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64)
진짜 충격적이다. 토텐 부인이 도움을 청해서 따라오기는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그냥 후계 다툼도 아니고, 디에스라는 죽은 후작의 동생이 도끼를 들고 애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하녀 하나가 방 안에 숨어서 아이를 끌어안고 보호하는 중이었고, 집사나 유모, 저택의 다른 사람들은 누구 하나 후작 동생 놈을 말리지 않았다. 저택에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토텐 부인이 제3자에 외부 사람인 나한테 도움을 청한 거구나
“내가 돌아왔으니 이제 되었지? 후작가로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어서 들어가 쉬게.”
“네. 그럴게요. 그런데 말입니다…. 형수님,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내 조카는 눈 하나 껌뻑 안 하고 깊게 자고 있더라고요. 참 죽은 듯이 잘 자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닷새 동안 앓다가 겨우 깊게 잠이 든 거라고. 그만큼 피곤했을 테니 주변의 소음이 들릴 리가 없지.”
후작 동생 놈은 아이를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토텐 부인은 최대한 디에스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디에스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위협적으로 굴며 아이를 확인해 보고 싶다고 요구했다.
“죽은 애 가지고 뭘 하는 건지, 원.”
젤리가 안쓰러워하며 혀를 찼다. 뭐? 누가 이미 죽었다고? 라이더가?
“젤리 씨, 그게 무슨 소리예요?”
헤나가 말을 떨며 물었다.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거다. 갑자기 무슨 말이래?
“모르겠어? 숨소리가 안 나잖아. 아…. 너는 못 듣나? 그럼 잘 봐. 피부는 창백하고 손에 힘은 없는데 턱이랑 목은 경직되어 있잖아.”
나도 황급히 부서진 문 안쪽을 바라봤다. 라이더는 이불에 칭칭 감겨 있어서 젤리가 말한 게 맞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혈색뿐이었다. 아이의 안색이 유독 창백한 게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고? 헤나는 새하얗게 질렸다가 걱정스러운 듯이 토텐 부인을 바라봤다.
“토텐 부인은….”
헤나의 중얼거림을 큰 목소리가 뒤덮었다.
“문을 열어달라 하세요. 왜 확인하지 않으세요? 형수님께서는 아들이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어서 저와 같이 들어가 보시죠.”
디에스는 일부러 토텐 부인의 성질을 긁어 댔다. 그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데도 토텐 부인은 직접 라이더가 무사한지 확인해 보라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토텐 부인은 아이가 죽은 걸 이미 아시는군요.”
헤나가 탄식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토텐 부인은 라이더가 죽은 걸 알고 있으니까 디에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거다. 여기 오기 전에 들었듯이, 라이더가 죽는다면 후작 직위의 계승권은 토텐 부인이 아니라 디에스에게 돌아간다.
토텐 부인은 그걸 피하려고 발버둥 치는 거다.
“애초에 주인님을 찾아온 게 그거 때문이잖아. 죽은 애를 살려 달라고. 죽었다 살아난 경우는 세상을 뒤져 봐도 주인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날 찾아온 거였어? 그래서 토텐 부인이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냐고 했구나. 처음에 만났을 때, 집사 할아버지한테 깜빡 속아서 위로는커녕 고칠 방법이 없다고 변명할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이봐, 넌 형수님이 오셨는데 안 나오고 뭐 해? 빨리 안 나오면 너는 해고야. 해고로 모자라면 경비병을 부를 거다. 후작 영식을 납치 감금한 죄로 경비병에게 넘길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사이에 디에스는 협박의 대상을 바꿨다.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고 회유하기 쉬울 것 같은 하녀에게 윽박질렀다.
“도, 도와주세요…, 영애.”
토텐 부인은 불안해하며 주위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날 발견했는지 손을 내밀었다. 꼭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안쪽으로 당겨서 구해 줬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난 토텐 부인의 등을 떠미는 수밖에 없었다.
“토텐 부인, 아이를 되살리고 싶으세요?”
“네…. 네.”
“되살아난 게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아들의 껍데기를 빌린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요?”
바로 나처럼. 토텐 부인은 내 물음에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네. 그래도 괜찮아요.”
