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57)
잠시 로한슨 영애가 옷을 시착하러 간 사이, 가브리엘은 데이지와 짤막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에반젤린이 대화를 나누라며 부러 자리를 비켜 준 모양새였다.
“포노르 씨에 대한 전갈은 잘 받았습니다. 영애께서는 포노르 씨를 계속 곁에 두실 모양이더군요.”
“네. 포노르 님이 많이 반성하는 것 같다며 말씀하시는 게, 영애님의 마음에 드신 것 같아요.”
자바니야 주교가 보낸 염탐꾼인데도 곁에 두실 정도면 퍽 마음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다행인 건 에반젤린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단 것이다.
돌리네 포노르의 전서가 도착하지 않아 자바니야 주교는 몹시 초조한 모양이었고. 오죽하면 가브리엘에게 넌지시 로한슨 영애가 구한 가정 교사들에 관해 물었을까.
“자바니야 주교님에겐 적당히 둘러댔습니다.”
“그래요?”
데이지는 집사에게 전달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브리엘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태양신을 마땅히 따라야 하는 저 기사는 어째서 영애님의 편을 드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데이지처럼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칸나에게 듣기론 가브리엘은 처음부터 영애님께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 수녀로 있을 적에 로한슨 영애의 부정함을 고발할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그 덕분에 영애님의 비밀을 지킬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가브리엘 경은 왜 영애님의 곁에 머무르시나요?”
데이지의 느닷없는 질문에 가브리엘은 답을 피할 기세였다. 말을 돌리기 전에 데이지는 한 번 더 되물었다.
“영애님께 바라는 거라도 있어요?”
아니면 정말 라파엘라 경의 말대로 홀리기라도 한 건가. 데이지가 매섭게 추궁했다. 가브리엘은 데이지가 무조건 답을 캐내고자 하는 태도를 알아차렸다. 바라는 거라.
“네. 있습니다.”
우습게도 그 말대로였다. 가브리엘은 목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로한슨 영애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주술 진의 영향을 수습하는 것이었고. 사적으로는….
불이 넘실거리던 그날, 백발에 불빛이 물들어 주홍색으로 번지던 모습이 생생했다. 만약 가브리엘의 마음이 에반젤린과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에 멈춰 섰다면 비호를 하는 대신 신전 측에 진작 신상 정보를 넘겼겠지.
분명 처음은 호기심이었다. 마른 고목에서 잎 없는 꽃이 피어나듯, 신의 권능을 무시한 채 시체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다음은 공포였다. 에반젤린 로한슨의 탈을 벗은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일지 두려웠다. 그래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비위를 맞춰 주고자 했다.
변화는 불시에 일어난다. 해일은 한순간에 가브리엘을 덮쳤다.
로한슨 영애가 답지 않게 고아원의 아이들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미약한 기대가 생겼다. 느린 심장 박동을 느꼈을 때, 에반젤린이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소후작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을 때 감히 실망했다. 알게 모르게 토텐 소후작에게 가브리엘의 과거를 겹쳐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반젤린 로한슨이 어린 자신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걸 상상했기에 그녀가 방법이 없다고 했을 때 멋대로 실망했다.
전능하고 이지를 벗어난 존재라면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기적을 부릴 거라 여긴 것이다. 제멋대로 사람답다며 생각해 놓고 이런 데서는 또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과거의 것들과는 다르다고 마음대로 기대한 것이다.
이율배반적으로, 가브리엘은 그 주제 모르는 실망을 통해 제가 에반젤린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가브리엘 경?”
그래서 에반젤린이 먼저 내밀어 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는 게 제 감정도 제대로 모르는 천치 같아 부끄러웠다.
가브리엘이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에반젤린은 시착을 끝내고 돌아왔다.
“가브리엘 경, 영애님을 보니 어때요?”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을 바라봤다.
“잘 어울리십니다.”
알테미시아가 몇 날 며칠을 공들여 만든 드레스는 자기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분명히 인지한 듯 옷의 주인과 무척 잘 어울렸다.
가브리엘은 훤히 드러난 흰 목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저와 로한슨 영애가 무슨 대단한 관계인 것도 아닌데 훔쳐보기가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의 마음도 모른 채 알테미시아는 계속 에반젤린을 보라며 강요했다. 제대로 된 감상 평을 내놓지 못하자 예시를 들어 준다면서 온갖 찬사를 내뱉었다. 그냥 자기가 칭찬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슈미티아나는 겁 없이 양 볼이 상기된 채 에반젤린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모습은 오늘 아침에도 로한슨 영애를 영접하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칭얼거리던 미쉘과 똑 닮아 있었다. 그걸 보며 라파엘라는 핏줄을 못 속인다며 혀를 차 댔다.
