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천추전에서 세종과 이향 (1)
파루가 울린 후 이향은 잘 익은 앵두가 든 그릇을 들고 천추전으로 향했다.
봄이면 동궁전을 분홍색 꽃으로 환하게 밝히는 앵두나무는 세자의 지극한 효심의 상징이었다.
유난히 앵두를 좋아하는 세종을 위해 이향이 직접 심고 정성스럽게 가꾼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서책에 낯선 부호가 적힌 종이가 어지럽게 놓인 방, 이즈음 세종께선 병환을 핑계로 이곳 천주전에 틀어박혀 새로운 문자 창제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이향이 잘 익은 것들로 골라 바친 앵두를 만족스럽게 우물거리고 씨를 퉤퉤 쟁반에 받고 난 후 세종께서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비가 두 가지를 함께 던지지 않았느냐? 그러면 저들은 남면(南面: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죽어도 안 된다고 반대하기 위해 신(臣)이라고 칭하란 것은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다. 명심하거라, 향아. 두 개를 던져.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것이 있으면 그보다 더 센 것을 함께 던지면 된다.”
온양 행궁에서 돌아온 후 세종은 병권과 인사 임명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군주의 권한을 세자에게 넘긴다고 공표하였다.
세자는 임금처럼 남쪽을 보며 앉아 정사를 살피고, 신하들은 모두 임금에게 하듯 세자에게 신(臣)이라 칭하며 예를 갖추라는 어명이었다.
이향에게 완전히 권한을 넘기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였지만, 선대왕 태종이 선위를 가장해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던 전례를 기억하는 신하들은 혹시 순진하게 찬성했다가 역시나 칼날을 맞을까 봐 연일 불가함을 외치며 상소하고 있었다.
“난 이 글자를 완성할 시간이 필요하다. 향이 너 또한 너의 인재들을 키울 시간이 필요하고. 나의 사람도 나의 시대도 너무 늙지 않았느냐?”
앵두를 또 한주먹 집어 입에 넣고 붓을 들며 세종이 말했다.
간밤 급하게 독대를 청한 것이 남면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세자가 한발 물러나려 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었다고 생각한 세종은 붓으로 비읍(ㅂ)을 그리고 그 밑에 이응(ㅇ)을 붙인 후 앵두 머금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향은 평상복에 얇은 도포만 걸치고, 갑갑하다고 상투도 틀지 않고 긴 머리를 대충 등 뒤로 내려 끈으로 묶은 부왕을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봉꾼처럼 흐트러진 옷차림에도 아바마마께선 제왕의 위엄 한자락은 놓지 않으신다.
‘그냥 돌아갈까.’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자신은 피부처럼 자연스러워진 ‘효심 깊은 세자 이향’을 지속할 수 있다.
아바마마께서 사랑해 마지않는 열다섯 명의 잘난 동생들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을 수 있고 그리하여 성군 아버지의 업적을 성공적으로 이어받은 성군이 될······.
수 없다고, 권가가 말했지.
나는 일찍 죽고 그리하여 홍위는 삼촌들에게 척살당하고, 아버지의 신하들 절반이 쓸려나가고, 결국 잔혹스럽고 탐욕스러운 것들만 남아 조선을 이끈다고 하였지.
몰랐으면 모르되,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비극을 듣고서도 방비하지 않는 것은 사직 앞의 죄인이니.
“전하, 신 조선국 세자 이향, 전하께 청이 있습니다.”
이향이 입을 떼었을 때는 마침 세종께서 앵두 우물거리던 입술을 모아 순경음 ‘브’ 발음을 하신 찰나였다.
그래서 이향이 ‘아바마마’라 칭하지 않고 신하된 이를 자처했다는 것에 깊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응? 말하거라.”
“내년 초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하.”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란 세종이 아직 과육이 절반 이상 남아 있는 씨를 퉤퉤 뱉으며 아들의 의도를 헤아릴 시간을 벌었다.
“···세손은 원래 소학을 읽을 수 있을 때인 여덟 살에 책봉하지 않느냐? 우리 홍위는 이제 겨우 세 살인데······.”
아들은 늘 한발 앞서 어심을 헤아려 원하는 바를 말해주곤 했다.
그래서 세종은 부러 말을 길게 늘이며 내키지 않음을 표명했다.
그러나 오늘 이향은 잘 익은 앵두의 보기 좋은 색깔과 너무나 달랐다.
