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8)
Chapter 8
어쩐지 애가 너무 착하더라! 강단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단숨에 이해가 갔다. 로판 경력으로 추론해 보면 원작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도 뻔했다.
여기 악녀 에반젤린과 악녀의 충실한 하인 도나우 그리고 악녀를 모시는 하녀의 여동생이자 여주인 칸나가 있다.
에반젤린은 평소에도 백작가의 하인들을 괴롭혔는데, 그중에서도 헤나를 특히 구박했을 거다. 괴롭힘이 선을 넘고 도나우에게 사주해서 헤나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칸나를 납치한 거지. 그리고 위험에 빠진 칸나를 구해 주면서 남주와의 첫 만남 이벤트가 발생하는 거다!
에반젤린 몸에 내가 빙의했어도 원작의 억지력 때문에 도나우가 칸나를 납치한 거 아닐까?
그러면 도나우가 왜 헛소리를 늘어놨는지도 이해가 갔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고 막 중얼거렸잖아. 와…. 원작의 억지력 무섭다 무서워.
그러면 내가 남주 등장 신을 강탈해 간 건가? 그냥 내버려 뒀어야 했나? 아니, 하지만 아무리 책 속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 상황을 보고만 있어.
“이제 더 물어보실 건 없죠? 아가씨께서 피곤해하시니 먼저 가 볼게요.”
상황 설명을 끝낸 칸나가 대화를 끊어 버렸다. 남주를 대한다기에는 너무 냉정한 태도였다.
이것도 남주 대신 내가 칸나를 구한 영향이겠지? 원작 여주가 악녀한테 들러붙는다니 이거 완전 악녀 빙의물이잖아! 역시 로판 세계관!
“혹시 문제가 생기거든 로한슨 백작가를 찾아오세요.”
속으로 감탄하면서 남주한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납치범도 피해자도 구해 준 사람도 로한슨 저택 사람이니 보고서 쓰다가 막히면 찾아오라고 말했다. 좋아 친절 하나 적립했고.
헤나가 마차를 세워 둔 곳까지 안내하겠다며 앞장섰다. 헤나를 따라가려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돌아보니 남주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나 딱히 악녀 같은 짓 안 했는데 왜 노려보지? 설마 칸나가 내 편을 들어줘서 질투하는 건가? 큰일 났다. 악녀 루트 대신 라이벌 루트를 밟아 버린 것 같은데….
***
“단장님, 불 진압됐습니다.”
“수고했다, 라파엘라.”
순백의 인형이 사라진 골목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가브리엘이 수하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던 건지 그사이에 불이 진압되고 말았다. 화마가 휩쓸고 간 건물은 이제 집이라고 보기도 어렵게 뭉그러져 있었다.
불 속에서 도망쳤다면서 그을음이라곤 없이 새하얀 여자와 다르게 다들 얼마나 열심히 잔해들을 치운 건지 정복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미안하다. 영애를 조사하느라 도움을 주지 못했군.”
“아닙니다. 저 불, 알아서 꺼졌거든요.”
“뭐?”
가브리엘이 묻자 라파엘라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했다.
“정말이에요. 활활 타다가 갑자기 사그라졌어요. 애초에 주변에 번지지 않고 이 집만 타는 것부터 좀 이상했는데….”
가브리엘이 몹시 찝찝하다는 듯 잔해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도 처음 본 순간 악마에게라도 홀린 줄 알았다. 이렇게 좁고 빽빽한 빈민가에서 화재가 일어났다고 하면 주변의 일대까지 전부 불이 번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대피를 위해 서둘러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고.
참상을 예지하고 달려왔으나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대피는커녕 보이지 않는 방화벽이라도 세워진 듯 혼자서만 타들어 가는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런 기현상이 아니라 그 불 앞에 서 있던 여자였다.
가브리엘은 처음에는 인파 사이에 석상이 세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빈민가에 그토록 섬세하게 조각된 대리석이 있을 리가 만무한데도 말이다.
사람이라고 인지하지 못한 것은 그것에 생명력이라고 부를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교하자면 꺾인 나뭇가지가 차라리 인간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죽어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새빨간 눈이 자신을 향하고 붉은 입이 사람의 언어를 내뱉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경혹하여 말을 잃을 뻔했다.
가브리엘은 의연함을 가장해 여자와 말을 나누었다. 예상했다시피 그것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인이 죽었다는 걸 이야기할 때도 가브리엘 자신을 볼 때도 온정이라고는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가는 개미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여자에게 가브리엘은 고작 개미와 같은 수준일 테니까.
여자는 그나마 옆의 칸나라는 하녀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사람이 아닌 것의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비록 하녀의 상태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맹목적이며 열렬한 모습은 마치 광신도를 보는 듯했다.
“단장님! 시신 찾았습니다!”
수하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가브리엘은 시신을 확인했다. 도나우라고 했나? 사후에도 탄화되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체는 꼭 조각과 다름없었다.
“이건….”
“신기하네요. 우연이겠죠?”
수족이 잘려 나간 시신의 등 뒤로 바닥의 그을음이 마치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고 머리 뒤로는 성화(聖畫)가 시신의 머리 뒤로 둥글게 빛을 내듯 그려져 있었다. 꼭 명화 속의 천사들이나 신에게나 달려 있을 법한 후광 같았다.
