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59)
가브리엘이 돌아간 후 시착한 드레스를 벗으려 다시 미샤한테 가고 있을 때 마침 산책하러 나갔다 돌아온 칸나랑 만났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크게 뜨이더니 볼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딱 봐도 한눈에 반한 얼굴이라 미샤가 가브리엘한테 원하던 반응이 딱 저런 반응이겠다 싶었다.
“천사신가? 왜 날개가 없죠?”
칸나가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했다. 우리 집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부를 잘하지? 미샤네 직원들이 아부 좀 잘 떨던데 나 없는 사이에 미샤한테 강습이라도 들었나? 하긴, 악녀 옆에서 살아남으려면 간신배처럼 재롱 좀 떨어 줘야지.
“가브리엘 경이 정신을 못 차릴 만했네요. 저도 왜 아가씨가 천사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니까….”
“가브리엘을 만났어?”
“네. 아주 많이 지쳐서 나가시던데요.”
칸나가 성대모사를 하며 축 처져 걸었다. 양심이 푹푹 찔렸다. 내가 말이 좀 심하긴 했지.
그냥 받아 줄 걸 그랬나? 아니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걸!
내가 걔랑 진짜 사랑할 것도 아니고, 악녀의 데드 플래그를 피하는 게 내 목적이니까 가브리엘한테도 적당히 맞춰 주면 되는 건데. 그래야 가브리엘이 적극적으로 날 보호해 주고 다닐 텐데.
그리고 뒤늦게 알아챈 건데, 사실 진짜 고백도 아니지 않았어? 내가 지레짐작으로 고백이냐고 물어본 거고. ‘너 나 좋아하냐?’ 이러고 물어봤을 때 가브리엘은 아무 말도 못 했잖아.
이게 0 고백 1 차임? 나 혼자 앞질러 나가서 거절한 거 아니야? 가브리엘이 날 좋아하는 건 맞는데 딱히 사귀어 달라는 말도 아니었고.
악! 내가 왜 그랬지? 겁나 후회된다….
빙의하고 나서 감정 기복 없이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가브리엘 앞에서 급발진을 해버렸다. 새벽도 아닌데 새벽 감성에 몰입해서 자기 역할 잘 수행하는 남주 두고 분풀이만 했네. 이게 다 자다 깨서 그런 거다. 이래서 사람이 잠은 잘 자야 한다니까?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하며 칸나의 품에서 푸딩을 넘겨받았다. 야행성이라 잘 시간도 아니면서 눈을 감고 있네. 턱을 긁어 주니 푸딩이 기분 좋은지 골골댔다. 크으. 이게 힐링이지. 애니멀 테라피가 최고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다 풀렸다. 푸딩이 수인만 아니었다면 배에 얼굴 파묻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쉽다.
“칸나. 나 대신 푸딩 산책시키느라 수고했어.”
“아니에요. 아가씨는 오늘 바쁘셨잖아요.”
오늘 가브리엘이랑 약속을 잡아 놔서 산책은 칸나가 대신해 줬다. 보통 이런 잡무들은 칸나가 맡는 편이었다.
칸나는 연차가 제일 적어서 대외적인 수발은 항상 헤나랑 데이지가 들어 줬다. 특히 요즘엔 경력 있는 데이지를 자주 대동해 다니고. 그래서 칸나한테 좀 소홀했던 것 같다. 반성하자.
“슈미티아나 님께 가시는 건가요?”
“맞아. 너도 같이 가자.”
데이지랑 헤나는 이미 치수를 쟀을 거고, 칸나만 재면 되겠다. 같이 가서 나는 옷 반납하고 칸나는 치수 재면 딱 맞네.
“저도 같이요?”
“그래. 네 것도 만들어야지.”
“저요?”
“헤나랑 데이지건 이미 만들어 달라 했어. 저번에 신전에 갔을 때 나 때문에 험한 말을 들었잖니.”
칸나는 대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내 품에 안겼다. 자기 자리를 침범당한 푸딩이 손을 휘저었다. 아니, 푸딩아. 온종일 칸나가 보살펴 줬는데 내 품 한쪽 정도는 양보해 줘라.
“아가씨이….”
아래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울어? 옷 하나 만들어 준다고 우는 거야?