“이리 일찍 세손 책봉을 청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결국 세종이 먼저 물었다.
“원손의 입지를 강하게 세워 사직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
세종이 붓을 놓고 이향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자애로운 아비에서 말 한마디에 바로 조선의 지존, 만백성의 군주로 돌아간 냉혹한 시선에도 이향은 흔들림이 없다.
“원손의 거처도 동궁으로 옮길 것입니다. 원손이 밖에 있으면 원손의 거처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갈등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공연히 원손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무리가 생겨납니다.”
“···중궁전에서 있던 일을 들었구나. 하지만 향아, 사내 애들 사이의 자잘한 싸움이 아니었느냐? 세상 자애로운 너도 클 때 몇 번 수양과 또 안평과 주먹질을 해서 이 아비한테 함께 혼나기도 했었고.”
세종은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감을 잡고 아들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이향은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씀드렸다.
“내년에 네 살이 되면 세손강서원을 꾸려 최고의 스승을 세손에게 붙이고, 또한 명문가 또래 자제들 대여섯을 배동으로 선발해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싶습니다.”
“······.”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촛불이 환히 밝혀진 천추전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세자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고 대리청정까지 명하였지만 아직은 군주인 아버지와.
많은 것을 물려받고 신하들까지 다스리고 있지만 그중 그 어느 것도 온전히 제 것이 아닌 세자.
지금의 군주와 장차의 군주만이 오롯하게 독대한 공간 속에서 무언의 언쟁이 치열하게 오갔다.
뻣뻣한 침묵이 일각이나 지속되었다.
어디선가 때 늦은 수탉이 꼬끼오오 와야 할 새 날을 알렸다.
“이 글자 말이다. 거의 다 완성이 되어가는데 언제 반포하는 것이 좋겠느냐?”
천추전을 지배하던 격렬한 침묵은 결국 세종이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면서 파사삭 깨졌다.
“손도 떨리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아. 어떠냐?”
종이 위에는 손이 떨려 형편없이 흔들린 ‘왕권’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때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거인처럼 보이던 부왕께서 저리 나약해지시다니. 세월이 이렇게나 흐르다니.
“···잘, 쓰셨습니다, 아바마마.”
이향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답을 올렸다.
흑, 울음을 참는 숨소리에 세종이 허연 눈썹을 찌푸렸다.
“너, 또. 눈물 짜려고 그러지? 그만 해라. 그만 해. 홍위도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툭 하면 울 것이야. 네가 그렇게 마음이 물러 터지니, 응, 다들 홍위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냐.”
타박하는 세종은 다시 자애로운 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아바마마께서 양녕 백부님을 한없이 감싸시는 것을 보고 배웠겠지요.”
서로의 너그러움을 타박하는 두 부자의 얼굴엔 그러나 근심이 짙었다.
홍위를 정식으로 세손으로 책봉하게 되면 그간 묻어두었던 문제와 갈등이 표면으로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자손이 많은 것은 큰 복이면서도 동시에 대흉이기도 했다.
일평생 세자에서 밀려난 큰형님 양녕 대군을 죽이라는 압박을 물리쳐야 했던 세종은 아들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를 너무도 잘 알았다.
게다가 아들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너무 출중했다.
여러 궁녀를 후려대는 만행으로 벌써 두 번이나 대군 직을 박탈당했던 임영 대군만 제외하고 수양이든 안평이든 그 누구를 세자로 세워도 부족하지 않을 동복 형제들이 세자에겐 너무 많았다.
온갖 기행으로 폐세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양녕과 일찌감치 불법에 뜻을 둔 효령을 형제로 둔 자신의 처지와 너무 달라서 아비로서는 기쁨이나 왕실과 국가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근심이라는 걸 두 사람이 제일 잘 알았다.
그렇지만 한 사람은 아비이고 또 한 사람은 형인 까닭에 그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종께선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새로운 글자를 화제로 그 첨예한 갈등을 슬쩍 피해 아들에게 답을 내렸다.
“세손 책례 도감을 세워 진행하거라. 세손을 세우는 것이 우리 조선의 개국 이래 처음 아니냐? 이번에 겸사겸사 절차를 상세히 세워야 할 것이야.”
“도감 도제조를 누구로 세울까요?”
“누구로, 하고 싶으냐?”
세손 책례 도감을 이끌 도제조는 그 상징적 의미와 실질적 역할이 컸다.
