹었으니 되돌려주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로한슨 영애가 생각보다 당신에 대한 애착이 없는 모양이군요. 내가 진짜 칼을 그 심장에 박아넣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잔뜩 난도질하려 한 말에도 가브리엘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그 말이 무엇에 대한 부정일지는 알 수 없었다.
사라카가 그 말을 들은 직후였다. 사제 중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와 사라카에게 고했다.
“주교님!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태양이 사라져?”
이 한낮에? 사라카가 바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전경이 새까맸다. 정말로 태양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상식적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원래 사라카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상식 밖의 것들이다.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사라카가 묻자 가브리엘은 눈매를 휘었다. 생글거리는 눈웃음이 장난을 치듯이 자못 천진했다.
“글쎄요. 신께서 벌이라도 내리러 오시나 보군요.”
비록 그 신은 가브리엘의 신일 테지만.
“신이 내린 벌이라고?”
사라카가 입술을 비죽였다.
“가브리엘 경께서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
“신의 벌은 바로 이 마리크만이 집행할 수 있답니다.”
사라카가 가브리엘을 계도하듯 설명했다.
가브리엘은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신은 직접 벌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여 징벌을 집행하는 자가 바로 ‘마리크 주교’가 아닌가. 그러니 신은 마리크 주교를 단죄할 수 없다. 마리크는 그 누구보다 신실하고 깨끗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라카 자신도 가브리엘이 말하는 ‘신’이 자신이 모시는 태양이 아님을 잘 알았다. 분명 그가 경외하는 유일한 것을 말하는 거겠지. 에반젤린 로한슨을 두고 신이라 칭하는 오만한 작태가 같잖았다.
사라카가 잠시 가브리엘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회장 안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말을 전한 사제가 지나치게 목청이 커, 그가 외친 말을 회장 안의 사람들까지 전부 들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래?”
누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창밖을 내다보고는 헛것을 본 양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러나 눈을 몇 번이고 비비고 다시 봐도 정경은 변하지 않았다.
창밖은 누가 먹물을 끼얹은 듯 온전한 어둠뿐이었다. 눈으로 보고도 맡겨지지 않아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 아래로 이상한 빛무리가 보였다.
“밑에 저건 뭐지?”
마치 불이라도 난 듯이 바닥에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해답은 뒤이어 회장 안으로 뛰어든 사제의 입으로 설명되었다.
“주교님! 어둠을 틈타 사람들이 신전으로 침입했습니다!”
“별채에, 별채에 불이 났습니다!”
“마리크 주교님, 사람들이 죽은 자식과 가족을 돌려 달라고 아우성이에요!”
사라카가 팍 인상을 구겼다. 다행히 베일 때문에 표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사람들이 들어왔다고요? 어떻게?”
“누, 누군가 문을 열어준 것 같습니다….”
주교의 차가운 분노를 한몸에 받은 사제가 움츠러들었다. 사라카는 순간 제가 발을 삐끗했음을 알고 심호흡을 했다. 가브리엘에게 자신이 사라카임을 지적당한 이후 점점 이성이 닳고 있었다.
진정하자.
마리크 주교답게 굴어.
사실 사제에게 굳이 범인을 물을 필요도 없다. 굳건히 걸어 잠긴 신전의 문을 열어 재낄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이 역시 에반젤린이 저지른 수작이 분명했다. 사라카가 분노를 담아 가브리엘을 노려보았다.
“나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브리엘이 사라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싱긋 휘는 눈매가 청명했다.
묻는 목소리는 상대를 위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사라카는 저것이 한때 태양을 짊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다.
당장이라도 심장을 베고 싶었으나 사라카는 가브리엘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저주받은 자들은 삶으로서 죄를 속죄해야 했다.
사라카는 마리크 주교님께 그리 배웠다. 더군다나 저것은 마리크 주교님께서 살린 목숨이기에 사라카가 직접 숨을 거둘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보지요.”