죽은 아이는 되살릴 수 없지만, 후작가는 지킬 수 있을 거다. 전부 잃느냐, 하나라도 지키느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토텐 부인은 후자를 택했다. 토텐 부인도 슬픔을 뒤로하고 각오를 다지셨는데 나도 차선책을 써서라도 도와드릴 수밖에 없지.
“젤리, 어서 멜렉을 불러와.”
“멜렉을요?”
나는 빙의자다. 소설 속에 빙의한 데에는 내 의지라고는 단 한 톨도 없고, 왜 빙의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원작을 알지도 못하고 추측만으로 헤쳐나가고 있는 지금 나와 같은 방식으로 라이더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내 옆에는 다른 유형의 빙의자가 있었다. 유령이라서 비어 있는 몸에 빙의가 가능한 멜렉말이다.
멜렉은 곧바로 젤리한테 소환당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멜렉을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부르셨어요?”
“멜렉, 저 애 보여? 저 아이의 몸에 들어가 주겠어?”
“네? 하지만…. 전,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멜렉은 뜬금없는 상황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새까만 안대로 눈을 가렸으면서 표정이 전부 읽히는 게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멜렉은 어떻게 빙의했는지 모른다고 했나? 나도 방법은 잘 모르는데…. 귀신이면 사람 몸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막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해요. 어린애잖아요. 남의 몸을 멋대로 쓰다니 그건 너무 큰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아요.”
하긴 얘는 동물도 못 먹고 쥐 한 마리도 못 죽이던데 사람이라면 생명의 무게를 더 무겁게 여기고 존중하겠지. 멜렉의 몸에는 어쩌다 보니 붙어사는 느낌인 것 같고.
근데 그거 고도의 돌려 까기 아니야? 남의 몸을 멋대로 쓰는 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나도 물론 고의는 아니긴 하지만….
토텐 부인이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멜렉이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다. 자기가 남의 몸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사용하는 건 고인에게 실례인 것 같아서 싫다는 거 아니야. 그럼 그게 아니라는 걸 인지시켜 주면 되는 거지.
“멜렉. 아이의 엄마가 원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라이더는 저주에 걸려 죽었다는 악명을 듣게 될 거야. 아무도 아이를 애도하지 않고, 오히려 잘 죽었다고 할걸? 하지만 네가 수고해 준다면 토텐 부인은 후작가를 지킬 수 있겠지. 라이더도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지만, 너무 가스라이팅이다. 오랜만에 에반젤린에 과몰입해서 악녀처럼 말하려니까 너무 급발진했나 보다. 근데 그게 멜렉한테는 오히려 효과가 좋았다.
“그게 정말이에요?”
“저기 저놈을 봐. 당장 혈육인데도 조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
디에스는 나와 멜렉이 소곤거리는 와중에도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라이더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애도하기는커녕 라이더의 죽음을 전시하고 후계자가 사라진 후작의 지위를 자기가 이어받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나쁜 자식.”
멜렉이 디에스를 보며 분노를 토했다. 정의감에 불타올라 당장이라도 라이더의 몸에 들어갈 듯 굴던 멜렉이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망설였다.
“영애님. 그런데… 어린애 연기는 어떻게 하나요?”
“딱히 하지 않아도 괜찮아. 토텐 부인은 진실을 아시고, 라이더는 어른스러운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완벽히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어디까지나 토텐 부인이 후작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후작의 지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멜렉은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멜렉의 몸이 흐려졌다. 이게 귀신 상태구나. 검은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 나한테 귀신의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영안 같은 게 없어서 그런 거겠지. 정령 친화력은 없으니까 좀 아쉬웠는데 영안은 하나도 안 부럽다. 없어서 다행이네.
검은 연기는 넘실거리더니 아이에게 스며들었다. 멜렉이 라이더에게 빙의하는 데 성공했다.
“도련님이 움직이셨어요!”
헤나가 눈치 빠르게 소리를 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헤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멜렉이 몸을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디에스가 몹시 당황해했다.
“뭐지? 왜 살아 있어?”
디에스가 허망해하며 되물었다. 이 자식도 라이더가 죽은 걸 알았나 보네. 그래서 저렇게 끈질기게 군 거였어. 그러게, 이 나쁜 자식아. 왜 살아 있을까.
멜렉은 곧 눈을 떠서 혼란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봤다.
“엄,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게 어색해 보이는 건 멜렉이 고아원 출신이기 때문일 거다.
