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47)
Chapter 47
지금쯤이면 이미 목이 잘렸을지도 모르지. 떨어지는 꽃이 잘린 목 같아 데이지는 창문에서 눈을 돌렸다. 앞으로 데이지는 꽃 내음을 맡으면 메라이를 떠올리게 될 거다.
“어때, 애들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네. 그런 것 같아요.”
데이지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아이들은 저택에 쉽게 녹아들었다. 로한슨 저택에서 고용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에반젤린인데, 아이들은 애초에 에반젤린이 데려왔기 때문인지 유독 적응이 빨랐다.
율마는 손재주가 좋아 주방에 들어갔다. 다만 고아원에서 여러 몫의 식사를 만드는 습관이 들어서인지 매번 손이 커서 혼난다고 했다.
라넌은 집사의 아래로 들어갔다. 원래부터 셈에 능하고 영특한 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는데 집사님의 눈에 들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에반젤린 영애가 데려왔다고 등한시하던 것도 잠시, 지금은 집사가 옆에 끼고 다니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메리는….’
메리는 자기가 메리 골드가 아니라 메리 로한슨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잘 지냈다.
어린애에게 시킬 일이 없기에 그냥 저택을 누비고 다니도록 놔뒀는데, 메리는 특히 같이 지하에 갇혀 있었다던 멜렉에게 착 붙어 다녔다.
멜렉은 밥값을 하고 싶다며 마구간지기를 자원했고, 난폭한 말들이 멜렉을 보자 꼬리를 말고 말을 잘 들어 아주 환영을 받았다. 메리는 그 옆에서 말들에게 당근을 주는 임무를 받았다.
에반젤린 영애가 약속한 대로 원장님이 판 아이들을 돌려받으면 사람이 한둘씩 더 차겠지.
“만족하니?”
에반젤린이 묻는 말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겁에 질려 저택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절대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척이요.”
온 벽에 그물처럼 쳐져 있는 섬유질과 돋아 있는 눈들을 보면서 이런 평화로운 감상을 느끼게 될 줄도 몰랐고.
***
거참 죽기 딱 좋은 날씨다…. 간지 나게 연기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다.
온몸이 나른한 게 누워서 칸나가 물려 주는 포도나 먹고 싶었다.
평소였으면 누워서 백수처럼 굴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이게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휴식 시간이었다.
가브리엘이 같이 연회에 나가자며 제안한 후, 나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그놈의 데뷔당트가 문제였다.
에반젤린은 사교계의 정점은 무슨,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처지라 본격적으로 무도회나 연회에 참석하려면 먼저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아가씨는 몸이 약하셔서 데뷔당트를 치르지도 못하셨어요.”
데이지는 에반젤린 몸이 너무 약해서 사교계에 나가지 못했다고 말했으나, 남 괴롭힐 기력은 있었던 거로 봐서는 에반젤린이 또 악녀같이 굴까 봐 백작이 못 가게 막은 것 같았다.
백작한테 데뷔한다며 전보를 쳤더니 말려도 안 들을 거 아니 내 마음대로 하라고 대신 부디 평범하게 굴어 주길 바란다면서 답장이 날아왔다.
그리고 답장이랑 같이 가정 교사들도 딸려 왔다. 그래도 내가 기억 상실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지 교육을 다시 하려고 그런 것 같았다.
근데 그것도 한둘이어야지…. 예절에 춤에, 그림과 승마에 자수, 시는 왜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 불려 온 교사만 여섯이었다. 그나마 역사는 가르치려 들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사들이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시를 가르치는 교사는 전공이 문학이라 그런지 본인도 감성이 뛰어나 로한슨 저택이 지상에 움튼 지옥의 단편, 악마가 뛰노는 만마전 같다며 시적인 비유를 남기고 대문을 넘어 보지도 않고 사표를 던졌다. 쉽게 말하면 에반젤린의 악명에 겁먹고 튄 거다.
자수를 가르치는 교사는 바늘에 내 손이 잘못 찔려서 피가 나자 자기 목은 제발 치지 말아 달라면서 울고 불며 애원하다가 혼절했다. 참고로 내 자수 실력은 발전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승마는 배울 필요도 없이 말이 내 말을 너무 잘 들어서 교사가 하루 만에 더 가르칠 게 없다며 하산하라 했다.
그림 교사는 화방이 있냐는 말에 옆의 창고 방으로 안내해 줬더니 방이 음침해서 그런지 좀 무서워하더라. 그림 실력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어서 내가 그린 건 아니지만 천을 전부 들쳐 보여 줬더니 질겁을 하고 도망쳤다.
근데 그럴 만했다. 에반젤린이 그린 건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같은 여자가 똑같은 구도로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은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공포 영화처럼 눈이 움직일 것 같기도 했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한데, 누구지?
“누군지 알아?”
“돌아가신 마님일 거예요.”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잠깐 말실수했다. 다시 보니 공포 영화가 아니라 영화 같다고. 에반젤린이 예술을 그려 놨네. 뭔가 익숙했던 게 에반젤린을 닮아서였나 보다.
데이지는 자기도 백작 부인이 작고하신 다음에 백작가에 들어왔다면서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일기 속에서는 매번 백작한테 저주 섞인 말을 하고, 죽음을 원하며 스스로를 비관하던 사람이 그림 속에서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름다우신 분이네.”
내 엄마도 아닌데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래도 딸한테는 웃는 모습을 보여 줬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림은 햇빛에 상할까 다시 천으로 덮어 놨다.
