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이향 시대의 서막
“다만 나 또한 선왕 태종의 선례를 받들어 신왕(新王)의 치세를 물심양면 뒷받침할 것이다.”
“······.”
“······.”
“······.”
긴장된 침묵 속에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임금의 의중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서였다.
태종은 양위를 하고도 군권과 인사권을 쥐고 있었다.
세자 책봉 두 달 만에 갑작스럽게 양위를 한 이유가 원래 새로 세자가 된 세종께서 명나라에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기로 한 일 때문이었다. 북경까지 오가는 길에 해를 당할까 하는 염려와, 막 폐세자된 양녕 대군 이제의 세력이 그 틈을 타 일을 꾸밀까 하는 우려에서 태종이 빨리 양위를 결정하셨다는 걸, 누구보다 세종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실상 태종께서 승하하시기까지 온통 상왕의 신하들로 가득 찬 조정에서 세종은 왕이되 왕이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때처럼 폐세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자 저하의 대리청정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거늘, 군권과 인사권을 쥐고 계실 것이라면 왜 구태여 지금 양위를 하신다는 말씀인가.’
신하들의 의문은 뜻밖의 말씀으로 해소되었다.
“일찍이 선왕께서 내게 보위를 넘겨주실 시기가 마침 개성에서 한양으로 환도할 때였다. 그 때 인정전의 역사가 백성에게 고되고 힘들어 잠시 중지하자는 청이 많았으나 태종께오선 백성의 원망은 모두 다 당신께서 지셔야 한다며 공사를 다 마무리하도록 재촉하셨다. 그렇게 완성을 보신 후에 내게 보위를 넘겨 주셨지. 백성의 원망이 있더라도 꼭 필요한 일은 마무리하되,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원망은 태종 당신께서 받으시고 신왕은 새로운 희망 위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 그것이 바로 태종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군왕의 마음이고, 또 아비의 마음이다.”
세종의 눈이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이향에 가 닿았다.
마침 고개를 든 이향과 세종의 눈이 맞부딪쳤다.
세종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시고 미리 합의한 공표를 이어갔다.
“하여 나는 교육과 종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정비하는 분야에 남은 여생을 헌신하며 우리 신왕의 치세를 뒷받침할 것이다. 이 분야가 여러 세력의 이해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상충하며 부딪칠 분야이기 때문이다.”
“···교육이라 하시면, 지금의 성균관과 지방의 서원, 기초 학당 외에 별도의 것을 더 세우실 것이란 말씀이옵니까?”
예조 판서 김종서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그러하다. 왕실 주관 하에 다양한 종류의 학당을 전국 방방곡곡에, 나아가 여진의 땅에까지 세우고 다양한 기술인을 양성할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은 유교적 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기본 유교 소양과 더불어 나라의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실무 지식을 함께 교육할 것이다.”
“하오나 조선은 일찍이 상국을 섬기고 성리학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농본주의를 근간으로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을 국시로 하여,”
“그 성리학은 분명 인의를 밝히는데 훌륭한 가르침을 주나, 과연 그 인의가 실제 생활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전하!”
“전하!”
여러 신하가 전하를 불렀지만 세종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입으로 성현의 가르침을 논하고 경서를 인용하던 이들이 실제로 어떠하였는가.
그 끝을 알게 되자 군주는 성학(聖學)을 공부하여 성인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요구, 또 신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 기질지성(氣質之性), 도심(道心), 인심(仁心), 천리(天理), 인욕(人欲)의 문제를 깊이 궁구하고 성찰하여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성리학적 세계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한가지 이념이나 종교만 절대적으로 숭앙하는 나라는 여지없이 더 많이 교조적으로 경직되었습니다. 불교가 흥한 고려에서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었던 것처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종교가 잔혹하게 이방인을 죽이고 배척했으며 그 종교의 주교들은 대개 교회의 권력을 두고 다투는 또 다른 정치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카톨릭이란 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지배한다는 저 먼 나라를 말하며 윤서가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 끝에 며칠 동안 다양한 지식을 적어내느라 굳은 살이 박히기 시작한 손가락을 주무르며 권윤서는 또 말하였다.
“도덕성이나 인격적 수양 등 추상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는 오히려 그 훌륭한 덕성이 모두 다 상대를 비난하는 인격 모독적인 언어로 변질되기 쉬운 듯합니다. 조정 일은 조정 일의 성과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난해야 하는데, 객관적인 측정이 불가능한 도덕성으로 ‘소인’이니 ‘간신배’니 하며 상대를 비난하면 결국 감정적 앙금만 남아 서로 죽고 죽이는 바까지 돌이킬 수 없이 나아갑니다.”