“토텐 부인, 움직이세요.”
토텐 부인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상황에 멍을 때리고 있었다. 어깨를 두드리며 빨리 상황을 수습하라고 조언했다.
“웨더, 문을 열어 주렴.”
“네, 네. 그럴게요.”
라이더를 안고 있던 하녀가 혼란스러워하면서 문을 열었다. 아차, 저 하녀 입장에서는 갑자기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 같겠구나. 토텐 부인이 아들을 맡긴 걸 보면 분명 신뢰하는 하녀겠지. 나중에 따로 설명해 주는 걸로 하자.
도끼로 반파된 문이 열리고, 하녀의 품에서 내려온 멜렉이 토텐 부인의 품 안에 안겼다.
“잘 잤니…?”
토텐 부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살아 움직이는 라이더를 보니 슬픔이 범람하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푹 잠들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깨 버렸어요.”
투정 부리는 게 딱 그 나이대 어린아이 같았다. 연기 못한다더니 완전 메소드 연기가 따로 없었다. 나보다 연기 잘하는 거 아니야? 아무도 영혼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저 도끼 들고 날뛰던 미친놈 빼고.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지? 방금까진 분명히 죽어 있었잖아!”
디에스가 버럭 화를 냈다. 다시 도끼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참고로 디에스가 들고 있던 도끼는 아까 토텐 부인의 발치로 굴러왔을 때 젤리한테 치워 버리라고 언질을 주었다. 나도 도나우 사건 이후로 배운 게 있다고.
“무슨 술수를 쓴 거지? 형수님, 하다 하다 이젠 사악한 짓거리에 손을 댄 거 아니야?”
도끼를 찾지 못한 디에스가 눈을 경련하며 물었다. 지나치게 흥분해서 말을 할 때마다 침이 튀었다.
귀신이 빙의한 거라서 따지고 보면 사악한 게 맞기는 했다. 토텐 부인은 우느라 그런 건지 변명을 못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나서기로 했다. 기왕 도와주기로 한 거, 끝까지 책임져야지.
“왜 그렇게 확신하죠?”
잠깐 멜렉한테 정신이 팔려 있던 디에스가 날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겁먹은 건가? 저런 시정잡배 양아치 같은 놈한테도 에반젤린의 악명이 쓸모가 있나 보다. 이럴 때는 악녀에 빙의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당신, 뭐야…. 집안일이니까 외부인은 빠져!”
“외부인이 아니에요. 토텐 부인이 제 샤프롱이신걸요.”
돌리네한테 배운 사교적이고 친절한 미소가 아니라, 오랜만에 날것의 악녀 미소를 날려 줬다. 참고로 이 미소로 말할 것 같으면 도나우를 제압하고, 우리 집 하인들을 졸도하게 만들며, 나한테 푹 빠져 있는 가브리엘마저 멈칫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미소였다.
“직접 심장이 멈췄는지 확인한 것도 아니고, 가까이서 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토텐 영식이 죽었다고 확신하셨던 거예요?”
“그러게….”
“난 그냥 주무시는 거로 생각했는데.”
일부러 그럴듯한 추론 과정을 나열해 가며 의문을 표하자, 구경하던 하인 몇이 내 의견에 동조했다.
“영식의 죽음을 단정할 수 있는 건 딱 두 사람뿐이에요. 가장 가까이에서 영식을 끌어안고 있던 하녀와 영식이 제발 죽기를 간절히 기다리다 끝내 죽이려고 한 사람이요.”
하녀 이름이 뭐였지? 방금 토텐 부인이 이름을 불렀던 것 같은데.
“웨더라고 했나?”
“네, 네. 영애님.”
“토텐 영식은 죽었었나?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어? 아니면 여기에 죽은 사람에게 실을 매달아 움직이게 조종하는 인형술사가 있기라도 하나? 너는 계속 토텐 영식을 안고 있었으니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아니에요. 도련님은 그냥 피곤해서 잠이 든 것뿐이셨어요.”
아무런 말도 전해 들은 적 없을텐데도 웨더라는 하녀는 눈치 빠르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토텐 부인이 아들을 맡길 정도면 분명 엄청나게 신뢰하는 하녀였겠지? 그래서 그런지 척하면 척이었다. 나한테 있어서는 칸나랑 헤나, 데이지 정도의 위치일 거다.
