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87)
푸딩이 천리안으로 테네브레이를 찾아 놓고 혼자 성급하게 먼저 가 버렸다.
“주인님. 쟤 혼자 갔는데요.”
나도 알아…. 젤리랑 나는 허망하게 푸딩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아니, 찾았으면 적어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혼자 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푸딩이 어려서 그런지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 원래 애들은 심부름도 자기 혼자 해 보겠다고 나서는 게 보통이긴 하지. 아까 자기 힘으로 테네브레이를 찾아보겠다고 끙끙 앓으면서 무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뒤따라가자.”
그래도 젤리라도 같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젤리가 손을 튕기자 푸딩이 있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나랑 젤리만.
“안테 경은?”
“감옥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죠.”
그러긴 하네. 감옥에 내 드레스가 남아 있으니까 안테 경이 재치 있게 드레스를 입고 나인 척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로판 소설에 이런 에피소드는 꼭 있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숲?”
우리가 이동한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푸딩은 테네브레이를 찾아서 이동했을 텐데 정작 테네브레이는 또 도망친 것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나저나 숲이라니…. 테네브레이가 그 짧은 사이에 황궁을 벗어났나 보다.
이렇게 뛰어난 도주 능력은 친아빠를 살해할 때 쓸 게 아니라 도망 여주로 쓰였어야 빛을 발하는 거였다며 아쉬워하려는데 시야 한편에 익숙한 성의 꼭대기가 보였다.
황궁을 벗어난 게 아니라 그냥 뒷마당에 있는 숲이었다. 방금 도망 여주를 했었어야 했단 말 취소할래. 고작 도망간 게 뒷마당이었다니. 남주한테 하루도 못 가서 잡히게 생겼네.
그래서 테네브레이는 안보이고, 푸딩은… 푸딩도 테네브레이를 쫓아간 건가? 젤리를 앞장세워서 푸딩의 흔적을 쫓아 뒤따라갔다. 숲이 꽤 넓어서 찾기 어렵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푸딩을 찾을 수 있었다.
“푸딩.”
“가까이 오지 마세요.”
테네브레이는 찾은 건지 물으며 가까이 다가가는데 푸딩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방금은 혼자서 사라지더니 이제 다가오지 말라고? 우리 고양이가 사춘기인가 봐! 내가 푸딩을 낳지도 않았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반려 수인 애지중지 키워 봤자 아무 쓸모 없어. 상처받아서 입을 꼭 다물고 조용히 있으니 푸딩만 있던 게 아닌지 수풀이 헤쳐지며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테네브레이인가 싶었는데 수풀 사이로 나타난 건 웬 훤칠한 남자였다. 가브리엘이랑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성기사 같았다.
“어디서 귀여운 방울 소리가 난다 했더니 역시 너였어. 용케 내가 있는 곳을 찾았구나?”
남자가 푸딩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었을 때는 교회 오빠같이 생겼는데 웃자마자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와 갈라진 혀가 드러나 인상이 180도 변했다. 단정하게 잘생겼던 인상이 확 바뀌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멍청한 거지.”
푸딩도 이를 세우며 경계했다.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남자의 등장과 함께 내게도 비린내가 맡아졌다. 남자가 든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니 저기서 나는 냄새인 게 분명했다. 힉, 어디서 누굴 베고 온 거람.
“너도 짐승 냄새 풍기는 건 마찬가지야. 게다가 뭘 처먹은 건지 썩은 내까지 나네.”
남자의 말에 순간 발끈했다. 썩은 내라니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우리 애들은 로한슨 저택 하인들이 영혼을 담아 씻기고 빗겨서 향기롭기만 한데! 푸딩이랑 젤리는 살아 있는 고체 향수거든? 남자가 든 칼이 무서워서 속으로만 열심히 반박했는데 푸딩은 아직 어려서 겁도 없는지 계속 비아냥거렸다.
“입 다물어. 비린내보다는 차라리 썩은 내가 낫지.”
“너답지 않게 말싸움이나 하면서 혀만 놀리는 건 네 주인 때문인가?”
짐승 냄새 운운하고 방울 소리를 언급하는 걸 보면 푸딩이랑 젤리가 수인이라는 걸 잘 아는 동족인 건 확실한데, 그런 것 치고는 사이가 무척 험악했다.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지? 지금 숲에 있는 걸 보면 테네브레이를 쫓는 쪽이거나 반대로 돕는 쪽 같은데…. 어느 쪽인지 가늠하고 있는데 남자의 시선이 나한테 휙 돌려졌다. 깜, 깜짝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정중한 척 인사했다.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아자젤 아스타로트라고 합니다.”
방금 푸딩한테 건방지게 말하는 걸 들어서 그런지 예의를 차리는 게 오히려 느끼했다. 가브리엘이랑 비슷한 말투인데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가브리엘은 남주 버프 덕분인지 담백한 맛이 있지. 아자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핏자국이 떨어져 궤적을 남겼다.
“스쳐 지나갈 때도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가까이 보니 영애님은 저희 같은 것들에게 더욱 자극적이네요. 왜 플라우로스가 꼬리를 말고 복종하는지 알겠어.”
플, 플라우… 뭐? 무슨 헛소린지 모르겠다. 게다가 갑자기 무슨 되지도 않는 플러팅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반존대는 그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
아자젤이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려는 듯 손을 뻗었다.
“감히 누구한테 손을…!”
푸딩이 성을 내며 달려들고 젤리도 막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만.”
내 목소리에 맞춰 아자젤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오던 푸딩과 젤리의 움직임까지 멈췄다. 날 걱정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스스로 쳐낼 수 있는데 둘 다 과민반응이다. 나도 호신술 정도는 할 수 있었거든.
내 머리카락을 만지려던 아자젤의 손목을 꽉 잡아 쥐자 아프다며 엄살을 부렸다.
“윽, 무슨 힘이….”
아프기는. 수인들은 하나같이 엄살이 심한 거야 아니면 고통의 역치가 낮은 거야. 손에 힘을 더욱 세게 주었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는 게 언짢아서 한마디 해야겠어.
“넌 푸딩과 동족이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대충 뭉뚱그리는 걸 보니 같은 고양이는 아니라는 말이다. 혀가 갈라져 있으니 뱀인가?