책봉 절차에서부터 세손의 교육을 담당할 스승을 뽑고, 함께 학문을 배우며 우정과 충성을 키워갈 배동을 어느 가문에서 선발할지까지 밀접하게 관여한다.
또한 유사시에는 세손을 보호하고 지켜내야 하는 인사이기에 왕실에서 미래의 군주를 지킬 이로 누구와 어떤 세력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를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가진 자가 돌변하여 어린 왕을 끼고 제왕 노릇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망탁조의(莽卓操懿,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처럼 국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에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했다.
이향은 영의정 황희의 이름을 말하려다 흠칫, 입술을 닫았다.
– 저하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린 아기씨가 보위에 오르시자 대군들이 왕권을 탐내 역모를!
권가 나인의 경고가 이향의 귀에 쟁쟁 울렸다.
‘황희 대감은 너무 늙었어. 파당을 짓지 않고 오로지 군주를 보필하는 데 마음을 다하나 장차 우리 홍위를 지킬 정도로 오래 살 수 없는 늙은이니.’
아들을 지켜야 한다. 내 잘난 형제들에게서 내 어린 아들을.
이향의 손이 슬그머니 방석을 거머쥐었다.
그 손의 움직임을 침침한 눈으로도 세종은 놓치지 않았다.
정녕 피해갈 수 없단 말인가.
하아. 한숨이 새나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이향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며칠 살펴 아뢰겠습니다.”
“그래, 우리 홍위를 위해, 모두를 위해, 신중하거라.”
“예, 아바마마. 그리고, 저 글자 말입니다.”
이향은 망설이다가 결국 여쭈었다.
“혹시 권가 나인에게 가르쳐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권가 나인? 엊그제 홍위를 위해 맹렬하게 수양의 부인과 맞서던 그 맹랑한 보모 나인 말이냐?”
“예, 아바마마. 하온데.”
이향은 망설이다 다시 빠르게 아뢰었다.
“그 아이가 저 글자를 압니다, 아바마마. 그것도 아주 능숙하게 저보다 더 잘 압니다.”
“그 아이가?”
놀란 얼굴로 기억을 되짚던 세종은 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하고 교통이 있었던 게지. 여달이가 원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홍위랑 잘 놀지 않았더냐?”
새로운 글자의 창제는 세자와 대군들과 함께 산학에 밝은 정의 공주도 참여하고 있었다.
정의 공주의 첫째 아들 안여달은 워낙 부산스러워서 궁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세종은 홍위를 위해 용감히 나서던 나인을 생각했다.
“그 아이는 신기한 말도 하더구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이에 따라 다르다고 하던가. 그걸 ‘연령별 사고 능력’이라고 하더구나.”
그 신기한 머리통 속에 또 무슨 지식이 더 들어 있는지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제게는 ‘피부가 숨을 쉴 시간을 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옷을 겹겹이 싸 입고 있으면 피부가 숨을 쉬지 못해 종기가 나기 쉽다면서요.”
그 종기 때문에 급사하게 된다고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올리지 않았다.
뭔가 권가 나인을 생각할 때마다 강렬하게 제 색채를 펼쳐 보이던 강렬한 눈동자가 생각났고, 그럴 때마다 또 부쩍 갈증 같은 조급함과 ‘때 이른 죽음’에 따른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내 곧 그 아이를 곧 불러 보아야겠다. 홍위도 함께 불러서 이 글자를 가르쳐 볼까? 세 살 아이도 쉽게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문자를 만든 목표가 아니었느냐?”
“홍위가 천자문을 거의 다 외웠다고 합니다. 그 오만한 성삼문이 자신보다 더 학재(學才)가 있다고 칭찬할 정도니, 이 글자는 며칠이면 배울 것입니다.”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환해진 아들을 세종이 물끄러미 보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팔불출.”
“아, 송구합니다, 아바마마.”
서둘러 사과하는 아들을 보는 세종의 눈이 복잡해졌다.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형제의 배척으로 이어질까 두려운 까닭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곧 이어진 말에서 확인되었다.
“전하, 지금 기근이 심하여 조만간 기우제를 지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굶주림에 지쳐 집과 땅을 버리고 팔도를 떠도는 백성이 많으니, 팔도 전역에서 바쳐야 할 공물을 당분간 대폭 감하도록 명하겠습니다.”
지배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도 의도를 담지 않은 말이 없다.
다시 침묵이 내렸다.
세종도 입을 열지 않았고 이향도 불편한 침묵을 완강한 침묵으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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