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74)
사라카는 에반젤린을 올려다 보았다. 당장이라도 바람에 떠밀려 추락할 듯 위태로운데 여유를 두르고 있으니 오히려 안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선택한 희생양은 참으로 성대하게 등장하셨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신전을 뒤집어, 태양을 스러지게 하고 바닥에서는 불길이 일렁이게 만들었다. 태양신이 머무시는 천상의 단편을 재현시켰다며 찬사받는 대신전에서 지옥을 엿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기도와 성가만이 울려 퍼져야 할 신전에 새된 비명과 절규가 가득했다. 이 소란 역시 에반젤린이 일구어낸 것이리라.
“마리크 주교님. 좋은 밤이에요”
사라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탓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첨탑 위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릴 리가 없었다.
사라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에반젤린은커녕, 그 목소리를 들은 것조차 사라카 자신뿐인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이토록 평온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사라카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작게 중얼거리며 답했다.
“로한슨 영애님께서는 한낮을 밤이라 칭하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해가 자취를 감추었으니 밤이 아니면 무얼까요.”
역시, 사라카의 착각이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다시 가까이에서 속닥댔다.
에반젤린의 목소리는 사라카에게만 들려오는 것이었다. 둘뿐인 대화라니, 참 낭만적이기도 하지. 물론 말하는 내용은 정반대였지만.
에반젤린이 정론을 말하듯 대꾸했다. 해를 사라지게 수작을 부렸을 장본인이 지껄이는 말치고는 태연했다.
태양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자신이 대신 자리하여, 고고하게 아래를 내려보는 꼴이 참으로 교만하다. 존재감만큼은 감히 태양을 대신할 만했다.
아니, 에반젤린이 일컫기를 지금이 밤이라고 했으니 기운 달 대신 자신이 직접 들어찬 것이겠지.
에반젤린 로한슨은 온통 암흑으로 가라앉은 가운데 유일하게 도백색으로 떠올라 강제로 시선을 잡아끈다. 하늘에 뜬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감은 도리어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흠결조차 없는 이지를 엇나간 압도적인 미색은 황홀하다기보다 불길했다.
“주, 주교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사제들이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물었다.
“설마 라헬 님께서 저희를 버리신 건가요? 혹시, 이대로 정말 태양이 다시 뜨지 않는 건….”
사라카는 사제들을 우선 진정시키며 답했다.
“글쎄요. 제게는 이 재앙을 칭할 말이 분명치 않네요. 그러나 저기 서 있는 영애님께서는 태양이 사라진 이유가 짐작이 가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사라카는 태양이 사라진 원인을 에반젤린에게 돌렸다.
사라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 끝에는 새하얀 신형이 서 있었다. 에반젤린은 바람이 헝클어댄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 일련의 행동이 그림처럼 유려했다. 만약 작금의 짧은 순간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몇 장의 명화를 이어붙여야 할까. 또, 몇 점의 상을 조각해야 할까.
머리를 쓸어넘긴 에반젤린이 입을 열었다.
“해가 사라진 이유를 물으셨나요?”
“이게, 무슨….”
“방금, 방금은 에반젤린 로한슨이 말한 건가요?”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사라카뿐만이 아닌 모여 있는 관중 모두에게 또렷이 전달되었다.
목소리를 들은 자들이 당혹스러워하며 겁에 질려 닭살이 돋은 어깨를 쓸어내리며 몸을 떨었다. 마치 여러 개의 입을 두고 사방에서 동시에 말하는 듯 목소리가 공명했다.
“적어도 라헬 님께서 화를 내고 계신 건 분명해요. 예를 들어, 라헬 님이 오만한 레아를 벌하셨을 때처럼요. 어머, 마침 오늘이 그때를 기리는 기념일이 아닌가요?”
에반젤린이 레아를 닮은 붉은 눈을 활짝 휘며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손을 맞대고 말했다. 그러나 그 유순한 소녀의 흉내는 놀랍도록 형편없었다.
붉게 박동하는 눈은 살기가 가득히 형형했고, 발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고조 없이 평상다웠다. 마치 대본을 읽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관객은 어쩌면 태양이 사라진 것을 인식한 모두일 것이다. 고작 하늘이 검어졌다고 넋을 놓고 침묵하고 있는 신도들 역시 에반젤린의 훌륭한 객이다.