내가 금화를 그렇게 뿌렸을 때는 우왕, 우리 아가씨 최고. 이러면서 엄지 척이나 하고 있던 칸나가? 기성복을 마차 가득 채울 정도로 사 줬을 때도 옷 고를 때 고민이겠네요, 하고 태연하게 굴던 우리 멘탈 강한 칸나가?
역시 정답은 맞춤복이었나? 좋아. 미샤를 영원히 고용하는 방향으로 가자.
“전 죽을 때까지 아가씨 거예요. 어떻게 쓰셔도 좋아요.”
칸나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니…. 안 쓸 거야. 코맹맹이 소리로 그런 말을 해 봤자 별로 간지 나지도 않거든? 하여간 은혜 갚은 여주는 헌신 범위도 끝내주네.
“아가씨는 저를 좋아하시죠?”
칸나가 안긴 채로 고개만 들어서 날 봤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사실 답은 따로 있는데, 가브리엘의 전적도 있고. 우는 사람한테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보통 난 소설 읽을 때 여주가 제일 좋더라. 그럼 칸나도 좋아하는 거지 뭐.
가브리엘은 꿈을 꿨다.
늘 꾸는 익숙한 악몽이다. 마차가 거세게 달리고, 어린아이가 바퀴에 깔린다. 마부는 귀한 분을 태운 마차가 사고 날 뻔한 것에 성을 내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을 계속 몰았다. 누군가 저 마차가 어느 주교가 탄 마차라며 속삭였다.
‘저 높은 분이 주술사 나부랭이들 잡는 데 큰 공을 세우셨대. 그런 마차에 끼어들다니, 저놈도 주술사 아니야?’ ‘가까이 가지 마. 저주받을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움을 주러 나선 몇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모른 체하며 자리를 떠났다.
가브리엘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살려 주세요, 다리가, 피가 멈추지 않아요.”
그러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감히 신의 총아가 탄 마차를 전복시킬 뻔한 아이를 돕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아이를 업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신관님을 찾아 도움을 청하겠다며 약속했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이를 업은 탓에 몸이 절로 휘청거렸다.
가브리엘은 사제를 찾아갔다. 빈민가를 돌며 가끔 성수를 써 기적을 보여 주던 사제였다. 사제는 백 번도 더 넘게 들은, 똑같은 말을 내뱉는다. ‘미안하지만 도움을 줄 수 없다.’
“거짓말쟁이!”
가브리엘은 사제에게 달려들었으나 곧바로 제압당했다. 뒤늦게 나타난 더 높으신 분이 난장판이 된 현장을 보며 혀를 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바니야 사제님….”
사제는 상황을 설명하고 곧바로 꾸중을 들었다.
“멍청한 것! 어차피 빈민들에게 쓸 성수이니 이 아이에게 내주어도 될 것을!”
“그게…. 어제 하루트가 조금 다쳐서 남은 성수를 줬습니다.”
“이를 어째….”
그사이에 가브리엘 등의 온기는 꺼져 갔다. 심장이 더욱 느리게 뛴다. 가브리엘은 익숙한 심박 수에 기시감을 느꼈다. 아주 느리게 뛰는 심장. 이건 분명 그녀의….
“내가 도와줄게.”
자바니야 사제의 목소리는 곧 차갑고 고저 없는 에반젤린 영애의 목소리로 변했다.
그건 평생을 바라던 말이었다. 그리고 에반젤린 로한슨을 만난 이후로 종종 듣던 말이기도 했다. 가브리엘은 제게 내밀어진 희고 차가운 손을 기대했으나 돌아본 곳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희미하게 깨어나는 정신 위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주무세요? 철야하며 일할 때도 멀쩡하시던 분이?”
“원래 서류 보실 때 졸지도 않으시는데, 오늘 좀 피곤하셨나 보네.”
“좀 전에 로한슨 저택에 다녀오셨잖아.”
“그러네요. 어떻게 하지? 깨울까요?”
익숙한 목소리들이다. 라파엘라와 유리엘인가? 점점 꿈이 흐릿해지고 닫힌 눈꺼풀이 보였다.
“마리크 주교님이 미쉘 경을 호출하셨던데…. 단장님께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브리엘은 곧 들리는 낯익은 이름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래, 그때 탄 마차의 주인이 그런 이름이었지.