“그런 주제에 왜 내게 건방지게 구는 거지?”
내가 푸딩이랑 젤리 보호자잖아. 친구 보호자한테 건방지게 플러팅이나 해 대고 말이야 이 자식아. 확 술을 담가 버릴까 보다.
눈싸움하듯이 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데 팩폭에 당황했는지 아자젤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네가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지? 이제 좀 알아들었으려나 싶어서 손을 놓아주자 아자젤은 뒷걸음질 치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너무 충격받아서 미친 건가?
“하하, 하하핫…. 진짜 대단하시네.”
아자젤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웃음을 멈추고 다시 정색했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내가 도나우를 상대로 악녀 열연을 펼칠 때 써먹었던 방법이랑 비슷했다. 도나우가 그때 이런 심정이었나? 당해 보니까 되게 무섭네….
“왜 이 녀석들이 당신께 배를 까고 복종하는지 잘 알겠어. 그런데 내가 이빨 빠진 저 녀석들이랑 같은 취급 당하기는 억울하거든. 난 내 머리 위에 누가 있으면 꼭 끌어내리고 싶어지더라.”
이제 알겠다. 푸딩은 사춘기라면 아자젤은 중2병이었다. 사실 뱀 수인이 아니라 흑염룡으로 진화하기 직전의 이무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난 사람을 갖고 노는 쪽이지 지배당하는 건 딱 질색이에요. 그래서 지금 당장 당신을 먹어 치워버리고 싶은걸… 내 전력을 다하면 그래도 그 예쁜 그릇에 금이라도 가지 않겠어?”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게 겨누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자젤이 섬뜩했는데 지금은 무섭기는커녕 조금 부끄러워졌다. 친구야, 공감성 수치라고 들어봤니? 내가 지금 그게 바닥난 것 같거든. 누가 접힌 손발 좀 다시 펴 줬으면 좋겠다.
“후회할 텐데.”
진심으로 충고했다. 한창때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중2병을 졸업하고 나면 매일 밤 이불을 차 대느라 멀쩡한 이불이 남아나지를 않을 거다.
“충고까지 해 주시다니 참으로 사려가 깊으시네요.”
아자젤은 자기 걱정해 주는 것도 모르고 비아냥거렸다. 그래…. 그 시절엔 누가 말려도 귓등으로도 안 들리긴 해.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이 호기롭게 깜빡였다.
“그래서 나랑 놀아 주실 거죠?”
아자젤이 검을 휘둘렀다.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만 보는데 누가 내 어깨를 강하게 당겨 겨우 검을 피했다. 놀란 탓인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한 박자 느리게 알아차렸다. 아, 나를 구해 준 건 젤리였다.
“에반젤린 님!”
푸딩의 새된 고함 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하게 들렸다.
“저 미친놈이 감히 누구한테 칼질을 하는 거야….”
젤리는 나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고 푸딩이 아자젤한테 달려들었다.
“플라우로스. 우리 둘 사이를 방해하지 말아 줄래?”
“역겨우니 부디 너 따위랑 에반젤린 님을 같이 묶지 마.”
“나 따위? 날 이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굴기는.”
푸딩을 플라우로스라고 부르는구나. 그게 푸딩의 진짜 이름일까?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푸딩의 본명이나 찾고 있는 내가 유독 비상식적으로 느껴졌다.
방금도 그랬다. 아자젤이 내게 검을 휘두르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겁이 나지 않았다. 빙의하면서 공포를 느끼게 해 주는 편도체를 집에 두고 왔나 헷갈릴 정도였다.
아마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여긴 어디까지나 소설 속이었고, 에반젤린도 허구에 불과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시시때때로 그런 생각이 드는데 중2병 악당이 칼을 들이밀었다고 해서 갑자기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경각심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래서 그런 거다.
그 탓인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푸딩과 아자젤의 싸움을 보고서도 액션 게임 같다는 감상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 푸딩은 법사인데 전사랑 근접전으로 싸워도 잘 버티는구나 하며 태평한 생각이나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윽…!”
순간 푸딩이 비틀거렸다. 질끈 감은 푸딩의 눈에서 핏물이 뚝뚝 흘렀다. 조금 전 감옥에서도 무리를 할 때 피눈물을 흘리더니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아자젤은 자비가 없었고 시야를 잃은 푸딩을 상대로 공격을 계속하려 들었다. 푸딩을 향해 겨눠진 검 끝이 붉었다. 저러다 큰일 나겠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푸딩을 등지고 끼어들어 아자젤이 휘두른 칼을 손으로 잡아 막아냈다. 정말 충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저지른 일이었다.
“…아프네.”
더럽게 아팠다. 아프니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서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할 때 뺨을 꼬집어서 확인하는구나…! 생각해보니 젤리한테 구해 달라고 하면 되는 걸 심약한 내가 뭘 어쩌겠다고 칼 앞에 나선 것인지 후회가 막심했다.
바닥에 뚝뚝 피가 떨어졌다. 아자젤은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리는 게 자기도 몹시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하는 짤방을 지금 아자젤이 짓는 표정으로 대체해도 될 듯싶었다.
“당신도 피는 붉구나.”
그러면서도 대사는 컨셉을 유지하는 게 대단했다. 그럼 내가 피가 푸르겠어? 아자젤이 중2병 같은 대사를 내뱉은 건지, 중2병이 아자젤 같은 대사를 내뱉은 건지 이젠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이다. 틀렸어, 아자젤은 그냥 중2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잡고 있던 검을 놓자 아자젤이 뒤로 물러났다.
“피가….”
푸딩은 내가 자길 구하다 다쳤다는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실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번뜩이는데 당장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이성을 잃은 푸딩이 비치적비치적 걸어 나왔다.
푸딩이 아자젤에게 다가서자 분위기가 바뀌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구름이 달을 가렸을 거라 생각하며 하늘을 봤다가 거대한 눈이랑 시선이 마주쳤다.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핏발 선 눈동자는 아자젤을 지긋이 응시했다. 내가 잠이 덜 깬 건가? 아니, 그러기엔 베인 손이 너무 아픈데? 피가 부족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했는데 젤리도 눈이 보이는지 작게 감탄했다.
“우와. 푸딩 녀석 엄청나게 화났네….”