“혹시 마리크 주교님께서는 제물을 착각하신 것이 아닌가요?”
에반젤린이 조곤조곤한 소리로 추궁했다.
제물이 틀려? 사라카는 에반젤린이 자기 자신을 말하는 줄 알았다가, 붉은 시선의 방향을 보고서야 의미하는 사람이 다른 걸 알아차렸다. 순간 에반젤린의 시선이 끄트머리에 있는 가브리엘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희생제의 제물이 옳지 않아 성을 내시는 걸지도 몰라요.”
공명하듯 퍼져나가는 목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담겨있는 듯했다. 온 사방에서 울려 퍼지니 신비롭게 들리지 않는 게 더욱 이상하다.
“저…, 주교님. 저 말이 진짜인가요?”
“정말 제물이 옳지 않아서 정말 태양신께서 노하신 겁니까?”
순식간에 사람들은 에반젤린의 의견에 감화되었다. 금세 사상에 동화되어 가브리엘이 옳지 못한 제물이냐며 묻기까지 했다. 사라카는 곧장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가브리엘 경은 신이 아닌 것을 숭배하였으니 그 역시 죄가 맞습니다. 거기다 숭배의 대상이 사악한 마귀이니만큼 더욱이요.”
만약 사라카가 계획한 대로, 무대 위에 가브리엘 모습을 한 악마가 있었다면 지금쯤 사라카의 말에 증거가 생겼을 텐데 몹시 아쉬웠다.
하지만 에반젤린 로한슨 역시 아쉬움을 토로해낼 만했다. 비록 속이기 위해서라지만 사라카가 직접 들러 에반젤린에게 제물 역할을 맡아달라 청하지 않았는가. 가브리엘의 자리에 에반젤린 로한슨이 있는 것도 구미가 당겼다.
“어쩌면 제 실수일지도 모르겠네요. 가브리엘 경이 아니라, 그가 숭배하는 당신을 초대했었어야 하는 것을.”
사라카의 말에 에반젤린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에반젤린이 훅 다가와 사라카의 귓가에 속닥댔다.
“제가 제단에 올랐어도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마리크 주교님, 귀를 기울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사라카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 숨소리마저 세밀하게 들릴 정도였다. 온 신경이 귀에 쏠린 느낌이었다.
순간 에반젤린이 정말 사라카를 붙잡고 속삭인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에반젤린은 여전히 종탑 꼭대기에 서 있었다. 사라카는 간지럽고 소름이 끼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에반젤린이 속삭임을 멈추자 바깥의 소리가 더욱 환하게 들렸다. 사라카는 그제야 소음에 귀 기울였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 대게는 사라카가 죽인 이단에 관한 것이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건 마리크 주교님이 아니신가요?”
에반젤린이 가엽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라카는 부정했다. 고통을 안겨주는 게 삿된 존재가 아닌 사라카 자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들이 고통받는 것은 가족을 이단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며, 태양신의 충실한 신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단인 가족을 잃고, 성수조차 과분할 정도로 불우한 것은 과거의 사라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들과 사라카의 차이가 있다면 사라카는 온전히 라헬 님을 받아들였다는 것뿐이다.
반면 저들은 믿음이 약해 의심을 껴안고 신전으로 난입하기까지 했다. 고로, 저들이 고통받는 것은 오로지 저 자신들이 자초한 일이다.
저들은 잘못되었다. 사라카는 잘못되지 않았다. ‘마리크 주교’는 악이 아니다. 마리크 주교님은….
주변이 시끄럽기 때문인지 유독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면 온통 어두운데 별관만이 타올라 불길이 유독 눈에 들어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당장 불길을 끌 수는 없으니 적어도 사람들의 입은 다물게 해야겠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소리 탓에 에반젤린과의 대화에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사라카는 에반젤린을 반긴 것과 다르게 소란 자체는 반기지 않았다. 저들 때문에 중요한 희생제마저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지 않았는가. 사라카가 이 희생제를 얼마나 기대하고 기다렸던가.
“아자젤, 아니지…. 경.”
“예, 주교님.”