미쉘과 다르게 알테미시아는 딱히 호감을 느낄 만한 구석이 없었던 것 같은데, 로한슨 저택에서 지내며 무슨 일이 생겼던 건가?
“천사님 같아요!”
“그래! 메리 씨 정말 잘했어요!”
“요정 같아요!”
“그렇죠!”
알테미시아와 어린아이가 장단을 맞추며 찬양했다. 그 수다스러운 모습을 마치 새들이 우는 걸 보듯이 에반젤린은 답지 않게 누그러진 얼굴로 관조했다.
평소와 같은 오만하게 짝이 없는 무심함이었지만,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에게서 작은 온기를 느꼈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귀족 영애처럼 드레스를 맞추고, 작은 아이의 시끄러운 수다에 어울려 주는 모습은 마치 정말 오롯한 에반젤린 로한슨을 보는 것 같았다.
로한슨 영애는 점점 인간의 탈이 익숙해지는 듯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에반젤린 로한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면 가브리엘이 점점 감화되고 있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가브리엘이 상념에 빠진 걸 알아챈 슈미타이나가 재시험을 치르길 요구했다.
“자, 경!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자신의 감상? 여태 두 사람이 예시로 들던 건 세상 모든 아름다운 명사들이다. 요정에, 천사? 가브리엘은 그 중 겹쳐지지 않는 것을 떠올리다가, 익숙한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메리가 말한 천사 때문에 떠오른 말이었다.
잿더미가 된 도나우의 유해에서 나온 흰 쪽지에 적힌 낱말 중 가장 기억에 남던 광명의 천사라는 말. 그 말보다 에반젤린 로한슨을 잘 표현할 말은 없을 거다. 천사는 이미 이야기했으니 남은 건 하나뿐이다.
“로한슨 영애는 가장 밝은 별 같으십니다.”
말 그대로 광명. 가장 빛나는 별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수식을 더 붙여야 했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기이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별이다. 태양을 피해 뜨는 것 중에 그보다 밝은 것이 있을까?
“저흰 그만 가 볼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 와중에 무슨 헛생각을 하는 것인지 음흉하게 웃던 슈미티아나가 다른 둘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잠깐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고 밖과 단절되어 세상에 남은 건 가브리엘과 에반젤린뿐이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가브리엘이 손을 먼저 내밀었다. 에반젤린이 춤을 청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에반젤린의 손을 계속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에겐 호재였다. 가브리엘의 체온은 꽤 높은 편이었으니, 오래 잡고 있다면 냉기가 가실지도 몰랐다.
“한 곡 가지곤 안 될 텐데.”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어 실수할까 겁이 나니 연습 상대를 해 달라고 했지. 그러나 에반젤린이 춤을 외우지 못했을 리 없다. 에반젤린은 흥미가 있거나 외울 필요가 있는 것들은 무척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물론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저번에 미쉘이 로한슨 영애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며 베개를 적시며 울어 댔지.
“얼마든지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에반젤린이 굳이 춤을 청한 건 ‘에반젤린 로한슨’의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서일 거다.
광명은 어째서 에반젤린 로한슨의 행색을 하고 있을까? 인간을 낮잡아 보는 존재가 인간인 척 군다는 게 얼마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가브리엘은 에반젤린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자세를 잡았다. 에반젤린이 제게 기대는 게 몹시 기꺼웠다.
반주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면 그건 가브리엘을 위한 장송곡임이 분명하다.
에반젤린이 드레스의 시착을 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 닫친 커튼 너머로 어둠이 넘실거렸다. 해가 저물고 시간을 확인하던 데이지가 창문의 커튼을 쳤다.
커튼까지 쳐져 있으니 실내는 더욱 침침했다. 어두운 세상에서 에반젤린만이 오롯이 반짝였다. 주변의 빛마저 전부 독식해 버린 탓에 주위는 더욱 침잠하고 별은 더욱 도드라진다.
가브리엘은 자신이 별 주변의 어두운 고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빛을 모두 빼앗겼으면서 에반젤린에게 시선이 가 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을 눈에 담으면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가브리엘뿐만은 아니었다. 두려움에 떨고 공포에 질려 겁을 먹었던 자들도 에반젤린이 가꾸는 화원 안에 들어간 이후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이 아끼는 하녀들도, 에반젤린이 구해 온 아이들과 미쉘, 슈미티아나마저. 원래 향하던 태양을 등진 채 모두 같은 빛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나의 신념도.”
철학도.
“이상도.”
태어날 때부터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당신이 세계를 처음부터 제멋대로 다시 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게 에반젤린이 가진 영향력이었다. 마치 이정표가 새로 세워진 기분이다.