“이미 일어났으니 괜찮다.”
“단장님!”
라파엘라가 가브리엘을 반겼다. 마리크 주교의 호출이라. 원래대로라면 라파엘라는 고민도 없이 가브리엘을 깨웠을 텐데, 오늘 유독 지쳐 보이기는 했나 보다. 아무래도 로한슨 저택에서 있었던 일의 영향이겠지. 가브리엘은 미간을 피며 잠을 쫓아냈다.
그래서, 마리크 주교는 왜 미쉘을 호출했을까?
“미쉘은? 먼저 갔나?”
“아뇨. 단장님한테 말씀드리고 가야 한다고 주교님을 뻥 차고 뻐기고 있어요.”
‘부하 하나 잘 두셨네요.’ 라파엘라가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물론 그 하나가 골칫덩어리라는 사실을 비꼬려고 한 말이기도 했다.
가브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라파엘라가 구겨진 부분을 두드려 펴 주며 단장을 도왔다.
“자바니야 주교님이 미쉘에 대해 다 불어 버린 거겠죠? 그 늙은이가 마리크 주교님의 노선을 탔잖아요. 의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위선자 같으니.”
그때 미쉘의 상황을 봤던 주교는 자바니야뿐이다. 분명 미쉘을 호출하는 데는 자바니야의 입김이 있었을 거다. 로한슨 저택에는 가정 교사를 빙자한 첩자를 보내더니 진짜 가지가지 하네. 라파엘라가 이 죽이자 가브리엘이 그를 말렸다.
“자바니야 주교님은 네 생각만큼 무정하신 분이 아니야.”
“남들 볼 때만 사람 좋은 척 자기 잇속 챙기는 늙은이가요?”
“라파엘라, 나는 자바니야 주교님의 은혜를 입은 몸이야.”
“제 생각엔 단장님이 준 도움이 더 클걸요? 늙은이가 주교가 된 게 누구 덕분인데.”
가브리엘은 어렸을 적 자바니야가 도와준 덕에 빈민가를 벗어나 신전의 보육원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지내던 형의 장례도 치를 수 있었고.
지금이야 세월이 많이 흘러 자바니야의 선함도 많이 퇴색되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가브리엘에게 자바니야는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었다.
물론 그건 가브리엘의 입장일 뿐이긴 했다.
라파엘라는 그걸 별것 아니라 여겼으니까. 날 때부터 공작가의 도련님으로 태어난 라파엘라에게 호의란 당연하였고, 어린아이에게 성수를 지원해 준 것도 아니고 보육원으로 보낸 건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가브리엘은 어린 나이에 기사단에 들어와, 지금은 기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자바니야의 수족처럼 부려지고 있으니 은혜는 이미 갚고도 남았지.
자바니야 주교에 대한 말이 나오면 항상 입장이 갈리는지라 가브리엘은 말다툼하는 대신 급한 것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가브리엘은 단장실 근처에서 눈치를 보며 기다리고 있던 미쉘을 불러 세웠다.
“단장님.”
“미쉘, 마리크 주교님께서 왜 호출하셨는지 연유는 말해 주셨나?”
“아니요. 이유는 못 들었습니다만 추측하건대 절 부르신 이유는 그림 건밖에 없을 겁니다.”
가브리엘이 생각하기로도 그랬다. 미쉘을 부를 이유는 그것뿐이었는데, 이상한 건 그림이 타오른 날로부터 상당히 시간이 지났다는 거다.
데이지가 머물던 수도원에서 베르가 사제를 잡아 온 이후로 그림에 대한 의견이 뒤집혀 다들 언제 찬양했냐는 듯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혹시나 그림이 더 퍼져 베르가 사제 같은 경우가 더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고.
그래서 가브리엘이 에반젤린에게 무도회의 파트너를 청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을 홀렸던 그림의 영향력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에반젤린 영애였다. 실제로 당시에 그림 앞에 밤낮이고 서 있던 사람들은 불타오르는 그림 앞에 서 있던 영애를 마주한 후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다들 에반젤린에 대한 기억은 제대로 못 하고, 미모가 뛰어난 영애 정도로만 복기했다는 점이다. 에반젤린 영애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나마 미쉘뿐이었다.