사라카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반사적으로 아자젤의 이름을 불렀다가 실수를 다시 정정했다. 가장 가까이에 호위로 붙어있던 기사가 재빨리 반응했다.
“사람들을 진정시키세요.”
기사는 사라카의 말뜻을 단박에 헤아리지 못했다.
사라카는 이런 면에서는 나키르라는 기사가 더 낫다고 판단 내렸다. 나키르는 두말하지 않고 사라카의 명령을 따랐다. 다만 말뜻을 제멋대로 해석해대고 기질이 과격한 면모가 있어서 귀빈들 앞에 세워두기가 께름칙해 호위가 아닌 경비 쪽으로 빼두었다. 하지만 나키르도 아자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아자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여럿을 써보고는 있으나 마음에 차는 자가 아직 없었다. 악마를 상대로 비교하고 있으니 눈에 드는 사람이 있을 리가. 그나마 나았던 건 무제타뿐이었으나 황실 소속의 기사를 계속 데려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라카는 조금 관대해지기로 했다. 마리크 주교님이 부족한 사라카를 가르쳤듯이, 사라카 역시 이들에게 손수 가르침을 베풀면 되는 일이다. 사라카는 상냥한 어조로 어떻게 사람들을 진정시키면 되는지 설명해주었다.
“침묵을 요구하고 듣지 않는다면 본보기로 한 사람을 죽이세요. 그래도 아직 소란스럽다면 분란이 가실 때까지 본보기를 계속 세우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수십의 목이 떨어진 후에는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 아는 것들이 알아서 입을 다물 것이리라.
“네? 하지만 주교님, 저들은 이단이 아니라 그저 시민들일 뿐입니다.”
기사가 당황하며 반박하는 말에 사라카는 혀를 내둘렀다. 마리크 주교님도 대단하시지, 몽매한 자를 이끌기란 이토록 수고스러웠다. 사라카는 기사에 대해 기억해두려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르빌입니다.”
기사는 마리크 주교가 이름을 묻는 것이 결코 좋은 이유는 아니리란 걸 직감했으나 솔직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은 누구의 밑에 있었죠?”
“…얼마 전까지는 파라로스 기사단에 있었습니다.”
기사가 조금 망설이며 답했다. 사라카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누군가 했더니 파라로스 기사단의 이탈자였다.
가브리엘의 명성이 퇴락한 후, 소속을 옮긴 수가 꽤 되었다. 사라카는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태도가 변한 몇 명을 추려 호위로 직접 골랐다. 가브리엘이 수하들의 앞에서 제물로 섰을 때 수치스러워하길 바라서였다.
더불어 기사들이 한때 동경해 마지않던 자신들의 단장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모습을 보기 위한 사라카의 작은 여흥이었다.
이름만을 기억해두었더니 얼굴만 보고서는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파라로스 기사단의 소속이었다면 이해가 갔다.
제 발로 직접 가브리엘의 아래에서 빠져나와 드물게 생각이 바로 잡혀있나 했더니 기대가 지나친듯싶었다. 신도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이렇게 오염시키다니 가브리엘도 참 대단하지.
사라카는 훈계하듯 일러 주었다.
“아르빌 경. 잘 새겨들으세요. 저들은 희생제를 방해하고 방화를 저지른 폭도입니다. 신전을 공격하려 하는 자들이 어찌 결백하겠나요?”
다른 기사를 지목해 시킨다면 굳이 설교할 필요도 없건만, 아르빌이 파라로스 기사단의 출신이라는 데서 마음을 바꾸었다.
출신이 그렇다면야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개전의 기회를 줄 수 있다. 사라카도 마리크 주교님의 큰 뜻을 헤아릴 때까지 자그마치 7년이 걸리지 않았는가. 사라카가 이어서 설명했다.
“사자를 되살려달라 말하는 것은 신께서 내린 이치와 섭리를 어기는 짓이고, 성수를 달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방식으로 성수의 가치를 지불하지 않고 폄하하는 불경한 태도랍니다. 저들은 라헬 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을 값싼 취급하고 있는 거랍니다.”
