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62)
“…….”
“…….”
와…. 부녀가 밥 먹는 동안에 이렇게 끝내주는 침묵이 오갈 수가 있구나. 은식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밖에 안 난다.
지금은 백작이 연회 가기 전에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대서 같이 밥 먹는 중이다. 그래서 한창 데뷔당트 준비하는 중에 시간 빼서 왔더니 이게 뭐야. 사레들릴 것 같아.
백작은 이제 막 예절을 배우기 시작한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식사 매너를 가지고 있었다. 저러니까 에반젤린 엄마가 홀딱 넘어갔지. 어휴. 사람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 돌리네가 가르쳐 준 예절 같은 건 다 집어치우고 스테이크를 푹푹 찔렀다. 레어로 익힌 건지 핏물이 그대로 배어 나와 흰 접시 위로 퍼졌다. 으악, 식욕 떨어져. 나는 웰던 파라고. 입맛이 싹 달아나서 고기만 다지고 먹지는 않았다.
심기가 별로라는 걸 팍팍 티 내고 있으니까 백작이 인제야 식기를 내려놨다. 왜요? 아저씨 딸이 식사 매너가 개똥 같아서 불편하세요? 뭐, 그럼 나는 안 불편한 줄 알아?
물론 제일 날벼락 맞은 건 갑자기 식당에서 식사한다는 말에 혼비백산하던 주방 식구들이다. 코스로 서빙하던 사람은 손을 벌벌 떨다가 나랑 눈 마주치니까 와인을 엎을 뻔하더라. 오늘은 또 겁먹은 하인들이 무슨 사고를 저지를지 주시하고 있었던지라 민첩하게 넘어가는 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후, 한 방울도 안 흘렸다.
“조심해야지.”
“네, 네. 죄송, 죄송합니다.”
그 이후 내 접시들은 전부 율마가 떠밀려서 서빙했다. 율마는 데이지네 고아원에서도 요리를 도맡았다고 하더니 여기서도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왜 주방에서 보조하는 애한테 서빙까지 시키나 했는데 막 뒤에서 율마가 그나마 무사할 거라면서 얘를 보내더라.
“율마, 영애님 앞에서 떨지 않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주방의 희망! 가라!”
“네가 주방에 와 줘서 너무 기쁘다.”
“영애님이 실수한다고 죽이는 것도 아닌데 다들 뭘 그리 겁을 먹는 거예요?”
“넌 진짜 심장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뒷담화면 좀 조용히 하지, 소리가 너무 커서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척하느라 혼났다. 슬쩍 보니까 백작도 안 들리는 척 태연하게 식사하고 있더라. 하긴 보고도 못 본 척, 들리는데 모른 척하는 게 귀족의 덕목이긴 하지.
율마가 서빙을 끝내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사실 내가 식당에 올 일이 없으니까 오랜만이 맞긴 하네. 그래도 내가 구출해준 아이니 안부 인사는 묻고 싶었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구나.”
“네. 영애님 덕분에요.”
그래도 율마가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이 접시 깬 다음 울면서 빌고, 머리 박는 꼴은 안 봐서 좋긴 하네.
“입맛에 맞지 않으셨어요?”
율마가 내가 조져 놓은 스테이크를 흘긋거리며 물었다. 아차, 지금 요리사 앞에서 편식하고 있었구나.
“피가 흐르는 건 별로야.”
“네?”
“왜? 내가 좋아할 것 같았니?”
왜, 뭐. 악녀라고 다 피 뚝뚝 넘치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법칙 있어?
“아니에요. 영애님의 입맛은 꼭 주방장한테 말해 놓을게요.”
응응. 꼭 전달해 줘. 맨날 고기 올라올 때마다 전부 레어라서 나 대신 칸나나 젤리가 다 처리했다고. 생각해 보니까 진작 요리법을 바꾸라고 말할 걸 그랬다. 갑질은 커녕 주는 대로 먹던 을의 버릇을 못 고치고 그냥 먹었네.
“자주 내려와서 여기서 식사하시는 게 어떠세요?”
진심이야? 에반젤린이 주방에 등장할 때마다 얼마나 큰 소란이 벌어지는지 모르지? 저번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빌던 꼴을 못 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다. 참고로 그때 하녀는 성수로 잘 치료받고 담당 구역을 바꿨단다.
근데 그 꼴을 매일 보라고?
“너희가 불편하잖니.”
“그래야 저 사람들도 적응할 테니까요. 어떻게 요리사가 영애님의 입맛도 모르고 있을 수가 있어요?”
“고려해 볼게.”
벌써 직업 정신이 넘치는지 율마가 툴툴거렸다. 근데 딱히 요리사를 탓할 수도 없는 게, 입맛을 모르는 건 내가 빙의자라서 그런 거 아닐까. 에반젤린은 진짜 악녀니까 레어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고. 나는 식사를 다른 사람이랑 같이 하는 편이니까 맨날 접시가 비워져 돌아왔으니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했나 보지.
율마한테 대충 맞장구를 쳐 주고 보내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백작이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플록스의 말대로 보기 그럴듯해졌구나.”
