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177)
비가 잔잔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보이질 않으니 범위를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신전 어디에 있든 비를 맞을 수 있을 거다.
‘푸딩은 괜찮으려나?’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그야 지금 푸딩이 비를 내리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종탑의 성수들을 비처럼 뿌려대는 것뿐이지만.
내가 푸딩에게 여태 휴식을 권고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등에 비둘기 날개 달고 휘황찬란하게 등장하는 것 하나 가지고 푸딩에게 체력을 아껴두라고 권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할 적부터, 마리크 주교가 신전에 침입한 자들이 내 편을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단이라 명명하며 제압하려 들 거라고는 대충 예상했다.
궁핍하게 살면서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을 사람들이 성기사를 상대해 낼 리가 만무했다. 자칫하면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결과를 낳을지도 몰랐다. 멋대로 이용하면서 나 때문에 죽어 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하지만 ‘에반젤린 로한슨’이 죄가 없다며 편을 들어주고, 내게 동조할만한 사람들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한참을 끙끙 앓으며 고민하다가 결국 성수를 뿌려대기로 했다. 적어도 성수 아래서는 아무도 죽지 못할 테니까. 거기다 신전이니 성수도 충분할 거라고 여겼고. 이른바 현지 조달이다.
원래는 콸콸 흐르는 분수대의 물을 사용할 예정이었는데, 젤리가 갇혀 있던 종탑에 쌓아놓은 성수 양이 많아서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부족하면 분수대의 성수를 끌어다 쓰면 되고.
빗줄기가 거센 걸 보면 내 생각보다 종탑에 있던 성수 양이 꽤 많았나 보다. 비를 내릴 정도의 성수로 과연 몇 명을 치료할 수 있을까. 많은 양을 전부 써 버리는 게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안 쓰더라도 돈 많은 귀족이랑 성직자들만 펑펑 써댈 것 아니야. 갑자기 마음이 좀 편해졌다. 좋아, 죄책감 없이 마구 써대자.
리코에게는 쥐들을 신전 건물로 대피시키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주머니나 소매 사이로 숨게 하라고 미리 일러뒀다. 겸사겸사 쥐들을 통해서 예레미아랑 멜렉한테는 아예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전해두기도 했고.
나쁘지 않은 해결책이었다.
다만 푸딩이 죽어라 고생하는 것만 빼면.
푸딩은 악마였고, 악마는 성수에 약하다. 고작 성수에 둘러싸였다고 젤리의 위치도 찾지 못했으며, 성수 몇 방울에 닿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성수를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조작하는 데서 오는 부담도 클 거다. 과연 푸딩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게 하늘을 보고 있으니 얼굴에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냥 차갑기만 한 비였다. 나한테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푸딩이나 젤리한테는 그렇게 위협적인 게 참 신기했다. 아무리 봐도 그냥 맹물 같은데 말이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렇다고 마리크 주교 앞에서 자존심 상하게 덜덜 몸을 떨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워서 떨어댄 거 가지고 내가 포위당해서 겁을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얼굴에 떨어진 빗물을 손으로 닦아 내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날 포위하고 있는 기사들이 내가 손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칼을 바로잡는 게 보였다.
무슨 궁지에 몰린 쥐처럼 날 경계해서 자칫 잘못하면 칼에 베일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무서워해야 하는 건 내 쪽 아니야? 왜 검을 들고 있는 건 자기들이면서 나를 두려워하는 건데. 무슨 내가 폭탄처럼 터지기라도 해? 이러다 숨 쉬는 것도 하지 말라 하겠네.
기사들이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 내 잘못은 없었다. 비가 내리기 전에,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도와 달라며 ‘로한슨 영애님!’ 하고 연호했었다. 그때는 솔직히 무슨 사이비 교주 유사체험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나 이러다가 천벌 받는 거 아닌가 싶었다고. 어쨌든 태양신이 실존하는 세계이긴 하니까.
사람들이 기도하는 걸 보면서 나마저도 살짝 소름 돋을 정도였는데 지켜보고 있는 태양신 신도들은 오죽했을까.
가만 놔두면 신흥 사이비 종교가 창설될 거라 생각했는지 몇 명이 달려와 나한테 검을 겨누더라. 그래놓고는 지금 덜덜 떨며 무서워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기사들은 나를 주시하면서 종종 ‘로한슨 영애님을 구해라!’ ‘개자식들, 로한슨 영애님을 놓아줘!’라고 외치면서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발길질해 떨쳐 내기도 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가자 내 주변은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 폭풍의 눈이라도 되는 마냥 조용해졌다.
나머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쏟아지는 비에 상처가 씻은 듯 회복한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쓰러지지를 않았다. 천사가 날 구해낸 모습도 봤고, 비가 내리면서 태양신께서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까지 더해지니 그냥 인간 불도저였다.
상대하는 쪽이 힘들어지는 건 당연했다. 비를 맞아서 춥고, 옷은 물을 먹어 무겁고, 칼을 휘적대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 기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지쳐갔다.
거기다 애써 무시하곤 있겠지만, 무려 성수가 내리는 거다. 푸딩이 천사 행세한 건 환상이라며 치부할 수도 있었지. 손끝에 닿는 감각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혼란을 느낀 사제 한 명이 마리크 주교에게 불안을 토로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교님, 이번에도 저희가 환각을 보는 겁니까…?”
마리크 주교도 참 대단하긴 하다. 야심 차게 준비해서, 목숨 걸고 종탑 위에서 몸까지 내던졌더니 말 몇 마디로 내 노력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렸잖아. 리코를 확성기로 쓰느라 목소리가 잘 들렸던 것뿐인데 그걸 가지고 트집 잡을 줄은 몰랐다.
