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possessed it, it became a ghost story RAW novel - Chapter (96)
황태자와 테네브레이의 장례가 끝났다. 시해범을 찾아낼 때까지 장례를 미루던 황제는 테네브레이의 시신을 받아 두 부녀의 장례를 함께 치러 주었다.
“패륜아에게 장례를 치러 주신다니 폐하도 참 배포가 크시지.”
물론 사건이 모두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테네브레이가 어떻게 무슨 수로 황태자를 죽였는지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기사들은 작정하고 테네브레이의 방을 이 잡듯이 뒤지는 중이었다.
“어, 여기 뭔가 있는데?”
침대를 치우고 바닥을 살피자 작은 틈이 보였다. 틈에 손을 집어넣자 바닥이 열렸다. 그 안에는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헌 서적과 편지 같은 종이 뭉치, 죽은 쥐 사체가 있었다.
“…으.”
기사는 질겁하며 침음하였다.
쥐가 틈새 사이로 숨어들었다가 나가지 못해서 갇혀 죽은 줄 알았더니, 슬쩍 몸을 뒤집자 배가 갈라져 꿰맨 자국이 보였다.
사람의 손이 닿은 거로 봐서 누군가, 아니지. 방의 주인인 테네브레이가 일부러 죽은 쥐를 바닥 창고에 집어넣은 것이 분명했다.
쥐의 배를 열어 보자 그 안에선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잘린 손톱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버려진 머리카락, 손톱에 불과했지만, 사체 속에 들어있던 탓인지 섬뜩하게 느껴져 사람으로부터 잘려 나온 신체 일부로 보였다.
테네브레이 황녀가 쥐의 배를 바느질하는 상상을 하고 만 기사는 구역질을 참으며 상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주술서와 주술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나왔으니 테네브레이 황녀가 이교도에 빠졌던 것이 분명했다.
“무제타 경. 테네브레이의 방에서 주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
테네브레이는 이미 황족의 신분을 박탈당했기에 황녀라는 호칭을 걸맞지 않았다. 그러나 무제타는 하마터면 수하에게 테네브레이에게 황녀란 호칭을 붙이라고 호통을 칠 뻔했다.
“황실의 치욕이군,”
“어쩐지 음침하더라니, 뒤가 구릴 것 같았어.”
테네브레이를 욕하는 가운데 무제타만이 침묵을 지켰다. 무제타의 무기력한 태도를 두고 휘하에 있던 기사들이 귓속말을 숙덕대었다.
“무제타 경은 왜 저렇게 의기소침해지셨어?”
“황태자 전하의 시해범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못 되어 그런 거 아니야? 무제타 경은 충성심이 남다르시잖아.”
“그러네. 일리 있어.”
뒤에서 무제타의 상태를 두고 무어라 추측하는 말들이 제법 크게 들렸지만 정작 무제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수하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황태자의 호위였던 무제타는 황제의 배려로 황태자의 죽음을 수색하는 일을 맡았다. 황태자가 연회장의 샹들리에에 매달려 죽은 당시만 하더라도 당장 범인을 찾아내 황명으로 도륙 내는 상상을 하며 밤낮으로 수색에 매달려 왔다.
흉기를 반입한 데다 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고, 마리크 주교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증언까지 합쳐져 용의자로서 감옥에 가둬 놓은 에반젤린 로한슨.
그리고 사건 당시 연회장에 있지 않아 심증뿐이긴 해도, 정황상 범인이라고 추측해 뒤를 캐고 있던 마리크 주교.
그런데 갑자기 범인이 튀어나왔다.
황제는 테네브레이 황녀가 황태자를 시해했음을 공표하였다.
생사를 불문한 수배령이 떨어진 바로 다음 날 새벽, 테네브레이가 시신으로 돌아오면서 무제타의 사기는 저조하다 못해 박살이 나 버렸다.
“왜, 그것도 파라로스 기사단 단장이 공을 세웠다며. 무제타 경께서 못마땅하실 만하지.”
