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52)
Chapter 52
“정말 잘 어울리세요!”
해맑은 목소리와 다르게 눈 밑이 퀭한 게 꼭 열흘은 밤을 새운 사람 같았다. 실없이 웃으며 내가 입은 옷을 보던 알테미시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지금 제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데뷔당트 옷은 아니고, 샤프롱을 해 주기로 한 토텐 부인을 찾아갈 때 입을 옷이었다. 새로 만들 시간은 없어서 부티크에 있는 옷을 나한테 어울리게 수선했단다. 알테미시아가 무어라 열심히 설명하기는 했는데 한 귀로 듣고 흘려서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귀부인들은 생기발랄한 레이디들도 좋아하시지만 얌전한 요조숙녀들도 만만찮게 좋아하시거든요. 게다가 토텐 부인은 병약한 자제분을 영애님이랑 겹쳐 보는 거니 레이스를 전부 떼고, 장식을 줄이고 처연미를 살려 봤어요!”
사실 평소에 내가 입는 옷이랑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울겠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수고했어요. 알테미시아.”
“미, 미샤라고 불러 주세요….”
역시 칭찬이 정답이었다. 이제 좀 마음의 거리가 줄어들었나 보다. 다섯 글자 대신에 앞으로는 미샤라고 두 글자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미샤 덕분에 토텐 부인께 잘 보일 수 있겠어요.”
“흡.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잘 다녀오세요….”
미샤가 비척비척하더니 다시 투왈렛 룸으로 떠났다. 다시 데뷔당트 드레스를 만들러 간 것 같았다. 곧 죽을 것 같은데 안 자도 되는 건가? 내가 부려 먹는 것도 아닌데 악덕 업주가 된 느낌이었다.
“영애님, 이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헤나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래…. 남아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할 일에 전념해야겠다.
오늘의 외출은 헤나랑 나랑 멜렉이 같이 가기로 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멜렉은 오늘의 마부였다.
전에 신전을 갔다 온 후로 마부가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비어 있던 자리를 멜렉이 꿰찼다. 메리한테 전해 들은 말로는 마구간에서부터 엄청난 마부의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 메리가 자기는 당근 먹이는 것밖에 못 하는데 뒤처지는 것 같다며 분해했다.
“가미긴, 잘 부탁해.”
멜렉이 말을 쓰다듬었다. 자기 이름도 못 지으면서 말 이름은 지어 줬어? 멜렉이 끝내주게 흔들림 없는 마차를 보여 주겠다며 나를 마차에 태웠다.
근데 눈 가리고 운전해? 유령이라 상관없나? 나야 그걸 아니까 안심하고 탈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좀 무섭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헤나는 아무렇지 않게 날 따라서 마차에 올랐다. 아닌가 보네. 보는 사람만 좀 무섭겠다. 우리는 괜찮으니까 상관없지 뭐.
과연 마부의 재능을 인정받을 만했다. 전에 탔던 마차들은 덜컹거려서 엉덩이가 아팠는데 멜렉이 모니까 마차가 달리는지도 모를 정도로 편안했다. 이게 유령이 모는 마차의 퀄리티인가?
감탄만 하다가 벌써 토텐 후작저에 도착했다. 가브리엘이 전한 연락을 잘 받은 건지 대문이 바로 열리며 마차가 통과해 저택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우와. 엄청나게 크네.’
로한슨 백작가에 비교하기가 미안한 수준이다.
“로한슨 영애님입니까? 토텐 후작가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환영해 줘서 고맙네.”
희끗희끗한 머리의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후작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랑 헤나는 집사를 따라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 이걸 쓰고 말을 모신 건 아니죠…?’ 뒤에서 마차가 정박할 곳을 알려 주는 하인이 멜렉이 안대를 쓴 걸 보고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모르는 얘기다. 얼른 들어가자.
토텐 후작저 내부는 꽤 독특했다.
환기를 위한 것인지 창문은 전부 열려 있고, 가구들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신앙심이 돋보이는 장식들이 즐비했다. 어쩐지 결벽적으로 관리된 게 사람의 거주 공간이라기보다는 꼭 영화 촬영장 같았다.
볕도 잘 들어서 색감도 잘 나왔다. 내가 지금 영화를 보는 건가?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듯 어쩐지 현실감이 사라지는데 집사 할아버지가 말을 거는 소리에 확 정신이 들었다. 아차. 스토리에 집중해야지.
“마님께서 이렇게 손님을 초대하신 것도 참 오랜만입니다.”
집사 할아버지가 사람 좋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토텐 부인은 인망이 뛰어나시지 않나?”
엥, 왜지? 가브리엘이 말하기를 토텐 부인은 발이 넓고, 사교성이 두루두루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샤프롱으로 두면서 사람을 소개받기에 좋을 거라고 했고.
가브리엘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고, 그냥 쇼윈도 인간관계인가? 뭔가 귀족답긴 했다.
“하하. 아무래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소란스러운 환경은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하. 아프다던 아들을 말하는 건가 보다. 생각해 보니 아픈 아들을 두고 손님을 초대해서 하하 호호하기가 좀 그럴 것 같았다. 헐, 그럼 나도 오면 안 됐던 거 아니야?
그래서 가브리엘이 토텐 부인을 로한슨 저택으로 부른다고 말한 거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온다고 했네. 솔직히 이건 나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가브리엘 탓이다.
