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67)
가브리엘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나도 곧 내릴 차례였다. 푸딩은 신전이 가까워질수록 기력이 빠지는지 축 늘어져 이젠 액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대로 유리병에 넣으면 그대로 담길 것 같은데.
“로한슨 영애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늦어서 죄송하다며 굽실거리며 고개를 조아려오기에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전에 칸나와 헤나를 마중 나올 때 한번 오고, 처음 오는 건가? 내 처지가 달라져서인지 신전이 이전보다 훨씬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신전 앞에 모인 무수한 인파 탓일 수도 있고. 신전은 기도하는 사람들, 무어라 속닥이는 사람들로 아우성이었다.
내가 내리자마자 마녀나 악마가 나타났다면서 욕설이 쏟아지고 혼란이 일 것 같아 푸딩에게 내 존재감을 살짝 지워 달라 부탁했다.
안 그래도 정신없을 텐데 무리시켜서 미안하네. 마차에서 내리려고 푸딩을 안아 드는데 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팔을 들어 올리자 몸이 그대로 쭉 길어졌다. …고양이는 원래 늘어나는 건가?
기력 없는 푸딩을 안아 들고 조용히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신전 앞에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정작 내가 걷는 길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기사들이 귀족들이 다니는 길인 마차가 멈추는 곳부터 신전까지는 길이 뻥 뚫리도록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딩 덕에 투명 인간처럼 남들 눈에 띄지 않고 한산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가브리엘처럼 무슨 기사단장이라도 되는 건가? 다른 기사들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기사가 줄곧 지켜보고 있던 회중시계를 덮고 품에 도로 챙기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됐으니 문을 닫게.”
“네, 알겠습니다! 문을 닫아라!”
“문을 닫아!”
그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 하나를 닫기 위해 기사들이 절도 있게 일제히 움직이는 모습은 나름의 장관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담을 넘을 뻔했네. 마부가 괜히 사과를 했던 게 아니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발을 재촉하는데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입구의 바로 앞이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발톱을 세운 푸딩을 진정시켰다. 존재감을 지웠으니 날 보고 튀어나온 사람은 아닐 거다.
눈을 찌푸려 자세히 보니 닫히는 문에 사람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기사들은 사람들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막는다고 보기엔 손속이 거칠었다.
사람들을 상대로 칼을 겨누고 위협하는 기사마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어떻게 통제된 건가 싶을 정도의 혼란이었다. 그러다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 떠밀어져 앞으로 튕겨 나왔다.
그는 헤진 천을 기워입고, 제대로 식사를 챙기지 못했는지 마른 몸에 얼굴에도 살이 없어 볼우물이 파여 있는 남자였다.
굉장히 빈곤해 보이는 남자는 곧장 활짝 열린 신전의 문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바로 기사에게 저지당했다.
“뭐 하는 거야!”
“제, 제발… 성수를, 성수를 조금만…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나눠주세요! 제 아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자가 기사의 바짓단을 붙잡고 매달린 채 애원했다. 깡말라 기력도 없는지 목소리마저 가늘었다. 남자는 떨리는 투로 기사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사연이었으나 기사에겐 아니었나 보다. 기사는 망설이지도 않고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러 남자의 등을 베어냈다.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눈앞에서 본 광경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기사는 아파하는 남자를 발로 차 떠밀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남자가 내 쪽으로 굴러떨어지기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다행히 남자가 갑자기 멈췄음에도 상황이 워낙에 혼잡하다 보니 아무도 이상하다 느끼지는 못한 듯싶었다.
“으, 윽….”
등을 크게 베인 것인지 옷이 축축했다. 받쳐 주는 손에서 피가 묻어났다. 그냥 말로 하면 되는 걸 사람을 베어? 내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 기사에게 무어라 화를 내려고 하기도 전에, 다른 데서 핀잔이 들려왔다.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상당히 젊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에게 달려와 그가 무사한지 확인한 후 기사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기세가 그리 위협적이진 않아 그런지 기사가 되려 훈계하듯 타일렀다.
“사제님. 배우지 못한 자에게 예의를 알려 주는 것뿐이니 사제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요? 그럼 주교님께선 신경 쓰실만하시겠네요.”
사제의 말에 기사가 낭패 봤다는 낯을 해댔다. 주교? 설마 마리크 주교를 말하는 건가? 마리크 주교와 연이 있는 사제라고? 나는 자세히 사제를 살폈으나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인상을 팍 구긴 기사는 곧이어 사제에게 비아냥댔다.
“하루트 사제님은 별일 아닌 일을 크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하기야, 어릴 적부터 마리크 주교님이 애지중지 기르셨으니 말입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럼 아닙니까? 사제님은 모르시겠지만, 이는 마리크 주교님께서 명하신 겁니다.”