가브리엘의 이야기가 나오자 무제타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니다. 충성심이 남달라 의기소침해 있다는 그들의 추측이 틀렸다. 물론 시해범을 찾는 일을 무제타의 손으로 하지 못하였다는 게 걸리긴 하였으나…, 무제타가 이토록 고뇌하는 것은 시해범의 정체가 하필 테네브레이 황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네브레이 그 패륜아는 왜 황태자 전하를 살해한 건가?”
“황족들 사이에서 피를 보는 일이 따로 뭐 있겠어?”
“헙…! 설마 황위 계승권 때문이라고?”
“그래. 폐하께서도 손위 형제들을 전부 죽이고 황위에 오르지 않았나.”
황제의 이명이 ‘찬탈자’라는 것은 유명했다. 아랫것들이 겁도 없이 멋대로 수군덕대는 게 언짢아진 무제타가 기사들을 타박하였다.
“윗분들 일을 멋대로 짐작하려 들지 마라.”
“…네!”
“죄송합니다. 무제타 경.”
어디서나 입은 있기 마련이다. 뒤에서는 황제의 욕도 한다지만 이곳은 황궁이었다. 황제의 안전에서 일개 수족이 주인의 흉을 본다는 건 안 될 말이다. 황궁의 모든 것들은, 심지어 사람마저도 황제와 황족들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무제타 역시 그랬다. 무제타는 아주 충성스러운 호위였다. 그는 주인의 의사에 일말의 사견도 얹어 본 적이 없었고, 황태자는 자신을 우직하게 섬기는 무제타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이는 그가 황태자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누가 알까, 보잘것없고 변변치 못한 황태자가 친딸을 학대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는 사실을.
테네브레이 황녀는 고귀한 신분에 걸맞지 않게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감히 장담하건대 귀족 출신의 시녀들이 테네브레이 황녀보다 더욱 존중받았을 것이다. 황태자는 테네브레이를 학대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 싫어해 치료조차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무제타는 그 모습을 묵인했다. 무제타의 주인은 황녀가 아닌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제타만은 테네브레이 황녀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황태자를 살해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들이 헤집고 있는 방이 유독 초라해 보였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테네브레이의 방은 예레미아의 방과 비교하면 볼품없었다. 테네브레이가 검소한 취향인 것이 아니라 사치 부릴 환경이 안 되었을 뿐이다.
황태자가 은연중에 둘을 차별하니 그 점이 아랫것들에게도 영향이 갔다. 두 황녀가 지내는 성의 재무관은 황태자의 묵인하에 총애받는 예레미아와 테네브레이에게 같은 예산을 배정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둘의 일상복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유행을 따라 옷을 맞추는 예레미아와는 달리 테네브레이는 옷을 새로 짓는 법이 없어 유행을 타지 않는 단출한 드레스가 대부분이었다.
테네브레이 황녀의 드레스는 하나같이 모두 검은색 계열이었다. 상처에서 배어나는 나오는 핏물을 가리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테네브레이는 늘 화사한 복장의 예레미아와 비교되며 음침한 황녀라는 멸칭에 시달려야 했다.
테네브레이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못 견뎌 하며 목덜미나 팔을 긁어댔다. 피부가 벗겨지고 손톱 사이에 살점이 낄 때까지 계속 긁적거렸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무제타는 황녀의 행동을 소름 끼쳐 하며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그런 습관을 천하다며 끔찍해 해서 자신의 앞에서는 결코 테네브레이가 몸을 긁지 못하게 했다. 한 번은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는 바람에 테네브레이는 황태자의 앞에서는 결코 몸을 긁지 않도록 꽉 주먹을 쥔 채 모진 시간을 견뎌냈다.
긴 손톱이 주먹 쥔 손을 상처 내더라도, 손톱을 지키겠다는 듯이 꽉 말아쥐고서는…. 결국 황태자의 화풀이가 끝났을 즈음에는 테네브레이의 손바닥 역시 엉망이 되었다. 그때 황태자의 명령을 뒤로하고서라도 연고라도 가져다줄 것을….
