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27)
Chapter 27
가브리엘도 아까 그 인자한 꼰대 주교님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여기서 배려심 넘치게 빠져 줘야지.
할 거 다 했나?
헤나랑 칸나도 귀족한테 시비 털리던 거 잘 구해 냈고, 애들이 그림도 봤고, 물론 불타서 난 못 봤지만 애초에 볼 생각도 없었으니까 뭐. 진술서도 회수했고, 기사 하나 구해 주면서 가브리엘한테 호감 스택도 하나 쌓았다.
갑자기 뜬금없이 데이지라는 신캐가 등장하기는 했는데 가브리엘은 여전히 날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문제없음!
“이제 돌아갈까?”
“네!”
칸나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하긴 여기서 몇 시간이나 날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얼른 돌아가고 싶기는 하겠다.
짐을 챙겨서 일어나자 가브리엘이 날 붙잡을 듯이 손을 뻗었다. 차마 진짜 잡지는 못하겠는지 손이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가시려고요?”
그럼 여기서 너랑 같이 살까? 순간적으로 비아냥거리려던 걸 혀를 씹어서 참아 냈다. 자…. 난 이제 로판 주민이다. 막 남주가 로맨스 대사를 친다고 소름이 끼쳐 하고 정색하면 안 된다고. 남주 잘 꾀어서 악녀 탈출해야지.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그럼 마차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교님도 보러 가야 하니까 겸사겸사 배웅도 해 주려나 보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그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마차까지는 금방이었다. 마부석에 앉아 벌벌 떨고 있던 마부가 날 보고 숨을 헉 들이켰다. 아 맞다, 아까 갑자기 순간 이동 해서 놀라게 했었지. 깜빡했다.
안심시키려 상황을 설명하려는데 마차의 문이 열렸다. 젤리가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왔어요?”
“수고했어, 젤리.”
자기 힘들었으니까 관심을 달라는 투다. 젤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치하를 해 주고 있으니 가브리엘이 나를 불렀다.
“로한슨 영애.”
돌아보니 가브리엘이 손을 뻗고 있었다. 뭐지? 아. 마차에 오르기 쉽게 에스코트를 해 주려나 보다.
가브리엘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런데 손이 점점 올라가더니 가브리엘이 손등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순간 너무 놀라서 때릴 뻔했네. 에스코트가 아니라 인사하려고 그랬구나.
로판식 인사인 건 아는데 내가 직접 당하니까 좀 심정이 이상한데…? 장갑이라도 끼고 있을걸! 다행히 가브리엘도 그냥 시늉만 한 거였다.
그래도 간지러운 느낌은 여전했다. 맨손 위로 촉촉한 살이 닿는 느낌 대신 호흡이 느껴졌다. 손 위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숨결이 닿자 어쩐지 수줍어져 당장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시 뵐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른 칸나가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거세게 문을 닫았다.
가브리엘이 마음에 안 든다며 구시렁대는 칸나의 말을 들으며 걔가 원래 네 짝이라고 말해 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심란한 남의 마음도 모르고 마차는 잘만 굴러갔다.
***
로한슨 백작가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라파엘라가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뭐… 뭘 하신 거예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도 절었다.
“작별 인사.”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브리엘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지독히 상식적이었다. 근데 상대가 그 에반젤린이면 작별 인사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게 오히려 비상식 아니야? 하여튼 단장이건 그 아래 있는 유리엘이건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태평할 수가 있지? 미쉘은 미쳤으니까 넘어가자.
“방금도 그렇습니다. 단장님, 왜 전부 얘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오기 전에 에반젤린 영애와 수녀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단장님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아마 수녀님이 영애께 전부 고해바친 것 같던데….”
에반젤린 로한슨이 가브리엘에게 무엇을 들었느냐고 캐물을 때, 라파엘라는 차라리 단장이 모든 걸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했다. 에반젤린의 붉은 눈과 마주친 순간 심장이 추락했다. 그때의 에반젤린의 시선은 무척이나 첨예한 칼자루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눈짓 손짓으로 그냥 이야기하라고 말했는데…. 그랬는데 정작 가브리엘은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때 라파엘라는 다 끝났구나 하면서 세상을 하직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가브리엘이 한술 더 떠서 에반젤린에게 진술서를 넘겨주는 거다.
거기엔 당연히 데이지가 고했던 것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입으로는 거짓말을 하면서 손만 솔직하면 뭐 하느냐고. 근데 에반젤린은 그걸 보고서 그냥 넘어가 줬단 말이지.
“왜 그렇게 하셨어요? 단장님이라면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그건 가브리엘의 본능과도 같은 직감이었다.
일찍이 겪어 본 바 에반젤린 로한슨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역할의 몰입이었다. 여태까지 한 행동이나 예의를 차리던 말투로 보아 외부에서 자신을 에반젤린 로한슨이라 여기게끔 행동하는 것 같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이 영애다운 태도를 벗어던진 건 가브리엘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도움을 드리고 싶다 할 때뿐이었다. 그 역할을 벗겨 내려 들었기에 그토록 분노했던 거겠지.