“주교님께서 사람들을 해치라 말씀하셨다고요?”
“하하, 무슨 소리 하시는 건가요? 제가 언제 사람을 해쳤나요? 멋대로 신전에 침입하려던 이단을 제지한 것뿐이죠.”
기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고, 사제는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묘한 눈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마리크 주교의 아래서 자랐다기엔 의외로 생각이 똑바로 박힌 사람 같은데….
가만히 둘의 실랑이를 들으며 품에서 성수를 꺼내 들었다.
성수를 챙겨오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다. 두 병을 꺼내 우선 한 병은 피를 흘려 정신을 잃어가는 남자의 입가에 대주었다.
환부에 직접 바르는 게 효과가 가장 좋겠지만, 이 상황에서 옷가지를 벗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성수 병을 전부 비울 즘에는 남자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끔뻑거린 남자가 당최 영문을 모르겠는지 혼란스러워하며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수를 보고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랐다.
“이건 혹시….”
“쉿. 우선 마시렴.”
우물쭈물하는 남자에게 명령조로 어깃장을 놓자 허겁지겁 병을 머금었다. 다행히 찢긴 넝마 사이로 보이는 등은 모조리 새살이 돋아나 있다. 언제 봐도 효능은 끝내주네. 이러니까 사람들이 태양신을 열렬히 믿지.
남은 병 하나도 남자에게 들려주자, 남자는 아주 소중한 보석을 받았다는 냥 꽉 쥐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혹시 깨질까 겁나는지 손아귀에는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
저런 반응을 보니 굳이 병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제 몸으로 직접 효능을 경험했으니 성수임을 잘 알 것이다. 두 번째로 건넨 성수는 아프다는 아내의 몫이었다.
“저…, 영애님은 누구시길래 절 도와주십니까…?”
남자가 머뭇대며 물어왔다.
“그리고… 왜, 어째서 아무도 당신을 보지 못하는 거죠?”
남자는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당혹스러워했다. 거기다 자신이 소란을 야기한 것 치고 아무도 시선을 두지 않으니 이상하겠지. 주변 사람들은 나와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양 굴고 있었다.
“글쎄. 악마라도 되려나?”
무어라 답할까 고민하다 웃으며 대꾸했다. 남자는 의외로 내 답을 듣고도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하긴 눈에 뵈는 게 있다면 칼 든 성기사가 지키는 문에 다이빙 하려 들지 않았겠지.
“성수를 준 대가로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어?”
“제게, 뭘 원하시나요…?”
목소리는 떨렸으나 나를 바라보는 눈엔 결의가 가득 차 있었다.
“…제가 할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제 목숨 빼고는 다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세였다. 바로 직전에 칼부림이 나서일까, 나는 조금 전보다 기세가 한풀 꺾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방금처럼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면 돼. 그러다 문이 열리면 저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면 되는 것뿐이야.”
“문이… 열린다고요?”
“그래.”
정확히는 열게 만들 거지만.
“나는 희생제가 아주 성대하게 망쳐졌으면 좋겠거든.”
마리크 주교가 다시는 내 사람들을 해칠 수 없도록 말이다.
남자에게 자세히 어떻게 해야 하면 되는지 대강 설명해 주었다. 남자처럼 신전에 불만 있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시간을 잘 재다가 희생제가 막 시작될 즈음 목소리를 높여 달라고. 그리고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와 마음껏 난동을 부려주면 된다고 말이다.
내가 앞으로 벌일 일에는 보는 눈이 아주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 부탁한 것이었다. 더불어 소문을 더해 줄 입이 많으면 더욱 좋고.
원래는 리코가 몸을 나눈 후 사람들의 목소리를 훔쳐 선동할 생각이었으나, 지금 보니 남자처럼 신전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꽤 돼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잊지 않기 위함인지 ‘희생제가 시작될 때’를 연신 되뇌었다. 다시 눈먼 칼에 베일 수도 있는데 겁도 나지 않는 걸까.
남자와 약속을 끝마치자 익숙한 쥐들이 밖으로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몇 사람들이 발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감촉에 몸을 비틀며 질색해댔다. 워낙 재빠른 탓에 육안으로 쥐를 본 것은 나뿐이었다.
“리코?”
“영애님!”
리코 역시 처음에 날 알아보지 못했다가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 내 쪽으로 달려왔다.
리코는 자신이 가브리엘과 무사히 자리를 바꾸었으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반절은 젤리를 찾기 위해 흩어져 천장을 뛰어다니고 바닥을 기어 신전을 뒤지고 있다고 했다.