우선 소란을 수습해야 했다. 사제들에게 가브리엘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언질 준 뒤 사라카는 밖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이어 사제들과 함께 귀족들이 머뭇대며 뒤로 달라붙었다. 태양이 사라져 짙게 깔린 어둠 때문인지 눈치를 보다가 제단 앞에 놓인 초를 슬쩍 챙기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굳게 닫힌 회장의 문을 열자 사람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쌀쌀한 바람에 초가 꺼질 듯이 일렁였다. 조금 전까지의 훈기는 어디 갔냐는 듯 사라져 몸이 오싹하며 쌀쌀했다.
“진짜 밤이 왔잖아…?”
그러나 밤인데도 하늘의 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것은 무수한 별들뿐이었다. 신전의 꼭대기에 떠 있어야 할 태양은 여전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히 달이 태양을 가리고 있기라도 한 걸까? 태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새하얀 고리뿐이다.
“저기 첨탑 위에 누가 있다!”
“대체 누가 있다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여럿이서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으니 의아해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본 자들 역시 말을 잃었다. 그건 사라카도 마찬가지였다.
시야 끝으로 순백의 드레스가 나부꼈다. 온통 새하얀 것이라 처음에는 첨탑에 조각된 천상의 조각으로만 보였다. 그것도 무수한 시간을 들여 끝내 완성해 내고야 만 역작과도 같은.
바람에 머리칼과 드레스가 산들거리고 나서야 사람임을 인지해 냈다. 층층으로 쌓여 한 올 한 올 이어 만든 드레스는 굽이칠 때마다 반짝이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건 달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별을 응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소녀의 뒤로 후광이 비쳤다. 사라카는 그 모습을 보며, 언젠가 신전의 벽면에 붙어 있던 기괴한 그림을 떠올렸다.
짐 노페디라는 화가가 그린 작품에는 시체가 마치 천사처럼 묘사되어 있다. 불타 죽은 시신의 몸에 재로 만들어진 날개가 돋아 있고, 시신의 머리 뒤로는 성스럽게 일렁이는 광환이 떠 있었다. 그 후광이 바로 주술진의 모양이었던가. 꼭 그 그림을 밖으로 끄집어낸 장면 같았다.
후광을 두르고 있는 순백의 소녀는 마치 지상에 내린 하늘의 존재처럼 보였다. 살아있는 존재보다는 조각이나 명화에 더욱 가까운 형상이었다.
정도를 모르는 과한 미색은 인간성을 상실해,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 미색에 감읍한 자들은 소녀를 천사라고 부를 것이고 붉은 눈에 거북함을 느낀 자들은 마귀라고 칭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그 누구도 저것을 감히 인간이라 폄하할 수 없었다. 저것을 끌어내린다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도 몰랐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첨탑 끝에 서 있는 소녀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아찔했다. 소녀가 떨어져 몸이 박살 난다면 그 유체를 갖기 위해 무수한 손이 몰려들 것이다.
잔악한 손길은 살점을 훔치고, 옷가지를 뜯어 챙길 것이다. 바닥에 스며든 핏방울 하나까지 모조리 핥아져 사라지겠지. 그건 축복일까, 아니면 역시 에반젤린이 야기한 재앙일까.
사라카에게 있어서 소녀의 추락은 축복이었다. 사라카는 그사이에 추잡하게 끼어들어 가장 큰 조각을 전리품으로 쟁취해 낼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거리가 먼데도 속눈썹 한 올까지 기묘하게 시선에 박혀왔다. 붉은 눈은 보석보다는 꼭 살갗을 벗겨내고 그 아래 자리하는 핏덩이 같다.
붉은 눈이 사라카를 내려다보았다. 이 역시 거리가 멂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라카는 그만 탄식했다. 기왕이면, 그래. 만약 사라카가 소녀의 일부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건 저 붉은 눈이 좋겠다.
“에반젤린 로한슨….”
꿀 같은 이름을 입에 담자 온몸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녀가 선택한 희생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