사라카는 마지막으로 마리크 주교를 깎아내리는 외침을 들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이 마리크가 고른 이들이 이단이 아닐 리 있나요? 자, 생각해보세요. 저들은 어떻게 신전에 침입했을까요? 그것도 거짓말처럼 태양이 사라지는 시련이 닥칠 때 말입니다. 우연일 리가 없지요. 저들은 에반젤린 로한슨과 결탁해 신전의 몰락을 꾀하는 무뢰한일 뿐이에요.”
기사는 태양을 가린 새하얀 여인을 올려다보더니 목이 타는 듯 침을 삼켰다. 하마터면 마리크 주교가 공인한 악적을 옹호하는 꼴이 될 뻔했다.
“아르빌 경은 무엇인가요?”
“전 라헬 님의 기사입니다.”
사라카의 물음에 기사가 재빨리 예를 차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태양신의 신도답게 구세요. 그 누구보다 선봉에 서서 태양을 위해 불경하고 사악한 이단을 섬멸하세요.”
사라카는 아르빌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르빌은 마리크 주교가 불쑥 가까워지자 흠칫 몸을 떨었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 마리크 주교님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살살 손을 쓰다듬자 심장께가 간지러워지며 심박질이 빨라졌다.
화재로 생긴 흉으로 얼룩진 손은 기사인 아르빌의 것보다 훨씬 흉측하고 볼썽사나웠다. 마리크 주교의 체향은 모든 걸 불사른 후에 남은 재와 같은, 매캐한 연기 냄새였다. 꼭 불길에 휩싸였던 그 날에 갇혀있다는 듯했다.
기사는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검을 잡아 생긴 물집조차도 마리크 주교의 손만큼 고난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마리크 주교의 흉은 그녀가 신전에서 가장 신을 위해 분투한다는 증거였다.
그에 비해 아르빌은? 자신은 제물에까지 발탁된 가브리엘의 수하였었다. 동료 기사들에게도 눈총을 받다가, 이번에 마리크 주교님께 직접 발탁당해 감사를 느끼며 잘해보겠다며 각오를 다지지 않았는가. 모두가 외치는 것처럼 주교님께서는 평등하시며, 자신에게조차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아르빌은 애초에 마리크 주교님께 말대꾸할 자격조차 없었다. 무시해도 될 의문을 마리크 주교님께서는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계셨다. 아르빌은 마리크 주교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사라카는 기사의 손을 허리춤으로 이끌어, 기사가 검의 손잡이를 쥐게 했다.
“아르빌 경의 노고는 곧 태양을 하늘에 다시 드리울 겁니다. 저를 위해 검을 빼 들고, 라헬 님을 위해 죄인을 거두세요. 그래. 선두에 선 모습은 분명 레아를 처단하기 위해 검을 빼 드는 건국 왕과 같겠죠.”
기사는 사라카가 이끄는 대로 검을 빼 들었다. 마치 자신의 의도로 직접 검을 들었다 생각하게끔 교묘한 수작에 불과했으나, 혼잡한 상황 덕분에 무척이나 잘 먹혔다.
사라카는 활짝 웃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휘어지는 눈은 세간에서 말하는 자애로운 주교의 것보다 사제들이 말하는 사악한 악마의 초상을 닮아있었다.
그러나 베일이 사라카의 흉측한 미소를 가려주었다. 사라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시작은 저자가 좋겠네요.”
사라카가 속삭였다. 사라카의 의도대로 움직인 칼끝이 고른 것은 부지깽이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깡마른 남자였다.
사라카가 남자를 고른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문을 개폐하는 데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더니, 그때 들은 인상착의와 퍽 비슷했던 탓이다.
그 소란의 당사자건 아니건 이 혼란을 조성하는데 일조했을 테니 적당한 인사가 아닌가.
“라헬 님을 위해서….”
기사는 각오를 다졌다. 그래. 건국 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리크 주교님의 눈에 들어 권력을 잡는 발 받침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마리크 주교님이 명명하신 고작 이단 하나의 목숨이다. 저울질해보았을 때 무게가 어느 쪽으로 쏠릴지는 자명했다.
기사는 마리크 주교가 ‘시작’은 저 남자가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새하얗던 머릿속은 곧 깡마른 남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찼다.
기사가 조금이라도 이성적이었다면 희생제에서 피를 봐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떠올렸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기사는 사라카에게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단순히 사라카의 혀 놀림에 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자가 몸 냄새라고 착각한 연기 냄새는 사라카가 습관처럼 태워 몸에 두르는 약의 냄새였다. 헤나에게 먹였던 것과 같은 종류의 마약이었다.