나머지 일부는 내가 부탁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나는 리코에게 남자가 우릴 도와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쥐, 쥐가, 말을….”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악마라고 소개할 때는 놀라지 않더니 쥐가 말하는 건 신기하나?
쥐 한 마리를 남자의 손에 쥐여주고 나는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몇 마리의 쥐가 나와 함께 도로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문이 곧바로 닫혔다.
“푸딩, 어때 찾을 수 있겠어?”
밖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푸딩은 계속 젤리 탐색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확이 없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신의 흔적이 곳곳에 뿌려져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했다. 푸딩보다 가브리엘의 대역으로 감옥에 내내 갇혀 있던 리코의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으니 말 다 했지.
푸딩의 능력으로 찾지 못한다면 직접 발로 뛸 수밖에 없지.
마리크 주교는 날 제물로 세울 생각도 아니고, 희생제가 시작될 때까지도 시간이 아직 남아있으니 괜찮았다. 젤리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우선 제일 의심 가는 건 지하인가? 태양신에게 험한 꼴은 보일 수 없다는 이유로 감옥 대부분은 지하에 있으니까. 리코가 다른 쥐들과 통신하듯 귀를 쫑긋거리더니 길 안내를 자처했다.
“이쪽이에요!”
리코를 따라 지하 감옥으로 들어섰다. 이게 신전의 지하라고? 화려하고 새하얀 지상과는 달리, 지하로 향하는 통로는 굉장히 어둡고 눅눅했다.
환기조차 되지 않아 비릿한 쇠 냄새와 출처를 모를 역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횃불을 들고 안을 비춰보자 군데군데 말라 지워지지 않는 붉은 자국에 토악질이 나왔다.
비어 있는 방도 여럿이나, 구류되어 있는 자들도 많았다. 혹시나 해서 살펴봤으나 젤리는 없었다.
시간을 들여 지하의 감옥을 전부 돌았는데도 성과는 없었다. 그저 속만 거북해졌을 뿐이었다. 지하 감옥이 아니라고? 그럼 젤리는 어디 있지?
가뜩이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억지로 굴려댔다. 지하는 없었다. 지하는….
분명 신의 눈을 피하고자 지하를 쓰는 거라고 했지. 하지만 젤리는… 젤리는 사람이 아니니 굳이 신의 눈을 피해 감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정반대인가? 지하가 아니라 가장 높은 곳? 태양신과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서 삿된 것을 단죄하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어 한다면?
마리크 주교라면 오히려 신에게 보란 듯이 제 업적을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남들의 눈은 피해야 하니 훤히 드러난 곳은 안된다. 그럼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
신전에서 가장 높은, 해와 가까운 곳은 바로 종탑이었다.
종탑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는데 품 안의 푸딩이 끙끙대며 앓기 시작했다. 너무 정신력을 많이 소모한 탓인가? 계속해서 눈을 늘려 사람들을 살피고, 젤리를 찾으며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수까지 쓰고 있었으니 말이다.
“푸딩 괜찮아. 잠깐 쉬고 있어.”
등을 쓰다듬으며 푸딩에게 휴식을 권했다. 앞으로 해 줄 일이 있으니 지금은 무리해선 안 됐다. 푸딩이 내 말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눈을 감았다.
“가자, 리코.”
푸딩의 역은 리코가 일부를 대신 해 주었다. 리코는 여럿으로 나뉜 쥐의 몸으로 주변을 살피고 인적이 없는 길로 나를 안내했다. 그러나 종탑에 가까워지자, 그 앞을 지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영애님, 여기에 젤리 씨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갇혀 있던 곳보다 감시가 치밀하거든요.”
리코의 말에 희망이 조금 솟아났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저 감시망을 어떻게 뚫고 지나가냐 이거다. 지금은 푸딩이 힘을 쓸 수 없어 내 모습을 숨길 수도 없는데…. 젤리를 구해 내는 게 목적이니 그냥 전부 제압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전부 처리하실 거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가 서늘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지어 나는 물론이고 리코 역시 영문을 모르겠는지 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에 밖에서 봤던 사제였기 때문이다. 이름이….
“로한슨 영애님이시죠? 처음 뵙습니다. 저는 하루트라고 합니다.”
그래, 하루트. 유일하게 쓰러진 남자를 걱정해 주다가 기사에게 면박을 받은 사람이라 유독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리크 주교와 연이 있는 것도 분명했고. 마리크 주교가 보낸 건가? 그를 경계하자 하루트는 제 양손을 쫙 뻗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쥐 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님께서는 마리크 주교의 사람이 아닌가요?”