그게 뭔 소리래?
“사람다워졌어.”
아하.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에반젤린이 금수의 탈을 벗었다는 이야긴가 보다. 에반젤린아, 내가 빙의하기 전엔 얼마나 반항심이 넘쳤던 거야. 나도 지금 건방지게 군다고 굴고 있는 건데 백작이 사람이 다 됐다는 소리를 하네.
와인 엎지를 뻔한 거 잡아 주고 하녀랑 담소 좀 나눴다고 저런 감상을 들어? 원래 얼마나 성질이 나빴을지 상상도 안 간다. 이러니까 내가 빙의한 걸 다 들키고 다니지.
“오늘 연회에 간다면 부디 얌전히 굴어 주길 바라마. 지금처럼만 해도 충분해.”
백작이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다.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오늘 있을 황태자의 탄신연에 관한 경고였다. 진짜 이놈의 백작놈. 오랜만에 딸 보고 한다는 얘기가 얌전히 굴어 달라고?
“오랜만에 보는 딸인데 안부 인사가 먼저 아닌가요?”
아빠가 저러니까 에반젤린이 엇나가서 세기의 악녀로 진화해 버렸지. 얌전한 나조차도 지금 저 말 듣고 사고 치고 싶어졌을 정도다. 내가 견적을 딱 보면 백작은 가족 후회물로도 구제 못 한다. 가족 후회물 찍으려면 이제 외가로 가야지.
“그래…. 얼마 만이지?”
“아마 제 장례식 이후 처음 보는 걸 거예요.”
그럼 딱 두 달 아니야? 두 달간 애를 방치해 놔? 근데 에반젤린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애는 아니긴 하네. 그럼 딸로 정정하자. 어? 딸을 방치해 놔? 그러고도 네가 애 아빠야?
“그래. 오랜만이군.”
백작은 내가 쉬이 물러나지 않을 기세라 그런지 눈을 피하며 한 수 접어 준다는 양 굴었다. 하여간 맘에 안 들어.
“그 말 하려고 부른 건가요? 쓸데없이 만찬까지 같이 하자고 하면서?”
내가 백작이랑 밥 먹어야 한다니까 칸나랑 미샤가 얼마나 슬퍼했는데. 물론 칸나는 나랑 같이 밥 못 먹어서 서러워했고, 미샤는 연회가 있는데 식사가 웬 말이냐면서 금식을 부르짖었다.
“아니. 중요한 게 더 있다.”
백작은 광고하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아, 그냥 빨리 말하세요.
“호사퀸 공작이 연회에 참가할 거다.”
호사퀸 공작이래. 장인이랑 사위 사이도 끝내주게 서먹하네. 하긴 딸이랑 절연한 원인이니까 사이가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겠구나.
“공작과 관계를 다지도록 해.”
뭐? 지금 절연은 자기가 당해 놓고 왜 똥은 내가 치우라 하는 건데? 뒷수습도 알아서 잘해야지. 헐. 설마 이거 가족 후회물로 진입하는 흐름인가? 근데 에반젤린은 다 컸는데?
“지금 와서요? 왜?”
이제 와서 육아물 찍기엔 너무 늦었는데? 회귀하는 거 아니면 답이 없다니까.
“몸이 좋지 않다더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해.”
어허. 이 아저씨가 진짜 귀가 왜 이렇게 얇아? 소문만 들으면 나도 사람 가죽으로 드레스 만들어 입는 악마다. 공작도 실제로 보면 골골대기는커녕 엄청나게 정정할걸.
“늙으면 감성적으로 되는 법이지. 죽은 딸을 그리워할 정도로 말이야. 네 얼굴은 아마란스를 똑 닮았으니까 공작도 직접 본다면 꽤 동요할 거다.”
아마란스? 어디서 들어 봤더라?
“아마란스는 에반젤린의, 그러니까 네 엄마다.”
백작이 뒤늦게 내가 기억 상실이라는 걸 상기시켰는지 부연 설명을 했다.
아하. 그런 이름이구나. 뭔가 익숙한 울림인 게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봤던 초상화들을 떠올려 보면 얼굴이 에반젤린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네. 물론 에반젤린네 엄마 쪽이 더 따스한 인상이기는 했다. 굳이 따지자면 분위기는 여주답게 다정한 인상인 칸나랑 비슷한 편인가.
“작위는 몰라도 유산은 네게도 상속받을 자격이 있어.”
백작이 드디어 본심을 밝혔다. 그러니까 곧 유산이 분배될 테니까 나보고 가서 알랑거리면서 돈 좀 벌어 오라는 소리였다.
우와 쓰레기. 진짜 악녀 아빠답다.
속으로 야유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번뜩였다. 이것도 이벤트인가? 아마 원작에서도 에반젤린이 저런 지령을 받았겠지.
그래서 에반젤린은 공작한테 접근한다. 할아버지는 에반젤린이 뒤가 구리다는 걸 알고 자기 손녀를 내치는 대신 유산을 상속할 다른 사람을 입양하는 거다. 그게 바로 칸나인 거지! 아마란스랑 얼굴은 아니어도 분위기가 비슷하잖아.