마리크 주교가 이번에는 어떻게 대답하려나. 나부터가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였다.
마리크 주교 선수. 사람들이 시체이며, 내가 시체를 좀비처럼 움직인다고 변명했습니다.
사제들과 기사들은 믿는 눈치인가요? 아, 찝찝해 보입니다. 하지만 군말 없이 명령을 따르는군요. 뇌를 맡겨놨나 봅니다.
마리크 주교의 말을 중계하면서 방송을 진행하는 캐스터처럼 해설을 얹었다.
마리크 주교는 기사들을 물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내도 소용이 없으니, 기사들은 결국 사람들을 죽이는 대신 우선 기절시켜 머릿수를 줄이는 것으로 제압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바로 마리크 주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삿된 존재를 상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세요!”
마리크 주교가 저러는 덴 이유가 있었다.
제압만 한다면 모를까, 피가 튀는 이상 푸딩은 계속 성수를 뿌릴 수밖에 없었다.
주교라서 지식이 많은 것인지, 아자젤을 부려먹은 전적이 있어서 아는 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마리크 주교는 나보다 악마에 대해 박식했다.
비를 내리는 게 푸딩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했으리라. 푸딩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는 거다. 어느 쪽의 체력이 먼저 닳을지의 소모전이라는 걸 파악했다는 의미였다.
마리크 주교의 말에 혀를 찼다.
“뭐가 우습지?”
내가 혀 차는 소리를 들었는지 날 포위하던 기사 중 하나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얘 좀 봐라, 난 웃은 적 없는데 생사람 잡네.
“지금 상황이 무슨 장난처럼 느껴지시나 봐?”
기사가 핏발이 선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누가 보면 내가 악역인 줄 알겠어요. 사람들 공격하는 건 성 기사들이고, 생명을 경시하는 건 댁네 주교님이 아닐까요?
내가 예전처럼 사람들을 무슨 개미처럼 생각했으면, 사람들 살리자고 우리 고양이를 갈아 넣고 있겠어? 오죽했으면 지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자도 후기에 별점 5개 주고 갈 정도였다.
난 따지고 보면 나만 살면 된다는 쪽인데 어쩌다가. 사람 살리는 건 내가 아니라 사제들이 할 일 아니냐고.
“이, 이딴 환각이나 보여 주고… 우리가 가소로워 보이십니까?”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몸이 덜덜 떨리는지 검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했다. 본 적 있었나 생각해 보니까 마리크 주교한테 거짓 증언을 했던 사람이었다. 제라크라고 했었나. 마리크 주교한테는 정중하게 그지없더니 아주 나는 만만한가 보다?
“제라크 경. 지금 보고 계시는 걸 정말 환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이름을 부르니까 제라크가 기겁을 해댔다. 아니, 마리크 주교가 네 이름 불렀잖아. 난 귀가 없니? 조금 전에 마리크 주교의 문답 쇼를 노려보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나 말고도 네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 열 명은 되겠다.
하지만 기왕 오해받은 거 잘 이용하기로 했다. 원래 교수님이 이름 부르면 소름 돋잖아. 사신이 자기 이름 부르는 거랑 같은 이치다.
“절 구해 준 천사께서 제라크 경 같은 신실한 분이 마리크 주교의 농간에 눈멀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에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경을 귓가에 속삭여주셨어요.”
“입 닥쳐! 천사는 무슨!”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블러핑의 성공률이 변변찮았다. 가스라이팅의 귀재가 곁에 있어서 그런지 잘 안 먹히는 것 같았다. 하긴. 마리크 주교의 기막힌 가스라이팅을 들으며 살았을 테니 내 수작이 통할 리 있나.
그럼 방향을 바꿔볼까?
계속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었다. 푸딩의 힘이 마모되기 전에 나도 수를 써야 했다. 비가 그치기 전에 기사들이 검을 내리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려면 이 포위에서 먼저 벗어나야 할 거 아니야.
“제라크 경. 사실 경도 환상을 본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계시잖아요?”
조금 더 제라크를 긁어대는 방향으로 노선을 틀었다. 회유가 안 된다면 도발이다.
“마리크 주교는 제가 레아라고 했으나, 잘 생각해 보세요. 감히 신의 뜻을 멋대로 해석하며 신도들을 멋대로 부리는 마리크 주교야말로 오만하지 않나요?”
“누굴 보고 오만하다고…?”
“제라크 경, 악마가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진정하세요.”
“맞습니다. 굳이 들어줄 필요 없으니 무시하세요.”
제라크가 버럭대기 무섭게 함께 날 포위하고 있는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제라크를 말렸다. 하지만 어디 찔리는 게 제라크뿐일까. 대화를 주워들은 다른 기사들도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제라크는 기사들의 만류에 화를 억누르며 분을 삼켰다. 어쭈, 좀 잘 참네? 기껏 틈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이대로 진정하게 둘 수 없지.
“그럼 어째서 직접 본 기적이 아닌 마리크 주교의 말을 신망하는 건가요? 신전에 발을 디딘 자들이 이단이라 간주할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건 경들도 아시겠죠. 신께서 그 사실을 아셔서 저와 안타까운 자들을 가엽게 여겨 천사를 보내시고 성수를 내리기까지 하셨는데 여전히 저를, 아니 라헬님의 뜻을 불신하고 계시니….”