거기다가 나와 리코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가까이 접근해 내다니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수상하기만 했다. 내가 경계를 풀지 않자 하루트는 품에서 성수를 꺼내 들었다.
“혹시 제 기척이 읽히지 않은 것 때문에 경계하시는 거라면, 제겐 특별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냥 이것 때문이거든요.”
“성수?”
하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애님의 애완동물들은 외람되지만 삿된 것들이 아닙니까? 성수는 삿된 것을 정화해 내기도 하지만 그들의 이목을 속이는 효능도 있거든요.”
하루트는 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리라 이야기했다. 하루트가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건 마리크 주교의 휘하이기 때문이겠지.
“저는 이래 봬도 꽤 신뢰받는 몸이라, 몸에 지닌 성수가 조금 많거든요. 아마 찾고 있는 것을 아직 못 찾고 헤매시는 것도 그 탓일 겁니다.”
그러니까…. 젤리를 성수가 가득한 곳에 가둬두어 여태 푸딩과 리코가 찾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푸딩은 젤리를 찾아다닐수록 피로해지는 거고? 이가 악물렸다.
“종탑에 성수를 보관해두는 창고라도 있나요?”
“원래는 아니지만…. 최근 들어 성수의 양이 부쩍 늘어, 종탑에 보관해두곤 합니다. 종탑에 오르시려는 거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움이 필요 없다면?”
하루트의 말에 경계하며 물었다. 마리크 주교와 끈이 있는 사제를 어떻게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그러자 하루트는 빼곡히 늘어선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종탑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영애님께서는 충분히 그들에게 손을 쓸 수 있을 테지만 곧 정오라서요.”
하루트는 너스레를 떨듯 덧붙였다.
“희생제가 시작될 때에는 종이 울려야 합니다. 열두 번이나 직접 종을 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제 도움을 받으시는 게 좋을걸요.”
하루트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 입구에서 쓰러진 남자를 보살필 때는 눈치 못 챘는데 하루트의 말투는 꽤 고압적이었다. 말투가 약간 마리크 주교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경계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자 하루트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무슨 실크같은 천이었다. 의아해하고 있으니 하루트가 설명했다.
“베일이에요.”
베일? 그 말을 듣는 순간 얼이 빠져 하루트를 바라보았다. 내 기억으로 베일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인데…. 그럼 이게 진짜 마리크 주교의 베일이라고?
“…마리크 주교의 것인가요?”
설마 아니지?
그러나 하루트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 맞단다. 무척 진지한 게 장난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제 옆에 베일 쓴 사람이 있으면 다들 주교님이라 생각하겠죠.”
“옷차림이 다르니 수상하게 여길 텐데요.”
내가 입고 있는 건 흰 드레스였다. 희생제 때는 전부 상복처럼 검은 의복을 차려입는다지 않았나?
“아마 베일에 정신이 팔려 괜찮을 겁니다. 신전 소속 중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오로지 마리크 주교님뿐이시거든요.”
그러고 보니 신전 사람들은 기사들까지 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다녔다. 베일을 쓴 건 정말 마리크 주교밖에 본적이 없네.
“사실 특권이나 다름없죠. 마리크 주교님의 베일을 화상 흉터를 가리기 위함인데, 보통은 얼굴에 상처가 난다면 곧바로 치료하거든요. 흉을 그대로 남겨봤자 축복을 거부한다느니, 저주받았다며 온갖 억측만 무성할 테니까요.”
하루트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이어 설명했다.
“하지만 주교님은 다릅니다. 주교님의 흉터는 불길에서 살아남으셨다는 증거이고, 이제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죠. 그러니 신전의 그 누구도 감히 마리크 주교님을 따라 베일을 두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설명을 끝낸 하루트가 슬쩍 종탑 앞에 빼곡하게 자리한 기사들을 흘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매부리코에 머리가 긴 남자 보이시나요? 저 기사는 마리크 주교님을 심하게 존경하거든요. 아스타로트 경이 주교님의 눈 밖에 난 지금을 기회라고 생각하니 상대가 마리크 주교님이라면 배를 까뒤집고 맞이할 거에요.”
그러니 내가 베일을 뒤집어쓰고 마리크 주교를 사칭하란 소리였다. 얘 마리크 주교의 사람 아니었어? 도와주겠다는 말이 그냥 한 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아주 단단히 도와줄 결심을 끝마쳤나 보다.
그런데 대체 마리크 주교의 베일은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종탑 앞에서 마주친 것도 그렇고, 애초에 날 만나러 온 건가? 미심쩍게 보고 있으니 하루트는 오히려 날 재촉했다.
“어서 받으세요.”