무제타는 의심하지 않고 따랐던 신념을 잠시 후회하였다. 그건 무제타가 지금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일까?
스스로 판단 내리기도 전 무제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바로 했다.
“무제타 경! 무제타 경?”
“왜 그러지?”
“방금 찾은 것 중에서 서신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무제타 경께서 한번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서 같은데요…?”
“…그래. 확인해 보지.”
무제타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테네브레이 님께.
나의 님, 창밖에 아름드리 피어난 벚꽃을 바라보니 문득 당신 생각이 납니다. 아니요. 사실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의 벚꽃은 저물지 않으니 저는 해종일 당신 생각뿐입니다. 당신께서 황금 뇌옥에 갇혀 살아가는데 아무도 그대를 위해 주는 자가 없는 것이 걱정됩니다. 도금된 자들은 죄를 입어 언젠가 쇠하여 사라질 테지만, 견딜 수 없이 악취가 난다면 내가 썩은 상처를 도려낼 발톱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작은 태양이 가장 짧은 그림자를 만들어 낼 때, 태양의 그늘에서 만나길 고대합니다. 제가 약조드린 말들이 당신께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당신은 제게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분이시니 그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당신의 영원으로부터.
“연서인가요?”
그 말에 무제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서신이 정인과 통하는 연서였다면 주술서와 함께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연서를 빙자해서 살인을 사주하는 편지였다.
어떻게 테네브레이 황녀가 학대당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몰라도 편지를 쓴 사람은 복수를 종용하고 있었다.
태양이 가장 짧은 그림자를 만든다는 건 가장 높게 떠 있을 순간, 즉 황태자의 탄신일을 말한다. 발톱이란 전하의 심장을 꿰뚫은 단검이겠지.
심지어 지지 않는 괴이한 벚꽃을 이야기할 때 로한슨 저택의 벚나무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게 더욱 이상했다. 이런 단순한 것만으로도 편지를 보낸 사람이 에반젤린 로한슨이라는 게 추측이 됐다.
사실 편지는 무척 허술하였다. 연회장에서 에반젤린 로한슨이 지참한 단검으로 황태자가 살해당한 것처럼, 너무나 에반젤린을 잡아가라는 듯 종용하는 편지였다. 상식적으로 에반젤린 로한슨이 자신에게 덫을 놓는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무제타의 상식은 황태자가 죽고, 테네브레이 마저 사망한 이후 제 기능을 한 법이 없었다. 무제타는 지금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편지를 읽었나?”
“…아니요.”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편지였어. 그냥 보잘것없는 연서다. 테네브레이 황녀에게 접근해 황가의 사돈이 되고 싶은 속셈이었겠지.”
“그렇군요.”
수하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색을 계속해 나갔다. 무제타는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을 때 편지를 몰래 품에 챙겼다.
무제타가 테네브레이의 서신을 빼돌린 것은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따로 조사해 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제타는 어디까지나 황제의 용인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경에게 부탁이 있네.”
“폐하께서 어찌 부탁이라고 하십니까. 저희는 당연히 폐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을요.”
“그렇게 말한다면 믿고 맡겨 보겠네. 무제타 경. 만약 테네브레이를 조사하던 중 에반젤린 로한슨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묵과하거라. 그 사실은 내게만 알려도 충분해.”
“하오나, 폐하.”
“무제타 경. 자네의 주인인 나를 위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게나.”
무제타는 황족을 위한 부품이었다. 황태자가 죽기 전에는 그의 소유물로서 최선을 다하였으나 지금은 황태자가 죽었으니 다시 황제 폐하를 위해 움직이는 게 맞았다.
그러나 손녀가 죽었음에도 자비라고는 내비치지 않는 황제 폐하가 너무나 야속하여, 무제타는 잠시 보고를 늦추도록 결심했다.