푸딩? 아하. 푸딩이 환각 마법을 부렸나 보다. 이성을 잃어서 목표 설정이 삐끗한 나머지 우리까지 휘말린 거지.
푸딩의 등에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만약 날개가 흰 깃털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우리 고양이가 천사였다면서 주접을 떨었을 테지만, 살을 찢고 나온 그것들은 살점과 살을 비집고 박힌 무수한 안구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구역질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만약 아자젤한테 환 공포증이 있어 약점을 공략하는 위한 장치였다면 완벽히 성공한 셈이다.
근데 왜 하필 날개지? 혹시 우리 푸딩이 타락 천사 같은 거에 관심 있나? 아무래도 중2병도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전염성 있는 중2병이라니 완전 사회적 해악이다.
눈알이 분위기 조성을 했다면 본격적인 건 지금부터였다. 아자젤에게서 불길이 피어났다. 주변에 번지지도 연기가 나지도 않으니 저것 역시 환각이었다. 그러나 아자젤은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는지 진짜 몸이 타들어 간다고 여겨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토해냈다.
“뜨거워, 아파, 아파.”
아자젤이 바닥을 뒹굴었다.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아자젤의 살이 녹고 신형이 일그러졌다.
“감히 네가 누구를 다치게 했는데, 그 값을 치러야지.”
가만히 지켜보던 푸딩은 분이 안 풀리는지 아자젤의 손을 짓이겼다.
동료의 부상으로 각성하는 것도 클리셰긴 한데 푸딩은 정도가 심했다. 여기가 소설 속이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과잉대응으로 잡혀갈 수준이다.
“저 성격 나쁜 괭이 새끼.”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젤리도 질색했다. 우리 푸딩… 여태 나한테는 내숭을 떨던 거였고 사실 성격 나쁜 편이구나. 젤리는 혀를 차더니 내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너무 보면 저 녀석이 싫어할걸요? 안 그래도 잘 포장한 모습만 보여 주려고 하는데 지금은 이성을 잃은 것 같아서요. 그리고 주인님도 좋은 것만 보셔야죠.”
너스레를 떨면서 활짝 웃는 게 좋은 게 자기 얼굴이라며 어필하는 모양새였다. 하긴, 계속 보고 있으면 내 정신건강에도 나쁠 것 같다. 아자젤이 내지르는 비명은 무시하기로 했다.
“손은 많이 다쳤어요?”
“아니. 괜찮아.”
칼날을 맨손으로 막은 것 치고는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피가 나서 그렇지 그냥 종이에 크게 베인 수준이었다. 아자젤이 내가 끼어든 걸 보고 힘을 거둬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베인 건 베인 거지. 빙의한 후 다친 건 오늘로 두 번째였다. 전에 소환진 그리다가 나무 바닥의 가시에 찔렸을 때도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팠는데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거랑은 비교가 안 됐다.
“주인님이 그사이에 끼어드실 줄은 몰랐어요.”
그건 나도 몰랐다.
젤리가 내 손을 살폈다. 환각의 영향인지 내 피가 떨어진 바닥에서 풀이 썩어들어갔다. 급한 대로 손수건을 감아 지혈했다. 젤리가 손수건을 묶어주고 한참 후에야 아자젤의 비명이 멎었다.
환각이 사라져 거대한 눈알도 없고 날개도 안 보였다. 그 사이에 몸을 쓰기도 했는지 푸딩의 옷 등 쪽이 찢어져 있었다. 절묘하게 날개가 튀어나왔던 부분이랑 같은 위치네.
아자젤은 너덜너덜한 상태로 바닥에서 헐떡였다.
푸딩은 아자젤의 멘탈을 산산조각 내 버리고도 만족을 못 했다. 핏발 선 눈으로 아자젤을 바라보는 게 아자젤도 모래알처럼 잘게 쪼개 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자젤의 정신력은 이미 갈린 후인 거 같은데….
“아자젤.”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냈어. 어떻게 하지? 설레고 벅찬데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서 심장이 떨려. 왜지? 송구스럽고 죄송스러워서 내 목을 잘라 바치고 싶어.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환각 마법을 저질렀다, 이놈아. 아자젤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혼란스러워했다.
“날 다치게 한 건 반성했니?”
나는 손을 뻗어 정신 좀 차리라고 뺨을 쓰다듬었다. 정신적 대미지가 지나쳐 실성한 애한테 뺨을 때릴 수는 없잖아.
“두려워. 당신에게 해를 끼친 내가 너무 추악하게 느껴져서 두려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죄악감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아자젤은 내 손을 끔찍해 하며 질색하면서도 떨쳐 내기는커녕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왜 이래…? 놀란 내가 손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푸딩이 아자젤의 배를 뻥 걷어찼다. 반항하지 않는 상대에게 쓰는 폭력은 완벽한 화풀이인데…. 우리 고양이가 질투가 많아서 미안.
애초에 아자젤이 자초한 일이라서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도 누굴 베고 왔는지 검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고.
잠깐. 설마 누구 죽이고 온 건 아니겠지?
“아자젤. 검에 묻어 있던 피는 누구 거니?”
푸딩이 대답하라는 듯 아자젤의 머리를 짓밟았다. 우리, 푸딩 모래처럼 조각내지 못하니 모래에 파묻히게 해 줄 생각이구나.
“예레미아.”
“예레미아?”
테네브레이가 아니라 예레미아? 테네브레이를 쫓아 들어온 숲에 예레미아가 왜 있어? 내가 되묻자 아자젤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 테네브레이던가?”
아자젤이 모래에 파묻힌 채 킬킬대며 웃었다.
“죽였니?”
“운이 좋으면 아직 살아 있겠지.”
운이 좋다면 살아 있을 거라는 말은 그만큼 큰 상처를 입혔다는 뜻이다.
테네브레이건 예레미아건 중요한 건 아니었다. 둘 중 누가 됐든 내게는 그 둘이 가브리엘의 조카인 게 문제였다. 내가 테네브레이를 쫓아온 건 혹시라도 가브리엘이 날 무죄 방면시키는 데 눈이 멀어서 혈육 상잔을 할까 걱정돼서였다.