이제 다시 화살을 돌렸다.
“디에스 님은 토텐 영식이 왜 죽었다고 확신하셨나요?”
이걸로 잘하면 디에스가 손을 썼다는 걸로 몰아붙여서 계승권을 박탈시킬 수 있겠다 싶었는데, 집사가 냅다 끼어들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
“라이더 님께서 돌아가시게끔 손을 썼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요새 라이더 님이 몸이 부쩍 약해져 도련님께 어쩌면 부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련님은 제 말을 듣고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마, 맞아. 집사가 그래서 난 그냥 믿은 거지.”
자기가 죄를 다 뒤집어쓰고 디에스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죄목이 훨씬 약해졌다. 그냥 오해에서 비롯된 실수가 돼 버렸잖아. 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화술 한번 끝내주시는 할아버지다. 저러니까 인자한 얼굴이랑 예의 바른 태도에 내가 확 속아 넘어갔지!
“건방지구나.”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날카롭고 퉁명한 소리가 집사를 힐난했다. 목소리의 정체는 토텐 부인이었다. 늘 예의 바르고 존중 넘치는 사람에게서 나올 거라곤 믿기지 않은 고압적이고 날카로운 비난이다.
“고작 고용인 주제에 소후작의 죽음을 예측해? 그것도 모자라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실망이야. 집사, 왜 그렇게 건방지게 굴었지?”
“토텐 후작가를 위해서입니다.”
“집사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모양이야. 자네는 후작가가 아니라 나에게, 그리고 내 아들에게 충성했어야 했네.”
후작 부인은 멜렉의 손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섰다. 평소처럼 완벽한 행색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 고고해 보였다. 세상 사람들, 모두 봐 주세요! 저분이 제 샤프롱이에요!
“집사를 지하에 가둬 두거라. 세 명이 함께 지하를 감시해. 가장 성실하게 임한 자에게는 집사의 자리를 물려주마.”
우물쭈물 눈치만 보고 있던 자들이 집사라는 말에 번쩍 손을 들며 자원했다. 토텐 부인은 대충 셋을 짚으며 집사를 딸려 보냈다. 대충 고른 것 같은데 다 큰 뜻이 있겠지?
“유모와 디에스는 우선 방에 가둬 두도록 해. 라이더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던 죄인들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공범으로 간주하마.”
유모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얌전히 끌려나가는 반면에 디에스는 불같이 반항하며 난동을 부렸다.
“이거 안 놔? 내가 너희 같은 하인들인 줄 알아? 감히 지금 날 가두겠다고?”
무려 성인 넷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나서야 겨우 디에스를 제압해 끌고 갈 수 있었다.
토텐 부인은 남은 둘마저 정리하더니 마지막으로 하녀를 보았다.
“웨더. 고생했다. 내가 상을 주기로 했지? 원하는 걸 말하렴.”
“저, 정말 제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되나요?”
웨더는 토텐 부인이 정말 상을 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빛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상기된 기분을 보여 주듯이 들떴다.
왜 저렇게 놀라지? 평소에 토텐 부인이 좀 인색하신 편인가? 그럼 이 기회를 살려야지. 토텐 부인은 나한테 집까지 걸었던 사람이니까 고민하지 말고 그냥 크게 질러!
웨더는 헤진 앞치마의 끝자락을 잡고 부르튼 손을 꾸물거리며 우물쭈물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장 원하던 걸 골랐는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다 이내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마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빨래 하녀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웨더는 다치면서까지 라이더를 보호해 놓고서는 되게 소박한 소원을 빌었다. 나라면 금이랑 보석을 달라고 했을 텐데…. 원래 충성스러운 하녀들은 다 저런 건가? 우리 집 애들도 금화를 안겨 주면 오히려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하더라. 물론 칸나는 좋아하면서 잘 받았다.
토텐 부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충분하니? 금괴나 보석이 아니라? 너는… 내 아들을…”
토텐 부인은 목멘 목소리로 말을 흐리다 헛기침을 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아한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너는 내 아들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어. 그래도 원하는 게 고작 빨래 하녀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니?”
“네에….”
“그럼 하녀장의 자리를 주마.”
“제가 하녀장이요?”
가히 충격적인 인선이었다. 토텐 부인은 상벌을 모두 주고 나서야 군중처럼 몰려 있던 하인들을 물렸다. 그리고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웨더라는 하녀만 대동한 채 투왈렛 룸으로 향했다.