우리 칸나가 모자란 건 없지만, 로판 여주치고는 배경이 허술한 편인데, 그걸 공작이 양녀로 들여서 딱 채워 주는 거지! 그러면서 악녀한테 복수까지 딱 해 줄 수 있는 거야. 완전 사이다 에피소드 아닌가?
갑자기 조금 관심이 생겼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 백작이 저울에 무게 추를 추가했다.
“내 제안이 끌리지 않는다면 나와 거래를 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내게 바라는 게 있나?”
“거래라….”
음. 뭘 달라고 하지? 물질적으로 갖고 싶은 건 딱히 없는데? 에반젤린 엄마가 물려준 돈도 있고. 굳이 따지자면 바라는 건 사형당하지 않는 안락한 미래이기는 한데 그걸 백작이 이뤄 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백작은 악녀가 사형당하는 날 혼자 내빼다가 뒤늦게 잡혀서 즉결 심판 당하게 생겼다.
필요한 건 없지만, 그래도 공작한테 접근하는 거 맨입으로 해 줄 수는 없고. 물론 유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그 유산을 백작한테 줄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부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였으면 좋겠군.”
백작은 내가 무슨 어마어마한 걸 바랄 거라고 여긴 건지 조건을 덧붙였다. 나도 상식이라는 게 있거든? 근데 백작이 왜 저런 말을 굳이 더했는지는 알겠다. 에반젤린은 뭐 좀 상식이 없었을 수도 있지.
필요한 거…. 필요한 거라…. 아. 백작을 보고 있으니 부탁할 게 딱 하나 생각났다.
바로 일기장이다. 에반젤린 엄마 일기에서 백작 욕한 부분을 편지 보낼 때마다 뜯어서 첨부했더니 두께가 꽤 줄었다. 원래 일기 쓰던 사람들이라서 일기를 하나만 써 놓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저택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단 말이지. 그럼 영지에 있지 않을까?
게다가 다른 일기에서 정령 소환진 같은 게 또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영애님께서 계시면 그림의 영향력이 혼탁해지니까요.”
갑자기 가브리엘이 내게 단호하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친화력이 바닥이라고 무려 남주가 공인한 사람이지만 정령 말고 다른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소환 진이 있을 수도 있잖아!
“백작령에 한번 들르고 싶은데요.”
“영지에?”
백작은 살짝 미간을 구기더니 시기를 물었다. 오늘 데뷔당트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사교 행사들에 참여해야 하니까 적어도 한두 달 뒤?
“한 달, 만약 준비가 필요하시면 두 달 정도 뒤가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미리 기별을 넣어 두마.”
그렇게 전하자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 생각에 잠기더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영지에 에반젤린의 방이 있던가?”
엥. 그건 또 무슨 소리래. 왜 에반젤린 방이 없어? 에반젤린한테 무슨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지? 하긴, 그러기에는 엄마랑 너무 닮긴 했다. 그럼 학대당하기라도 한 건가?
“왜 제 방이 없죠?”
만약 진짜 학대하기라도 했다면 백작을 가만두지 않겠어.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란스가 영지에 내려가는 걸 꺼려해 에반젤린과 항상 수도에 남아 있었다. 영지에 가는 건 나뿐이었어.”
이번에도 백작이 기억 상실을 고려해 설명을 해 줬다. 아하. 그냥 귀촌을 싫어한 것뿐이었구나. 그럴 수 있지, 응응.
“방을 준비해 놓으라고 하마. 한두 달이면 충분하겠지.”
기왕이면 아늑한 우드 톤으로 꾸며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요구해 봤자 백작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고생할 테니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내게 요구할 건 그것뿐인가?”
“그럴 리가요. 또 필요한 게 있다면 편지할게요.”
내가 그거 하나 들어준다고 만족할 줄 알아? 난 만족을 모르는 여자다.
“그렇게 해. 대신, 그 고약한 저주들은 보내지 말고.”
흥. 할 거거든? 내 맘이거든요?
“왜요? 어머니가 남기신 절절한 사랑 고백인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부른 부분만 찾아 보냈어요. 어머니께서 직접 찾아오시지 못하니 글이라도 보낼 수밖에요. 아니면 진짜 찾아오시길 바라나요?”
후식으로 나온 차를 호로록 마시며 말하니 백작이 오한이 든 건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귀신이 나타날까 봐 무섭기라도 하나? 흥. 쌤통이다.
“아마란스의 이름도 몰랐던 주제에 퍽 챙겨 주는군.”
“몰랐던 게 당연하죠. 전 기억 상실이잖아요.”
게다가 일기장은 1인칭 서술이라서 이름 같은 거 안 나오거든? 에반젤린 엄마가 표지에다가 ‘아마란스’ 이렇게 이름 적어 놓은 것도 아니고!
“계속 그런 식으로 굴 건가?”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황궁에 가서는 말씀하신 대로 얌전히 굴 테니까요.”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백작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도 조심하세요. 기억 상실에 걸린 병약한 딸을 가여워하는 성의라도 보여야지 않겠어요?”