긴 옷을 입고 베일을 쓴 후 드러나는 부분은 화상 흉터로 전부 가렸다. 거기다 오랜 시간 교육을 받기까지 했으나, 사실 사라카와 마리크 주교 사이에는 세세한 차이가 존재했다.
오랜 시간 마리크 주교와 함께 지내왔을 사제들이라면 사라카조차 깨닫지 못한 차이를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몸에 두른 향기는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약간 이완시켜 그 작은 위화감을 지워 주는 용도였다.
옅은 향기뿐이지만, 그래도 마약이었다. 사람들은 사라카의 곁에서 기분이 풀어져 안정을 찾았다. 신도들이 ‘마리크 주교’를 유독 따르며 곁을 지키고 싶게 만드는 마음의 정체란 사실 이러했다.
종종 나키르처럼 지나치게 약이 잘 드는 예도 있었는데, 아르빌 역시 같은 체질인 것처럼 보였다.
아르빌은 천천히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이봐 조용히 해.”
기사의 목소리는 소란에 파묻힐 만큼 충분히 작았다. 일부러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말했나 오해할 정도였다.
“조용히…, 조용히 하라니까….”
기사는 검의 손잡이를 꽉 쥔 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라카는 그 모습을 무료하게 관조했다.
사라카는 그저 침묵이 찾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기사와 남자의 용도는 그뿐이다.
되려 사라카의 흥미를 끄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칼부림과 남자의 죽음에 에반젤린이 어떻게 반응할 지었다. 에반젤린이 굳이 신전에 사람을 끌어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사람들을 선동해 마리크 주교를 욕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라카가 신전에 멋대로 침입한 이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나? 고기 방패를 준비한 거였다면 더 그럴듯한 것들을 데려왔으면 좋으련만. 사라카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나마 볼만한 건 기사가 파라로스 기사단의 소속이었다는 것뿐이다. 제 휘하에 있던 기사가 앞장서 살인에 가담하는 꼴을 보게 될 테니, 에반젤린은 몰라도 가브리엘은 퍽 우스운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에반젤린이 가브리엘을 제물로 썼다며 사라카를 매도했으니 이것은 정당한 설분이었다.
혼란 사이에서 사라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르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였다.
아르빌은 검을 바짝 치켜들었다. 크게 심호흡한 아르빌이 검을 그었다. 곧 살을 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두두둑 혈관이 끊어지고 살가죽이 서걱 잘리는 느낌이 생생히 전해진다. 왈칵 터진 피가 아르빌에게 튀었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아르빌은 잠시 굳었다. 방금 제 손으로 사람을 베어낸 게 맞나? 사악한 이단이라기에는 조금의 반항도 없는, 너무나, 너무나도 손쉬운 상대였다.
아르빌은 기사였다. 파라로스 기사단 소속으로 나름 많은 전투를 치러왔다. 그러나 무저항의 상대를 베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장인 가브리엘이 잔혹하다 싶은 일은 소수 정예에게만 맡겼기 때문이다. 대체로 라파엘라와 미쉘, 유리엘이 그 대상이었다. 아르빌은 그들이 단장의 신뢰를 받는다 질투하였으나, 그들의 살육마저 시샘한 적은 없었다.
피를 뒤집어쓴 것은 아르빌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근처에 있던 소년 역시 가까이에 있던지라 질겁을 하며 비명을 질러다.
“…으, 으아, 으아아!”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베였다. 얼굴에 뜨끈한 것이 튀어 소년은 제 얼굴을 더듬어대다 손에 붉은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공황에 빠졌다. 소년이 비명을 질러대고 나서야 시선이 몰렸다.
“저 자식 뭐 하는 거야?”
아르빌의 기행을 알아차린 자들이 당혹스러워했다. 신전에 멋대로 들어오려 했던 사람들을 제압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온 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가 아닌가. 게다가 주교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미친, 아르빌?”
그 사이에서 라파엘라 역시 기사를 알아보았다. 라파엘라는 마구 머리를 쥐어뜯었다. 단장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저 건 왜 또 저러는 건데!