대신전에 주로 출입하여 그림을 봤던 사람들은 주로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다. 심지어 당시 그림에 대한 소문이 퍼져 구경하러 온 자들이 꽤 됐다.
누가 그림에게 홀렸는지 일일이 확인하여 사는 곳을 방문할 수 없으니 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갈 수밖에. 그게 바로 사교계였다. 신전에는 출입 명부가 있으니, 방문자들이 가는 연회를 에반젤린과 함께 들락거릴 예정이었다.
에반젤린의 영향력을 활용해야 하는데, 영애의 괴상한 소문이 발목을 잡았다. 사교계에 얼굴 한번 내비친 적 없는 사람이 소문은 얼마나 무성하던지, 누군가 고의로 말을 흘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최대한 많은 연회에 참석하고 영애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가브리엘이 동행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법이었다. 가브리엘의 대외적인 평은 흠잡을 구석 없이 무결했고, 성기사와 동행하는 만큼 에반젤린에 대한 소문들도 희석되어 가라앉을 것이다.
혹시 거절할까 싶어 걱정했으나, 상황 설명을 듣고 에반젤린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나이대의 평범한 귀족처럼 굴길 원했으니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던 거다.
가브리엘은 물 흐르듯 생각의 끝이 에반젤린에게 향하는 걸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미쉘과 마리크 주교에게 집중해야 할 때다.
그러고 보니….
가브리엘이 미쉘을 바라보았다.
칸나는 그 끔찍한 광경을 겪고도 살아남은 게 자신뿐이라는 듯 이야기했으나 가브리엘은 그런 사람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열렬한 광신도가 된 부하 말이다.
“미쉘.”
칸나가 모르는 건 당연했다. 에반젤린에게 미쉘의 이상 증세를 알리지 않았고, 미쉘도 영애의 앞에서는 내숭을 떨며 자중하려고 드는 편이었고.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렇다면 삽을 준비할까요?”
“장난치는 게 아니야. 그때, 로한슨 영애가 너에게 물을 뿌린 순간 말이야.”
“아. 네. 그때요?”
“그때 뭘 봤지?”
미쉘도 가브리엘과 마찬가지로 범상치 않은 붉은 세상을 본 걸까? 미쉘은 그 당시를 떠올린 것인지 황홀한 낯을 해 보였다.
“하얀 것이요.”
하얀 것이라면, 순백이 수식으로 어울리는 건 단 한 존재뿐이다. 미쉘은 꿈을 꾸듯 계속 말을 이었다.
“세상이 불로 뒤덮이는데 그분만 새하얬어요. 이미 타서 재가 남은 것처럼. 그래, 도나우처럼요. 아, 물론 지금은 그런 것과 로한슨 영애님이 같은 선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본 게 달랐다. 설명만 듣자면 몸에 불이 붙어 시야까지 불길이 일렁이는데 그때 로한슨 영애를 본 것뿐인 것 같았다. 에반젤린은 흰옷을 즐겨 입고, 대신전에 방문했던 날 역시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눈도 봤습니다. 그림에 그려진 눈 같은 문양이 아니라 진짜 눈이요. 후광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눈? 가브리엘이 본 그 눈이 맞을까?
“왜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야 다들 절 이상하게 생각하니까요. 물론 단장님 빼고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전과 비교했을 때 정말 이상해진 것뿐이었다. 원래 미쉘은 굉장히 수줍고 말수가 적으며 침착한 편이었으니까. 성격만 놓고 비교해 봐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래. 미쉘도 그 눈을 봤다는 이야기다. 가브리엘은 에반젤린 로한슨에 관한 생각을 뒤로하기로 했던 것도 까맣게 잊고 미쉘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쉘, 넌… 그걸 보고서 어떻게 로한슨 영애를 숭배할 생각을 했지?”
“견딘다면 사랑받으실 수 있어요. 당신 절 부러워하잖아요.”
칸나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견디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영애에 대한 생각을 애써 떨쳐 낼 때, 미쉘이 홀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거든요.”
“뭐?”
“로한슨 영애님은 그냥 절 구해 주신 거잖아요? 제가 그분을 추앙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미쉘이 홀려서 무조건 에반젤린을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꽤 세속적이고 납득이 가능한 이유였다.