내 생각엔 백작이 더 문제다. 자기 딸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방치하고만 있지.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친부도 손절한 악녀라면서 헛소문이 더 활개를 칠 테고.
백작은 정곡이 찔렸는지 말이 없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볼게요.”
백작이랑 더 대화 나눌 것도 없고, 미샤가 데뷔당트 준비해야 한다고 일찍 오라고 했으니 그만 돌아가 봐야지.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후회했다.
“늦으셨어요!”
미샤가 눈에 불을 켜고 대기 중이더라.
가자마자 잡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당했다. 이건 진짜 당했다는 말밖에 못 한다. 에반젤린으로 빙의된 이후 누가 날 이렇게 주물러 댄 적 처음이야! 심지어 남자 주인공인 가브리엘이랑도 손잡고 손등 뽀뽀한 게 전부인데! 마사지하면서 향유를 얼마나 들이부은 건지 내 몸에서 꽃향기가 날 지경이다.
화장이나 머리 손질은 미샤의 감독 아래 데이지랑 헤나가 달라붙어서 완성해 냈다. 칸나는 손재주가 별로라서 미샤한테 쫓겨나 구석에서 자리만 지켰다.
머릿결은 금은 가루를 뿌리고 곱슬기를 살려서 고정해 놨는데 엉겨 붙기는커녕 만지면 사르르 풀린다는 게 감탄스러웠다. 이게 장인의 솜씨인가?
드레스도 약간 수선을 거쳤다. 저번에 전부 완성한 줄 알았는데 시착하고 나니까 또 수정할 게 보인다더라. 약간 ‘최종의_최종의_최종의_최종’ 같은 거지.
세심하게 수선된 건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척 봐도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드레스에는 붉은 루비가 달려 있었다. 그냥 루비도 아니고 무려 꽃 모양으로 세공한 거다. 원래 데뷔당트에는 꽃다발을 들었는데 요즘에는 간소화돼서 꽃장식을 코르사주나 머리 장식으로 다는 게 유행이란다.
“특히 생화를 다는 게 유행하고 있어요.”
장시간 꽂아 두면 시들기 마련이니 무려 꽃을 갈아 주는 하녀를 따로 데리고 다닐 정도란다.
“영애님은 물론 생화도 잘 어울리시겠지만, 다른 아가씨들과 달리 어른스러우시니까 차별점을 둬 봤어요.”
미샤는 어른스럽다며 말을 우회했지만 사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야기였다. 보통 열여섯 살 정도에 데뷔당트를 한다고 하니까 에반젤린은 적령기에서 네 살이나 오버된 셈이다. 풋풋한 새내기들 사이에 졸작 준비 중인 선배가 하나 끼어 있는 느낌이네. 그럼 절대 다른 애들처럼 꽃을 달면 안 되지.
다행히 에반젤린한테는 생화보다 루비로 세공한 꽃 쪽이 훨씬 잘 어울렸다. 새빨간 게 눈 색이랑도 좀 비슷하고. 내가 보석을 매만지며 구경하고 있으니 미샤가 음흉하게 웃으며 윙크했다.
“그리고 보석 말이에요, 제가 아니라 가브리엘 경이 준비하신 거예요.”
가브리엘이? 갑자기 보석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걔는 나한테 어장 관리당하는 주제에 뭘 이런 것까지 준비하고 난리야. 사람 무안해지게….
그리고 흰 레이스 장갑을 끼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다. 장갑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했더니 칸나가 계속 쥐고 있으면서 덥혀 놨단다. 칸나가 잔뜩 수줍어하며 이유를 덧붙였다.
“밖에 비가 오니까요. 혹시 아가씨가 추워서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떻게 해요.”
“영애님이 감기에 걸리신다고요?”
“네! 아가씨는 병약하시니까요.”
“아…. 칸나 씨는 참 영애님을 많이 걱정하시네요.”
미샤가 감탄했다. 어깨가 으쓱했다. 너희 집에는 햇살 여주 없지? 이게 바로 햇살 여주란 거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걱정뿐이지. 밖에는 먹구름이 가득한데 내 마음에선 볕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는 걸 열심히 끌어 내리며 고맙단 인사를 했다.
“고마워.”
“아니에요. 아가씨, 정말 예쁘세요!”
칸나의 말대로, 이렇게 꾸며 놓으니까 진짜 더럽게 예뻤다. 굽이치는 머릿결은 꼭 은사 같았고, 입술이나 볼에 평소보다 혈색이 돌아 보이는 게 꼭 살아 있는 인형 같았다. 그렇지. 로판 악녀 하려면 이 정도 파급력은 있어 줘야지. 과연 여주도 홀리고, 남주도 얼빠로 만들어 버리는 외모였다.
준비는 전부 끝난 건가? 날 한번 둘러본 미샤가 만족한다는 듯 눈을 감았다. 묘사가 아니라 진짜로 휘청거렸다.
“저는 이제 여한이 없어요….”
“네? 알테미시아 님? 정신 차리세요!”
