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38)
Chapter 38
율마는 그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데이지 언니?”
“세상에, 다친 데 없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눈물범벅의 데이지가 라넌과 율마를 끌어안았다. 그 뒤로 트로이가 보였다. 라넌의 말대로 정말 트로이가 우리를 구하러 왔잖아?
그리고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율마는 숨을 들이켰다. 미친, 무슨 사람이 저렇게 생겼어?
입은 옷만 봐도 고귀한 귀족 아가씨다. 그런데 저렇게 병약하게 생겨 놓고서 정작 풍기는 건 압도적인 분위기다. 모든 귀족이 다 저런 거라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았다.
같이 온 걸 보면 데이지 언니나 트로이가 불러온 걸까?
“원장님….”
새로운 면면들의 난입으로 원장 역시 과거에서 현실로 도로 돌아왔다.
나약한 아들이 데려온 조력자가 데이지였다니. 원장이 기억하는 데이지는 운이 좋은 아이였다. 늘 얌전했고 순종적이었다. 팔기 좋은 조건이었으나 번번이 트로이가 방해해 대는 통에 데이지에 대한 마지막 인상은 그거였다. 다른 아이들을 팔고 남은 애.
별 위협이 되지 않아 그냥 두었는데 그렇게 사이가 나쁘던 트로이와 합심할 줄은 몰랐다.
“트로이 너는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정말이지 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는 걸까?
메라이는 원장의 곁에서 한 몸 희생했는데 정작 메라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물론이거니와 악마마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흰옷이 나부꼈다.
원장은 트로이의 뒤에 서 있는 천사를 보았다. 메라이는 탄식했다. 찬미했다. 전율하고 감격했다.
온 세상이 희게 번졌다. 신전에 걸린 그림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찬란하며 권위적인 존재인가.
천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메라이는 계시를 받은 것이라 여겼다. 천사가 이 상황을 타개할 힌트를 준 것이다.
그래. 눈앞의 사랑하는 아들 말이다.
메라이는 벽을 더듬었다. 손에 뭉툭한 감각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쥐고 등 뒤에 숨겼다.
지금은 방해물이 너무 많다. 다른 사람들이 잠깐 시선을 돌릴 때 그 시간을 노려야 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라넌? 율마?”
“메리! 내가 눈 감고 있으라고 했잖아!”
“나는 백까지 전부 세서….”
율마가 오판한 게 있다면, 메리가 수를 아주 잘 셌다는 것뿐이다. 메리는 몇 번을 틀리고 나서야 백을 전부 셌고, 그 후에 눈을 떴다.
메리가 우물쭈물 말하자 율마가 불같이 소리를 쳤다. 메리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지레 겁을 먹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메리에게 집중된 사이 원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로이에게 달려들었다. 불길함을 짐작한 율마가 서둘러 메리를 끌어안고 눈을 가렸다.
푹!
“엄… 마?”
“하아, 하아. 하, 하하 하하하핫!”
원장은 활짝 웃었다. 환희에 찬 표정이었으나 눈물이 맺혀 볼을 타고 떨어지는 통에 아무도 그 표정을 기쁨의 미소라고 해석할 수 없었다.
원장이 설마 친아들을 찌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원장 자신조차도 아들을 해칠 생각은 없었으니 아무도 추측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트로이는 비틀거리며 원장에게 기댔다. 데이지가 달려 나가려 했으나 율마와 라넌이 양팔을 잡고 저지했다.
“멜렉. 내 아들을 제물로 바치마. 트로이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있겠지.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줄 거지?”
원장은 악마에게 귓속말하며 더럽혀진 손을 내밀었다. 라넌의 눈먼 칼에 맞아 겨우 숨이나 헐떡이고 있던 멜렉이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침을 삼켰다. 굶은 지 너무 오래됐다. 안 그래도 약해진 몸에 상처까지 입으니 더욱 극심한 허기가 밀려왔다.
이성은 점점 잠식된다. 멜렉이 트로이를 포식하려는 순간 청명한 목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배고프니?”
멜렉은 누가 묻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은 거짓말이라 치부했지만, 멜렉은 정말로 악마가 된 이후 제대로 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먹이는 내가 챙겨 주마. 그러니 지금은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명령처럼 단호한 목소리가 어쩐지 상냥해서 멜렉은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뭐 하는 거야? 멜렉!”
원장의 절규에 멜렉은 몹시 안타까워졌다. 메라이는 아직도 20년 전의 지하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멜렉도 마찬가지던가?
원장은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러 와 주신 게 아닌가요?”
원장이 에반젤린을 향해 읍소했다. 대신전의 그림으로 나타났던 그때처럼, 지금도 해답을 주기 위해 강림한 게 아닌가? 에반젤린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어.”
“저는 버려진 건가요?”
“그래. 네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잖아. 그러니 이제 그만해.”