조금 더 도발이 잘 먹히지 않을까 해서 마리크 주교의 말투를 빌려왔다. 이래 봬도 연기로 마리크 주교 추종자였던 아르빌도 속여넘겼던 몸이다. 당한 게 많아서 그런지 마리크 주교 흉내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제겐 제라크 경이 꼭 라헬 님이 아닌 마리크 주교를 숭배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이게 결정타였나보다.
“내가 그 더러운 입 닥치라고 했지!”
소리 지르는 목에 핏줄이 섰다. 눈은 형형했고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제라크는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더 격분하는 거다.
일부러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웃는 연습 거세게 해서 이럴 때 쓰네. 가브리엘 앞에서 어색하지 않게 웃으려고 연습한 건데 왜 남한테 보여줘야 하는 건지…. 하지만 무표정보다 웃는 쪽이 더 상대를 도발하는데 효과가 좋아서 안 웃을 수도 없다.
“이 빌어먹을 악마 새끼가…!”
“…제라크!”
제라크가 내게 달려들려고 했고 그를 막기 위해 여럿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대형이 무너졌다.
“진정 좀 해! 주교님께서 에반젤린 로한슨은 죽이지 말라고…!”
왜 나를 경계하고만 있나 했더니 마리크 주교가 미리 날 죽이지 말라 언질 줘놨나 보다. 추측해 보건대 나 때문에 상황이 틀어졌으나 적어도 내 처우만은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처리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시끄러워! 뭐라 하는지 못 들었어? 지금 죽여야 해. 더는 수작질을 못 부리게 지금 죽여야 한다고!”
그러나 제라크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마리크 주교의 명령을 지킬 생각이 없나 보다. 좋아. 마리크 주교를 숭배한다는 말은 취소하자. 주교님! 기사 교육 잘못시키셨어요!
결국, 제라크는 제 동료들에게 검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도 않았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이 베여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던 기사들의 환부가 비를 맞아 빠르게 아물어갔다. 저 기사들은 이제 비가 성수라는 걸 믿겠네.
“…너희도 환각이지? 그렇지?”
제 동료들이 순식간에 낫는 모습을 부정하듯이 제라크가 실성한 채 중얼거렸다. 환상이라고 치부했으니 아예 이성이 날아가서 제대로 된 상황 파악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 지나쳤나?
하지만 단순히 내가 잘못했다기에는 제라크의 상태가 지나치게 괴이쩍기도 했다.
내가 도발한 말에 화난 데다가 피 냄새와 비명까지 들리니 흥분해서 잠깐 이성을 잃을 수는 있다. 하지만 마리크 주교의 명령도 어길 정도로 이성을 잃는다고?
꼭 음주로 자기 간수를 못 하는 사람 같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눈이 좀 풀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진짜 근무 중에 술 마신 거 아니야? 진짜 그런 거면 대단한 성기사 납셨다. 신전이 부패의 정점이라서 성기사가 음주하는 건 별로 가십거리도 아니지만.
제라크가 술 마시고 추태 부린 덕분에 포위망이 허물어졌으나, 그 탓에 다른 기사들도 바닥을 뒹구느라 날 지킬 사람도 없어졌다.
제라크가 손을 치켜들었다. 손에 들린 검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저 칼이 곧 나를 찌를 것 같은데 미친…. 지금 성수를 내리고 있는 푸딩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푸딩이 성수 안 뿌리면 나 대신 수십 명이 죽을 거다.
어쩔 수 없다. 찔리기 전에 검을 잡아내는 수밖에. 잘리는 건 아니겠지? 상처가 낫지 않는 걸 보이면 조금 곤란한데.
잠시 낭패를 보았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익숙한 형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열기가 훅 끼쳐왔다. 내게 등을 지고 있으나 누군지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니,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가브리엘 경?”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제라크를 가볍게 막아낸 가브리엘이 검을 쳐냈다. 크게 궤적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간 검이 바닥에 팍 꽂혔다.
자기가 무슨 남주도 아니면서 또 드라마처럼 나타났다며 주접을 떨려던 참이었다. 가브리엘은 무장이 해제된 기사를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으, 으아악…!”
피가 튀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어 내게 닿는 것은 없었다.
가브리엘은 내게 흉측한 광경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 내 시야를 막아서 보이는 건 가브리엘의 등뿐이었다.
나도 신장이 작지 않았는데 가브리엘은 그런 나보다 머리 하나 차이만큼 더 크다는 게 실감 났다. 가브리엘과 나란히 서 있을 때도 그는 날 내려다보지 않았으니 등을 보고서야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가브리엘이 날 보호하듯 서 있으니 피 한 방울 튀지 않았으나, 제라크의 비명 섞인 울음소리만큼은 잘 들렸다. 옆으로 한 발짝 옮겨 살짝 가브리엘의 뒤에서 벗어났다.
살이 베이는 고통에 기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성수의 축복은 마찬가지로 발휘되어, 그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당황스러워서 그냥 눈만 동그랗게 뜬채 눈을 깜빡였다.
가브리엘이 사람을 베다니? 아니, 물론 기사니까 검을 휘두들긴 하겠지. 그런데 가브리엘이 사람을 해쳤다는 게 눈앞에서 벌어졌는데도 믿기지 않은 탓이다. 마리크 주교를 옹호하는 사제들 심정이 딱 이런 걸까? 이런 역지사지는 필요 없는데.
가브리엘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다시 겨누었다.
“아문 상처를 두고 언제까지 어수룩하게 굴 거지?”
가브리엘의 말에 비명을 지르던 제라크가 제 몸을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상처가….”
