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76)
귀족들은 마치 극장의 좌석에라도 앉은 듯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관조했다.
에반젤린이 첨탑에서 뛰어내렸을 때는 ‘어머나!’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고, 천사가 나타났을 때는 ‘세상에….’하고 탄식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또 마리크 주교가 천사가 강림해 에반젤린을 구해낸 장면을 악마가 보여준 환영이라고 치부했을 때는 혹시나 자신들에게 질문이 올까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러다 칼부림이 나자 휩쓸릴까 봐 회랑 아래로 슬그머니 발을 뺐고, 덕분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한 비가 아닌가?”
상처가 순식간에 낫는 모습을 보고 궁금증 많은 영식 한 명이 슬쩍 손을 내밀어봤다.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손은 작은 상처는 물론이고, 튼 곳조차 없이 부드러워 손을 적시는 비가 정말 성수인지 알 수 없었다.
군중들과 기사들이 한대 엉켜 싸우는 모습을 보며 한 유약한 귀부인이 화두를 던졌다.
“그나저나 마리크 주교의 손속이 조금 과하지 않나요? 저 잔인한 장면을 좀 보세요. 불쌍하기도 해라….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쯤 시체 더미를 보고 있을걸요.”
“맞아, 혹시 압니까? 저 사람들 다음이 우리가 될지.”
“설마 마리크 주교가 생각 없는 이가 아닌데 우리한테까지 손을 쓰겠습니까?”
“쓰지요. 쓰고말고. 제 사촌 누이가 마녀로 몰려 죽었는데요.”
“어험, 그렇다면 주교님께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설마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겠습니까? 저 사람들도 사악한 이단이니 안타깝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누명? 이유는 무슨! 마리크 주교가 그저 권력이 탐나 그러는 것이겠지요. 아주 제국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어허, 무례하시기는요! 제국의 주인이신 폐하가 계신 자리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으십니다!”
귀족들을 아울러야 할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소란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언성을 높인 백작이 황제의 앞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아, 폐하…. 제가 절대 폐하를 욕보이려고 한 소리가 아니라….”
“되었네. 사과할 필요 없어.”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폐하, 황녀님처럼 희생제 회장 안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제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귀부인이 물었다. 얼굴이 창백한 게 사실 자신이 돌아가고 싶은 듯 간절한 말투였다.
귀족들이라고 전부 마리크 주교를 따라 회장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예레미아 황녀는 넋을 놓고 있는 통에 무제타와 함께 회장 안으로 되돌아갔고, 애초에 호사퀸 공작이나 토텐 후작처럼 처음부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지켜볼 테니 들어가고 싶다면 어서 돌아가게나.”
황제의 완곡한 거절에 우물쭈물하던 귀부인은 비릿한 피 냄새와 눅눅한 공기를 더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성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비위가 약한 자들과 흥미를 잃은 귀족들도 함께 동행하며 잠시 대열이 틀어졌다.
소란을 틈타 라파엘라는 조용히 뒷걸음질 치다가 바알 공작의 곁에서 멀어졌다. 여럿이 움직이는 지금이 가브리엘을 빼돌릴 기회였다.
천을 풀어낼 만한 도구가 없어 가는 길로의 기사 하나의 검을 슬쩍 빌려왔다. 이래 봬도 같은 성기사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암.
죽으라고 검을 휘두르더만 상대가 비를 맞고 상처가 순식간에 낫는 모습에 어벙해져서 자기 손에 검이 잡혀있는지, 허리띠가 잡혀있는지도 모르더라. 이따가 혼자 허리띠를 휘두르는 광경이 볼만하겠다고 라파엘라가 속으로 이죽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가브리엘의 곁에 있는 기사들은 라파엘라가 도착하기도 전에 나자빠져 있었다. 라파엘라는 남아있는 둘의 뒷목을 칼등으로 내리쳐 기절시켰다.
하늘에서 내리는 성수 아래서 죽을 일도 없으니 원한을 담아 일부러 힘을 팍 실었다. 기절시키고는 쓰러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잡아채 눕히고는 바로 가브리엘을 살폈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라파엘라.”
라파엘라가 결박을 풀고 가브리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브리엘이 라파엘라의 부축을 받으며 벌떡 일어섰다.