원장은 악마에 이어서 천사임이 틀림없는 존재에게까지 버림받고 나서야 모든 걸 포기했다. 메라이의 시야로 지하실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미에게 칼을 맞아 피 흘리는 아들과 자신을 경계하는 데이지와 라넌, 율마, 메리. 그리고 눈과 귀를 막고 메라이를 외면하는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메라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모든 걸 망쳐 버렸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원장이 전의를 상실한 것을 알아차린 라넌과 율마가 메라이에게서 트로이를 빼앗아 부축했다. 트로이는 용케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 라넌, …율마.”
“됐어. 환자는 닥치고 있어.”
율마는 상반되는 감정에 차마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욕을 박았다. 데이지는 옥신각신하는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트로이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가 컸다.
데이지는 에반젤린을 바라봤다.
“왜, 왜 트로이는 구해 주지 않으셨어요?”
에반젤린 영애건, 젤리라는 악마건, 둘은 충분히 원장을 막아 낼 수 있었을 거다. 그러면 트로이도 다치지 않았겠지.
“우리의 약속에 없었잖니.”
데이지의 질책에 에반젤린이 여상스럽게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데이지는 머리가 띵했다. 그랬다. 데이지가 구해 달라 했던 건 원장님과 아이들이었다.
데이지는 에반젤린을 탓할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리 없으니까 그저 데이지가 부탁한 것을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지키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 트로이를 욕한 것도, 뒤를 내리친 것도 데이지가 한 짓이었는데 에반젤린 영애가 트로이가 칼 맞는 것을 지켜만 봤다고 욕할 자격도 없었다.
“왜? 살리고 싶어?”
“네. 살리고 싶어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젤리가 그랬던 것처럼 시체를 일으키는 건 당연히 제외하고 말이다….
“다행히 나에게 성수가 있어. 딱 한 병이지만.”
한 병?
“데이지, 네가 고르렴. 트로이와 저 남자 둘 중 누구에게 성수를 줄까?”
검지를 들어 수를 센 에반젤린은 그대로 트로이와 젤리가 수습하고 있는 멜렉을 가리켰다. 데이지가 머뭇거리자 에반젤린이 말을 물렸다.
“장난이란다.”
에반젤린이 그림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데이지는 자신에게 토악질이 났다. 마지막 말을 듣지 않았다면 데이지가 고를 사람은 분명했을 테니까.
***
데이지가 급하게 안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애들은 잘 찾은 것 같다. 데이지는 남자애랑 여자애를 데리고 원장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다른 애들은 전부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둘만 위험하게 왜 나와 있었던 거야?
원장은 우리가 오는 걸 알아차리고 최후의 발악 중이었나 보다. 칼부림 중이었는지 이미 다친 사람도 있었다.
팔에 사슬을 매달고 눈이 가려진 게 저 사람도 노예로 팔려고 감금해 둔 것 같았다.
“멜렉?”
“아는 사이야?”
“네, 일단은요. 근데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젤리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인신매매범한테 납치당했을 때 알던 사이인가? 아니면 혹시 쟤도 수인이야?
“동족?”
“네? 굳이 따지자면 그렇죠?”
정답은 수인에다가 같이 납치도 당한 거였나 보다. 이걸로 원장이 젤리랑 데이지의 납치 사건에도 관여되어 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는군.
“트로이 너는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나쁜 짓 한 건 자기면서 트로이를 나쁜 놈으로 몰고 가는 거 좀 봐라. 저거 가스라이팅 아닌가? 가정 폭력이라고.
원장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생각이 없는지 우리가 한눈판 사이에 트로이를 칼로 찌르고 붙잡았다. 무슨 자기 친아들을 인질로 잡아?
게다가 트로이만 가지고는 쪽수가 부족해서 불리할 것 같은지 젤리 친구를 포섭하려는 것 같았다. 귓속말하는데 잘 안 들린다. 후각만큼 청력도 남다른 젤리가 대화를 요약해 줬다.
“지금 먹을 거로 꼬시고 있어요.”
뭐? 그런 거로 넘어가겠어?
“쟤 굶주린 것 같은데요?”
넘어가려나 보다. 굶었다고? 원장이 밥도 안 주고 굶겼나 보다. 그럼 내가 들었던 배고프다는 소리가 애들이 아니라 저 멜렉이라는 남자가 말한 거였나 봐.
밥 가지고 협박하는 것만큼 서러운 일이 어디 있어. 젤리 친구가 홀랑 넘어가기 전에 말렸다.
“배고프니?”
원장 진짜 치사하네. 아니 자기만 먹을 게 있나. 나도 있다! 애들 주려고 빵을 왕창 사 왔단 말이야. 마차에만 가면 한 아름 있다고.
“먹이는 내가 챙겨 주마. 그러니 지금은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뭐 하는 거야? 멜렉!”
다행히 원장의 가스라이팅을 적절히 커트한 모양이다. 멜렉이 원장에게 반항했고, 불똥은 나한테 튀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러 와 주신 게 아닌가요?”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는데 상황이 바뀌었어.”
도청기 심어 놨어? 원래 구하려 했던 걸 어떻게 알았지? 아, 생각해 보니까 정령들이 막 사람들 말도 옮겨 주고 그러잖아. 그렇게 해서 전해 들었나 보네.
데이지도 원장님이 못돼 먹은 사람인 줄 알았으면 구해 달라고 안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