“직접 경험하니 어떻지? 아직도 환상처럼 느껴지나?”
아직도 환각 같다면 다시 베어주겠다는 기세였다. 차갑고 고압적인 말투가 낯설었다. 가브리엘은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존대를 거둔 적이 없으니까.
“환, 환상이 분명하지. 방금도 그냥 날 베는 환상을 보여 준 것뿐이잖아!”
제라크의 말에 가브리엘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제라크의 복부를 베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가브리엘이 정말 다시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제라크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기에 도망치지도 못했다.
낮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에는 어떻지?”
평소의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엿볼 수 없는 무심한 어조였다. 냉혹하리만큼 고요하고 잔잔한 어조에는 분노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섬뜩하기까지 했다.
그야 가브리엘의 평이한 어투는 제라크처럼 이성을 잃어서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오로지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사람을 고의로 상처입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말 한번 잘못했다가 호되게 당한 제라크는 또 한 번 베일까 두려운지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제라크는 새하얗게 질린 채로 덜덜 떨며 가브리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래 저게 정상이긴 했다. 사람들이 성수 내린다고 불도저처럼 달려드는 게 보통 심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 신전으로 몰려온 사람들이 얼마나 처절한지 잘 알겠지.
말도 못 하는 제라크를 두고 기사들이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개 중 몇은 가브리엘이 구속에서 풀려났다며 고할 생각인지 마리크 주교에게 달려갔다.
“주, 주교님!”
불러다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 기사들에게 마저 손을 쓰려는 듯 발을 떼었다. 가만히 두라는 의미로 가브리엘을 불렀다.
“경.”
불렀는데 가브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가브리엘 경, 절 보세요.”
다시 한번 부르고 나서야 가브리엘이 비스듬히 몸을 돌리며 내게 한 발짝 멀어졌다.
왜 여태 뒤만 보여 줬나 했더니 앞이 엉망이라서 그런 거였다. 제라크의 피가 옷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튀어 있었다.
축 가라앉은 머리와 긴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비를 맞아 평소보다 희고 창백한 피부에 튄 피의 붉음이 더욱 대비되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어째서 붉은 색채에 그리 흥분하며 욕망하는지 얼핏 이해하고 말았다. 입술 자국도 아닌데 금욕적인 얼굴을 물들인 색이 외설적으로 느껴져 순간 충동이 일었다.
마치 설원에 찍힌 발자국 같다. 더럽히고 싶은 욕망을 이해하면서도, 이미 찍혀진 발자국을 보며 나보다 먼저 낙인을 찍은 선객이 있다는 사실에 삐딱하게 화가 솟아 버렸다. 사실 가브리엘에게 튄 피는, 그가 사람을 베어낸 데서 묻어난 폭력의 잔재인데도 말이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자 가브리엘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날 보라고 했던 말 때문인지 시선은 내게서 비켜나가지 않았다.
“…이런 흉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흉한 꼴이란 건 직전의 칼부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피로 물든 걸 보고 하는 말일이. 만약 후자라면 지나치게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흉할 리 없잖아요. 오히려….”
오히려 구미가 당겼다. 붉은색에 사람의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작용도 있던가? 그럴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식인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는데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단호히 부정하는 말에 가브리엘이 수줍어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야 내가 아는 가브리엘 같았다. 피범벅이 돼서 수줍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조금 전에 실랑이하면서 가브리엘도 다친 걸까? 옷이 너덜너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받쳐입은 셔츠만 그렇고, 겉의 재킷은 유난히 멀쩡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가브리엘이 입고 있는 것도 미샤가 준비해 준 겉옷이 아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가브리엘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재킷을 여몄다.
“오는 데 방해가 있어서 잠시 빌렸습니다.”
기사들 겉옷을 벗겨 입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손에 든 검도 가브리엘의 것이 아니겠구나. 눈으로 가브리엘을 훑어보며 물었다.
“다친 곳은요?”
“제가 영애님의 허락 없이 죽을 리가요.”
대답은 잘해. 그래도 다친 곳은 없다는 말을 들으니 안도가 덮쳐왔다. 지금처럼 차라리 남의 피를 뒤집어쓰는 게 낫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도 별로였다. 계속 보고 있기에 속이 끓어올라서 적어도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손을 뻗으니 가브리엘이 슬슬 뒤로 몸을 빼는 게 보였다.
“더러워지십니다.”
가브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내 옷을 더럽힌 색이 불결하다는 마냥 옷자락이 못마땅한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나한테 피가 닿을까 저러는 것 같은데 왜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감히 내 손을 피해?
“가만히 있어요.”
노려보며 말하니 가브리엘의 몸이 굳었다. 옷 소매로 조심스럽게 가브리엘의 얼굴을 닦았다. 흰 옷소매가 금방 붉게 물들었다.
머리는 푹 가라앉아 있고, 속눈썹 끝에서 맺힌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다행히 비가 내리는 덕에 얼굴의 피는 금세 지워졌다. 손에 묻어나오는 게 없는지 확인하려 손을 볼에 문대니 잔뜩 붉게 물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영애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냥 얼굴 한번 만진 거 가지고 뭐. 내가 깨물기라도 했어? 무슨 입이라도 맞췄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보는 눈이 많은 게 누구 때문인데. 괜히 괘씸해졌다. 그야 많겠지. 구속해놓은 제물이 갑자기 멋들어지게 등장했는데 누가 안 봐?
“왜 오신 건가요?”
너무 매정했나 싶어 순간 아차 싶었다.