호기롭게 파라로스 기사단을 나갔으면 좀 떵떵거리며 지내던가! 왜 마리크 주교의 곧 버려질 게 뻔한 체스 말이 되어있는 거냐고!
라파엘라는 곧장 시선을 돌렸다.
단장님은? 아르빌의 멱을 따러 가는 건 아니겠지? 라파엘라는 고개를 돌려 가브리엘을 확인한 후 안도했다. 목에 핏줄이 서 붉어져 있으나 가만히 있으니 일단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옆에 기사들이 붙어있으니 적어도 가브리엘이 멋대로 굴 수는 없을 거다.
가브리엘을 묶어 호송하던 놈들이 고와 보일 줄 몰랐네.
라파엘라가 주위를 둘러본 것을 본 바알 공작이 너나 얌전히 있으라며 귀를 잡아당겼다.
반면 사라카는 나름 만족하는 중이었다. 주변이 훨씬 조용해졌다.
비록 기사가 마지막에 망설이며 손속에 사정을 두었는지 남자가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나약한 소년이 비명을 질러댄 덕에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좋지 않은가.
울컥, 울컥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는 것이 오히려 더 보기 그럴싸하기도 했다. 사라카는 그다음 이어질 에반젤린의 반응을 기다렸다.
“주교님.”
마침 에반젤린이 사라카를 불렀다.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군중들의 시선이 사라카에게 단박에 쏠렸다.
“겨누어야 할 대상을 잘못 지목하신 게 아닌가요?”
에반젤린의 시선은 남자를 겨눈 기사에게 잠시 향했다. 에반젤린의 시선에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피 묻은 손을 움찔 떠는 게 보였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듯한 기세였다.
“이런, 로한슨 영애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제가 아르빌 경에게 살인 교사라도 했다는 뜻인가요?”
사라카는 듣는 이로 하여금 꺼림칙함을 느낄 수 있도록 부러 험궂은 단어를 사용했다.
“아르빌 경, 대답하세요. 제가 경께 저 남자를 살해하라 일렀던가요?”
“그렇,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경은 어째서 검을 빼 들었나요?”
“저… 저자가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희생제를 방해하였고, 신전에 멋대로 침입하여 거짓을 입에 담은 까닭입니다.”
아르빌은 사라카가 속살거린 대로 곧잘 답했다.
아르빌에게 베인 남자의 몸이 들썩거리는 게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도 에반젤린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에반젤린에게도 고작 버리는 패에 불과했나? 저런…. 사라카는 남자를 약간 동정했다.
아르빌은 제 손과 검에 묻은 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누가 보면 살인이라도 한 줄 알았을 거다. 이단 하나의 목숨을 마무리 짓지도 못한 것 치고는 참으로 담이 작지 않은가.
“아르빌 경.”
“예, 예… 주교님.”
사라카는 반쯤 정신을 놓은듯한 기사를 불렀다. 아르빌은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사라카의 몸에 입혀진 향기는 생각을 느슨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경은 잘못되지 않았답니다.”
사라카는 아르빌을 어르고 달래며 서두를 끊었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날을 기리기 위하여 참석해주신 신도님들.”
그리고 곧바로 청자를 확대했다. 그러나 사라카가 말을 거는 대상은 신전에 갑작스레 침입한 무뢰한들이 아니라, 정식으로 초청받은 귀족들과 사제, 기사들뿐이다. 분수도 모르고 신전에 침입한 이들은 사라카의 설교가 먹힐 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로한슨 백작의 증언을 들으셨겠지요. 저건 안타깝게 사망한 에반젤린 로한슨의 껍질을 뒤집어쓴 악마랍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목소리와 레아의 상징과 다름없는 붉은 눈이 그 증거이지요.”
레아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반향은 무척 컸다. 신전에 쳐들어온 무지한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사제들을 바짝 경계해댔다. 혼란은 순식간에 불거진다. 에반젤린 로한슨의 붉은 눈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중에서 가장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라카였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사악한 악마가 태양을 가리고 몽매한 자들을 홀려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사라카의 제물은 붉게 타오르는 눈으로 사라카를 바라보았다. 지독히 기대되었다. 공포인지 환희인지 모를 감정으로 머리까지 오싹했다.