가브리엘한테는 아직 출생의 비밀을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면회 때 진작 알려 줄 걸 그랬다. 할 말을 뒤로 미루면 안 된다는 소설의 법칙을 잠깐 망각한 참사였다. 물론 황녀를 몰래 빼돌려서 사건의 진상을 캐는 데 도움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황녀에게 가 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운을 띄웠다.
“저는 조금만 더 놀다 갈게요.”
푸딩은 분이 다 안 풀렸나 보다. 아자젤은 패션 중2병이 아니라 진짜 칼을 휘두르는 미친놈이었으니 실제로 손해 입은 사람도 여럿 있을 거다. 그 피해자 가운데 푸딩이나 푸딩의 주인인 내가 포함됐으니 저렇게 분에 차 있는 게 이해가 갔다. 게다가 젤리가 둘의 사이가 앙숙이라고 하기도 했고. 저런 사람이 성기사라니 세상이 말세다.
“먼저 가 볼 테니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렴.”
“네. 꼭 에반젤린 님께 돌아갈게요.”
푸딩이 환하게 웃다가 다친 내 손을 보고 눈썹을 서글프게 찌푸렸다. 푸딩은 상처가 난 내 손을 잡아서 애교 부리듯 볼을 비볐다. 얼굴이 멀쩡했으면 피가 묻는다고 내쳤을 텐데 똑같이 피 칠갑을 한 상태라 그냥 뒀다. 푸딩의 애교는 얼굴에 피칠을 했는데도 파괴력이 컸다.
“그리고 에반젤린 님. 저 같은 것을 구하시려고 다치실 필요는 없어요.”
푸딩은 고양이가 그러듯 내 상처를 핥았다. 소독인가?
“하지만 그럼 네가 다쳤을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우리 집고양이가 칼에 맞게 생겼는데 가만있을 수가 있나. 그런데 푸딩은 내 말에 반박했다.
“그냥 다치게 두세요. 에반젤린 님에게 상처를 입힐 바에야 내가 죽는 게 나으니까요. 하물며 저 비린내 나는 구렁이도 에반젤린 님을 다치게 했다는 사실에 정신을 놔 버렸는데 전 오죽하겠어요?”
젤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주인님을 다치게 하다니, 죽어서 사과해, 푸딩.”
푸딩은 젤리의 말을 씹었다.
푸딩의 말에 생각난 것은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도 그랬나? 내가 다치는 게 죽는 것보다 싫어서 나 대신 유리잔에 맞았던 걸까? 마냥 거북하게만 느껴졌던 호의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푸딩은 내가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는 걸 알고 내 손을 톡톡 치며 주의를 줬다.
“기억하세요. 나는 당신을 위해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푸딩은 축객령을 내렸다. 푸딩한테 쫓겨나는 건 늘 젤리 역할인데 직접 당해 보니까 마음이 허했다. 사춘기 아들이 방 문패에 출입 금지 방해 금지 팻말을 달아 놓은 것 같은 박탈감이다. 푸딩이 아들이면 젤리는 뭐냐고? 당연히 백수에 취준생인 삼촌이다.
“젤리, 우리 먼저 가자. 황녀를 찾을 수 있겠어?”
취준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로트의 영향력이 죽어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젤리는 내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상처를 의식한 게 분명했다. 네가 그러면 더 아프거든? 원래 상처는 의식하지 않는 게 제일 덜 아픈 법이다.
“많이 아프세요?”
“괜찮아. 성수라도 바르지 뭐.”
“하하, 농담도 참 무섭게 하시네요.”
젤리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하냐며 나를 질책했다. 뭐지? 농담 아닌데?
의아해하다가 불현듯 에반젤린이 병약해서 죽었다는 걸 떠올렸다. 처음 눈을 뜬 게 관 속인데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질 않으니 가끔 잊고 만다. 그러네. 에반젤린도 라이더처럼 성수가 통하지 않는 쪽이었지.
근데 백작은 빙의하고 나서 왜 그렇게 내게 성수를 많이 먹였던 거지? 빙의 초반에는 그냥 에반젤린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쓰레기 같은 백작이 딸을 그렇게 챙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친부니까 에반젤린이 성수의 효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거다. 토텐 부인처럼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것도 아니고…. 설마 마리크 주교처럼 날 악귀 취급한 건가? 딸 몸을 빼앗았으니 그런 취급을 당해도 싸긴 한데, 적어도 백작은 그러면 안 되지. 백작 부인한테는 욕먹어도 상관없지만.
“주인님. 황녀를 찾았어요.”
한참 뜸을 들이던 젤리가 황녀를 찾은 것 같았다.
“피 냄새가 유독 진하게 나는 걸 보면 정말 아스타로트 놈 말대로 죽기 직전인 것 같아요.”
젤리가 상황을 알렸다. 성수라도 있었으면 바로 치료했을 텐데 감옥에서 탈출한 처지에 성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젤리가 손을 튕기자 시야가 확 바뀌었다. 진짜 순간 이동은 개사기 능력이다. 이동한 곳 역시 같은 숲속이었다. 주변 풍경이 똑같아서 얼마나 멀리 이동했는지 짐작은 가지 않았다.
“이런.”
젤리가 영혼 없이 침음했다. 이번에는 황녀를 제대로 잘 찾아왔다. 문제는 가브리엘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너무 늦었나?
안 그래도 아자젤이 한번 찔렀는데 거기다 가브리엘이 확인 사살을 해 버린 건 아니겠지…? 걔는 네 조카야! 게다가 뒷공작에 휘말린 가짜 범인일 확률이 높으니 황명 따위는 집어치우고 절대 죽이면 안 돼!
가브리엘을 막으려고 가까이 가자 바닥에 말캉한 게 밟혔다. 발을 치우자 그 밑에 사람이 뻗어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서 이 자리에서 빙의 끝내고 성불할 뻔했다.
바닥에는 기사들이 여럿 쓰러져 있었는데 날 잡아 감옥에 가둔 기사들이랑 옷차림이 같았다. 그러니까 황궁 기사단이라는 말이었다. 다 죽어 가는 황녀가 기사들을 이길 리 없으니 이건 가브리엘이 한 짓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기사들은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기절한 것뿐이겠구나. 성기사는 원래 아무나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 가브리엘도 황녀를 구하느라 기사들을 제압한 거겠지?