쓰러지는 미샤를 데이지가 겨우 받아 냈다. 설마 기절한 거야? 걱정스러워서 살펴봤더니 색색 하며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피곤해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얼마나 피곤했으면 애가 서 있다가 갑자기 잠이 드냐. 워낙 급하게 부탁한 드레스였고, 그동안 잠도 못 자고 고생했으니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미샤한테는 진짜 보너스 두둑이 챙겨 줘야지….
“이대로 둘 수도 없으니, 미샤를 방으로 옮겨야겠어.”
“네, 영애님.”
헤나랑 데이지가 미샤를 양쪽에서 부축해서 방을 나섰다. 미샤가 둘보다 신장이 커서 바닥에 발이 질질 끌렸다. 다른 방식으로 부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영애님 방에서 시체가 나왔어…!”
“아직 살아 계세요.”
근데 하필 밖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아직 문이 열려 있어서 헤나가 해명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 그런데 헤나야, 아직이라는 말은 미샤가 언젠가 죽을 거라는 뜻 아니니? 물론 사람인 이상 전부 죽긴 하겠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기절했으니 방에 데려가 주시겠어요?”
“네, 네에….”
아무래도 둘이 미샤를 데려가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하인들에게 부탁했다. 내일이면 저택에 내가 미샤를 기절시켰다는 소문이 하나 더 돌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내 드레스를 만들다 과로해서 기절한 거라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렇게 소문이 하나 더 늘어나는구나. 머리를 싸매고 있으니 미샤의 인계를 끝낸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 미샤도 잠들었고, 준비도 끝났겠다. 이제 출발하면 되나?
“영애님,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시겠어요?”
“연회는 언제 시작해?”
“8시에 시작하니까 아직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요.”
“그래? 그럼… 백작님한테 출발 시간을 한번 여쭤보렴.”
연회를 가 본 적이 없어서 언제 가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좀 일찍 가서 사교 활동을 좀 하고 있어야 했나? 쓰읍, 아닌 것 같은데… 주인공은 늦게 등장해야 하는데.
한창 로판의 클리셰를 열심히 떠올리고 있는데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영, 영애님, 백작님은 이미 출발하셨다고 해요.”
뭐?
준비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는데 의리 없이 기다려 주지도 않고 먼저 간 거야? 연회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치사하게 먼저 가? 나도 같은 마차를 타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괜히 짜증이 났다.
몰라. 그럼 난 천천히 가야지. 토텐 부인은 아직 연락도 없으니까 마리크 주교님이 내 샤프롱이 되어 줄 텐데, 일찍 가 봐야 엑소시스트 앞에서 긴장이나 하고 있겠지.
최대한 시간을 보내다 가려고 푸딩이랑 같이 손장난을 치고 있으니 창밖을 보고 있던 젤리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주인님.”
저놈의 주인. 젤리는 저번에 라파엘라 앞에서 나를 놀리려고 저렇게 부른 이후로 쭉 주인이란 호칭을 고수하는 중이다. 그냥 에반젤린이라 부르라고 해도 죽어도 안 듣더라.
“누가 오고 있는데요?”
“누가?”
딱히 올 사람은 없는데? 애초에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올 사람이 있나? 혹시 가브리엘?
젤리의 옆으로 가 창밖을 내다봤다. 내 눈에는 빗줄기밖에 안 보이는데…. 생각해 보니 젤리는 수인이라 시력이 좋잖아. 지금은 안 보이는 게 당연하지.
젤리가 보는 방향을 같이 지긋이 노려보자 한참 후에 일렁이는 형체가 보이더니 시야에 말이 훅 튀어나왔다. 아, 딱 보니까 가브리엘은 아니다. 가브리엘이 타고 다니는 말은 주인을 닮은 검은 명마다.
푹 젖은 채 망토를 둘러쓴 사람이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정문이 닫혀 있어서 차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멈춰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인기척인데…. 주인님한테 볼일이 있어 보여요. 데려올까요?”
전에 나한테 붙었던 감시를 멋대로 처리했다고 혼나서 그런지 젤리가 눈치를 보며 내 의견을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젤리가 신이나 꼬리를 흔들어 댔다. 꼭 ‘물어 와!’ 놀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젤리는 사실 늑대가 아니라 개 아닐까?
“해치지 말고 조심히 데려와.”
혹시나 한 군데 부러트려서 데려올까 봐 황급히 조건을 붙였다. 날 몰래 감시하는 사람이면 저렇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거다. 가브리엘이 보낸 기사라던지, 순전히 날 찾아온 손님이면 다치게 하면 안 되잖아.
“네엡….”
젤리가 불평하듯이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대답하고는 순간이동을 해 사라졌다가 눈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바로 앞에 망토를 쓴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아니, 젤리야! 아래로 내려가서 모셔오라는 소리였지 마법을 부려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내 눈앞에 대령하라는 의미가 아니었거든…! 아주 그냥 마법사라고 이마에 써서 다니지 그래!
“말씀하신 대로 멀쩡하게 데려왔어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 아니야, 잘했어, 젤리.”