“저들은 이미 지성을 잃은 괴뢰와도 같아졌습니다. 여러분, 검을 빼 들으세요. 이미 마귀에 물든 자들을 편히 잠재워주어야 하지 않겠나요.”
사라카의 말에 사방에서 다발적으로 검을 발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사라카가 명명한 이단을 상대로 검을 빼든 것이다. 사라카는 아직도 망설이는 이들에게 권고하듯, 그리고 검을 든 기사들을 북돋우며 연설을 이어나갔다.
“더는 악마에게 휘둘리지 않게 베어 제압하는 것만이 저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르빌 경이 그러셨던 것처럼요.”
그러니 저들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사라카는 들뜸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드디어 혐오해 마다하지 않는 끔찍한 찌꺼기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사라카가 경외하던 마리크 주교님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만을 악착같이 버텨왔다. 사라카는 자신의 이름마저 버리고 마리크 주교님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것이 미천한 이단이었던 사라카가 연명해나갈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더 욕심이 커졌다. 배은망덕하게도, 사라카는 단순히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리크가 되고 싶어졌다. 지하실의 부패해가는 주교님보다는 사라카 저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마리크 주교를 뺏어와야 했다. 사라카는 주교님 이상의 업적을 세우기로 했다. 만약 사라카가 레아의 헌신을 처단한다면, 후에 마리크 주교로서 기억되는 건 바로 사라카 자신이겠지. 고작 이단을 학살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제 마리크 주교님조차 이륙해내지 못한 위업을 사라카의 손으로 이뤄낼 차례였다.
그 받침은 에반젤린이 될 것이다.
“어서, 로한슨 영애와 안타까운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사라카는 흥에 겨워 노래하듯 흥얼거렸다. 그러나 곧 사라카의 흥취를 깨는 말이 들려왔다.
“주교님께서 저를 의심하시니 몹시 억울하네요.”
순간 등 뒤에서 흰 팔이 뻗어져 사라카의 목을 껴안은 줄 알았다. 목이 졸린 것도 아니건만 목덜미가 서늘했다. 귓가에 속삭여진 목소리는 상냥해서 소름이 끼쳤다.
“하늘에 맹세코 전 무고하답니다.”
그렇게 말한 에반젤린이 이번에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드높였다.
“신뢰하실 수 없다면…. 그럼 내기를 할까요?”
분명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커졌으나, 에반젤린의 대화 상대는 사라카 혼자뿐이다.
“…내기?”
사라카가 인상을 구기며 되묻자 에반젤린은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 이대로 몸을 던질 거에요. 만약 제게 죄가 있다면 전 온몸이 박살 나는 것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겠죠. 하지만 제게 죄가 없다면 신께서 절 불쌍히 여기셔 구원의 손길을 내미실 거에요.”
에반젤린의 말이 영롱하게 귀에 와닿았다.
에반젤린은 미소를 지워냈다. 그린 듯 걸려있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제 죽음으로 무죄를 증명할게요.”
이윽고, 에반젤린은 몸을 던졌다. 사라카가 바라보고 있던 첨탑의 끝에서 흰 드레스와 머리칼이 나부끼더니 아래로 확 떨어지며 시야 밖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저들의 상상이 실현된 것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추락했다. 사라카마저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눈이 크게 뜨였다. 순간 온 세상이 소음이 사라진듯했는데.
그 순간 확, 날개가 펴졌다.
“…이게 무슨.”
산산조각이 난 시체를 보게 될 줄 알았건만, 눈앞에 드리워진 건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햇빛을 베어 자아낸 찬란한 금발이 거대한 날개가 펄럭대며 만드는 바람에 하늘거렸다. 굽이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빛의 창공이 엿보였다.
그러나 오묘한 눈빛과 달리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구해 나이를 다르게 가늠하기 어려웠다. 열일곱은 된 것 같기도 했고, 또 자그마치 백 년을 넘게 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드라운 살결에 아직 소년티를 미처 다 벗어내지 못한 어린 외형이었다. 소년을 이루는 색채는 뚜렷하고 맑아 불결한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접하지 않았을 것처럼 결백하고 순수해 보였다. 영혼마저 결점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았다.
과장을 더 해 천사가 아니라, 신의 현현이라고 일컬어도 믿어볼 직한 외모였다.