가브리엘은 처음부터 황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나도 상황 파악을 했는데 남주인 가브리엘이 못 했을 리 없었다. 어쩌면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럼 나는 괜히 개고생한 건가? 아니지. 사람 하나 살리는 건데 이 정도 고생쯤이야.
내가 물컹한 사람을 밟고 놀라서 멈칫한 사이에 젤리는 가브리엘 쪽으로 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서둘러 가까이 갔다.
“…로한슨 영애.”
“네, 경. 부르셨나요?”
가브리엘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내 기척을 느낀 건가? 발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거야? 남주다운 능력이다.
“에반젤린.”
“네. 가브리엘 경.”
가브리엘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였다. 왜 먼저 불러 놓고 놀라는 거래. 설마 자기도 발소리만 듣고 나를 알아맞힐 줄 몰랐던 걸까?
아, 그게 아니구나.
가브리엘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물기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늘 푸른 하늘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넘실거리는 게 그냥 호수였다. 누가 멋대로 하늘빛을 반사해서 남을 오해하게 하래.
“부디… 황녀님을 살려 주십시오.”
가브리엘이 나를 간절히 올려다봤다. 나는 이런 시선을 여러 차례 받아 본 적이 있었다. 칸나를 구했을 때, 데이지가 돌아왔을 때, 고아원 아이들이 매달릴 때, 토텐 부인이 나를 찾아왔을 때, 가브리엘은 그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단 한 번도 그들을 내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악녀에게 주어진 참혹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냥 변덕일 수도 있었다. 얼마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세상을 종잇조각처럼 여기는 나에게 매달리나 싶어 안타까워서 그럴 수도 있고.
“경이 바라신다면요.”
지금의 가브리엘은 툭 찌르면 넘칠 거라는 걸 알아서 나는 위로하듯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가브리엘은 한시름 놓은 듯 희미하게 웃었다. 울지 말라니까 눈에서 차오른 것이 넘쳐 밖으로 툭 흘러나왔다. 딱 한 줄기, 한 방울이라 가브리엘은 자신이 운다는 것도 모를 터였다.
우는 모습을 더 보기 싫어 눈을 돌렸다. 어장 관리라면서 가브리엘이 운다고 절절매는 나도 참 쉬운 사람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걸 알아주는 건 칸나뿐이긴 했다. 악녀라는 꼬리표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칸나가 ‘아가씨는 다정해.’ 염불을 외워도 아무도 안 믿더라. 아, 푸딩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곤 했다. 그러니 내가 둘을 편애할 수밖에.
슬쩍 보이는 황녀의 상태가 심각했다. 바닥에 축 늘어져 겨우 숨만 헐떡이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옆구리를 정통으로 찔린 것인지 그 부분의 옷감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옷을 찢어 환부를 살폈다. 상처가 너무 깊었다. 아자젤 이 쓰레기 자식.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 이제 보니 중2병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었다.
“성수는?”
“소용없습니다. 젤리 씨가 통하지 않는다고….”
바닥에 화려하게 세공된 병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바닥에 부딪혔는지 유리에 금이 가 있었다. 황녀도 성수가 통하지 않는 저주받은 체질인 건가? 젤리는 가브리엘이 울든, 황녀가 다 죽어가든 관심 없다는 듯이 성수 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성 없게 유리 조각에 찔렸는지 손가락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어댔다.
옆에서 황녀는 죽어가고 있는데 고작 유리 조각에 좀 찔렸다고 아프다고 난리였다. 안 그래도 상황이 복잡해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골치 아파 죽겠는데 엄살 부리는 걸 보니 젤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성수가 묻어 있으니 바로 아물었을 텐데 하여간에 엄살은….
그 소란에 정신이 들었는지 황녀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날 바라봤다.
“천사…?”
죽으면 저승사자가 아니라 천사가 모시러 오는 세계관이라 그런지 이곳에서 자주 들어온 얘기였다. 그나저나 헛것을 보는 걸 보니 정말 심각하긴 한가 보네…. 이러다 치료할 방법을 찾기도 전에 저승으로 떠날 것 같아서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차리라 했다.
“테네브레이 님? 예레미아 님?”
토텐 부인이 쌍둥이 황녀는 목걸이로 구별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목걸이가 피로 물들어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배령이 내려진 테네브레이라고 보는 게 맞았으나 아자젤이 예레미아를 찔렀다는 말이 계속 머리에 남아 있었다.
“…난 예레미아…예요.”
그래. 예레미아구나. 테네브레이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왜 예레미아가 다친 건지 우선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꼭 물어보자.
성수가 통하지 않으니 서둘러 의사를 찾아야겠다. 끝내주게 부조리한 세계답게 성수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에, 만병통치약이 존재하는 것 치고는 의사의 수가 꽤 많았다. 그때 손가락을 부여잡고 돌아온 젤리가 엄살은 끝냈는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이 몸은 틀렸어요. 아자젤이 낸 상처라서 낫지도 않을 거고, 성수도 통하지 않는데 의사가 고칠 수 있을 리 없어요. 의사란 것들은 껍데기에 바느질이나 해 대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순전히 의지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에요.”
젤리의 말을 들은 것인지 예레미아가 숨을 헐떡였다.
“난, 나는 죽기 싫어….”
물기를 잔뜩 머금어 축 가라앉은 바람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예레미아는 동아줄을 찾는 듯이 허공에 손을 뻗어 휘저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상처가 난 손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이 유독 뜨거웠다. 꼭…, 꼭 눈앞에 있는 게 소설의 규칙을 벗어나 종이를 찢고 나온 진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신의(神醫)가 되어서 외상을 고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포지션이 성녀도 아니라서 게임처럼 힐을 남발하지도 못했다.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지? 가진 건 돈 뿐인데, 성수를 사도 통하질 않았고 악녀의 명성도 좀 두려움이나 사는 정도였고…. 도움이 안되네. 진짜 빙의할 몸을 잘못 골랐어…. 빙의? 아, 맞아, 난 빙의자였지.
난 빙의자였고, 빙의자는 빙의 전문이다.
비어 있는 몸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몸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사람… 멜렉! 맞아, 멜렉이 있었지!
“우선 자리를 옮겨야겠어요.”