내가 너한테 뭘 더 바라겠니.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무시하고 정체불명의 망토를 쓴 사람에게 집중했다. 젤리가 데려온 사람은 비를 얼마나 맞은 건지 망토가 푹 젖어 있었다. 젖은 망토 안에서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한슨 영애….”
“토텐 부인?”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기자 드러난 얼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토텐 부인이 여기서 왜 나오시지? 아니, 계속 연락이 없으시더니 갑자기 연회가 열리는 직전에 극적으로 나타난다고? 무슨 영화라도 찍으세요? 아, 로판이니까 극적으로 등장하는 게 비슷한 맥락이기는 하네.
토텐 부인은 비를 맞고 와서인지 안색이 새파랬다. 아무리 망토를 썼다고 해도 천이 장대비를 다 막아 주지는 못한다. 토텐 후작저에서 우리 집까지 마차를 타고도 거리가 꽤 됐던 것 같은데 이 비를 맞으며 말을 타고 달려왔으니 상태가 무사할 리 없었다.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토텐 부인이 내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든 듯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방금까지 난 밖에 있었는데?”
“…절 찾으신다기에 모셔 왔어요. 아닌가요?”
모르겠다. 나도 그냥 뻔뻔하게 나가야겠다. 토텐 부인도 거센 비를 뚫고 달려오느라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혼란스러우신 것 같으니까 젤리가 순간이동 시킨 건 모른 척하고 넘겨야지.
토텐 부인은 머리를 싸매며 혼란스러워했다.
“맞… 아요. 난 영애를 찾아왔어요.”
다행히 나한테 볼일이 있으신 게 맞았다. 혹시, 샤프롱을 해 주기 위해 오신 건가?
“마차를 타고 오시죠. 많이 젖으셨어요.”
“그야…. 영애가 먼저 황궁에 가 버린 게 아닐까 싶어서 급하게 오느라 말을 몰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늦으면 핀잔을 줄까 봐 비 맞으면서 달려왔다는 말이지? 나를 얼마나 악독하게 보시는 거람.
푹 젖은 부인을 배려해서 데이지가 난로에 장작을 더 넣었다. 그사이에 밖에서 수건을 챙겨 돌아온 헤나가 토텐 부인에게 수건을 건넸다. 흠뻑 젖은 몸을 닦으라고 준 것 같은데 토텐 부인은 눈물만 닦았다. 아니, 그러다 감기 걸리세요.
근데 토텐 부인은 연회에 나가기엔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셨다. 비를 얼마나 맞은 건지 머리에서부터 얼굴에 물기가 가득해 꼭 펑펑 운 사람 같았다. 눈가도 붉고. 설마 샤프롱을 해 주러 오신 게 아니라 못 할 것 같다고 취소 통보하러 오신 건가?
여태 잠수 타다가 양심에 찔리셔서 뒤늦게라도 찾아오신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결정을 하기엔 늦으셨네요.”
취소를 하든 허락을 하든지 조금 일찍 연락을 주셨으면 얼마나 좋아. 앗. 불평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듯 말해 버렸다.
“그러게요. 내가 너무 늦었어요….”
토텐 부인은 내 물음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엄청나게 후회하고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다. 아차, 말실수했다.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는 건데.
“기다리고 있었어요.”
토텐 부인의 손에서 수건을 뺏어서 그냥 내가 물기를 닦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토텐 부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니지만, 마리크 주교가 내 샤프롱을 해 줄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기 때문인지 토텐 부인이 백마 탄 기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토텐 부인이 타고 온 말은 그냥 갈색 말이었지만.
“제 샤프롱이 되어 주실 거죠?”
이렇게 된 이상 토텐 부인이 샤프롱을 안 해 준다고 해도 내가 바짝 엎드려서 졸라야겠다. 토텐 부인만 허락해 주면 이제 엑소시스트 앞에서 겁먹고 발발 떨 필요 없다.
“저는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 뒤에도 성심껏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좋아요,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날 책임져 줄 적임자는 토텐 부인밖에 없다고 한 게 통했나 보다. 토텐 부인이 망설임 없이 승락했다. 야호! 백작을 따라서 바로 나가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를 잘했다. 토텐 부인이 오셨으니 마리크 주교를 거절한 명분이 생겼다.
엑소시스트와의 위험한 동행과 구마 엔딩을 피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다. 로판이 하마터면 제령물이 될 뻔했네. 라파엘라한테는 그냥 까짓거 한다면서 배짱을 부렸는데 사실 좀 무서웠다고. 하지만 중세 시대 고문들을 생각해 보면 겁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덤덤한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영애는… 내가 올 줄 알았나요?”
“아니요. 제가 신도 아니고 미래를 알 리가 없죠.”
“그렇겠죠….”
솔직히 기대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라파엘라가 있었어야 했는데! 라파엘라도 역베팅에 걸었을 때의 쾌감을 느껴 봐야 하는데 아쉽게 됐다.
“영애라면 결국 내가 찾아오게 되리란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토텐 부인이 의기소침해졌다. 헐. 내가 안 믿어 줘서 서운하신가 보다. 아니, 근데 잠수 타셔 놓고 믿어 주길 바라는 게 도둑놈 심보 아닌가?