“옆에 쓰러진 건 단장님이 하신 겁니까?”
“로한슨 영애님께서 떨어지실 것 같길래 그만….”
가브리엘이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에반젤린이 첨탑에서 떨어지니 자기도 모르게 받아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저를 구속하고 있는 기사들을 역으로 제압해버렸다는 것이다.
“…묶인 채로 참 잘도 하셨습니다.”
라파엘라는 경악스러운 마음 반, 질린다는 마음 반을 담아 입으로 대충 호응했다. 그리고 바로 잔소리를 시전했다.
“아니, 그나저나 몸도 불편하신 분이 잘 도망쳤다고 하셨으면서 대체 왜 여기 잡혀계신 거예요? 제가 단장님 보고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가브리엘은 라파엘라에게 차마 제 발로 걸어들어왔다는 말을 하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됐습니다. 변명은 나중에 들을 테니 어서 몸을 피하기나 하세요.”
라파엘라가 채근하는데도 가브리엘은 대피할 기세가 아니었다.
“단장님?”
“영애님께 가야겠다.”
라파엘라가 경악하며 물었다.
“저 사이를 뚫고 가겠다고요?”
기사들과 사람들이 엉켜서 싸우고 있는 전쟁터나 다름없는 저 사이를? 라파엘라가 기겁하건 말건 가브리엘은 가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방향을 응시했다.
라파엘라는 가브리엘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의 끝에 닿는 건 당연하다시피 에반젤린 로한슨이었다.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에반젤린의 목을 내리칠 것처럼 검을 겨누고 경계하고 있었다.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로한슨 영애님이잖아? 고작 기사 몇이 상대가 될리 없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에반젤린의 수족은 성수 아래에선 제 능력을 쓰지 못했다. 제 주인의 명을 끔찍이 생각하는 고양이는 분명 비를 내리느라 온 심력을 쏟고 있을 게 분명했고.
“지금 비가 오고 있으니까. 비를 막아줄 사람이 필요하겠지.”
비를 맞아서 그런지 에반젤린은 조금 더 창백해 보였다. 원래도 몸이 찬 분이시니 푹 젖은 몸에 더욱 한기가 들지 않을까? 제 온기를 나눠주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가브리엘의 몸도 그리 따뜻하지 않았지만…. 가브리엘은 차라리 에반젤린이 제게 남은 온기마저 전부 다 앗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성수를 비처럼 내린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신 게…?”
라파엘라가 숨을 죽여 조용히 물었다. 가브리엘에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그러나 침묵에서 정답을 읽어낸 라파엘라가 질겁했다.
태양을 없어질 않나, 성수를 내리지를 않나. 이젠 에반젤린 로한슨이 만드는 이적을 화술로 상대하는 마리크 주교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예. 단장님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가세요. 가.”
라파엘라는 가브리엘을 말릴만한 능력이 없었다. 성수를 비처럼 내리는 사람이니 적어도 로한슨 영애님이 가브리엘을 죽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묘한 신뢰가 바탕에 깔린 덕이다.
라파엘라가 허리띠와 교환해낸 검을 건네받았다.
“라파엘라, 부탁이 있다.”
“뭐든 명하세요.”
“자바니야 주교님을 모셔와 주겠나? 아마 문 쪽에 계실 거야.”
“어쩐지 그 늙은이가 보이질 않더니….”
라파엘라의 추측대로라면 마리크 주교의 바로 옆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한마디씩 거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문에….”
라파엘라가 혼잣말하다가 고개를 획 돌려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죠?”
그럴 리가 없지만, 정말 아닐 것 같지만, 라파엘라는 이상한 추론을 하고야 말았다. 신전에 갑작스럽게 침입한 사람들이랑 자바니야 주교가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자바니야 주교가 갑자기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단장님은 대체 어떻게 늙은 너구리의 위치를 아시는 거지?
“자바니야 주교님은 그리 나쁜 분이 아니시다.”
“그건 단장님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라파엘라가 이번에는 확신이 담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라파엘라는 가만히 가브리엘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장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눈을 돌린 순간 라파엘라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바알 공작이 매서운 눈으로 라파엘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난 죽었다….”
눈가가 축축한 건 빗물 때문일까.
“단장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제가 공작 영식이 아니더라도 부관으로 써주실 거죠?”