하여튼, 그림을 보고 겁먹어서 미술 교사도 못 하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집사가 오죽했으면 교사들 입단속 시키기 힘드니 부디 선을 지켜달라고 읍소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다.
“기억 상실이라고 하셨지만, 몸에 습관이 배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나마 예절 교사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지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빙의자 버프가 이런 데서라도 있었는지 예절은 패시브로 깔려 있어 다시 배우지 않아도 됐다.
이런 걸 몸이 기억한다고 하는 거지. 어쩐지 가끔 말할 때마다 싹수없이 말하게 되는데, 이것도 혀가 기억한 건가 보다.
“돌리네도 수고했어요.”
“전부 영애님이 잘 따라와 주신 덕분이에요.”
도망치지 않고 가르쳐 준 게 고마워서 집사한테 보너스를 두둑이 두라고 언질 줘 놨다.
돌리네는 깐깐한 예절 교사의 클리셰를 깨고 대단히 눈치가 없고 착한 편이었다. 에반젤린의 악명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을 안 친 건가?
“곧 있으면 댄스 교사가 올 시간이네요. 몸이 약하셨다고 들었는데 춤을 춰도 괜찮으신가요?”
몸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마찬가지로 댄스 교사였지.
춤 동작도 금방 익혔는데 실습을 하려고 같이 춰 보려고 하니 차마 내 몸에 닿을 수 없다며 교사가 춤추는 걸 거부하는 중이었다.
“영애님, 실례합니다. 수업은 끝마치셨나요?”
헤나가 노크를 하며 문밖에서 물었다. 들어오라고 부르니 헤나가 돌리네에게 인사를 하고 나한테 편지를 넘겨줬다.
수신인을 보니 댄스 교사였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구구절절 쓰인 변명을 모두 쳐 내면 동작은 이미 전부 익혔으니 문제없을 거라고 자긴 할 만큼 했으니 그만두겠다는 말이었다.
“또 그만둔다고 하나요?”
“그래.”
이걸로 내 가정 교사는 전부 그만두고 돌리네 한 명만 남았다.
아니 댄스 교사도 참 웃긴 게, 가르칠 건 다 가르쳐 놓고서는 왜 중간에 내빼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동작이라도 알려 줘서 참 고맙네.
헤나에 집사한테 가서 교육비는 깎지 말고 그대로 주라고 했다. 중간에 그만뒀다고 돈도 안 주면 뒤에 가서 무슨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른다. 에반젤린이 배울 건 다 배워 놓고 해고하고 돈도 안 줬다고 변질할지 누가 알아. 가진 건 돈밖에 없는데, 수전노라니!
“네. 그렇게 전할게요.”
“음…. 저도 이만 가 봐야겠어요.”
눈치를 살피던 돌리네가 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리네는 춤을 가르칠 줄 아나요?”
“기초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영애님의 상대를 하려면 신사분의 역할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전 어디까지나 교양으로만 출 줄 알아서요.”
그러니까 남자 파트를 몰라서 안 된다는 말이구나.
“가브리엘 경께 연습 상대가 되어 달라고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그런가…. 어차피 춤도 가브리엘이랑 출 거고, 그냥 가브리엘한테 부탁해야 하나.
돌리네는 조언을 남기고 몹시 미안해하며 떠났다.
돌리네가 가자 오후 시간이 붕 떴다. 방에 돌아가서 침대 위에 쓰러지자 푸딩이 고양이 발로 안마를 해 줬다. 귀엽기는 한데 하나도 안 시원해….
젤리가 그걸 보고 있더니 사람으로 변해서 마사지를 해 줬다.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젤리는 마사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따로 배운 거야?”
“예전 주인이 가끔 이런 걸 시켜서요.”
그래서 어디서 배운 거냐고 물어봤다가 상처만 건드렸다. 그래 내가 가끔 망각하지만, 젤리는 수인 노예 출신이었지….
“나한테 이런 걸 시키다니, 악취미죠?”
지금 안마받는 나보고 찔리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며 젤리를 쳐 냈다. 악취미라 미안하네.
“젤리, 넌 춤출 줄 알아?”
“내가 인간들 춤을 알겠어요?”
아니. 넌 잡혀 있다가 노예상한테서 도망쳐 온 웨어울프니까 알 리가 없지. 근데 전 주인한테 마사지도 배웠다고 하니까 춤도 배웠나 싶어서 한번 물어나 본 거지….
“넌 알아?”
젤리가 푸딩의 꼬리를 잡아당기며 묻자 푸딩이 손톱으로 젤리를 할퀴었다.
“성격 한번 더럽기는, 모르면 말로 하지.”
아니. 그건 아직 말도 못 하는 애기한테 물어본 네 잘못이지. 푸딩도 얼마나 대답하고 싶겠어.
“춤은 왜요? 댄스 교사도 도망갔어요? 인간들은 참 다들 겁이 많다니까.”
내 말이. 다들 어찌나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돌리네 같은 인재가 너무 부족하다.
“그래도 돌리네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얼마나 더 버텼으면 좋겠어요? 하루? 한 주?”
“글쎄.”
젤리 이 자식, 아주 그만두라고 제사를 지내는구나. 그냥 두면 언제 그만둘지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래도 2주는 버텨야 하지 않겠니.”
“2주? 알겠어요.”
내 데뷔당트가 이 주 후로 예정되어 있다. 이미 지금 한창 무도회가 열리고 연회가 벌어지는 시즌이라서 늦은 감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