“그동안 라이더가 아팠어요.”
물론 아들이 아파서 연락할 틈도 없었다면 무죄다. 도둑이 아니라 의적이셨네.
“열이 너무 많이 올라서, 당신을 오늘에서야 떠올렸어요. 너무 늦게 오고 말았지만…. 로한슨 영애는 전에 내게 한 말을 기억하세요?”
“어떤 말이요?”
내가 뭔 말을 했더라? 후작가 집사 할아버지 칭찬했던 기억밖에 안 나는데? 토텐 부인은 머뭇거리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 봤다.
“당신에게 기대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분명 말씀하셨어요. 당신에게 기대도 좋다고.”
토텐 부인이 확신에 차 말했다. 눈이 이글거리는 게 도저히 거짓말로는 안 보였다.
해, 했나 보네. 뭔가 위로하면서 그런 말을 한 거 아닐까? 그때 부인한테 잘 보이려고 별말을 다 했나 보네. 이래서 사람이 입에 발린 말도 적당히 해야 하는 거다.
“아직도 그 말이 유효하다면, 부디. 제발 나를 도와주세요.”
토텐 부인이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는 바람에 얼굴이 쑥 가까워졌다. 부담스러워서 슬쩍 몸을 뒤로 빼고 얼굴을 들었더니, 건방지게 턱을 쳐든 모양새가 돼 버렸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부인이 제 샤프롱을 해 주신다고 했으니 제가 들어 드릴 수는 있는데요, 무슨 부탁인지는 먼저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저도 쓸 수 있는 자금의 한도라는 게 있고.
“라이더 때문인가요?”
“네. 그 아이를 되돌릴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아하. 토텐 부인의 말을 들으니 전말이 전부 짐작이 갔다. 아들이 엄청 아파서 정신 팔려 있다가 오늘이 데뷔당트 날이란 걸 깨닫고 급하게 오신 거구나. 그런데 라이더는 아직도 많이 아파서, 토텐 부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날 찾아오신 거고.
“…감히 부탁드릴게요. 제발 라이더를 돌려놔 주세요.”
토텐 부인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전에 분명히 토텐 부인 아들을 구명할 방법이 따로 없다고, 소문이 진짜라는 것처럼 말해 놔서 부탁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토텐 부인이 나를 그냥 피하는 줄 알았지.
“이대로 가다간 집사의 뜻대로 디에스에게 후작저를 빼앗기고 말 거예요.”
“집사요?”
완전 충성심 쩔던 집사 할아버지 말하는 건가?
“영애가 한 말처럼, 집사는 나를 기만하고 있었어요. 내 아이가 아픈 틈을 타 후계를 이을 수 있는 남편의 동생을 데려오지 않나….”
잠깐.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집사 할아버지가 쓰레기라고? 근데 그걸 내가 말해 줬다고? 나는 그냥 집사 할아버지 칭찬만 했는데?
토텐 부인은 간략하게 집안 상황을 설명해 줬다. 요약하자면 집사 할아버지랑 남편의 동생이 같이 편 먹고 라이더를 죽인 후 후작가를 꿀꺽할 셈이란다.
생각보다 사건이 훨씬 심각한데? 그냥 애 아픈 걸 고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려 후작가가 얽힌 후계 경쟁에 힘을 실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럼 집사 할아버지가 치료법을 알려 주지 말라고 했던 것도 배려가 아니라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였구나.
토텐 부인은 뭔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짓씹고 손은 깍지를 껴 모았다.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오물거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 영애님뿐이에요.”
지금 토텐 부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 상황을 파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라이더가 완치되고 입지를 다지는 것뿐이었다. 토텐 부인은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게 나뿐이라 생각했나 보다. 에반젤린한테는 악명도 있고, 자금도 있고, 병약했다가 건강해진 전적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에반젤린이 완치된 건 내가 빙의돼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인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토텐 부인 때문에 조금 고심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헤나, 시간이 얼마나 여유롭지?”
“후작저에 잠깐 들를 정도는 충분해요.”
헤나가 시간을 확인하며 같이 바람을 잡았다. 들으셨죠? 잠깐 들렀다가 가도 충분하대요.
비록 토텐 부인이 원하는 만큼 내가 만능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야기라도 들어 주면서 짐이라도 조금 나눠 들고 싶었다. 아이를 완치시키는 건 못해도 악녀의 명성을 활용해 후작가를 장악한 집사 할아버지나 후작의 동생으로부터 라이더를 구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외면하기에는 너무 신경이 쓰였다. 그래, 이건 기브 앤 테이크야. 토텐 부인은 에반젤린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내 샤프롱이 되어 주신 분이니까. 잠수 타시기는 했지만, 자식이 아프다는 사정이 있는 거였고, 늦을까 봐 당일이라도 달려와 주셨잖아.
“가브리엘 경이 말씀하시기를, 토텐 부인은 귀부인의 귀감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하시던데요.”