그러고 보면 칸나도 그랬다. 도나우 블루에게 납치당했을 때 에반젤린이 구해 줬다고 했지. 처음엔 영애에게 적대적이었던 데이지도 그랬다.
‘그렇다면 나는?’
가브리엘은 구원받을 시기를 놓쳤다. 꿈속에서 에반젤린이 도움을 준다 해도 죽은 아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게 가브리엘이 에반젤린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인가?
고민도 잠시, 가브리엘은 상념을 애써 떨쳐 냈다. 해일이 밀려와 언젠가 물에 잠기게 되더라도 지금은 눈앞의 맹수를 경계할 때다.
마리크 주교가 기거하는 곳으로 향하자 그를 따르는 보좌들이 가브리엘을 반겼다.
“가브리엘 경. 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미쉘 경을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가브리엘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위압적인 기색에 사제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제가 우물쭈물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하자 그 옆의 다른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대신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셨나 보군요. 미쉘 경을 호출하시기는 했지만 그건 사후 감사 때문입니다. 그건 주교님이 아니라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고요.”
미쉘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폈다. 존경하는 상관의 발목만 잡다니 라파엘라의 말대로 참 대단하신 부하셨다.
“하하. 사후 감사는 의례적으로 꼭 해야 한다는 걸 기사단장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겁을 먹었던 사제가 이제 다시 기세등등해져서 맞장구를 쳤다.
노페디의 그림이 불탄 지 벌써 한 달이 지난 모양이다. 사제의 말대로 중한 사건들은 한 달의 틈을 두고 사후 감사를 하고는 했다. 날짜 감각이 둔해져 마리크 주교의 부름에서 목적을 알아채지 못한 가브리엘의 실책이었다.
마리크 주교가 미쉘을 부른 건 미끼였다.
마리크 주교가 가브리엘을 호출했을 때 온갖 변명을 들어 가며 만남을 미뤘으니 회유책을 쓴 것이다. 그래서 미쉘을 호출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나 보군. 사후 감사라고 하면 가브리엘이 대동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리고 이런 식으로 수를 쓰면 가브리엘을 명분 없이 호출했다는 질책에서도 피할 수 있겠지.
“함께 오셨으니 미쉘 경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주교님과 대화라도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밤이 늦었는데 결례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결례라뇨. 내 호의인걸요. 기사단장도 내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가브리엘이 거절하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문밖의 소란스러움을 듣고 마리크 주교 본인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오늘도 베일을 쓴 채였다.
“나와 차 한잔하며 담소를 나눌 시간도 부족한가요? 나는 늘 취침 전에 차를 든답니다. 피로를 풀어 숙면에 무척 도움이 되는 차예요. 공사다망하신 기사단장께서도 잠이 필요해 보이는데, 차가 도움이 될 거예요.”
아주 부드러운 강요였다. 옆의 사제들은 주교님과 함께 다과를 나누는 영광을 누릴 가브리엘을 몹시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은 끝내 끈질긴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수긍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마침 요즘 피로가 쌓여 있었습니다.”
가브리엘은 미쉘과 눈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외부자를 상대로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하는지는 일전에 설명한 적 있으니, 잊지 않았을 거다.
라파엘라는 미쉘을 보고 뇌가 맛이 갔다고 했지만, 가브리엘이 보기에는 그냥 맹신의 대상이 라헬 님에서 에반젤린으로 옮겨진 것뿐이었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쉘은 퍽 냉정한 상태였다. 그러니 에반젤린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 내뱉지 않을 거다. 그 편으로는 신뢰해도 좋았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세요.”
가브리엘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말대로, 존경을 받는 주교가 머무른다기에는 단출한 내부였다. 나름 검소하다며 정평이 난 자바니야 주교의 집무실만 봐도 화려한 장식들이 여럿 있는데, 마리크 주교의 집무실은 무척 황량했다. 꼭 수도원에 온 것만 같았다.
마리크 주교는 원래 수녀였으니, 그때의 습관인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 마리크 주교가 직접 차를 우려내어 따라 주었다.
“기사단장과 이렇게 둘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마저 자신의 잔을 채운 마리크 주교는 가브리엘의 건너편에 앉았다.
