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10
10화. 비현각에서 이향 (2)
불경한 잔소리와 달리 권가 나인은 제법 공손한 자세로 문가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이 냄새는!’
이향이 코를 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넌 이만 나가보거라.”
이향은 일단 시중드는 내관을 내보냈다.
내관이 문을 닫자마자 이향은 쯧, 혀를 찼다.
“다른 여인들과 다를 줄 알았더니.”
사향 냄새 폴폴 풍기는 향낭까지 매달고, 이 야심한 밤에.
“가서 부부인께 전하거라. 내가 그 자개함을 내린 건 가여운 빈의 혼을 추모하고 부부인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지, 나인 따위를 이따위로 꾸며 들이밀라는 뜻이 아니었다고!”
부부인은 세자빈 권씨의 친정어머니 해령 부부인 최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윤서가 다락방에서 발견한 목함은 이향이 딸을 잃은 장모를 가엾게 여겨 내렸다는 뜻이었다.
아하, 그래서 그 함이 우리 집에 대대로 내려와 이 사단을 만들었구나.
“진성(鎭星)은 언제 또 밝게 빛납니까?”
“?”
“며칠 전 진성이 밝게 빛나고 흔들려서 홍······.”
‘홍위’라고 습관처럼 말하려던 윤서는 ‘호흠’ 어색한 기침 소리로 수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진성이 흔들려서 뭔가 조짐을 느끼시고 원손 아기씨를 보러 달려오시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그 별이 또 언제 환하게 흔들리는지 알아야 합니다.”
별로 가능성이 많아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설사 돌아간다고 해도 육체는 벌써 장례를 치르고 선산 부모님 곁에 묻혀 심각하게 부패가 진행되었을 것 같지만, 윤서는 진성이 흔들리는 날에 가락지를 가지고 다시 실험을 해볼 요량이었다.
“왜 그걸 묻는 거냐?”
“그것이 제가 겪은 기이한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기이한 일?”
“이 가락지.”
윤서는 향냥 안에 넣어온 금가락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목단 자개함에 함께 들어 있었던 자모기세하총총(慈母棄世何怱怱) 만시까지. 모두 돌아가신 세자빈께서 제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눈빛이 단번에 험악해지며 이향의 이마에 핏줄이 불뚝 튀어나왔다.
“믿기지 않으실 말이라는 거, 잘 압니다.”
윤서는 침착하게 말하며 무릎걸음으로 세자에게 다가갔다.
“다가오지 마라. 죽고 싶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로 관심을 끌어놓고 기어이 몸으로 들이대려 한다고 오해한 이향이 살벌한 어조로 경고했다.
“보여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보시고 나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또, 또!
다른 나인들 같으면 가슴골이 잘 보이도록 엎드려 교태 섞인 목소리로 ‘송구하옵니다.’ 싹싹 빌며 눈치를 살필 터인데.
저 권가 나인은 태연하게 걸어와 서탁 위에 놓인 붓을 묻지도 않고 집어 들고 빈 종이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이 요물을 당장 끌어내라’ 소리치려던 이향은 대체 무얼 쓰는지 보기나 하고 내쫓자고 종이를 쏘아 보았다
권가 나인이 붓을 움직였다.
글씨가, 참······.
안평 대군과는 다른 격을 가진 명필가인 이향의 눈에 지렁이 기어가듯 한심한 글자가 나타나는데······.
“···어, 어?”
세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랏말ᄊᆞ미 듕귁에달아]“너, 너, 이게, 이게 무, 무엇······!”
태어나 처음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이러시면 세자빈께서 제게 가락지를 주셨다는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훈민정음의 시작 부분.
아직 한글 창제를 발표하기 전이란 것을 박 상궁에게 물어 확인했던 윤서는, 이걸 보여주면 이향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네가?”
“더 쓰면, 믿어주시겠어요?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시고 계신, 백성을 위한 글자 말입니다.”
이향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우리 조선의 언어에 알맞은 문자를 만드는 것은 주상 전하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고 지식을 독점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이 극렬히 반대할 것을 아시는 까닭에, 전하는 우리 문자 창제를 세자와 수양 대군, 안평 대군, 광평 대군, 정의 공주 등과만 극비리에 진행하고 계셨다.
이제 겨우 자모를 정하고 문자 조합을 정하는 단계인데.
아직 다 완성이 되지도 않은 글자를 권가 나인이 능숙하게 써 보이다니!
이향은 도깨비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윤서는 붓을 놓고 세자의 눈과 시선을 맞춘 채 흔들림 없이 고했다.
“진성이 밝게 빛나며 흔들리는 날, 세자빈께서 꿈에 나타나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장차 우리 아기씨와 또 세자 저하께 닥칠 일들을 보여주시며, 아기씨를 지키겠다는 언약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징표가 이 가락지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설명이었다.
“그러니 또 진성이 밝게 빛나고 흔들리면 제게 또 무슨 말씀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알려달라고 청하는 겁니다.”
윤서는 이렇게 연막을 쳤다.
그러나 이향은 정신이 온통 혼미해 진성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 홍위를 지킬 아이를 보내었어요!
소리친 세자빈의 말을 꿈에서 들었다 해도,
그 외침 때문에 장호원에서 40리 길을 단숨에 달렸다 해도,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극비 글자를 권가가 알고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이 저 나인 따위에게 가락지를 준다는 것이 참말인가.
혼돈에 휩싸인 채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거리던 이향이 겨우 질문을 던졌다.
“···또, 무엇을, 보여, 주셨느냐?”
“지금처럼 홀로 계실 때조차 꽁꽁 싸매고 밤낮으로 과로하시다가, 종기가 크게 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저하를요.”