“상처가 낫지도 않으니 피해계시기로 하셨잖아요.”
서둘러 덧붙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멱살 잡고 흔들어대고 싶었다. 잠깐 보이질 않길래 슬쩍 빠져 있는 줄 알았더니 이 난장판에 왜 나타나냐고!
내가 캐묻자 가브리엘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비가 많이 내려서요.”
그 비 내리는 게 우리가 계획한 거잖아?
가브리엘은 느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영애님께서는 몸이 차시니, 추위에 떠실까 걱정되어 혼자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정작 가브리엘도 비를 맞고 있으니 손에 와닿는 온기가 그리 따뜻하지도 않았는데 말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어리석기는. 달짝지근한 감정에 뇌가 녹아버리기라도 한 건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가브리엘은 푸딩이 없으니 날 지킬 사람이 없어 걱정되어 날 찾아온 것 같았다.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세상에 날 걱정할 수 있는 건 가브리엘을 포함해 한 손에 꼽을 거다.
단맛으로 속이 충만해졌다. 눈시울이 시큰해지는데 차마 고맙다며 인사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나 역시 가브리엘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성수 아래 노출되어 있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거기다가 다친 곳이 성수로 치유되지 않는 모습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마리크 주교가 또 어떤 현란한 말재간으로 가브리엘에게 죄를 뒤집어씌울지 몰랐다.
“경의 몸도 찬걸요.”
괜스레 타박하며 가브리엘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다디단 과자를 먹고 난 뒤에 입에 끝 맛이 돌듯이, 가브리엘에게 닿았던 손에서 뭉근한 열감이 잔재했다.
한바탕 가벼운 설전을 마치고 나서야 가브리엘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가브리엘이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숨결이 내게만 닿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푸딩 씨가 오래 버틸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도 무리하고 있을 거예요.”
물론 푸딩은 내가 부탁한 이상 제 몸을 갉아 먹더라도 계속해서 비를 내려 줄 테지만, 그러다 진짜 우리 고양이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다치기라도 하면….
불쾌한 추측에 호흡이 들떴다. 내게 예속된 것을 잃을 뻔한 공포는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 감내하기 버거웠다. 젤리의 부상을 막 보았을 때는 심장이 따끔대기까지 했다.
그러니 더는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로 비롯되어 죽는 꼴 따윈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럼 서둘러 상황을 걷잡는 게 좋겠군요.”
부쩍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가브리엘이 날 달래듯 지긋하게 설명했다.
“라파엘라에게 자바니야 주교님을 불러 달라 부탁했습니다.”
“자바니야 주교님이요?”
애매한 인선에 의문을 띄웠다.
그 사람 전에 신전에 방문했을 때 나한테 말을 걸었던 사람 아닌가? 가브리엘을 멋대로 부려먹는다고 라파엘라가 침이 튀도록 욕했던 시아버지인지 악덕 상사인지 도통 모를 사람 말이다. 그 사람을 왜 부르는 거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가브리엘이 짧게 덧붙였다.
“마리크 주교를 경계하려면 대척점에 설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긴 사족 없이도 가브리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대강 이해가 갔다.
가브리엘은 말 그대로 마리크 주교를 대신해 우리 편에 들 신전 소속의 상징을 찾는 것이다. 그냥 마스코트 같은 거지.
제라크나 다른 사람들을 보니 기사들은 지금 마리크 주교가 내심 옳지 않다고 분명 인지는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애써 진실을 외면하는 이유는 권력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단으로 전락할 거란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지금 마리크 주교를 지탱하는 것은 여태 쌓아온 권세와 그녀의 신분 자체가 가진 정당성이었다.
고작 사제가, 고작 기사가. 그 누가 신의 총아에게 반기를 들 수가 있을까.
하지만 자바니야 주교는 입장이 다르겠지. 자바니야 주교도 나이만큼 신전의 오랜 터줏대감이었고, 이해는 가지 않지만, 인망도 좋다고 들었고.
내가 마리크 주교를 매도하며 악행을 고발한다면 그건 악마가 누명을 씌우려 간교한 거짓을 내뱉는 것이다. 그러나 자바니야 주교가 비슷한 말을 한다면 그건 부패한 주교를 비난하는 정의로운 발언일 것이다.
문제는 자바니야 주교도 마리크 주교한테 콩고물 받아먹으려고 달라붙었다는 거지.
“자바니야 주교님께서는 마리크 주교의 수족이 아닌가요?”
과연 자바니야를 신뢰할 만할까?
“자바니야 주교님은 신전의 문을 열어 달라는 제 어리광도 들어주셨습니다. 지금은 잠시 야욕에 눈이 머시긴 했지만 사실 정도를 아시는 분이니 결국 마리크 주교를 막아 세우는 일을 거들어주실 겁니다.”
가브리엘이 자바니야를 두둔했다.
그러니까 문을 열어줄 사람이라는 게 자바니야 주교였어? 대체 그 사람의 뭘 믿고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긴 거지?
라파엘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자바니야 주교가 개문한 건 마리크 주교에게 승기를 따내고 자신이 실권을 잡으려는 음흉한 속셈 때문일 거라고 반박했을 거다.
진심이냐는 듯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주한 두 눈은 탁하지 않고 투명하기만 해서 자바니야를 향한 신뢰가 고스란히 나에게까지 닿았다.
마구 헤집어대며 물장구를 친다면 저 선명한 푸른색이 혼탁해질까.