테네브레이 황녀는 너무나 쉽게 잡혀 죽었다. 황녀에게 살인을 사주한 자는 테네브레이 황녀를 이용했을 뿐, 궁지에 몰린 그녀를 구할 생각 따윈 없던 것이었다. 만약 에반젤린 로한슨이 정말 테네브레이를 충동질한 뒷배라면….
황제 폐하의 명을 따를 것인가, 황녀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인가… 무제타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선 정말 에반젤린 로한슨이 보낸 편지인지 확인해 보자. 그 이후의 일은 천천히 생각해 봐도 좋았다.
무제타는 편지와 에반젤린 로한슨의 필체가 일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로한슨 백작가에 사람을 보냈다.
하인들을 매수할 생각이었는데 로한슨 백작가의 식솔들이 어찌나 자신들의 영애님을 애지중지하는지 외부인을 지나치게 배척해서 쉬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로한슨 영애의 필적을 빼돌리는 대가로 일반 백성들은 넘볼 수도 없는 금액을 제시해도 마찬가지였다. 고용인이 이렇게 많은데 금전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꼭 단체로 세뇌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저 교육을 잘 받은 것일 뿐이겠지. 아무래도 에반젤린 로한슨이 감옥에 있는 만큼 경계가 삼엄해졌을 거다.
수하 하나가 어린 애한테 커다란 돌을 맞고서 돌아왔을 때는 무제타도 더는 로한슨 백작저를 찾지 않았다.
무제타는 백작저를 서성이는 걸 그만두고 로한슨 백작을 찾아갔다. 백작저의 문을 걸어 잠갔길래 그곳에서 칩거하는 줄 알았더니 로한슨 백작은 수도에 다른 집을 얻어 사는 중이었다.
‘주인이 집을 두고 밖에서 지내다니, 무슨 쫓겨난 모양새군.’
백작은 경고 섞인 말 몇 마디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인들보다 백작을 더 쉬이 넘어트릴 수 있다니, 참으로 우스웠다.
“딸아이의 편지? 그건 왜 찾는 게요?”
백작은 무제타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했지만, 순순히 협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테네브레이 황녀의 방에서 서신을 찾았습니다.”
“설마 그게 내 딸애가 보낸 편지란 말이오?”
무제타는 답을 하지 않았다. 백작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화를 냈다.
“지, 지금 내 딸을 의심하는 거요? 고작 편지와 칼 때문에? 내 그 아이가 죽는다면 가만있지 않겠소!”
무제타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연기하기 위해 일부러 성을 내는 백작을 느긋이 바라보았다. 딸을 그리 귀히 여기는 아버지였다면 로한슨 저택을 지키고 가브리엘처럼 물심양면 노력했었어야지. 고로, 백작이 지금 성을 내는 것은 딸인 로한슨 영애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혹시 로한슨 영애가 전하의 살인을 사주했다는 게 밝혀지면 연좌제로 처형당할까 두렵습니까?”
“…누굴 그리 무정한 아비로 보는 건가!”
무제타의 추측이 맞았다. 로한슨 백작은 자신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였다. 그렇다면 구슬리기도 쉽겠지.
‘친부가 주인을 지키려 돌을 던진 꼬마만도 못하군.’
무제타는 백작에게 제안했다. 만약 로한슨 영애가 사건의 흑막이더라도 백작만큼은 수사에 협조를 해 주었으니 반드시 면죄부를 주겠노라고.
“쉽게 믿을 수 없소.”
백작은 요즈음 친밀하게 지내던 휘켈 자작에게 뒤통수를 맞은 참이었다. 그러니 구술로만 거래하는 건 안 될 일이다.
“공증을 서시오.”
“그러도록 하지요.”
무제타는 백작이 준비한 서류에 사인했다. 백작은 서류를 품에 집어넣고 하인에게 편지를 가져오게 시켰다.
“이것이 에반젤린이 내게 보낸 편지라오.”
무제타는 편지를 읽었다. 단순히 필적만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그 내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로한슨 백작님께.