토텐 부인은 문을 닫고 나서야 바닥으로 무너졌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웨더가 토텐 부인을 붙잡았다.
“마님!”
“웨더…. 넌 라이더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걸 봤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는구나.”
라이더의 몸에 들어간 멜렉이 면목이 없다는 듯 내 뒤로 숨었다. 멜렉아. 내가 시킨 거니까 너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죽은 아이를 보살피라고 한 내가 징그럽지 않니?”
“전혀요. 마님, 제가 태어난 마을에는 인형을 업고 다니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아들은 몇십 년 전에 전쟁에 나가 소식이 없고요. 할머니는 치매인데 아들 이름만을 기억해서 인형을 아이처럼 키우세요. 그리고… 그분이 제 할머니시고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친 노인이라고 불러도 저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전 마님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고맙구나.”
웨더가 토텐 부인을 위로하며 자기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아니, 뭔 놈의 로판 소설이 애들 과거가 다 이렇게 어둡냐? 데이지는 믿고 있던 원장님이 노예 상인이었지, 칸나는 이상한 놈한테 납치당해서 죽을 뻔했지, 이제 새로 등장한 웨더는 눈물 짜내는 신파 서사를 가지고 나타났다.
따지고 보면 하녀들뿐만 아니라 토텐 부인이나 가브리엘만 봐도 서사들이 우중충하고 어둡고 암울하기는 하지. 이건 다 세계관이 피폐 로판인 탓이다.
토텐 부인은 이제 한시름 덜었는지 내 쪽을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로한슨 영애.”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뭐라 불러야 할까요? …멜렉?”
토텐 부인이 다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대상은 멜렉이었다. 내 뒤에 숨어 있던 멜렉이 고개를 쑥 뺀 뒤 입을 열었다.
“그건 전에 있던 몸의 이름이었습니다. 로한슨 영애님이 주신 이름은 머…!”
멜렉이 이상한 말을 하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머랭이라고 하지 마! 귀신한테 그런 귀여운 이름 붙여 주는 게 좀 이상한 사람 같잖아! 약간 태풍에 유치한 이름 붙여 주는 원리라고 설명하면 이해하실까? 아니, 못 할 것 같아!
나와 눈을 마주친 멜렉이 눈치를 챘는지 고개를 끄덕이길래 손을 떼줬다.
“멜렉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요. 멜렉,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죄, 죄송해요. 아드님의 몸을 뺏어서….”
“그건 내가 선택한 거였어요. 당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네요.”
멜렉이 쓰는 몸이 라이더의 것이라서 그런지 토텐 부인의 눈빛은 아들을 보듯이 몹시 따뜻했다. 멜렉도 토텐 부인의 반응을 보고 안심한 것 같았다.
같은 시련을 파훼해 나갔다는 미약한 동료애가 샘솟는 기분이다. 훈훈함에 코를 훔치고 싶었는데 헤나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나를 불렀다.
“영애님, 이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나도 시계를 봤다. 헐, 벌써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지금 가야 안 늦을 것 같은데? 근데 바로 출발할 수도 없는 게, 토텐 부인을 저대로 데려갈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헤나랑 웨더가 토텐 부인의 치장을 돕기로 했다. 다행히 헤나는 미샤한테도 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화장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헤나의 손길로 토텐 부인은 점점 원래의 인상을 되찾아 갔다. 젖어서 가라앉은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렸다.
“마음에 드시나요?”
“그래…. 고마워.”
입술에도 색을 입히니 드디어 생기가 돌았다. 토텐 부인이 신발은 그대로 신고 가고 싶다고 하셔서 드레스만 따로 골랐다. 짙은 녹색 드레스가 오늘따라 차분한 토텐 부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영애의 하녀는 솜씨가 좋네요.”
“그렇죠?”
헤나의 칭찬에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또 헤나만 잘하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애들도 실력이 수준급이거든요. 우리 애들이 밖에서도 인정받으니까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실까요?”
‘그래, 어디 가 보자!’ 하고 일어나는데 순간 라이더에 빙의한 멜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멜렉은?”
“그러게요. 집사와 디에스를 가둬 놨으니 큰일은 없을 테지만…. 연회에 데려갈 수도 없고.”