받지 말라며 거세게 도리질 치는 리코를 애써 무시한 채 베일을 건네받았다. 내게 베일을 넘긴 하루트의 시선이 내 품에 안긴 푸딩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고양이요. 잠시 두고 갈 순 없나요?”
리코가 경악했다.
“아니면 제게 잠시 주시던가요. 마리크 주교님은 고양이를 품에 안으시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흰 드레스부터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가만히 조용히 숨을 쉬는 푸딩을 쓰다듬다가 하루트를 바라보았다.
“사제님은 타인의 손에 자신의 심장을 들려줄 수 있나요?”
하루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거 봐. 자기도 못 할 거면서. 푸딩을 꽉 끌어안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의 애완동물을 하나 더 잡았다는 변명이면 충분하겠죠.”
하루트는 내가 푸딩을 두고 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리코는 하루트가 영 못마땅해 보였다. 쥐의 표정이 이렇게 다양한지는 처음 알았네.
아마 내가 의심했듯이 리코도 하루트를 수상쩍게 여긴 것 같았다. 하루트가 우릴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으니 경계하는 거겠지.
하지만 리코야, 혹시 함정이더래도 종탑에 젤리가 있을 확률이 높은데 어떻게 이 제안을 거부하겠어. 하루트가 자신한 것처럼, 지금은 그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수월하고 효과적이었다.
푸딩이 무리해선 안 되니 감시를 따돌리고 종탑을 오르기 위해선 약간의 무력을 써야 했다. 그럼 금방 소란이 날 테고 결국 몰려온 사람들을 또 제압해야 할 테지.
그렇게 계속 가다간 하루트 말대로 종을 울릴 인원도 남아나지 않을 거다. 종이 울리지 않으면 마리크 주교가 변고를 알아차릴 게 분명하니 결국 들키지 않으려면 내가 종을 울려야 하는 거다.
그럼 종탑에 발이 묶이느라 젤리를 구하러 갈 수 없겠지. 그러니 하루트가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일단 잡아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하루트가 준 베일을 뒤집어썼다. 베일을 쓴 마리크 주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데서 짐작은 했으나 시야가 침침해진 게 앞이 제대로 분간 가지 않았다.
그나마 이 정도로 보이는 것도 감지덕지했다. 마리크 주교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불편한 베일을 매일같이 쓰고 다닌 거야?
“부축 필요하세요?”
“그럴 리가요.”
하루트가 예의상 묻는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럼 갑시다. 제가 말할 테니 영애님께서는 조용히 계시기만 하면 되세요.”
하루트가 앞장섰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리코는 하루트의 발 옆에서 눈치를 보며 쫓아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중 가장 화려한 의장을 갖춰 입은 기사가 먼저 하루트를 알아보았다.
“하루트 사제?”
“수고하시네요, 나키르 경.”
하루트가 웃는 낯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예의상 인사해 준다는 티가 역력해 나키르라는 기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사제님이 갑자기 무슨 일로…?”
“아, 제가 볼일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루트가 뒤로 눈길을 주자 나키르의 눈도 따라서 내 쪽을 향했다. 베일을 본 나키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리크 주교님? 어이쿠, 주교님도 함께 오셨군요.”
나키르가 대표 격으로 먼저 소란을 떨며 인사하자 다른 기사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에 의문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곧 희생제가 시작될 건데 주교님께서 왜….”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하루트가 재빨리 답을 했다.
“종탑에 가둬놓은 것들이 필요해서요.”
“아, 그러시군요. 아니, 직접 들르실 필요 없이 제게 귀띔만 해두시지.”
나키르는 대강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가 실없이 웃으며 내게 아부를 떨었다. 이번에도 하루트가 답을 가로챘다.
“귀한 포로이니 직접 다루시는 게 맞지요.”
“역시 주교님께서는 소명의식이 남다르십니다.”
나키르가 내게 말을 걸고, 정작 답하는 건 하루트인 기묘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키르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하루트를 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도 마리크 주교의 앞에서 대놓고 실랑이할 생각은 없는지 하루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마리크 주교가 아니란 걸 들킬까 곤란하니 슬슬 관심을 꺼주면 좋을 텐데 나키르는 기어이 마리크 주교와 말이 섞고 싶었나 보다. 무언가 화젯거리를 찾다가 내가 안고 있는 푸딩에 시선이 고정됐다.
“주교님 품에 있는 고양이는 뭔가요?”
하루트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나키르는 처음에 대화할만한 주제를 찾은 듯 좋아하다가 곧바로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교님?’하고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종탑에 있는 것들과 비슷한 존재입니다. 함께 가둬두려고 데려온 거고요.”