백작님. 어머니만 쓰시는 저택의 3층 말이에요. 어머니의 방에 제 아이들을 지내게 해야겠어요. 3층에서 사람이 쓸 수 있는 방은 그 방뿐이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께는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되도록 다른 사람들은 3층에 오지 않으면 좋겠어요. 집사에게 일러둘게요.
당신의 딸 에반젤린이.
무정한 로한슨 백작님께.
백작님. 편지를 부치지 말라니요? 제 편지를 받지 않으신다면 직접 눈을 마주보고 말을 전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백작님은 저와 눈 마주치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아 참, 집사에게 곧 어머니의 기일이라고 들었어요. 무덤에는 국화가 아니라 흰 카네이션을 헌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카네이션이 좋아하시잖아요.
분명 처음 백작님이 프로포즈 할 때 준비한 꽃다발이 카네이션이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백작님께서 준비한 카네이션을 받고자 어머니가 무덤에서 기어 나오실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다시 만나길 기대하고 계실 거에요.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글을 남기셨으니 첨부할게요. 망자가 쓴 편지라니 낭만적이지 않나요?
당신의 딸 에반젤린이.
무제타의 눈이 흔들렸다. 에반젤린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분명 죽은 백작 부인일 것이다.
“백작 부인은 이미 타계하시지 않았습니까?”
백작은 말이 없었지만,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무제타의 물음이 정답임을 알 수 있었다.
편지 내용을 보면…. 말도 안 되지만 3층에 백작 부인의 유령이라도 나와 배회한다는 것 같았다. 마녀가 아니라 그냥 미친 것뿐이었나?
페이지를 넘기자 편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작은 수첩 한쪽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무제타가 종이를 주우려는데 백작이 질겁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종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이건 에반젤린의 편지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백작이 단호하게 벽을 세웠다.
“자. 다음 페이지를 읽어 보기나 하시게. 자네가 찾던 건, 이 쪽지가 아니라 에반젤린의 편지가 아닌가.”
로한슨 백작의 말에 무제타는 찝찝하지만, 시선을 돌렸다. 백작이 다급히 숨긴 저 쪽지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쓴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함께 섞여 있는 것이고, 어째서 저 수첩에는 ‘배신자.’라는 말이 페이지 가득 쓰여 있는 것일까? 정말 망자가 편지를 쓰기라도 했나?
무제타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게 마지막 편지였다.
로한슨 백작님께.
백작님. 가브리엘 경께서 데뷔탕트 파트너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앓아누워 죽어 가던 딸이 드디어 데뷔하는데 방해하시지는 않겠죠? 저 역시 얌전히 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딸 에반젤린이.
에반젤린 로한슨이 파라로스 기사단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에 들어선 것은 너무나 유명해 잘 알고 있었다. 먼저 권한 쪽이 가브리엘이라는 시답지 않은 정보나 알게 되었다.
무제타가 알아보려 했던 건 내용이 아니라 필체뿐이었으니 상관없다.
“로한슨 영애는 글솜씨가 좋으시군요.”
문장력이 아니라 글씨체를 말하는 것이다. 에반젤린의 글은 한결같이 유려하며 정갈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테네브레이의 방에서 찾은 것과 필체가 같았다.
더 자세한 건 전문가에게 분석을 맡겨 봐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같은 사람이 쓴 글이라고밖에 판단되지 않는다.
그때 무제타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에반젤린 로한슨은 죽었는데, 호사퀸 공작의 유산이 탐난 백작이 비슷한 소녀를 데려와 에반젤린이 살아 있다 꾸몄다는 소식이다.
“필체는 확인했으니 이제 되었소?”
백작은 무제타의 반응을 살펴보며 물었다.
‘하여간 기사란 것들은 표정이 없어서 구분하기 어렵다니까.’