가브리엘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숲은 꽤 넓은 편이었지만 황제가 기사들을 풀어 수색에 전념하니 언제 다시 발각될지 몰랐다.
“젤리, 로한슨 저택으로 가자.”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지만 꾹 참으며 버텼는데 이런 식으로 저택에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가브리엘이 예레미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예레미아는 방금 소원을 비는 걸 끝으로 기력을 다했는지 정신을 잃었다. 작게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걸 보여 줬다. 그럼에도 간절한 마음은 진심이었는지 예레미아의 작은 손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나를 꼭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펴보는데 언제 깨어난 건지 기사 하나가 바닥에 붙어 눈만 껌뻑이며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얼마나 공포에 질린 것인지 기사는 다시 눈을 감아 기절한 척할 생각도 못 했다. 내가 탈옥했다는 걸 이실직고하면 곤란한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젤리가 기사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기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데이지가 불러일으킨 유행이었다.
“이제 말 못 할 거예요.”
젤리는 뒤통수를 때리며 무슨 마법의 도움을 얻었는지 기사가 입을 다물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젤리가 그렇다면 믿어야지 뭐.
젤리가 손을 튕기자 숲은 내 방이 되었다. 젤리는 곧바로 멜렉을 데리고 오기 위해 사라졌다.
당연히 방이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소파 위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자는 칸나가 보였다. 얘는 편하게 지내라고 백작 부인의 방까지 내어 줬는데 왜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는 거래. 칸나가 나를 걱정하여 내 방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뭉클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자세가 불편해서 그리 깊게 잠든건 아닌지 칸나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가씨…?”
칸나가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처음에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하는 듯했다가 내가 ‘칸나.’ 하고 이름을 부르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칸나가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왔다.
“아가씨,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칸나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품에 안겨 들썩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칸나를 본 지 무척 오래되긴 했다. 내게 숨 쉬듯이 주어졌던 애정이 한동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자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이제 아예 완벽하게 나오신 건가요?”
“아니. 그냥 잠깐 빠져나온 거야. 환자가 있으니 침대에 눕혀야겠어. 도와줄래?”
“환자요? 어…. 가브리엘 경.”
칸나는 내가 군식구를 데려온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가브리엘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칸나는 예레미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침대를 정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내게 양해를 구하며 예레미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 흰 침대보는 예레미아가 쏟아내는 피로 인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상처가 심각하네요. 열도 심하고요…. 아가씨, 이분은 누구신가요?”
“예레미아 황녀님이야.”
칸나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황녀님이요…? 황녀님이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치셔서….”
칸나는 뒷말을 흐렸다. 다친 예레미아를 왜 로한슨 저택으로 데려왔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자초지종을 캐묻는 대신 예레미아를 간호하는 것을 택했다. 크으. 우리 칸나는 배려심도 끝내주네.
칸나가 물수건을 가지러 가자 방에 남은 건 기절한 예레미아와 가브리엘뿐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직도 예레미아와 맞잡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다치셨군요.”
가브리엘이 내 상처를 눈치챘다. 사실 내가 엄살을 부린 거지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누굴 걱정하는 거래.
“다친 손으로 계속 손을 잡아 주고 계셨던 겁니까?”
손을 잡은 건 예레미아였다. 난 그냥 놔뒀을 뿐이다. 가브리엘은 예레미아의 손을 내게서 떼어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맞잡은 손을 잃어버린 내 손을 파헤치듯이 바라보았다.
“제가 감히… 손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손을 내친 이후로 가브리엘은 멋대로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괜히 양심이 푹푹 찔려 얌전히 가브리엘에게 손을 내주었다. 가브리엘은 내가 예레미아처럼 치명상을 입었다는 양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푸딩처럼 상처를 핥지는 못했다. 벌벌 떨리는 손은 환부에 자극이 가지 않게 아주 멀리 손끝을, 손등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가브리엘이 날 걱정하는 게 피부로 와 닿아 몹시 간지러웠다.
“이런 식으로…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이 침잠했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감옥에서 면회를 안 받아 줘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가 다쳐서 나타나니 서글퍼하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걸 봐서 좋은데 다쳐서 슬프다는 거겠지?
“그래도 살아 있는 걸 확인했으니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나요?”
“저는….”
무언가 망설이며 말끝을 흐리던 가브리엘은 결심이 섰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제 다짐했습니다. 에반젤린 당신이 설령 죽은 시체라고 해도 손을 놓지 않겠다고요.”
어…. 뭔가 굉장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죽어도 시체를 데리고 살 셈이야? 아무래도 무심 남주에서 시체를 끌어안고 사는 피폐 남주로 키워드를 갈아 끼운 것 같았다. 저번에 집착의 기미가 보이던 게 내 어림짐작이 아니었나 보다. 신실한 성기사는 어디 갔는데…?
설마 내가 가브리엘을 매몰차게 대한 게 악영향을 끼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었겠어. 그렇고말고. 이건 장르가 잘못한 거다.
“서둘러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레미아 님의 일을 끝내고 나서요.”
나는 손이 찢어진 게 전부였으니 성수가 아니더라도 의사를 부르는 거로 충분할 거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걸 깨달았다. 푸딩과 젤리는 날 그토록 챙기는 주제에 상처를 치료하자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나 날 걱정하면서 왜 치료하자는 말은 안 할 걸까? 걱정은 진심인 것 같았는데….
깊게 파고들기도 전에 칸나가 돌아왔다. 가브리엘은 그새를 못 참고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공유했고 칸나는 기껏 그친 눈물을 다시 펑펑 흘렸다. 둘 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지?
큰 상처는 아니라며 칸나를 진정시키는 사이 젤리가 멜렉을 데리고 돌아왔다. 가브리엘이 같이 있다는 걸 신경 썼는지 라이더의 몸이 아니라 눈을 가리고 있는 원래 멜렉의 모습이었다.
“에반젤린 님, 부르셨다고 해서…. 우욱.”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멜렉이 헛구역질했다.
“죄송합니다…. 피 냄새가 나서….”
“참아.”
젤리가 구역질하는 멜렉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젤리는 멜렉을 강하게 키웠다. 오죽하면 처음에 젤리랑 푸딩한테 반말했던 멜렉이 알아서 몸을 수그리고 한 수 접어 줄까.