하루트가 뒤늦게 변명했으나 나키르는 이미 수상쩍음을 감지한 것 같았다. 날 보는 온도가 달라졌다. 분명히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루트가 작게 꾸벅이며 조급하게 말했다. 사달이 나기 전에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나키르가 그 앞을 막아섰다.
“나키르 경? 뭐하십니까?”
하루트가 물었으나 나키르의 시선은 계속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키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날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말입니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게 이상하네요.”
싹 텄던 의심이 하루트의 조급한 행동을 보고 확신으로 변했나 보다.
“마리크 주교님께서 꼭두각시도 아닌데 하루트 사제가 대변인이라도 된 양 건방지게 말을 채가지를 않나, 거기다 희생제인데 흰 드레스를 입고 있으시질 않나. 보면 볼수록 수상해서 말입니다.”
나키르는 내게 성큼성큼 걸어와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나키르가 날 내려다보며 물었다.
“실례되지만 혹시 베일 아래를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까의 아부는 어디 갔는지 몹시 흉흉한 목소리였다. 나키르와 내 사이에 하루트가 끼어들며 나키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키르 경. 주교님께 무슨 무례입니까?”
만약 상대가 진짜 마리크 주교였다면 베일을 들치는 건 둘도 없는 무례한 일일 것이다. 굳이 저런 말을 꺼낸다는 건 내가 마리크 주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례? 그건 마리크 주교님을 팔아먹는 하루트 사제님께 더욱 어울리는 말이겠지요.”
나키르가 비아냥댔다. 상황이 복잡해졌네. 마리크 주교의 숭배자라면, 베일을 보고 쉽게 속을 테지만 역으로 마리크 주교에 관해서 훨씬 예민하게 나올 거란 사실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대로 나키르를 제압하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리코를 불렀다. 나키르와 하루트는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으나 리코라면 충분히 들을 것이다.
리코에게 말을 전하는 사이 나키르는 내 앞을 가로막은 하루트를 옆으로 밀쳐 내고 씩씩대며 고함을 쳤다.
“하, 생각해 보니 주교님께선 한창 희생제를 준비하셔야 하는데 여기 계실리가 없지! 감히 마리크 주교님을 사칭하려 들어? 그 건방진 낯짝 좀 봐야겠다. 당장 베일 벗지 못해? 가만히 있을 거면 내가 직접 해 주지.”
나키르가 베일에 손을 뻗었으나 나는 나키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슬쩍 베일을 걷어내고 그 안을 엿본 나키르가 그대로 굳었다.
그야 당연하지. 나키르가 보고 있는 건 화상 흉터로 얼룩진 얼굴일 테니까.
하지만 환각은 아니었다. 리코에게 부탁해 변화에 능한 ‘쥐’의 몸을 화상 흉터처럼 변하게 해 얼굴에 달라붙어 있어 달라고 했을 뿐이다.
나키르의 손이 마구 떨렸다. 그가 쥐고 있던 베일을 놓친 탓에 베일이 살랑이며 내려와 다시 시야를 차단했다. 리코도 긴장됐는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키르 경? 왜 그러십니까?”
나키르가 제 손을 노려보며 온몸을 떨고 있자 옆의 기사들이 이상하다는 듯 나키르를 살폈다. 나키르는 되려 저를 살피러 온 기사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내가, 내가 실수할 리 없는데? 방금 봤어? 너도 봤냐고?”
“켁…, 경…. 목 좀 …놔주세요.”
“나키르 경, 진정하시고! 아니 뭘 봤다는 겁니까!”
“이 내가 잘못 판단한 거라고? 왜, 왜 화상 흉터가 있지?”
나키르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이럴 리 없다며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나키르에게 목덜미가 잡힌 기사가 숨이 넘어갈 듯 캑캑거려 여럿이 달려들어 나키르를 말리느라 소란이 벌어졌다.
이 좋은 상황을 놓칠 수야 없지. 내 얼굴 위에 덮인 리코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코. 마리크 주교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니?”
“네? 네. 가브리엘 경 모습으로 변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번 마리크 주교가 찾아온 적 있어요.”
“그럼 내가 작게 하는 말을 마리크 주교의 목소리로 따라 하는 거야. 할 수 있지?”
“네… 해 볼게요.”
지금 쥐가 내 얼굴에 붙어있으니 소리가 이상한 데서 들린다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이세계 목소리 변조기다.
“나키르 경.”
“나키르 경.”
내가 복화술을 하며 작게 속살거리고, 리코가 그 말을 따라 하면 내가 다시 립싱크처럼 입 모양만 뻐끔거리는 거다.
좋아, 이렇게만 하자. 한번 연습을 마친 후 베일을 살짝 들쳐 일부러 흉터를 보여줬다. 나키르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에게도 내가 ‘마리크 주교’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마, 마리크 주교님.”