라파엘라가 왜 그렇게 자바니야를 두고 분광하는지 이해가 갔다. 어린 시절에 입은 은혜를 갚는다며 온전히 신뢰만 주는 모습에 질투가 날 지경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것도 내 앞에서, 방금까지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어느새 가브리엘에게 감화되어, 가브리엘이 내게만 보이는 특별함에 중독되었나 보다. 가브리엘의 과거마저 독식하고 싶었다.
자바니야 주교가 가브리엘에게 은인이라 큰 의미가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겠다.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를 거두어줬으니 새끼 오리가 각인하듯 자바니야 주교를 따르는 거겠지.
아, 가브리엘 내가 구할걸. 불현듯 생각이 튀었다. 그런데 확 구미가 당겼다. 나도 한 구원하지 않나? 그때의 가브리엘을 내가 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정하자. 생각해 보면 가브리엘이 자바니야 주교를 끌어들인 것도 사실 다 날 위해서잖아?
“경이 신뢰하신다면 저도 자바니야 주교님을 믿어 볼게요.”
하지만 내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가브리엘이 믿는다니까 나도 한 번 믿어 보는 거지 그냥.
물론 자바니야 주교가 오는 걸 가만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전에 기사들에게 의심을 심어줘야 했다. 그래야 마리크 주교와 자바니야 주교가 편 가르기를 할 때 자바니야 주교에게 냉큼 붙게 만들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리크 주교를 헐뜯을만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리크 주교를 사악한 사람이라고 되려 몰아넣는 거다.
문제는 그 방법이 뭐냐는 거다. 천사가 나타나도 소용이 없고 마른하늘에 비가 내려도 마리크 주교의 말만 듣는 사람들을 어떻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할까?
미처 방법을 떠올리기도 전에 마리크 주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가브리엘을 보고 도망치듯 후퇴했던 기사들이 불러온 것이었다.
마리크 주교는 경배에 둘러싸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애로운 사제보다는 꼭 사신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옷가지까지 검으니 더욱 사신이란 말에 걸맞았다. 마리크 주교가 여태 죽인 목숨의 수만 헤아려봐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꽁꽁 가린 베일 아래에는 어쩐지 해골이 있을 것만 같다. 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멋대로 낫을 휘두르며 가차 없이 사람의 숨을 거두어 가는 해골이.
잠시 생각이 튀었다가 전구가 켜지듯 불현듯 베일 아래 자리하고 있을 요요한 얼굴이 떠올랐다.
베일? 모두가 직시하는 곳에서 마리크 주교의 베일을 벗길까?
마리크 주교는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은 어린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고서처럼 신의 총애를 듬뿍 받아 노화하지 않는 건지, 어떻게 젊은 모습을 가졌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게다가 소문과는 달리 화상 흉터로 얼굴 전체가 뒤덮여있지 않는다는 것도 그랬다. 신전에서 자란 가브리엘마저 마리크 주교의 온 얼굴이 화상 흉이 져 있다고 알고 있었다.
소문과 다른 얼굴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잠시 동요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을까?
화상 흉…. 잠깐, 잠시만….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왜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마리크 주교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분명 마리크 주교 말고도 얼굴에 화상 흉이 진 사람의 이야기를 흘린 듯이 들은 적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다가 그 정체를 깨달았다. 들은 게 아니라 읽은 것이다.
조금 다급하게 가브리엘에게 캐묻듯이 답을 구했다.
“가브리엘 경. 마리크 주교의 방 아래 있다던 지하실을 기억하시나요?”
“네. 예레미아 님이 편지로 전해 주신 부분이 아닙니까? 지하실에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이 갇혀있다는….”
예레미아의 편지에서 아주 잠깐 서술되어 기억 한구석에 박혀있었다.
“그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요?”
가브리엘은 침잠한 낯으로 답을 하지 못했다. 가브리엘은 그 사람이 죽었으리라 판단 내린 듯했다. 존재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묵인했다는 것이 걸리는지 설핏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내 잘못이다. 가브리엘한테 괜한 걸 물어서 심란하게 했네. 적임자는 따로 있었다.
“리코.”
내 부름에 비를 피해 옷 속에 숨어있던 쥐가 꼼지락댔다. 성수 때문에 답할 정도의 기력은 없는 것 같았다.
“부탁할 게 있어. 마리크 주교의 방을 찾아 지하실을 확인해주겠니? 지하실에 사람이 살아 있는지 확인해주기만 하면 돼.”
리코가 알았다는 듯 작게 울었다. 성수를 피해서 쥐들 일부는 신전의 건물 지붕 아래로 피해있었다. 건물 안까지는 성수가 닿지 않으니 리코가 움직이기 훨씬 수월할 거다. 젤리를 찾느라 신전을 이 잡듯이 뒤져댄 덕에 길도 잘 찾을 테고.
“영애님. 그… 사람을 찾으시는 까닭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타개책이에요.”
어쩌면 지하에 있는 것은 예레미아가 찾아낸, 마리크 주교의 약점일지도 몰랐다.
마리크 주교는 ‘아자젤’을 수상쩍게 여겼다. 그래서 ‘아자젤’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예레미아가 알게 된 가브리엘의 행방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신분이며, 심지어 마리크 주교가 사라카라는 하녀의 행세를 한다는 사실까지 전부 마리크 주교가 의도적으로 흘린 걸 테다.
가브리엘을 본 예레미아는 내게 급히 편지를 보냈고, 편지의 행적을 쫓은 마리크 주교는 ‘아자젤’이 바뀌었다고 확신했겠지.