넋을 잃고 바라볼 즈음, 어디선가 나팔 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주자 없는 오르간이 제멋대로 연주를 시작했다. 귓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음색은 분명 성스러운 성가였다.
“…천사?”
누군가 한 말이 물에 먹물을 탄 듯이 급속도로 퍼졌다.
“천사라고?”
“천사다… 천사님이야”
“천사가, 천사가 에반젤린 로한슨을 구했다…!”
물음은 곧 깨달음이 되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등가죽을 찢고 자라난 거대한 날개가 공기를 가르며 펄럭댔다. 날개가 만들어낸 바람에 사라카의 베일이 휘날릴 정도였다.
무지한 치들은 화폭이나 조각에서 묘사되던 천사를 그대로 옮겨낸 듯한 황홀한 생김새에 매료당한 것 같았다.
마치 신을 목도한 듯 경이로운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지나치게 예를 갖추어 무릎을 땅에 대고 절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과한 경외마저 마땅하게 느껴졌다.
오로지 사라카만이 이를 악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사라고? 사라카가 지하실에서 그리 부르짖었을 때도, 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구해달라 외칠 때도 나타나지 않던 존재가 에반젤린의 부름에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거짓말처럼 소년의 등장을 반기듯 다시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기 봐! 해가 돌아왔어!”
다시 드리워진 태양은 에반젤린과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소년을 비추었다. 에반젤린이 있는 부분이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조명이 켜진 듯 환해지기 시작하더니 그 범위가 점점 더 늘어갔다.
서서히 해를 가리던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주변이 환해졌기 때문에 더욱 경건한 광경을 자아냈다. 새하얀 여인을 안타깝다는 듯 안고 있는 절색 천사를 향해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성화 속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라카의 명령에 당장 사람들을 베어낼 듯 굴던 기사들이며, 사제들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뛰어내리기 직전 에반젤린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 에반젤린이 무고한 죽음을 맞을까 싶어 천사가 그녀를 구해낸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사라카만은 알았다. 태양신께서는 정말 공평하시어 누군가를 특별히 구해내는 법이 없으시다. 사라카가 죽인 자들 중에 신을 부르짖던 자가 몇십이었던가. 죄 없는 자가 몇백이었던가.
그들 앞에서도 나타난 적 없던 게 에반젤린을 위해 나타났을 리 없다.
그러니 저것은 천사가 아니다.
사라카는 천사마저 사칭해대는 에반젤린에게 분노를 느꼈다. 사모하는, 사라카의 제물께서는 에반젤린 로한슨의 시체를 가져다 제 껍질로 멋대로 써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날개가 조용히 펄럭이며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 광경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바라봤다.
천사는 제 품에 안긴 에반젤린이 잔디 위를 밟는 걸 도왔다. 놀랍게도 조심스러워 극진하기까지 한 손길이었다.
에반젤린을 품에서 떨어트린 천사는 아쉽다는 듯 에반젤린 로한슨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어디선가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에반젤린을 바라보는 눈은 또 어찌나 상냥한지 내밀한 관계를 엿보는 것 같아 보는 이까지 낯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감히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가지고 해선 안 될 상상이었다.
그 탓일까, 천사는 발에 땅을 디디지도 않은 채 빛 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원래였다면 그 자신의 산산조각 난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천사가 구해냈으니 로한슨 영애님은 그럼 정말 무고하신 거 아니야?”
누군가 조심스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변이 워낙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속삭임이 유독 크게 들려 말한 이가 몸을 웅크렸다.
“그런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홀린 듯 다시 에반젤린 로한슨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경외심이 드는 외관이었으나, 그 방향은 이전과 달랐다.
천사가 사라졌으나 새하얗던 날개가 환상처럼 남아 에반젤린의 뒤에서 여전히 펄럭거리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 때문에 거세게 뛰는 심장을 사랑이라 착각하듯이, 군중들은 에반젤린 로한슨에게 서려 있는 불길함을 신성하다 오판했다.
한순간에 삿된 존재라는 오명을 벗어낸 에반젤린 로한슨이 눈을 활짝 휘며 물었다.
“주교님. 아무래도 신께서는 제 죽음을 반기지 않으시는 모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