에반젤린이 아니라면, 가브리엘은 이지를 벗어난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거다. 에반젤린이 아니라면 데이지도 다시 로한슨 저택에 돌아오지는 않았겠지. 슈미티아나도 오랫동안 고수한 신념을 버리고 취향에서 벗어난 하녀들의 옷을 지어 주지는 않았을 거고.
“그거 무슨 고백 같네요.”
에반젤린이 무척 떨떠름한 낯으로 말했다.
고백이라…. 그렇게 훈풍이 불 것만 같은 따스한 마음은 아니었다. 가브리엘 스스로조차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이건 두려움일까, 혹은 공포일까. 에반젤린과 함께 있으면 이질적인 존재를 보는 듯이 오싹해졌다. 섬뜩한 것을 목도하듯 심장이 떨렸다.
에반젤린이 평범한 귀족 영애의 탈을 벗고 속에 든 오만하고 권태로운 면모를 드러낼 때는 두려운데도 눈을 떼지 못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지금은 호기심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를 훔쳐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가브리엘이 신전을 속이면서까지 에반젤린을 비호한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날 좋아한다고?”
그래서 가브리엘은 말을 정정하는 대신 에반젤린의 반응을 지켜봤다. 호기심을 느낀다는 것 보다는 차라리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더 듣기 좋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선택이 잘못됐던 모양이다. 가브리엘은 역린을 건드렸다.
슬쩍 웃고 있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고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에반젤린을 처음 본 순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작게 싹이 트던 감정이 사라지고 차가운 조각만이 남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추락해 땅과 맞닿으면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이 망가지고 말 거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추락한 별 역시 모양이 으그러진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별을 끌어내리고 싶은 저열한 욕망이 만들어 낸 참상이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에반젤린은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꼭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눈이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초가 깜박였다. 두 안구가 사라진 것처럼 시야가 장막에 갇혀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불이 들어오며 탁 트였다. 실내가 이렇게 넓었었나? 무언가 비틀린 것 같았다. 천장에서 촛농이 떨어졌다.
밝아진 세상은 전에 보던 것과 전혀 달랐다.
벽과 가구들은 섬유질로 뒤덮여 있다. 살덩이들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듯 박동했다. 천장에는 안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온갖 틈에서 돋아나 있다. 그것들은 서로 저마다 다른 속도로 깜박였다.
빙글빙글 돌 때마다 발밑에서 무언가 물컹한 것들이 터져 나갔다. 구역질이 일어 가브리엘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붉은 오물로 점철된 세계에서 에반젤린 로한슨만이 유일하게 순백했다. 시선을 둘 곳은 에반젤린뿐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마저 붉은 탓에 정작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꼭 에반젤린의 눈이 이곳의 심장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바로 귓가에서 속삭였다.
“가브리엘 경은 그냥 저와 적당히 어울려 주시기만 하면 돼요.”
질책답지 않게 다디단 목소리다. 나긋한 울림은 혀가 갈라진 악마의 현혹 같기도, 가브리엘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주제넘게 나섰기에 벌을 주는 건가? 에반젤린은 가브리엘이 유독 긴장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살짝 어깨를 쓸었다.
과거가 반복되었다. 로한슨 저택에서 에반젤린과 대회를 나누었을 때, 선을 넘은 가브리엘에게 경고하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때처럼 무정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직면하기가 두려워 가브리엘은 차선책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 비친 세상에는 오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깨끗한 방 안 풍경에 안도감이 들었다. 아마 저게 진짜일 거다. 가브리엘은 그렇게 믿으며 거울을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춤을 추는 자신이 비친 순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거울 속에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없었다. 저 거울 속이 진짜라면,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야가 또다시 점멸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그게 전부였다는 듯 다시 원래의 색을 찾은 방 안은 몹시 조용했다.
“이만할까요?”
설탕물에 빠져 익사하는 개미를 보며 무척 안타까워하는 낯이었다.
그게 신호가 된 듯 막혔던 숨통이 확 트였다. 가브리엘은 숨을 들이켰다. 에반젤린에게선 말라비틀어진 달큼한 꽃향기가 났다. 에반젤린이 몸을 뗌과 동시에 코끝에서 향기가 멀어졌다.
에반젤린은 거리를 벌린 후 그린 듯한 자세로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살짝 몸을 숙여 인사했다. 다시 몸을 치켜세웠을 때는 무척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는 경이 꽤 맘에 들거든요.”
에반젤린은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었다. 짐 노페디가 살아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리고 싶어 했을 법한 미소였다.
에반젤린은 자기가 제대로 탈을 뒤집어썼는지 확인하려는 듯 거울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 역시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에는 무표정한 에반젤린 로한슨이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