“멜렉, 네가 처음 다른 몸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해?”
“제가 이 몸으로 들어온 순간이요…?”
멜렉이 가브리엘의 눈치를 살피며 이걸 말해도 되냐는 듯 망설였다. 가브리엘은 애초에 내가 빙의자인 걸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난 멜렉처럼 예레미아를 다른 몸에 빙의시킬 속셈이었다. 젤리는 예레미아의 몸이 가망이 없다고 했으니 다른 몸을 찾으면 그만이다.
“음…. 말씀드렸다시피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이 희미해서 뚜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아요.”
멜렉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좋게 말해 빙의지, 사실 멜렉이 죽었던 순간을 다시 말해달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었다. 멜렉에게는 무척 끔찍한 기억일 것이다. 멜렉에게 좀 미안한데…. 하지만 나는 그냥 눈 떴더니 빙의 완료된 사람이고 내가 직접 몸을 골라 빙의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멜렉의 경험뿐이니 어쩔 수 없지.
멜렉의 사기를 증진할 방법은 아주 뻔했다.
“여자아이가 죽어 가고 있어. 이 몸으로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살리고 싶어.”
“저처럼요?”
“그래. 그러니 당시의 환경, 네가 겪은 상황, 어떻게 죽고 다시 깨어날 수 있었는지 기억나는 걸 전부 말해 줘.”
멜렉은 너무 마음이 여렸기에 상처를 파헤쳐 남을 도울 방법을 찾아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멜렉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토해 냈다. 악마 같은 사람과 원장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지하실에 가두고 학대했다는 것. 어느 날부터 원장은 지하실에 발걸음을 끊었고, 아이들이 아사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이가 멜렉이라는 것까지.
나는 다시금 이야기를 들으며 멜렉이 수인에게 빙의한 것을 떠나 왜 그토록 피를 싫어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기아가 심한 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뜯어먹기도 한다고 했다. 멜렉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고기 취급하지 않았으니 수인에 빙의되어도 피와 고기를 멀리할 수밖에.
멜렉의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너무 비참하고 참혹하여 그 입에서 다시 기억을 꺼내어 내뱉게 한 내가 쓰레기 같았다. 역시 악녀라서 그런지 선한 의도로 행동해도 남을 괴롭히게 되는 것 같네…. 그러나 수확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멜렉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지 못했다면 더 미안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젤리가 꺼낸 말에 가브리엘이 눈을 빛냈다.
“젤리 씨. 부디 알려 주세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왜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그냥 순순히 설명해 주면 우리 젤리가 아니지. 상황이 심각한데 장난을 치는 걸 훈계할 생각이었는데 가브리엘이 선수를 쳤다.
“에반젤린 영애가 그것을 바라시니까요.”
“영악한 놈.”
젤리가 혀를 차며 가브리엘을 비꼬았지만 사실 내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기사는 어디 가고…. 부디 가브리엘이 저렇게 된 게 내 탓은 아니기를 빈다.
젤리는 설명을 해 주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가브리엘을 노려봤다. 지금 예레미아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 갑자기 무슨 기 싸움을 하고 그러니….
“말하기 전에 너한테 확답을 받아야겠어. 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주인님의 곁에 남아 있을 거야? 난 태양신한테 사랑받고 자라난 자식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혹시 알아? 다음번에는 네가 우리 주인님을 불로 태우려 들지.”
가브리엘이 성기사라는 걸 꼬집는 건가? 하기야…. 젤리가 저렇게 날을 세우는 것도 이해는 갔다. 가브리엘이 여태 나를 두둔하던 걸 그만두고 태도를 바꾸며 모든 사실을 고해바친다면 그때는 정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지도 몰랐다.
가브리엘은 젤리의 말을 듣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시선의 끝자락이 내게 향해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았다.
“태양 빛이 제게 닿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푸른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가브리엘의 푸름이 하늘이 아니라 깊은 물 속이라면 햇빛이 닿은 적 없다는 말은 사실일 것이다.
젤리가 무어라 트집을 잡기 전에 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만하고 서두르자. 젤리, 어서 설명해 줄래?”
젤리는 내가 가브리엘의 편을 들어준 것이 못마땅한지 잔뜩 삐졌으면서도 짐작해 낸 정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고아원의 지하실은 멜렉의 희생양을 모아 놓은 곳이에요.”
“저요?”
“너 말고, 원래 멜렉 말이야.”
젤리의 구박에 멜렉은 바로 의기소침해졌다.
“멜렉은 이 순한 놈과는 다르게 역겨운 놈이었거든요? 뭐, 우리 같은 놈 중에서 역겹지 않은 걸 찾아보기가 더 드물긴 하겠지만요.”
젤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멜렉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즐겼거든요. 특히 어린애들을, 그러니까 고아원 원장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고아원 애들을 가지고 논 거죠. 그러는 중에 원장이 발길을 끊었으니 얼마나 애가 탔겠어요.”
가브리엘이 짐작이 간다는 듯 말을 얹었다.
“아이노아 고아원의 원장이 이교의 무리로 간주하여 처형된 기록이 있었습니다.”
20년 전의 이교도 학살을 말하는 것 같았다. 젤리는 심드렁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 뭐, 그런 이유로 발길을 끊었겠지. 자신에게 장난감을 제공해 주던 인간이 죽으니 멜렉이 상황을 파악하려 다시 고아원을 찾았을 거고 거기엔 다 죽고 한 아이만 남아 있었던 거죠.”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멜렉이다.
“아이는 소원을 빌었어요. 우연히도 그곳에는 주술진과 제물이 있었으니 조건이 딱 맞아떨어진 거죠.”
소원? 주술? 제물? 젤리의 설명으로 떠오른 것은 원장실 바닥에 그려져 있던 소환진이었다.
젤리는 멜렉을 조용히 응시했다. 젤리의 기본값이라고 볼 수 있는 날티가 사라지고 절로 몸을 웅크리게 만들 만큼 사나운 기색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젤리는 지금 멜렉을 보고, 진짜 ‘멜렉’을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는 악마에게 소원을 빌어 멜렉의 몸을 차지한 거예요.”