굳어 있던 나키르는 화상 흉터도 모자라 목소리마저 같으니 이제야 제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자각했는지 얼굴이 파리해진 채 바로 손을 뗐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아둔하여 주교님께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나키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목소리가 얼마나 음울하고 마구 떨리는지 나키르의 절망스러운 심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허리를 숙인 나키르를 하루트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꼼짝없이 베일이 들춰져 정체가 탄로 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사과를 받는데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괜찮습니다. 나키르 경께선 날 걱정해 다소 과격하게 행동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리코가 내가 일러준 말을 따라 했다. 리코와 몇 번 합을 맞췄더니 립싱크도 자연스러워졌다. 만족스러워 작게 웃자 제게 웃어주는 줄 알았는지 나키르가 감동하였다는 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빛냈다.
“주교님…!”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이 나키르란 자는 마리크 주교의 상당한 추종자인가 보다. 하는 짓이 왠지 파라로스 기사단의 미쉘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 조급하니 그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리코는 마리크 주교의 성대모사를 꽤 잘했다. 마리크 주교의 추종자도 눈치 못 챈 것 같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는데 베일을 들쳐짐으로써 오히려 마리크 주교라는 확신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론 이득이었다.
나키르는 이전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는 대신 종탑의 문을 손수 열어주는 배려까지 베풀었다. 나키르를 마리크 주교 앞에서 배를 까놓는 개 취급한 것이 과언은 아니었다.
나키르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며 인사하고는 조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내가 마음을 바꿔 무례에 벌을 내릴까 봐 겁나 말을 번복하기 전에 도망가는 것 같았다.
가만히 나키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이제 편히 말해도 된다며 일러주었다. 하루트가 긴장이 풀리는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에 일가견이 있으시네요.”
“사제님도요.”
“괜히 띄워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거든요….”
부쩍 의기소침해진 하루트를 두고 종탑 내부를 살폈다. 종탑 안으로 들어오자 치솟은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아마 계단을 전부 오르고 나면 젤리가 갇힌 방이 있을 것이다.
“그럼 갈까요.”
그 전에 리코에게 쥐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일러주었다. 리코는 더는 내 변조기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했는지 서둘러 다시 쥐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깨를 타고 내려온 쥐를 푸딩의 위로 얹어주었다. 쥐가 오르기엔 종탑의 계단이 가팔랐기 때문이다.
종탑 내부는 꼭대기로 가기 위한 계단이 벽을 타고 계속해서 위로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난간이 있기는 했으나 무게를 잘못 잡았다간 기대자마자 무너질 것처럼 허름했다. 자칫하면 그대로 떨어지겠네.
안 그래도 내부가 어두운데 베일까지 쓰고 있으니 시야가 잘 구별되지 않아 망설이지 않고 베일을 벗어냈다. 마리크 주교의 것을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닐 수 없으니 베일은 다시 하루트의 손에 돌아갔다.
하루트는 다시 드러난 얼굴이 뽀얗기만 하다는 걸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셨길래 화상 흉터로 뒤덮이지 않은 얼굴을 보고도 나키르 경이 속은 겁니까?”
“글쎄요. 재밌는 짓?”
사제가 들어봤자 박수쳐주면서 잘했다고 환호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게다가 하루트를 온전하게 신뢰하지 않으니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도 없었고. 하루트도 내가 사정을 전부 이야기해 주지 않는 이유를 대강 짐작했는지 더는 물어오지는 않았다.
계단은 하늘로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진작 중간중간 멈춰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하루트가 따라오지 못한다면 두고 갔을 텐데, 하루트는 악바리처럼 내 속도를 뒤쫓아왔다.
가만히 계단을 오르다 문득 성수를 종탑 위에 보관해둔다는 말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이 길을 성수를 든 채로 올라간다는 말이지.
그냥 걷는 것도 위태한데 성수까지 짊어지고 간다면 더욱 위험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수를 종탑 꼭대기에 보관할 필요가 있나? 왕복이 힘든 곳이니 일종의 도난방지라도 되는 건가 싶어 하루트에게 물었다.
“성수를 왜 높은 곳에 보관해두는 건가요?”
지하에 보관하는 게 보통 아닌가? 아니, 그건 와인인가.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태양에 가까운 곳이니까요. 덕분에 옮기는 사람들만 고생이죠.”
하루트가 사제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킨다며 툴툴거렸다. 괜히 종탑에 성수를 보관하다가 사제들만 죽어 나간다고 정작 이 안건을 낸 사제는 엉덩이가 무거운 작자라며 뒷말을 주절대기도 했다.