“마님께서 샤프롱이 되시기로 한 것도 처음입니다. 아마 기사단장에게 들은 이야기의 영향일 테죠.”
“내가 아팠다는 이야기?”
“예. 마님께서 이례적으로 방문을 허락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집사 할아버지가 나한테 눈치를 줬다. 토텐 부인이 날 초대한 거랑 샤프롱이 되어 주신 것도 내가 아픈 아들이랑 비슷한 신세라서 그런 거라고. 근데 나는 은혜도 모르고 집으로 쳐들어왔다고 뭐라 하는 것 같았다.
연륜 덕분인가 돌려 까는 솜씨가 끝내줬다. 근데 내 잘못은 맞아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거참 배려심 없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가 노파심에 주제넘게 한 소리 드리자면… 부디 마님께 헛된 기대를 안겨 주지 마시길 바랍니다.”
헛된 기대? 무슨 소리지?
“마님께서는 최근에서야 마음을 정리하셨는데, 로한슨 영애님의 이야기를 듣고 라이더 님도 차도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내가 막 희망의 상징 같은 게 된 거잖아.
“하지만 라이더 님께서는 성수를 써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정말 가망이 없으셔서….”
집사 할아버지가 안타까워하면서 말을 흐렸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희망이 독일 때도 있긴 하지.
집사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헉, 우시는 건 아니지? 생각보다 병환이 더 깊나 보다. 성수 가지고도 차도가 없을 정도면 심각하나 본데, 시한부 같은 건가?
정리하자면 집사 할아버지는 토텐 부인 아들이 나처럼 회복하지 않을 거니까 쾌차할 거라는 등의 위로를 하지 말라는 것 같았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이 더 크면 재기가 불가할 정도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마님께서 영애님이 쾌차하신 방법을 물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부인께서 내게 희망을 찾으려 부르셨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딱히 없으니까.”
그럼 걱정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에반젤린은 이미 죽었고,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내가 빙의해서 그런 것뿐이다. 딱히 내가 이 세계 질서 안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선례는 아니라서 조언 같은 걸 해 줄 수도 없다.
내 말을 듣고 집사 할아버지가 크게 안도했다. 토텐 부인을 되게 많이 생각해 주시네. 집사의 정석 같다. 우리 집 집사님은 맨날 겁먹고 나만 마주치면 도망치는데. 근데 에반젤린이 저지른 죄가 커서 뭐라 하지도 못하겠다.
“들었던 것과 다르게 말이 잘 통하는 분이시군요. 안심했습니다.”
집사 할아버지가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근데 이 할아버지 아까부터 계속 나를 좀 은근히 돌려 까는 것 같지 않아?
지금 ‘네 소문은 거지 같던데 생각보다 말 잘 들어서 좋다.’ 이 말이잖아. 돌리네한테 화술 수업을 받은 덕분에 이제 다 해석이 된다고.
매번 에반젤린의 악명에 발발 떠는 사람만 보다가 이렇게 당돌하게 나오는 사람을 보니 감흥이 새로웠다. 신분 높은 귀족 집안의 집사들은 프라이드가 높다더니 이게 딱 그 경우인가 보다.
에반젤린이 자기 샤프롱을 맡아 줄 후작 부인에게는 주제를 알고 고개를 숙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자네는 참 토텐 부인을 존경하나 봐?”
“네?”
집사가 뜬금없는 물음에 나를 돌아봤다.
“토텐 부인께 영향이 갈까 봐 오늘 처음 본 나에게 후작가의 사정을 그렇게 전부 이야기해 줄 정도니 말이야.”
역시 유능한 집사는 눈치도 좋나 보네. 아주 잘 파악했다. 완전 넙죽 엎드리지. 나는 원래 자존심 같은 거 없다. 내가 자존심이 있었으면 소설 등장인물이랑 연애 놀음을 하겠어?
집사 할아버지의 높은 충성심과 후작저의 사정을 모두 꿰고 있는 정보력을 칭찬하기 위해 돌리네의 ‘돌려 말하기 화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누가 보면 자네가 후작저의 주인인 줄 알겠군.”
주인 의식도 뛰어나시다 참. 고용주들이 제일 탐내는 인재상! 워후!
“…….”
아부가 과했는지 집사가 말을 잃었다.
아차. 로판에서 아랫사람한테 막 굽신거리면 안 되는데 불문율을 깨고 나도 모르게 아부 넘치는 발언을 해 버렸다.
사실 아까 나를 살살 돌려 깔 때 한마디 할까 했는데, 그랬다가 나쁜 소문이 하나 더 생길지도 몰라서 겨우 참은 거긴 했다.
그리고 괜히 발끈해서 뭐라고 했다가 집사 할아버지가 후작 부인한테 내 뒷담을 하면 어떻게 해. 오늘 만난 나랑 오래 일한 집사랑 누가 더 믿음직스럽겠어. 뒷담화가 진행된다면 그길로 바로 샤프롱과는 작별이다. 그러니 참은 김에 끝까지 참자. 샤프롱을 떠올리자.
“말솜씨가 아주 좋아. 여태 후작가를 방문한 모든 손님께 같은 응대를 했나 보지?”
립 서비스도 끝내주시고, 손님 응대도 만점!
만약에 방명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집사님이 친절하고 후작가가 맛있어요.’ 하고 후기를 남기고 별점 다섯 개를 줬을 거다.
칭찬 세례가 너무 부담스러웠는지 집사 할아버지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