무제타의 표정만 봐서는 테네브레이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서신과 필체가 같은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고작 이런 것 가지고 연좌제에 묶이지 않을 수 있으려나 하는 의심이 스쳐 지나갈 찰나, 무제타는 다시 입을 열었다.
“…1년 전 말입니다.”
“1년 전?”
“그 전이라도 좋습니다. 로한슨 영애의 필체는 예전부터 변함이 없습니까?”
일순간 무제타의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이었다.
백작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떠올리며 무제타가 이런 질문을 한 저의를 알아차렸으나 너스레를 떨었다.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지만 협력하기로 하였으니 답해 드리지. 에반젤린의 필체는 변한적 없고, 크게 아픈 후 완쾌하고 나서도 똑같았소.”
“똑같았다고요?”
“왜 이상한가? 무제타 경도 내가 죽은 딸애를 대신해 다른 허수아비를 데려와 세웠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네. 그 애는 에반젤린 로한슨이 맞아. 필체도, 습관도, 식성도 전부 다 같으니.”
무제타가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백작이 말한 것은 전부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같이 식사하던 자리에서 에반젤린이 자신의 딸처럼 식사했다. 딸은 몇 번을 훈계해도 꼭 음식을 먹기 전에 음료를 입에 댔는데, 에반젤린 역시 먹는 순서가 같았다.
고작 몇 달 만에 봤다고 처음 장례식에서 봤을 때와 다르게 제법 사람 흉내를 잘 냈지.
“믿지 못하겠소? 몇 년 전 그 아이가 쓴 편지가 있을 거요. 아마 로한슨 저택에 있을 테니, 그 편지를 찾아보라 이르지.”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무제타를 내보냈다.
며칠 후 무제타에게 서신이 도착했다. 백작이 약속을 지킨 것이다. 급조한 것은 아닌지 편지에선 꽤 오랜 시간 그늘진 곳에 보관된 눅눅한 냄새가 났다.
무제타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었다.
로한슨 백작님께.
백작님. 어머니께서 몸이 아프다고 하세요. 잠시라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
친모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 편지는 무척 짧고 담담하였다. 그리고 백작이 말했던 대로 필체 역시 놀랍도록 똑같았다. 이건 몇 년 전에 쓰인 편지일까? 어머니가 언급된 것을 보면 꼭 백작 부인이 살아 있을 무렵일 것이다.
‘로한슨 백작 부인이 언제 타계했더라?’
무제타가 찾아본 결과 백작 부인이 타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7년도 더 된 것이었다. 그런데 편지는 7년이 아니라 꼭 수십 년이 지난 것처럼 더 오래되어 보였다. 무제타는 정확한 연도를 알기 위해 백작에게 답신을 부쳤다.
백작님. 로한슨 영애가 보낸 편지는 몇 년 전에 받으신 편지인가요?
10년 전쯤일 테요.
답은 늦지 않게 돌아왔다.
‘10년 전?’
그렇다면 이 편지를 쓴 것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였다. 아무리 귀족들이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열 살도 전에 완성한 글씨체를 10년도 넘게 같은 똑같이 유지할 수 있을까? 당장 하루 이틀 차이로 적은 편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편지는 확실히 10년도 더 되어 보였고, 잉크가 묻어나 조작임이 드러난다는 기적 같은 일도 없었다. 애초에 에반젤린 로한슨은 감옥에 있으니 글을 쓸 상황도 아니었다.
로한슨 백작이 몰래 부탁하였다 하더라도 에반젤린 로한슨이 자신을 궁지로 몰고 갈 편지를 쓸 리도 없었고.
무제타는 에반젤린 로한슨에 대한 의문을 삼켰다. 어찌 되었든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필적이 너무 기이하여 당장 감옥으로 달려가 에반젤린에게 검을 겨누겠다는 결심은 속으로 삼켰다. 미지의 것을 대하는 공포심이 싹튼 탓이다.
‘그래. 우선 폐하께 전하자.’
무제타는 그리 변명하며 테네브레이의 방에서 나온 서신과 에반젤린의 편지를 들고 황제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