“······!”
이향은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새벽에 갖춰 입고 문후를 들었던 그 복장 그대로였다.
언제나 이렇게 반듯하게 입어왔거늘, 갑자기 켜켜이 껴입은 옷들이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또?”
“저하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어 어린 아기씨가 보위에 오르시자 대군들이 왕권을 탐내 역모를,”
“무엄하다!”
조금 설득되어가던 이향이 얼굴이 대번에 살벌해졌다.
“형제들의 우애가 깊거늘. 네 감히!”
하! 저하, 세자 저하!
“왕가의 우애가 어떠한 것인지는 선대왕 때 보시지 않았습니까? 고금 왕실 황실의 역사의 태반이 형제와 부자의 피로 얼룩진 것도,,”
“그만!!”
이향이 서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벼루가 들썩이며 서탁 위에 먹물을 뿌렸다.
그러나 윤서는 굴하지 않았다. 굴할 수 없었다.
내 미래니까! 당신 부인이 저지른 이 개 같은 일에, 또 우리 홍위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말하지 않는다고 닥쳐올 미래가 없어집니까?”
윤서는 목표를 에둘러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가락지에 대해 캐묻겠다고 할 때, 그리고 세자의 침수를 들라고 목욕을 시킬 때 결심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이용해 역사를 바꾸기로.
“너!”
소리치던 이향이 입을 꾹 닫고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권가 나인의 말이 심중 깊숙이 꾹꾹 눌러둔 불안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너무도 잘난 형제들에, 아직은 너무도 어린 홍위.
혹여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홍위는 어찌 되고, 우리 조선은 어찌 되는가.
조선이 건립된 지 막 오십 년,
태종께서 수많은 피로 기틀을 세우시고,
아바마마께서 찬란한 문물을 만드시며 겨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일찍 죽게 되어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
그간 태종과 부왕께서 만들어낸 찬란한 업적과 인재 모두 다 사라지고 말지 모른다.
“엄 상전, 들라!”
한참 침묵하던 이향이 갑자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예, 저하. 소인 대령하였습니다.”
문이 열리고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엄 내관이 들어왔다.
“지금 강녕전에 가서, 대전 내관에게 내일 아침 아바마마께 독대를 청한다 전하거라.”
문가에 읍하고 서 있던 엄 내관이 놀란 눈으로 권가 나인을 찾았다.
놀랍게도 권가는 책상 옆에 서서 붓까지 쥐고 있었다.
‘글자까지 쓰게 허락하시다니,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나 보군.’
세자가 임금을 뵙고 권가 나인에게 후궁 품계를 내려주십사 청할 것이라고 오해한 엄자치는 일단 만류했다.
“···저하, 품계는 천천히 내리셔도 되옵니다.”
터무니없는 오해에 이향이 발끈했다.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예, 예. 소인 물러가옵니다.”
아니라는 데도 엄 상전은 어서 양 귀인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나는 듯 물러갔다.
‘품계라니. 엄 내관은 인지 편향이 심하시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현실 인식을 왜곡하는 인지 편향이 심해서는 우리 홍위를 위해 큰 시야를 가지기 어려운데. 그러니 후궁 따위로나 써먹겠다는 하수에 집착하겠지.
“한 가지만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향낭부터 떼어 내놓고, 저리 멀리 떨어져 앉거라.”
이향이 윤서를 거칠게 밀어냈다.
향낭 속 사향 냄새는 이향의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자꾸 권가 나인의 몸에 시선이 갔다.
가늘고 긴 목선, 어깨부터 허리까지 날렵하게 떨어지는 저고리 속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이 선명하게 그려지며, 과도한 업무와 부왕과 노신들의 기대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까맣게 잊고 살던 육체의 욕망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저도 머리가 아팠는데, 잘 되었습니다.”
본래 사향이나 최음제의 냄새는 여인보단 남성에게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윤서는 태평하게 문으로 걸어갔다.
“······!!”
들끓기 시작한 이향의 시선이 치마 아래 흔들리는 둔부와, 그 아래 필시 탄탄하게 쭉 뻗어있을 다리를 훑었다.
윤서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이향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하고 태연하게 문을 열고, 저고리 깃에 달린 향낭을 떼어내 반지만 손에 쥐고, 문밖으로 내려놓았다.
“크흠.”
윤서가 뒤를 돌자 이향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스물아홉 생애를 고귀하게만 살아오면서 처음 겪는 혼란이었다.
윤서는 다시 책상 근처로 와 공손히 꿇어앉았다.
이향이 어디 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원손 아기씨를 동궁에 거하게 하셔야 합니다.”
윤서는 오늘 동궁에 온 진짜 목적을 꺼내 놓았다.
“···양 귀인이 우리 홍위를······?”
잘 못 모시느냐.
자식의 일에 이향의 머리가 번쩍 깨어났다.
“아뇨. 양 귀인이 아기씨를 잘 못 모셔서가 아닙니다.”
양 귀인은 계속 홍위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윤서는 양 귀인이 신빈과 살벌하게 말싸움하는 환경을 부러 고하지 않았다.
“원손 아기씨가 특정 후궁의 처소에 머물면 공연한 시기와 질투, 원망을 받게 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원손 아기씨가 양 귀인의 보살핌을 받으면 아기씨를 돌보지 못하는 다른 후궁들이 양 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원성은 결국 아기씨에 대한 반감으로 확대되지요. 인간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자신의 부족함보단 그 대상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폄하하는 걸로 위안을 삼는 존재입니다, 저하.”
총애를 받고 싶은 대상에게 외면당한다는 소외감이 들면 그 대상이 딱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솝 우화의 신포도처럼.
“···그러한가?”
이향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