라파엘라의 물음에 가브리엘이 우승은 농담을 들었다는 양 작게 웃었다.
라파엘라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비를 맞았으면 똑같이 푹 젖은 생쥐 꼴 이여야 하는 거 아니야?
라파엘라 자신은 왜 털에 숨이 죽은 강아지고, 저쪽은 무슨 이른 새벽에 호수에서 헤엄치고 나온 요정 같은지 모르겠다.
더럽게 잘 생기셨네. 로한슨 영애님 앞에서는 앞으로 물에 젖은 상태로만 돌아다니시라고 할까.
감탄하는 사이 가브리엘이 라파엘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네 능력 외의 것을 본 적이 없어.”
“단장님!”
라파엘라가 감격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라파엘라는 파라로스 기사단에 뼈를 묻겠다고 결심했다.
‘이번만큼은 어머니도 절대 눈감아 주시지 않겠지?’
가족을 들먹이며 라파엘라에게 잠자코 있으라며 요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가브리엘을 몰래 구해 낸 것도 모자라 명령을 수행하러 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번에는 바알 공작이 진심으로 절연하자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대신 족보에서 사라지는 방법은 죽는 것뿐이라며 아들을 기어이 죽이려 드시겠지만.
바알 공작 자신은 피붙이를 죽이고 공작 위를 차지한 데 비해 정작 자식들에게는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라며 세뇌하듯 말해 왔다. 라파엘라가 추측해보건대, 공작은 아마 자신의 전례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어릴 적부터 후계 자리도 이미 첫째로 정해진 셈이었고.
라파엘라가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누님만 예뻐하니 질투가 나서 자기가 더 총명하니 공작을 하면 안 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바알 공작은 라파엘라에게 첫째가 죽으면 첫째의 자식에게, 자식이 없다면 첫째가 아끼는 하녀에게 공작자리를 물려주겠노라며 못을 박았다. 라파엘라가 다 자라기도 전에 신전으로 쫓겨나듯 온 것도 그때 어머니께서 한 말의 영향이다.
라파엘라는 고개를 주억였다. 하는 수 없지. 한동안은 라파엘라 바알이 아닌 그냥 라파엘라로 사는 수밖에.
공작이 살아 있을 때는 바알 공작저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말자. 누님은 막내를 예뻐했으니 공작 사후에는 다시 라파엘라 바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바알 공작을 피해서 자바니야를 데리러 가는 길에, 라파엘라는 슬쩍 가브리엘을 돌아보았다.
저 지독한 사람 같으니라고. 가브리엘은 정말 빗속으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괜찮을까? 단장님을 더 말릴 걸 그랬나? 라파엘라는 괜스레 불안해져서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다시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사이에 가브리엘은 겁도 없는지 꾸준히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가브리엘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들켰나? 라파엘라가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다가 멈칫했다. 가브리엘을 가로막은 사람의 정체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아르빌?’
파라로스 기사단에서 냉큼 이적하고 마리크 주교한테 달라붙은 배은망덕한 아르빌이었다. 저, 저, 저놈이 이제는 기어코 단장의 앞을 막네. 고약한 늙은이처럼 혀를 차대며 라파엘라가 눈을 부라렸다.
단장님 아르빌 놈을 혼쭐 좀 내주세요. 라파엘라는 둘을 지켜보았으나 그새 거리가 멀어져 시야가 흐릿했다.
라파엘라는 눈이 그리 좋지 않아 두 사람의 형상이 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1년 내내 서류만 보고 있어 봐. 눈이 안 침침해지고 배기나.
두 사람은 무언가 대화하는 것처럼 멈추어 서 있었는데, 갑자기 아르빌이 단장을 확 껴안았다. 라파엘라는 어리둥절했으나 가브리엘이 끝내주는 말로 아르빌을 훈계했으리라 생각했다. 아르빌이 감동한 나머지 단장을 안고 못 배겼나 보지.
역시 우리 단장님. 라파엘라는 가슴이 훈훈해져서 코를 훔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가브리엘이 부탁한 대로 자바니야 주교를 찾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진짜 자바니야 주교가 진짜 문을 개방해 사람들을 들였을까?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어차피 찾아야 했으니 직접 가서 캐묻는 수밖에. 라파엘라는 서둘러 정원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