그러나 마리크 주교는 정작 예레미아의 편지 내용은 읽지는 못해 세세한 내용까지는 미처 모를 것이다. 거기서 오는 가설이었다. 만약…. 만약 편지에 마리크 주교가 숨기려 했던 정보가 들어있었다면?
기억을 더듬어봐도 유독 도드라지는 게 하나 있었다.
예레미아의 편지에 기술되었던 내용은 대부분이 황성에서 얻어낸 정보들이었다. 오로지 예레미아가 마리크 주교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 찾아간 신전의 지하실만 빼고.
예레미아의 추측대로 가족일지 몰라도 그 지하실에 갇힌 사람이야말로 마리크 주교의 역린일것이다.
태양신의 신도들은 신의 눈을 피해서 불순한 일을 저지를 때 지하를 애용했다. 하물며 마리크 주교의 방에 붙은 지하는 신전의 사람들도 존재를 모르는 숨겨진 지하였다.
아니지, 잠깐. 하루트는 마리크 주교의 지하실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이미 아는 정보라 기이함을 알아채는 게 늦었다.
분명 하루트는 지하실에서 빠져나온 사라카와 마주쳤다고 했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지하실에 갇혀있는 사람 마리크 주교의 가족 같은 게 아니라 하루트가 봤다던 사라카인 게 아닐까?
하루트는 어린 시절 사라카를 한번 본 이후로는 다신 마주친 적이 없어 죽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신을 직접 확인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죽었다는 추측이다. 사실 사라카는 그 이후로도 계속, 줄곧 지하에 갇혀있던 게 아니었을까?
“영애님.”
때마침 리코가 날 불렀다.
“마리크 주교의 지하실에 붉은 덩어리가 살아 있어요.”
붉은 덩어리? 리코의 언어 선택이 괴이쩍기는 했지만, 지금 몸이 나뉘어 사고가 조금 어려진 걸 고려하자면 화상 흉터를 두고 그리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진짜 빨리 찾았네.
“고마워 리코.”
괜한 행동을 했다가 마리크 주교에게 리코를 들킬라, 쥐의 턱을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사라카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살아 있단다. 사실 사라카인지 확신치 않았지만 갇혀있는 게 진짜 사라카가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누이 말했지만, 오늘 내 전략은 날조였다. 당하고만 살 수는 없지.
사라카의 존재를 증언해줄 하루트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마리크 주교의 지하실에 사람이 갇혀있다는데 이보다 충격적인 게 뭐가 있을까.
잠시만….
지하실에 화상을 입은 채 시체처럼 누워있는 사람과, 기이할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는 마리크 주교라. 이거 마리크 주교를 몰아가기 수월해질 것 같은데? 예전부터 여인의 피를 마시며 젊음을 유지하는 마녀 이야기는 유구한 클리셰였다. 오죽했으면 나한테 붙은 소문 중에서 식인한단 이야기가 있겠어.
이단을 고문하는 건 별다른 죄가 되지 않겠지만, 젊음을 수혈한다는 건 딱 봐도 수상쩍고 사악해 보였다.
게다가 자신을 뻔뻔하게 사라카라고 소개하며 하녀 행세까지 했으니 다들 혀를 내두르지 않을까. 어떻게 지하에 가둬둔 아이의 이름까지 멋대로 쓰냐며 말이다.
결정했다. 마리크 주교의 베일을 벗겨야겠다. 그것도 아주 활활 타오르는 극적인 방법으로.
어느새 마리크 주교는 코앞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주교님….”
바닥에 쓰러진 제라크가 화색을 뛰며 엉금엉금 기어 마리크 주교에게 향했다.
“주교님 정답을 말해 주세요. 제가… 진짜 환각을 보는 겁니까? 그렇죠? 환상을 보는 거죠?”
마리크 주교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기만 했다. 아마 제라크를 감흥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마리크 주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히 로한슨 영애에게 검을 올리지 말라 했을 텐데요.”
그러나 마리크 주교가 가장 먼저 타박한 것은 쓰러진 제라크였다. 마리크 주교는 애원을 단칼에 잘라냈다.
“제라크 경. 내 명이 우스웠습니까? 이 마리크의 말에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나요?”
마리크 주교의 말에는 사람의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다. 발음에서부터 남달라 특별한 어조였다. 질책하는데도 마치 손을 맞잡고 함께 기도해주는 수녀처럼 자애로운 구석이 있어 밉보일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라크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토악질하듯 소리를 치며 부정했다.
“저 사악한 마귀가 주교님을 두고 뭐라 지껄이신 지 아십니까? 주교님께서 오만하다고, 저희가 태양이 아닌 주교님을 섬기고 있다며 개 같은 망언을 내뱉어댔단 말입니다!”
아이고, 다일러라. 아주. 가브리엘한테 겁먹어서 입도 벙긋 못하더니 제 편 생겼다고 아주 살판 났다. 솔직히 내가 한 말이 틀린 것도 아니면서 왜 화를 내는 거래? 지금 꼴만 봐도 마리크 주교를 숭배해대는 게 아주 잘 보였다.
그러나 마리크 주교는 참으로 오만한 신이다. 저를 숭배하는 신도에게 자비조차 베풀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마리크 주교가 차가운 어조로 제라크를 할퀴기 시작했다.
“그래서. 로한슨 영애를 죽이고 싶었나요? 시신은 박제하고, 안구는 전시하며, 피는 크리스털 잔에 따라 와인처럼 음미하고 싶었겠지요. 그런 욕망이 제라크 경을 지배한 게 아니고서야 내 명을 무시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제라크를 욕하는 줄 알았더니 말로 도륙 나는 건 바로 나였다.
