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89)
“몸이 많이 아픈데요?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사실 배가 뚫렸을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예레미아가 아자젤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평하는 소리에 고양이로 돌아간 푸딩이 슬쩍 눈을 피했다. 응. 우리 푸딩은 그사이에 아자젤이랑 깊은 몸의 대화를 나눴나 보다.
“괜찮나요?”
내 물음이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걸 알아 예레미아는 잠시 멈칫하며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았으니 충분해요. 고마워요, 로한슨 영애.”
예레미아는 심지가 무척 굳었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생명줄을 부여잡고 돌파구를 찾을 때까지 버틴 사람다웠다.
“로한슨 영애가 계속 제 손을 잡아 주고 계셨던 거죠? 소문처럼 마녀는 맞지만, 또 소문과 다르게 친절하신 분이네요.”
저… 마녀는 아니고 악녀인데요. 아니, 악녀도 아니야. 정정하려는데 예레미아가 상처가 나지 않은 쪽의 손을 마주 잡았다. 참고로 상처가 난 쪽은 뒤늦게 다쳤다는 걸 안 칸나가 울면서 치료를 끝마친 참이었다.
푸딩이 매섭게 예레미아를 노려보다가 아자젤 껍데기 안에 든 게 어린 황녀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듯 콧바람을 뀌며 시선을 돌렸다.
“아스타로트 몸으로 저렇게 순진하게 구니까 왜 이렇게 역겹지?”
젤리가 푸딩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푸딩과 젤리는 아자젤의 몸에 예레미아가 들어 있다는 사실에 인지 부조화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자꾸 에레미아한테 시비를 거는 둘을 옆으로 치워 내고 예레미아에게 줄곧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예레미아 님. 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수배된 테네브레이 황녀 대신 쫓기고 있었던 건지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예레미아가 나와 가브리엘을 흘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로한슨 영애와 가브리엘 경께서는 절 구하셨으니 당연히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그리고 예레미아의 이야기는 황태자가 살해당한 연회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테네브레이가 목걸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는 수작질부터 예레미아에게 치명상을 입힌 아자젤이 마리크 주교의 호위였다는 것까지 자초지종을 전부 전해 들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몰아친 비극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빼앗기고 몸까지 잃고 말았네요.”
예레미아는 담담한 척 말을 끝마쳤다. 영혼을 옮겨 예레미아가 몸을 잃는 데 일조한 사람으로서 양심이 아팠다. 아니지, 내가 아니라 마리크 주교가 잘못한 거지.
예레미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나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 흑막이 마리크 주교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로한슨 영애, 감사합니다.”
불이 꺼졌을 때 의도적으로 부딪혀 피를 묻힌 다음 인사를 해오던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 생생하다.
“삿된 것이 얽혀 있으니 이제 제가 간섭해도 되겠지요.”
“그렇지요, 영애님?”
황태자가 죽은 자리에 보란 듯이 그려져 있던 내 주술진과 그걸 가리키며 굳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 마리크 주교의 음성도.
이쯤 되면 내가 선물한 검과 황태자 몸에 꽂혀 있던 검이 같은 것도 마리크 주교가 꾸민 일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예레미아랑 나 둘 다 보기 좋게 놀아났네. 수완이 이렇게 뛰어날 정도면 흑막을 뛰어넘어서 그냥 최종 보스 아니야? 아니 로판에 최종 보스가 웬 말이냐고. 보통 흑막을 빙자한 아빠라거나 남주라거나 그러지 않아? 저기, 저희 세계관 최종 보스가 인자한 수녀님이신데요. 뭔가 오류가 있는 거 아닌가요?
예레미아의 설명이 끝나자 가브리엘이 말을 꺼냈다.