“네? 제가요? 멜렉한테 소원을 빌어서? 멜렉 몸을 차지했다고요?”
멜렉은 젤리가 재해석한 상황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젤리가 방금 악마라고 한 거 맞지?
“주술진이라면 원장실에 그려진….”
“맞아. 그거야.”
젤리가 확인 사살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소환진이 정령이 아니라 악마를 소환하는 거였다고?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성큼 다가온 진실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이래서 젤리가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가브리엘한테 상부에 고하지 않을 거란 확답을 들으려고 했구나.
그나저나 정령이 아니었다니, 어렸을 때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버금갈 충격이다. 그래 어쩐지 이 세계에 사는 사람 중 누구도 정령을 모르더라.
정령이 유니크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없는 거였어. 정령 소환진이 아니었다는 걸 빙의한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에서야 알아차릴 줄 몰랐다. 아니, 이제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인 건가?
그럼 나도 자칫 잘못하면 악마를 소환할 뻔했구나. 그때는 언어 패치가 덜 됐다고 욕했었는데, 악마라니… 주석을 보지 못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글을 몰라서 데드 플래그를 피해간 셈이다. 도나우는 그럼 악마를 소환하려 들었던 거고…. 제물이 필요하다 했으니 칸나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열이 뻗쳤다. 도나우 이 개자식 잘 죽었다.
“멜렉,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어?”
“기억이 흐릿해서 정말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요….”
“기억나지 않는다면 추측을 할 수밖에.”
젤리가 묻자 멜렉이 기억을 더듬었다. 저렇게 순해 빠졌는데 그리 험악한 소원을 빌진 않았을 거다.
“그땐 배가 고팠고, 죽기 싫었어요. 그것밖에 기억나지 않아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멜렉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미웠어요. 원망스러웠어요. 나를,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멜렉에게선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험악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알고 있기에 멜렉의 소원이 사악하다 질책할 수 없었다. 젤리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황녀도 같은 소원을 빌면 되겠네요. 배가 고프지는 않겠지만…? 뭐, 아프긴 하겠죠.”
하여간 젤리는 엄살만 부릴 줄 알지 남을 배려하는 면모가 부족했다. 한편으로 악녀의 하수인답기는 했다.
고개를 돌리자 색색 숨을 내뱉는 예레미아가 보였다. 사실 다른 방법은 전무했다. 성수가 통하지 않았고, 의사도 고칠 수 없었다. 애초에 에반젤린이 아픈 이유를 고양이에게서 찾아 길고양이들을 학살하는 세계관인데 의학이 그리 발전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라이더도 진작 쾌차했겠지.
소환진은 내가 창고 방에 그려 둔 게 있다. 멜렉이 겪었던 것과 상황을 비슷하게 재연해야 할 텐데 제물이랍시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젤리가 곧 배달이 올 거라며 태연하게 얘기했다.
“왔네요.”
나타난 건 푸딩이었다. 푸딩이 바닥에 무언가를 내던졌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자젤?”
아자젤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이 자식 때문에 황녀가 죽어 가는 거니 책임을 져야죠.”
타당한 논리였다. 아자젤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는데 젤리가 혀가 차댔다.
“그렇게 먹어 치우더니 효과가 있어 다행이네. 하여간 징그러운 자식.”
징그럽다는 말은 푸딩한테 하는 건가? 푸딩은 늘 그렇듯 젤리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푸딩이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후 아자젤의 입 안으로 손을 넣었다. 목구멍 안으로 계속해서 손이 들어가 팔꿈치 밑으로 깊게 쑤셔 넣었다. 아자젤은 구역질이 나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발버둥 쳐댔다. 원흉은 쟤가 맞는데, 뭔가 굉장히 내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다.
“욱, 우읍….”
목구멍이 과하게 열렸는지 아자젤의 목에 핏줄이 섰다. 푸딩은 안을 휘젓듯이 더듬더니 무언가를 잡아 확 밖으로 빼내었다.
아니, 미친! 사람이 놀라면 몸이 굳는다더니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푸딩이 뭘 꺼냈는지 두려웠다. 푸딩의 손에 잡힌 길쭉한 것이 꿈틀거렸다. 꿈틀거려? 소름이 끼쳐 울고 싶었다. 담력도 강한 가브리엘은 그 광경을 멀쩡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뱀?”
뱀이라고? 그 말에 나도 푸딩의 손에 들린 게 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뱀이었다. 그것도 머리가 삼각형인 걸로 봐서는 독사인 게 분명한!
“이게 아스타로트의 본체에요.”
“아자젤의 본체?”
그냥 수인이 아니었던 거야? 어쩐지 푸딩이 엄청 극혐하더라. 본체를 빼낸 아자젤의 몸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저건 빈 껍데기에요. 그러니 몸을 써도 상관이 없죠.”
푸딩은 손에 쥐고 있는 독사와 널브러진 아자젤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제물. 저건 옮겨 탈 몸.”
이런 말을 하면 정말 쓰레기 같겠지만 가성비 끝내준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1+1 이벤트도 아니고….
대충 준비가 끝난 것 같아 예레미아를 깨웠다. 아플 테니 무리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러다가 영원히 쉬게 생겼으니 양해 바란다.
“…소원을 빌게요.”
상황을 설명하자 예레미아는 놀라지도 않고 수긍했다. 악마한테 소원을 빌고 몸을 옮겨 탄다는데 놀랍지도 않나? 아마 더 큰 일을 겪어서 더는 놀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가브리엘 경에게 이야기를 듣고 이미 결심했어요. 악마에게… 아니, 당신에게 내 영혼을 팔아도 좋으니 부디….”
예레미아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칸나가 조심스럽게 예레미아에게 다가가맥박을 재더니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멈춘 것이다. 심장이 철렁했다.
뭐 소원을 빌려면 악마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안 나타나지? 설마 방법이 틀린 건 아니겠지? 보통 영화같은 데서 보면 악마가 등장해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던데, 여기도 소설 속이니까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정작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호기롭게 나섰다가 희망 고문을 해 버린 거 아닌가?
죄책감에 파묻히려던 찰나, 쓰러졌던 아자젤이 몸을 일으켰다.
“…하아.”
그러더니 막힌 숨통이 트인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태어난 그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기를.”
악마가 소원을 이뤄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