하루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신앙심은 분명 있는데, 다른 사제들과 다르게 태양신보다는 사람을 더 챙기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적이었다고.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돕는 걸까? 날이 서 있는 말투를 보건대, 나를 꺼리는 게 분명한데 말이다.
“하루트 사제님은 마리크 주교의 측근이시죠? 그런데 왜 날 도와주는 건가요?”
내 말에 하루트는 침묵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속사정을 캐묻는 건 배려가 없었나 싶을 무렵 하루트에게 답이 돌아왔다.
“마리크 주교님은 제 은인이시지만….”
하루트가 머뭇거리듯 이어 내뱉었다.
“모두에게 친절하신 분은 아니죠.”
“이단을 말하는 건가요?”
“…네.”
하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는지 발걸음이 느릿해졌다.
“저는 고아라서, 어릴 적에 마리크 주교님께서 거두어주셨습니다. 더불어 주교님께서는 때때로 제 교육도 맡아주셨어요.”
마리크 주교가 하루트에겐 꽤 신경을 썼나 보다. 그래서 은인이라고 했구나.
“하루는 주교님의 방에서 제 또래의 아이를 본 적 있습니다. 그 아이의 이단의 아이였는데 당장 사형당하는 대신 회개할 기회를 얻어 교육을 받는 듯했습니다. 주교님은 제게 아직 깨끗해지지 못한 아이를 마주하게 해 미안하다 하셨었죠. 그 아이의 차림이 남루하고 지저분해,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 그 뜻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리크 주교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겠지. 마리크 주교에게 이단이란 더러운 오물일 테니까.
하루트가 어릴 적이라면 대략 20년 전쯤 되려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리크 주교는 참 한결같은 인물이었나 보다. 하긴, 예전에 있었던 이단 학살 역시 마리크 주교의 주도하에 일어났다고 했지.
“그때 딱 한 번 마주친 이후로는 아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마리크 주교님은 그저 배울 것이 많아 마주치지 못하는 거라 하셨으나 최근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어요.”
하루트의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착잡함이 숨어 있었다.
“주교님께 이단의 자식은 마찬가지로 이단일 뿐입니다. 그 애 역시 부모의 죄로 묶여 함께 죽었겠죠.”
애초에 교육조차 하루트에게 변명하기 위한 명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트가 나보다 앞서 있었기에 표정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마치 우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주교님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그 애 생각이 많이 나서요. 저도 모르게 부채감이 있나 봅니다. 어쩌면 제가 그때 진실을 알았다면 주교님을 말릴 수 있지 않았나 하고요. 그렇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하루트는 우울한 기색을 지우고 다시 건방진 어조로 돌아가 선언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주교님을 말리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트는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마리크 주교를 말리기 위해 내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주교님이 이단을 죽여 시체 위로 쌓아 올린 명성 아래 비호받으며 자란 제가 죗값을 갚으려면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요.”
그래서 신전을 배신하고 악마를 도울 결심을 하다니, 예사 사제가 아니었다.
“마리크 주교에게 걸리면 목이 달아날 텐데요?”
“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럼 더 악몽을 꾸지는 않을 테니까요.”
새삼스럽게 하루트가 남달라 보였다. 마리크 주교를 존경하나 그의 사상까지는 존중하지 않았고, 신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나, 이단의 아이마저 동정할 줄 알았다.
아. 왜 하루트가 다른 신전 사람들과 다르게 느껴졌는지 알았다. 이 사제는 신보다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었다. 쉬지 않고 계단을 오르느라 진이 빠진 뒷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봤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사라카의 악몽은 지긋지긋해요.”
누구라고 했지?
“…사라카?”
지나치게 익숙한 울림이었다.
그건 마리크 주교가 하녀 신분으로 민얼굴을 드러낼 때 쓰는 이름이니까.
문맥을 짐작해 보건대 사라카라는 건 분명 하루트가 만났던 그 이단 아이의 이름일 거다. 열이 확 뻗쳤다. 대체 양심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제가 죽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쓸 수 있는 거지?
속으로 마구 마리크 주교를 씹어댔다. 그런데도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욕이 부족했나? 뭔가 눌어붙은 찌꺼기의 정체를 제대로 밝혀내기도 전에 하루트가 멈춰 섰다. 벌써 계단 끝에 다다라 있었다.
“바로 저기입니다.”
하루트가 가리킨 곳에 문이 보였다. 사라카의 이름은 잠시 뒤로하기로 했다. 지금은 더욱 중요한 게 있으니까.
푸딩이 자면서도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보면 방 안에는 막대한 성수가 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라면.
드디어, 드디어 젤리를 볼 수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