“이런 모습이라니 꼭 천사 같아요.”
그렇게 생각한 건 가브리엘뿐만이 아니었다. 가브리엘은 침음했다. 천사라니…. 재로 만들어진 날개는 날갯짓하기도 전에 부서져 무저갱으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저 헤일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는 둥그런 광환이 꼭 깜박일 것처럼 느껴졌다.
***
“저택에 방을 내줄까?”
돌아가는 마차에서 에반젤린 영애가 입을 열었다. 헤나는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했으나 차마 다시 물을 수조차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무섭겠지. 내가 보살펴 줄게.”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괜찮다며 사양하려던 헤나가 영애의 눈길이 자신이 아니라 동생에게 향해 있음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헤나가 아닌 칸나의 의사를 묻는 것이다. 헤나는 칸나의 손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눈치를 주다 영애의 심기를 거스르면?
영애의 기분을 상하게 한 도나우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징그럽고 구역질 나는 죽음에 칸나가 만족했다는 사실이다.
영애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려에 헤나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자비로운 사람 흉내를 내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에반젤린는 영애는 헤나에게도 나름대로 관대한 편이었으나 칸나에게는 특히 유해 보였다. 비록 그게 덫에 걸린 동물을 구하여 거둬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긴 했지만.
“언니도 함께 지내도 될까요?”
“물론이지.”
“방도 제가 고르고 싶어요.”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그리고 칸나도 마찬가지였다. 영애를 상대로 들떠서 재잘거리다니, 헤나는 숨이 턱 막혔다.
어릴 적부터 유독 겁이 없긴 했지만, 영애의 앞에서까지 간을 빼놓은 듯 굴 줄 몰랐다. 헤나는 칸나가 만족하는 듯 웃는 모습에서 과거의 한 단면을 엿보았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계실 무렵에 사랑스러운 칸나는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가끔 밥을 엎고 성질을 부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나이도 차고 철이 들어 그러지 않았지만.
영애가 구해 줬기 때문에 마음을 연 걸까?
성수를 훔치며 에반젤린 영애가 준 것이라고 둘러댔으니 두 번이나 구원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영애의 고양이가 아니었다면 칸나는 아직도 몸져누워있을 것이고, 오늘 영애가 가지 않았다면 칸나의 상처는 목에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저 그러면 아가씨의 바로 아랫방도 괜찮을까요?”
영애는 자신이 지내는 4층을 제외하고 방을 고르라고 했고 칸나가 고른 것은 3층의 영애가 지내는 방의 바로 아래였다.
칸나는 저택에서 일한 적이 없으니 그냥 고른 걸 테지만 3층은 작고하신 로한슨 백작 부인이 기거하던 층이다. 게다가 그 방은 백작 부인이 쓰시던 방 아닌가? 물론 에반젤린 영애는 자신이 쓴 껍데기의 죽은 혈육 따위에게는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영애님. 그 방은 백작 부인이 쓰셨던 방이에요.”
“이미 돌아가셔서 지금은 주인이 없으니 상관없잖아. 가구도 채워져 있으니 바로 지내기도 편할 거고.”
헤나가 조심스럽게 설명했으나 영애는 주인도 없고 비어 있는 층이니 상관없다며 못을 박았을 뿐이다. 로한슨 백작과 집사에게는 말을 전달해 놓겠다고까지 했다.
헤나는 백작 부인의 방을 하녀에게 내어 주겠다는 말에도 토를 달지도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집사는 헤나의 동생이 중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앓던 애가 하루아침에 완쾌해 돌아다닌다는 걸 알면 의아하게 생각할 거다. 어쩌면 성수를 떠올리고 그걸 훔쳤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몰랐다.
‘그러면 안 되는데….’
“영애님. 집사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러렴. 그럼 나는 백작님께만 말해 둘게.”
최대한 집사에게는 들키지 말자. 헤나는 집사의 생활 반경을 떠올려 봤다. 집사가 머무르는 건 2층이었고, 위층으로는 올라오지 않았다. 특히 집사는 에반젤린 영애를 피해 다녔으니 칸나가 영애의 근처에 머무른다면 들키지 않을 거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백작 부인의 방을 고작 하녀의 동생이 쓴다는 걸 로한슨 백작이 허락해 줄 리 없으니까 머지않아 쫓겨날 거다. 그때까지만 조용히 지내자.
조율이 끝나자 마차를 돌려 헤나의 집에 들렀다. 집에서 헤나와 칸나는 며칠 묵을 만한 짐을 챙겨 나왔다. 사실 둘 다 가진 게 그리 많지 않아 옷가지들은 거의 다 챙겼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짐을 마차에 싣고 다시 한참을 달려 로한슨 저택에 도착했다.
보통 하녀가 먼저 나가 에스코트를 하기 마련인데 에반젤린은 거리낌 없이 먼저 내려섰다.
“푸딩! 마중 나왔구나.”
그리고 대문 창살 위에 늘어진 고양이를 발견하고 무심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에반젤린 영애는 그 기이한 생물을 몹시 사랑스러워했다. 괴물이 영애의 품 안에서는 한낱 애완동물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고양이는 세 개의 눈을 빛내며 헤나와 칸나를 바라보다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칸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이 사라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