적나라한 욕망은 제라크의 속내를 파헤친다기보다 마리크 주교의 바람을 나열하는 것 같았다.
날 가지고 별짓을 다 하려고 하셨네. 마리크 주교는 날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게 잘 느껴졌다. 사람이라기보단 전리품 취급에 가까웠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심지어 사제나 기사들마저도 마리크 주교에겐 비슷할 테지만.
내가 이 세상을 책 속이라 여겼을 때, 날 상대하던 사람들의 기분도 이랬을까? 마리크 주교를 보고 있으니 엄청나게 반성이 됐다. 아니지. 내가 마리크 주교처럼 막돼먹지는 않았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주교님을 욕하는 게 듣기 싫어서….”
“정녕 날 위했다면 내 명을 우선해야 했답니다.”
마리크 주교가 하는 꼴을 가만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리코를 호출했다.
“리코. 푸딩에게 빗줄기를 조금 약하게 해달라 전해 주렴.”
리코가 말을 잘 전달했는지 어느새 물줄기가 조금 약해져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졌어도 문제가 없는지 사람들이 엉켜 있는 쪽을 살펴보았다.
기사들은 눈에 띄게 지쳐 보이는 게 보였다. 막 서슴없이 사람들을 베어내던 초반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아무리 베어내도 의미가 없으니 슬쩍 손에 힘을 풀고 검을 휘두르는 시늉만 하기도 했다. 물줄기가 약해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듯싶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마리크 주교는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자 금방 눈치를 챘다.
“…드디어.”
마리크 주교가 오랜 탄식을 터트렸다. 푸딩의 힘이 슬슬 한계를 향해간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마리크 주교는 제라크를 뒤로하고 내게 향했다. 가브리엘이 날 보호하듯 앞을 막아서자 마리크 주교가 차갑게 일갈했다.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건 자바니야 주교에게서 배운 버릇인가요?”
갑자기 자바니야의 이름을 꺼내기에 깜짝 놀랐다. 자바니야와 마리크 주교는 원래 같은 편이 아닌가? 그런 것 치고는 자바니야를 멸시하는 듯한 냉담한 목소리였다. 혹시 자바니야가 가브리엘을 돕기로 변심했다는 대화를 주워들은 건 아니겠지?
“스스로 목줄을 차고 묶여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멋대로 줄을 풀고 다른 주인을 찾아가다니요. 이래서 떠돌이는 개는 기르는 게 아니라니까 자바니야 주교도 참….”
마리크 주교가 여상스럽게 핀잔을 놓았다. 지껄이는 말을 들어보니 마리크 주교는 자바니야의 변절을 모르는 어투였다.
그냥 가브리엘이 자바니야를 은인처럼 생각했으니 일부러 신경을 긁어대려고 자바니야를 거론한 듯했다. 은인인 자바니야가 아닌 내 편을 들고 있는 가브리엘의 작태를 꼬집어대기까지 했고.
자바니야를 낮잡아보는 건 그냥 원래 그랬나 보네. 마리크 주교보고 자애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진짜 안과 좀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안과가 없지.
마리크 주교는 한술 더 떠서 가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고상하게 발음 사이로 뒤틀린 심사가 묻어나왔다.
“어머. 실수했네요. 기사 단장께서는 혈통 있는 개였죠?”
“주교님께서는 그 혈통을 탐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가브리엘이 마리크 주교의 모멸 찬 말에 익숙하다는 듯 대꾸했다.
오히려 더 격분한 건 나였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지금 누굴 짐승 취급하는 거로도 모자라서 혈통 운운까지 해? 혈통 있다고 하는 것도 가브리엘이 황자였어야 한다는 걸 꼬집는 거다.
황제는 어디서 뭐 하냐, 마리크 주교 입단속 안 시키고. 하여간 황제도, 마리크 주교도 둘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뒀다간 마리크 주교가 계속 가브리엘을 긁어댈 것 같았다. 가브리엘의 어깨를 살살 쳤다.
“경, 괜찮으니 물러서 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가브리엘 경.”
내가 힘을 실어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가브리엘이 불안해 보이는 투로 머뭇대다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완전히 시야가 트이고 마리크 주교와 마주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마리크 주교가 날 지긋이 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주교님께서는 말을 조심하셔야겠네요. 개를 기르는 주인은 이가 사나워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찢어발기기로 유명한 괴물이거든요. 괴물이 귀한 분을 알아볼 리 없으니 아끼는 개의 험담이라도 들었다가 주교님마저 물어뜯을지 모르니까요.”
상대가 마리크 주교만 아니었어도 멱살 쥐고 탈탈 흔들어댔을 거다. 물론 마리크 주교나 되니까 내 앞에서 저딴 망발을 내뱉는 거겠지만.
내 말에 살기가 느껴졌는지 마리크 주교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검을 뽑으려 들었다. 기사들을 경계하듯 가브리엘도 덩달아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진 줄을 놓게 한 건 마리크 주교였다. 마리크 주교가 손을 들어 기사들을 제지했다. 내 안위는 퍽 잘 챙겨주시네. 누가 보면 마리크 주교가 내 호위인 줄 알겠어.
나와 가브리엘을 보던 마리크 주교가 추억에 잠긴 듯 운을 뗐다.
“그저 추억에 잠겨 한 소리이니 이해해주시겠어요? 제게도 저 비슷한 게 있었거든요. 말을 참 잘 듣던 개였는데, 얼마 전에 가죽이 벗겨져서 다른 짐승이 뒤집어쓰고 있는걸 봤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