그때 웨더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님, 제가 도련님의 곁에 있을게요.”
“네가? 웨더 너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잘 알겠지만, 이 아이는… 이제 라이더가 아니란다. 그래도 괜찮겠니?”
“저는 괜찮아요.”
웨더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토텐 부인이 되려 당황한 듯 되물었다.
“어째서….”
“저희 아버지도 라이더 도련님처럼 돌아오기라도 하셨다면 할머니가 무척 기뻐하셨을 거예요. 인형보다 그편이 낫지 않나요?”
토텐 부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부탁하마.”
멜렉은 연회에 참가하는 동안 웨더가 곁에서 보살펴 주는 걸로 결론이 났다. 토텐 부인은 한시름 놓았지만 내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멜렉이 후작저에 남으면 이제 내 마부는 누가 해 줘?
멜렉이 운전해 주는 거에 익숙해졌더니 다른 마차를 타면 멀미할 것 같던데. 앞으로 나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멀미 유발 상자에 앉아서 엉덩이가 결리는 걸 참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그건 싫은데!
게다가 내 마차는 어쩌지? 황궁에는 토텐 부인 마차로 가야 하나? 집 갈 때는 어떻게 하지? 잔뜩 걱정하며 밖으로 나왔더니 예상외의 인물이 있었다.
앗! 저 사람은, 수인에다가 젤리랑 데이지와 셋이 추억을 함께 쌓은 마부님!
“좋을 대로 써먹으세요.”
젤리가 멜렉을 데려오고 나서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센스 넘치게 마부를 데려왔나 보다. 이 귀여운 자식! 오늘은 네가 푸딩만큼 귀엽다! 푸딩한테는 비밀이야!
반면에 멜렉은 자기 자리가 빼앗기자 몹시 서러워했다. 알맹이는 멜렉이라도 겉모습은 라이더라서, 눈물을 글썽이자 어르고 달래고 싶어졌다.
“마부는 제 역할인데….”
“그래. 네가 돌아올 때까지 빈자리를 채우는 것뿐이야.”
“그렇죠? 가미기인…. 영애님 제가 돌아갈 때까지 가미긴을 잘 보살펴 주셔야 해요.”
멜렉은 말이랑 눈물의 작별 인사를 했다. 적어도 후작가가 안정될 때까지는 라이더한테 빙의해 있어야 할 테니까, 언제 딱 다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게 서러운 것 같았다.
“전 언제 돌아갈 수 있어요?”
“후작 부인의 입지가 탄탄해지면. 라이더가 존재하지 않아도 부인이 자립할 수 있는 그때까지만 머물러 주렴.”
“네, 그럴게요…. 아 참, 영애님. 그럼 제 식사는요?”
아. 그러네. 식사 문제도 있었다. 그런데 왜 최우선 순위가 말이고 그다음으로 식사를 떠올리는 건데…. 보통은 거꾸로 아니야?
귀신이라서 우선순위도 거꾸로 가는 건가? 막 귀신은 손뼉도 손등으로 치고, 쌈도 고기에 상추를 싸 먹는다는 이야기 있잖아. 고기가 메인인 쌈은 좀 탐나는데 어차피 멜렉은 먹지 못하겠지.
근데 멜렉은 원래 소 수인 몸에 빙의해서 꽃이 필요한 거 아닌가? 식성은 다른 몸에 빙의해도 안 바뀌는 건가…. 일단 멜렉이 후작저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꽃잎을 따다가 토텐 부인한테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거참, 해결할 게 한둘이 아니네.
가는 길에 오늘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토텐 부인도 그냥 내 마차에 같이 타시기로 했다. 젤리는 피곤하다고 도망갔다. 애초에 젤리를 데려온 것도 후작가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런 거였고, 마부도 구해 왔으니 젤리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좋아, 돌아가도 좋다.
“그럼 먼저 집에 가 있을게요.”
젤리가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진짜 부럽다. 나는 마법도 못 배우겠지. 정령 친화력도 바닥인데 마력은 무슨, 보나마나 재능이 바닥일거다.
토텐 부인은 순식간에 사라진 젤리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아차. 깜빡했네. 숨길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이미 라이더 몸에 멜렉이 들어간 상황에 갑자기 사라지는 젤리쯤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토텐 부인을 향해 가자는 듯 고갯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