토텐 부인이 뜬금없이 시작한 서두에 의아해하셨다.
비를 맞고 달려와서 그런지 토텐 부인의 머리는 눌려서 푹 가라앉아 있고, 화장은 거의 번졌고, 드레스는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사교계에서 완벽한 귀부인의 귀감으로 여겨진다는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흐트러진 차림이다.
“내 샤프롱을 비에 젖은 꼴로 데려갈 순 없죠. 아쉽게도 로한슨 저택에는 부인께서 입으실 옷이 없으니 토텐 후작가로 가야겠어요.”
토텐 부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부인 혼자 보낼 수는 없죠. 함께 가 드릴게요.”
게다가 토텐 부인은 로한슨 저택까지 말을 타고 왔잖아. 연회에도 참석해야 하니 후작가에 먼저 들렸다가 같이 연회장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다.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영애님.”
토텐 부인은 감동에 차서 눈물을 글썽였다. 낮에 식사하는 중에 백작이 사람이 다 됐다 한 것도 그렇고, 토텐 부인도 그렇고, 다들 내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 줘도 엄청나게 동요하네. 진짜 에반젤린은 얼마나 인성이 쓰레기였던 거람.
“그럼 서둘러서 저택에, 앗!”
토텐 부인이 기쁨에 젖어 발을 내딛다가 절뚝거렸다. 뭔가 했더니 신발의 굽이 떨어져 있었다. 아니, 성한 데가 없네. 얼마나 험하게 달려오신 거예요.
토텐 부인한테는 내 신발이 사이즈가 맞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사이즈가 비슷해 보이는 게 하나 있다.
“데이지. 어머니의 신발을 가져오겠니? 미샤가 고쳐 놓은 거 말이야.”
“네. 그럴게요.”
데이지가 나가서 신발을 가져왔다.
“사이즈는 어떠세요?”
“잘 맞아요. 하지만… 내가 영애 어머님의 유품을 신어도 되나요?”
지금 부인이 신은 신발은 창고 방에서 발굴해 낸 거다. 에반젤린 엄마의 짐들은 대체로 아래층에 잘 정리되어 있는 데 비해 딱 한 켤레가 내 방 옆에 있는 창고에 박혀 있더라.
얼룩진 것만 빼면 고급스러운 여성화인데 발 사이즈가 달라서 에반젤린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발견 당시에는 검붉게 얼룩이 져 있었으니까 아마 버리려다 깜박한 거 아니었을까?
남의 물건을 내가 버리기도 좀 뭐해서 그냥 뒀는데 그걸 미샤가 내 신발인 줄 알고 깔끔하게 고쳐 놨다. 얼룩 빼느라 힘들었다고 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 신을 수가 없어서 그냥 둔 거였다.
“네. 상관없어요.”
그러니 토텐 부인이 신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버려진 거니까 유품이라 할 수도 없지. 토텐 부인을 맨발로 걷게 할 수도 없으니까 마침 딱 좋았다.
신발을 신은 토텐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러 나섰다. 후작가에 들렀다가 바로 황궁에 갈 거라서 준비도 미리 해 놓으라 했다.
안대를 굳게 눌러쓴 멜렉이 흑마들이 이끄는 마차를 끌고 나오자 백작이 왜 먼저 떠났는지도 좀 알 것 같았다. 비가 오고 있는 탓에 아래가 뿌예서 꼭 말들이 발이 없는 것 같았다.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마차였다. 사실 귀신이 이끄니까 절반 정도 맞기는 하지. 이 정도면 죽어도 같이 타기 싫을 것 같은걸.
“이걸 타는 건가요…?”
“네. 어서 타세요.”
토텐 부인도 잠깐 머뭇거렸다. 물론 토텐 부인은 반항할 힘도 없어서 얌전히 마차에 올라 내 건너편에 안착했다.
“토텐 후작가를 들렀다 바로 황궁으로 갈 생각이야.”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데이지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칸나가 손수건을 흔들며 아쉬워했다. 대충 어깨를 두드려 주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 예절을 가장 많이 익힌 게 헤나라서, 황궁에 동행하는 건 헤나가 되었다.
그리고 젤리도 호위라는 명목으로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말이 호위였지, 만약에 후작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마법을 써 상황을 제압할 비장의 무기였다. 건방지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휘파람을 불고 있으니 토텐 부인이 젤리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저 남자는….”
“난 주인님의 개,”
“제 수족이에요.”
젤리가 토텐 부인 앞에서 헛소리하려 하길래 황급히 말을 돌렸다. 농담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라파엘라랑 토텐 부인이 같아?
“그렇군요, 영애의….”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토텐 부인이 무언가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정정할 틈도 없이 멜렉이 마차를 움직였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도 흔들림 하나 없는 게 역시 운전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평생 내 운전사로 부려 먹고 싶네.
토텐 후작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머지않아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이제 도착한 건가? 마차에 달린 커튼을 치우고 창밖을 내다봤다. 유리 너머로 토텐 후작가가 보였다. 후작가는 전에 봤던 거랑 다르게 음침하고 우울해 보였다. 아무래도 비가 와서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