“예레미아 님께는 송구스럽지만, 몸은 황제에게 발견되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마리크 주교와 테네브레이 님께서 예레미아 전하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예레미아는 미련이 넘쳐흐르는지 침대에 누워 있는 원래의 몸에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네브레이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며 스스로 둔하다고 깎아내린 것과 다르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내 생각에 예레미아는 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너무 믿었기 때문에 비극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설명을 하다가 당시 상황이 생각나 서글퍼졌는지 예레미아의, 아니 아자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저렇게 애처럼 울먹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심경이 복잡해졌다. 왜 푸딩이랑 젤리가 시비를 걸었는지 알겠다.
저건 예레미아다, 예레미아다… 아직 어린 황녀다, 끊임없이 자기 세뇌를 하는데 다행히 가브리엘이 화제를 돌렸다. 나이스 타이밍! 아자젤은, 아니 예레미아는 황급히 눈가를 문질러 닦고 언제 울먹였냐는 듯 물기를 지웠다.
“그 전에 정리가 필요한 것 같군요. 에반젤린 영애께도 전달 드릴 말이 있습니다.”
다행히 밤은 길었고,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가브리엘이 칸나에게서 종이를 받아왔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무언가 꾸물꾸물 그리기 시작했다. 예레미아는 눈을 반짝이며 검은 자국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무슨 그림인지 맞혀 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저 모습을 보니 진짜 어린애가 맞구나.
“등에 도끼가 박힌 개?”
“태양을 등에 업은 사자입니다.”
신전의 약식 문장이었다. 누가 들었으면 신성 모독이라고 으름장을 놨을 거다. 애초에 악마한테 예레미아를 살려 달라 소원을 빈 것부터 신성 모독을 저지르긴 한 거지만.
“이건 붕대를 감은 사람이죠?”
“용이 칼을 휘감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럴 리 없는데? 이 삐쭉삐쭉한 게 머리 아니에요?”
“왕관입니다.”
칼을 휘감은 드래곤은 황가 쪽 문양이었다. 황녀도 알아보지 못하는 거면 얼마나 엉망으로 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아. 이건 너무 쉽다. 지렁이?”
물결 모양은 내가 보기에도 꼬불거리는 지렁이 같았다.
“뱀입니다.”
뱀이라면 아자젤이구나. 전부 틀렸으니 예레미아의 참패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분한지 예레미아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조금 전까지 애써 괜찮은 척하던 모습보다는 그림 맞추기에 열중하는 유치한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가브리엘도 같은 생각인지 흥을 깨지 않고 휙휙 무언가를 그려 냈다. 내가 예전에 봤던 열쇠 구멍이랑 상당히 비슷한 모양새였다. 한번 본 적이 있다고 얼추 가늠됐다. 저건 사람이겠네.
예레미아는 답이 항상 기상천외했던 걸 기억하며 색다른 답안을 내놓았다.
“사과에 명중한 화살촉?”
바로 답을 정정해줬던 가브리엘이 이번만큼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예레미아 님이십니다.”
“이게 나라고?”
예레미아가 얼떨떨해하며 되물었다.
“로한슨 영애…. 전 이렇게 생겼나요? 지금 모습이 아니라 원래의 저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예레미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번엔 가브리엘의 패배였다.
“가브리엘 경은 그림 실력이 참 독특하시네요….”
예레미아는 가브리엘이 그린 초상화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직도 가브리엘이 그린 낙서가 어떻게 사람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듯 종이를 바라보다 비밀을 알아차렸다며 손뼉을 쳤다.
“아! 혹시 암호와 비슷한 건가요? 혹여라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어떤 그림인지 추론할 수 없도록 일부로 이렇게 그린 신 거 맞죠?”
생각해 보니 가브리엘은 주술진 하나는 잘 그렸는데…. 작도 실력이 끝내주는 걸 보면 사실 ‘남주가 그림 실력을 숨김’ 뭐 이런 거였나? 그러나 가브리엘은 답이 없었다.
가브리엘 너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너도 네 그림이 낙서 같다는 자각은 있었구나….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귀 끝이 붉었다. 이게 바로 갭모에?
“죄, 죄송해요.”
예레미아도 가브리엘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당황했는지 어찌할 줄 모르며 사과했다.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된 그림 맞추기 시간은 어색하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