그래서 가브리엘은 이번 역시 비위를 맞추었다. 거짓을 고해 분노를 살 수는 없으니 종이를 건넸고, 전혀 반대의 말을 해 못 본 척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행히 가브리엘의 대처가 에반젤린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고.
그리고 에반젤린에게 일부러 작별 인사를 하며 가브리엘은 하나를 더 깨달았다.
인사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에반젤린의 키는 작지 않았으나, 가브리엘과 덩치 차이가 꽤 있는 탓인지 그 손 역시 가브리엘보다 무척 작았다.
체온은 몹시 낮았다. 손을 포개고 손끝에 집중해 맥박을 쟀다.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하면서도 에반젤린 로한슨이 손을 뿌리치지 않으리란 걸 짐작했다. 일부러 속도를 늦춰 천천히 입을 맞추며 심박수를 계산했다. 느리지만 분명히 심장이 뛰었다. 작지만 호흡하고 있었다.
시체가 억지로 움직이고 있다고 짐작했으나 분명 살아 있었다.
데이지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죽은 시체를 움직인다고 했으나, 그 말은 틀린 셈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히 같다. 에반젤린은 사람을 한낱 미물처럼 여기며 도리어 미물 취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지게끔 한다.
에반젤린을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모든 살아 숨쉬는 것 중에서 유일하게 죽어 있던 것.
온갖 따스한 것 중에서 도드라지게 차가운 것.
에반젤린 로한슨은 그래서 특별했다.
가브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감췄다. 진짜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에반젤린의 낮은 온도가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
의무실로 간 유리엘은 미쉘을 침대 위에 눕혔다. 이제 두고 가면 되는 건가? 이미 성수를 뒤집어썼으니 따로 치료할 필요도 없을 테고…. 유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의무실을 나가려는 순간 세라프가 의무실로 들어왔다.
아까 올 때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련 중이었나 보다. 목 부근에 얕게 베인 자국이 있었다. 세라프는 푹 젖어 있는 미쉘을 보더니 경악을 하며 놀랐다.
“미쉘 경! 이, 이게 무슨 일이래요? 왜 이렇게 젖은 거예요? 아픈가요? 식은땀은 아니겠죠? 죽지 마세요, 미쉘 겨엉…!”
“세라프 경, 진정하세요. 그냥 성수입니다.”
“네? 그 정도로 많이 다쳤었던 건가요? 앗, 아니면 분수대에 뛰어든 건 아니겠죠?”
세라프는 유독 소심하고 걱정이 많았다. 유리엘은 세라프가 괜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한마디를 할 때마다 세라프가 자기의 추측을 사이에 끼워 넣으며 사건을 변질시키는 통에 이야기의 진행이 더뎠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가브리엘과 기사들이 에반젤린의 배웅을 끝내고 의무실에 들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완벽히 이해했어요.”
라파엘라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문을 닫을 뻔했다. 호들갑스러운 세라프에 단순하고 무식한 유리엘이라니 끔찍한 조합이다.
다행히 의무실에는 둘 외에도 예레미라는 기사도 함께였다. 예레미는 대련을 하던 중 잠깐 치료를 한다며 의무실에 간 세라프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왔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라파엘라와 눈이 마주친 예레미가 구해 달라며 손을 허우적댔다.
“라파엘라 경! 단장님!”
“단장님. 로한슨 영애님은요?”
“돌아가셨다.”
“아….”
유리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라파엘라는 저 ‘돌아가셨다’는 말이 혹시 하늘로 돌아간 건가 혼란스러웠다.
“미쉘은?”
“아직 자고 있…, 깨어 계시네요?”
세라프가 두 눈 멀뚱히 뜨고 있는 미쉘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다. 라파엘라가 이마를 짚었다.
“아…. 죄송합니다, 두 분이 너무 즐겁게 이야기하고 계셔서 제가 끼어들기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볼을 긁적거리던 미쉘이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몸을 움직이는데도 이상이 없었다.
“미쉘, 몸은 괜찮나?”
“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하나?”
“네. 기억하는 것도 있고, 방금 유리엘 님의 말씀을 들어서 대충 상황은 이해가 갑니다.”
가브리엘과 라파엘라는 미쉘을 살펴본 후 상처가 없고 멀쩡해 보인다는 것에 크게 안심했다. 에반젤린이 부은 성수 덕분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신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질문을 해 봐야 했다.
“미쉘, 지금은 좀 괜찮아? 몸 말고 머리 쪽.”
“네?”
“아직도 그림 속에 그려진 게 천사라고 생각하나.”
“아…. 죄송합니다. 당시에 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척 불길하고 괴상한 그림인데 말입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나 보네.”
라파엘라가 크게 안심하며 미쉘이 누워 있는 곳과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았다. 미쉘 이 자식,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미쉘 너는 진짜 우리한테 감사해야 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방에 가둬 놨더니 어떻게 빠져나와서 겁도 없이 불타는 걸 끌어안고 있어? 로한슨 영애님이 아니었으면 넌 진짜 크게 다쳤을 거다.”
라파엘라가 그동안의 한을 풀듯이 미쉘에게 한 소리 했다. 미쉘은 머쓱한 듯 라파엘라의 말을 듣고 있다가 에반젤린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