마리크 주교는 베일을 살짝 걷어 차를 마셨다. 살짝 드러난 하관에는 살이 녹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보기 흉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괜한 말은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나 자신도 내 얼굴을 보기 저어해서 천으로 가리고 다니니까요.”
마리크 주교가 화상을 입어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건 신전 사람들에게는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리크 주교가 얼굴을 내보이길 꺼린다는 것도. 그래서 마리크 주교는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횟수가 드물었다.
그 드문 상대에 자신이 포함될지는 몰랐지만. 가브리엘은 마리크 주교를 따라 차를 입에 댔다. 그다지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차였다.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어떤 건가요?”
“사람을 대함에 여유를 가져야지요.”
가브리엘이 재촉하자 마리크 주교는 서두르지 말라며 훈계를 했다. 마리크 주교는 차를 전부 들이켜고 면사포를 다시 덮고 나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기사단장에게 축하할 일이 생겼더군요.”
“제게요?”
“하하.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네요. 왜, 로한슨 영애의 데뷔당트 상대라고 말이 많던데요.”
“네. 맞습니다.”
왜 가브리엘을 불렀나 했더니 에반젤린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인가? 가브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주최한 탄신 연회의 초대장을 구하는 동안 소문이 퍼져 나갔다.
“스물에 데뷔당트라….”
“로한슨 영애가 병약했던지라 몸이 회복된 지금 뒤늦게라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사단장께서 사모하는 분을 위해 신경 써 주신 거군요? 하긴. 로한슨 영애에게 기댈 구석은 기사단장뿐이니까요.”
마리크 사제는 가브리엘의 기특함을 치하하는 듯했으나 사실은 에반젤린의 처지를 비꼬는 것이다.
“로한슨 영애는 어머니가 없으니 의지할 사람이 없겠어요. 다른 귀족과 교류도 전혀 없었고, 외가와도 절연했다죠?”
그것 역시 유명한 소문이었다. 더불어 친부인 로한슨 백작마저 온갖 이유를 대며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에반젤린에게 더욱 소문이 들러붙었다.
“주교님께서 떠도는 소문에 귀 기울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귀가 밝아지는 법이지요.”
가브리엘은 의연한 척 마리크 주교를 살폈다. 면사포로 가려져 있으므로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토텐 후작 부인이 샤프롱이 되어 주기로 한 건가요?”
토텐 부인이 샤프롱이 되어 주기로 한 건 당사자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어디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걸까?
돌리네 포노르 쪽은 입막음이 잘 되어 있고, 로한슨 저택의 고용인들에게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는 않았을 텐데.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자바니야 주교만을 믿을 수 없어서 감시를 더 붙인 건가? 로한슨 저택의 마차를 감시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비교적 느슨한 토텐 쪽에서 새어 나갔거나.
“그런데 일이 좀 틀어진 모양이에요. 영애가 후작저에 방문한 이후로 토텐 후작 부인이 두문불출하고 있지요? 신전에도 오지 않고 있으니, 기사단장의 연락도 받지 않을 것 같네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설마 가브리엘과 토텐 부인의 거래까지 아는 건가? 그리고 그걸 가브리엘에게 부러 티 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샤프롱, 내가 해 줄까요?”
가브리엘은 놀라서 움직임을 멈췄다. 마리크 주교는 정자세로 곧게 앉아 있었다. 특정 습관을 갖고 있지도, 지금 특이 행동을 취하고 있지도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불가능했다.
“다름이 아니라 로한슨 영애의 사정이 딱해서요.”
마리크 주교의 목소리는 무척 인자했다.
“주교님께서는 사교계에 나가는 걸 저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겸사겸사 권하는 거예요. 미래의 영광이실 황태자 전하의 연회이니 신전 측에서도 인사를 가야 하지 않겠어요? 나 역시 초대를 받았고 참석하기로 했답니다.”
미래의 영광이라. 황제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싫어 아직도 제위에 남아 있는 걸 제국민 중 누가 모를까. 그러나 마리크 주교는 거짓을 진실인 양 늘어놓는 장기가 있었다.
“토텐 부인이 아니라면 내가 샤프롱을 맡죠.”
가브리엘은 면사포 아래로 가려진 눈이 번뜩일 거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