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Quit Being A Wicked Mother-in-law, Everyone Became Obsessed With Me RAW novel - Chapter (54)
악녀 시어머니를 그만뒀더니, 다들 내게 집착한다 (54)화(54/180)
<54화>
적어도 숨 쉴 구멍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인데…….
안리체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이야. 재능이 있는 분야도 각자 다른 법이란다.”
“……엄마.”
“물론 네가 차기 가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주 기특하다고 생각해.”
안리체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기특한 만큼, 안쓰럽기도 했다.
그 마음을 담아 안리체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발루아의 소가주라는 이유만으로, 네 행복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잖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당연하지.”
엘리엇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안리체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생각해 보렴. 긴 발루아의 역사 속에서, 기사로서 전공을 세웠던 가주들은 무척 많지만…….”
제 아들과 시선을 맞추면서, 안리체는 상냥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림으로써 두각을 나타낸 가주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잖니?”
“그, 그렇기는 하지만요.”
“난 말이지, 훌륭한 검술 실력을 가진 발루아의 가주도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얼떨떨한 얼굴의 엘리엇을 향해, 안리체는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출중한 그림 실력을 가진 발루아의 가주도,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단다.”
“…….”
엘리엇은 침묵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어두운 얼굴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엇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잖니?”
엘리엇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응시하던 안리체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공모전에 그림을 내 볼 생각은 없니?”
“됐어요, 공모전은 무슨…….”
“주제도 자유라잖아. 아무 그림이나 내 봐도 되는 건데, 밑져야 본전 아니니?”
“하지만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는걸요.”
엘리엇은 시무룩하게 양어깨를 늘어뜨렸다.
흠,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 라.
잠시 고민하던 안리체가, 밝은 얼굴로 아이에게 제안했다.
“그럼, 가장 좋아하는 것을 그려 보는 건 어때?”
“가장 좋아하는 것…….”
그 말을 곱씹던 엘리엇은, 이윽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꽉 막혀 있던 가슴 속에, 처음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엘리엇은 안리체의 조언을 새겨들었는지, 최근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만 릴리아나는 다소 시무룩해졌는데, 그 이유가…….
“어머님, 요새 엘리엇을 자주 못 만나는 것 같아요.”
안리체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예전 릴리아나가 한창 공부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 엘리엇이 투덜거렸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으므로.
“그럼 한번 직접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은근슬쩍 그렇게 제안하자, 릴리아나는 반색을 했다.
“그래도 될까요? 엘리엇이 너무 바빠 보여서…….”
“글쎄, 엘리엇은 네가 찾아가 주기만 해도 엄청 좋아할걸?”
그 말을 듣자, 릴리아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저, 간식이라도 챙겨 가는 편이 좋을까요?”
“좋은 생각이네. 주방으로 가 보렴, 크림치즈 머핀을 구워 두라고 말해 뒀단다.”
“크림치즈 머핀이요?”
“그래, 너희 둘 다 좋아하는 간식이잖니?”
안리체가 생긋 웃어 보였다.
릴리아나의 표정이 전등을 켠 것처럼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감사 인사를 남긴 릴리아나가,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안리체는 흐뭇한 시선으로, 릴리아나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도화지를 노려보고 있던 엘리엇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
그 대답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릴리아나였다.
손에는 머핀과 음료가 담긴 쟁반을 야무지게 들고 있었다.
엘리엇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릴리아나?”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릴리아나가 머쓱한 얼굴로 헤헤 웃었다.
엘리엇이 정색을 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해? 릴리아나는 얼마든지 내 방으로 찾아와도 괜찮아.”
“하지만, 요새 엘리엇이 굉장히 바빠 보여서…….”
우물쭈물하던 릴리아나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그렇잖아? 얼굴도 제대로 잘 못 보는걸.”
“이제야 내 마음을 알겠어?”
“응?”
뜻밖의 대답에, 릴리아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엇이 밉지 않게 핀잔을 주었다.
“너도 옛날에 매일 공부방에만 박혀 있었잖아.”
“아, 그랬었나?”
릴리아나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엘리엇은 아마도, 예전 아이반 자작 부인과 공부하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
“그래서 여긴 웬일이야?”
“그거야 엘리엇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지.”
그렇게 대답한 릴리아나가, 총총걸음으로 엘리엇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로 쟁반을 내려놓는다.
“같이 간식도 먹고 싶고 말이야.”
“……이거, 나랑 같이 먹으려고 갖고 온 거야?”
“당연하지. 엘리엇, 머핀 좋아하잖아?”
방긋 눈웃음을 지은 릴리아나가, 이젤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보드라운 금발이 사르륵 쏟아져 내린다.
청량한 향기가 훅 끼쳤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엘리엇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그림 그리는 건 잘 돼 가?”
“신경 쓸 것 없어,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이렇게나 잘 그리는데?”
릴리아나는 감탄이 가득한 눈동자로 엘리엇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하얀 도화지에는, 아직 연필로 선만 슥슥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스케치만으로도 엘리엇의 뛰어난 재능이 얼핏 들여다보였다.
아마 인물화인 것 같은데…….
“난 평생 그림을 배워도, 이렇게 그리지는 못할 것 같아.”
부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릴리아나가, 문득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맞다, 이번에 공모전에 나간다고 들었어.”
“뭐, 어차피 떨어질 거…….”
“왜 그런 말을 해?”
그때, 릴리아나가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사실 난, 엘리엇이 수상하든 수상하지 못하든 그건 전혀 상관없어.”
“……릴리아나.”
“다만 엘리엇이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 그래야만 결과에 만족할 수 있잖아?”
그 말에, 엘리엇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릴리아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난 그림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엘리엇의 그림은 아주 멋지게 보여.”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인 릴리아나가,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힘내, 응?”
“……고마워.”
엘리엇은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릴리아나가 보지 못하는 목덜미는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릴리아나는 엘리엇의 소매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우리 빨리 간식 먹자. 나, 엘리엇이 맛있는 거 먹는 모습 보고 싶어.”
“……내가 먹는 걸 보고 싶다고?”
어쩐지 말이 좀 이상한데?
얼떨결에 릴리아나가 건넨 머핀을 받아들며,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아나는 턱을 괸 채 엘리엇이 머핀을 먹는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흠, 어머님께서 가끔 ‘네가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라고 하시거든.”
릴리아나가 흐뭇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아마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
그건 어쩐지 약혼자를 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린 자식을 귀여워하는 마음 같은데?
엘리엇은 뚱한 얼굴로 머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머핀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 한 달이 지난 때.
엘리엇은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소파 한구석에 도사리고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공모전 당선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까.’
비록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엘리엇은 사실 공모전 결과에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안리체가 한마디를 했다.
“엘리엇, 그렇게 다리를 떨고 있어도 발표 시간이 당겨지지는 않는단다.”
“그, 그래도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발끈한 엘리엇이 와락 목소리를 높였다.
안리체는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뭐야, 관심 없는 척하더니?”
“그, 그게……!”
말문이 막힌 엘리엇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곁에 앉은 릴리아나가 엘리엇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너무 긴장하지 마, 잘 될 거야.”
“릴리아나…….”
엘리엇이 감동이 가득 찬 눈동자로 릴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릴리아나밖에 없어!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네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장난을 치신 걸 거야.”
“…….”
……릴리아나밖에 없다는 말, 취소.
쟨 어머니 바보도 아니고, 기승전 어머니라니까.
엘리엇은 뚱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