권윤서의 말은 분명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을 엿본 자의 통찰이자, 세종 자신이 조정을 이끌면서 느껴온 갑갑함의 원인을 알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나는 미래를 엿보는 기이한 중전과 함께 실용적인 지식 체계를 세워 북쪽으로 또 저 먼 호주로 뻗어나갈 장차의 치세를 뒷받침해야 한다.’
이것이 세종께서 상왕으로 물러나기로 결심하신 이유였다.
새로운 지식 체계와 지식 집단을 만드는 일은 달리 말하면 지금의 지식 체계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지배 집단을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 과업의 조력자가 되어야 마땅히 되어야 할 신하들을 하나씩 살피며, 새로이 가지게 된 신념을 설파하셨다.
“나는 그간 각 분야의 주자가례적 의례를 정교히 하는 것에서 성리학 구현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여 왔다. 그러나 실상 깊게 생각하니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것은 이전의 망가진 고려와 다른,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지 성리학을 섬기기 위해 나라를 재편하겠다는 취지가 아니었다.”
“!”
“!?”
군권이나 인사권이 아니다.
재위 기간 내내 유교적 통치 이념을 엄격한 절차의 의례로 구현해내는 데 집중했던 국왕이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통치 이념을 그 근간부터 다시 살피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한 성리학과 농본주의를 국시로 하는 조선의 근간을 그 뼈대부터 새로이 세우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였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 성과를 요구하시는 왕 때문에 고단하게 일을 했거늘,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익혀 하라고 하시면.’
늙은 나는 이제 은퇴하란 말씀이신가.
이런 기대를 하며 황희는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사십 대 중반에서 아직 오십 대, 육십 대 초반인 다른 신하들은 달랐다. 이제 한창 전하께서 원하시는 국가 경영이 무엇인지 감을 잡고 뜻을 펼쳐나가던 신하들은 전하께서 새로이 요구하시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보위에 오르신 후 전하께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신실하게 백성을 위한 배움과 통찰을 멈추지 않으셨음을 저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신 등도 미욱하나마 모든 충정을 다해 전하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애써왔습니다. 앞으로도 신을 비롯한 저희 조정 신료의 충심은 변함이 없을 것인데 구태여 양위를 하시고자 하는 뜻을 어리석은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좌의정 하연이 고하였다.
속뜻은 그러니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마시고 명쾌하게 알려주시고 직접 이끌어주옵소서 하는 청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당장 설명하고 싶지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혹은 어디까지 가르치고 변화시킬 것인지는 윤서가 가진 모든 미래 지식을 전수 받은 후에야 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은 다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장차 알게 될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왕의 치세가 이제까지와 아주 다를 것이니, 경들은 온 힘을 다해 새 왕을 보필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세종은 모든 신하를 물러가게 하였다.
임금께서 부르시는 소환패를 받고 연희궁에 왔던 신하들은 가마와 말을 타고 돌아가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전하 밑에서 오랫동안 조정 일을 이끌어온 실력 있는 관료들이면서도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자 들어 화폐의 제작과 유통에 대해 명쾌한 실행안을 제시하셨고, 또 두창 예방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셨으며, 명의 칙사에게 다리와 도로의 건설법을 가르쳐 줄 것을 의뢰하신 것, 작첩이 몰수된 수양 대군을 저 먼 나라에까지 보내서 유황, 동, 초석 등을 사오게 하시는 것을 보면.’
신왕이 앞서 이끌고 상왕이 뒤에서 뒷받침할 미래는 이제까지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란 점은 확실하였다.
*****
“연희궁은 너무 멉니다, 아바마마. 창덕궁에 거하시지요.”
신하들이 모두 돌아간 밤.
차 상을 앞에 두고 앉은 이향이 세종께 권하였다.
“그리고 여기 연희궁은 여름이면 뱀과 전갈이 많아 위험하지 않습니까? 창덕궁은 후원에 숲도 깊으니 아바마마께서 홍위와 몸을 단련하시기도 좋습니다.”
“상왕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다른 마음을 먹는 자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태종께서도 여기 연희궁에 계시다가 또 포천의 행궁에 계시다가 하신 것이야.”
“···실은 윤서 때문이기도 합니다.”
“윤서가, 왜?”
“아바마마께서 의문이 생기실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윤서를 호출하실 터인데 윤서가 그때마다 여기 연희궁까지 오려면 너무 번잡하지 않습니까?”
“하!”
세종께서 ‘이런 팔불출을 보았나’ 하는 표정으로 세자를 보셨다.
그러나 이향은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하루 두 시진(4시간) 이상 윤서를 잡아두시지 마옵소서. 아직 금똥이가 어려서 돌봐야 하고, 홍위도 여전히 윤서의 손길이 많이 필요합니다. 희아도 내심 윤서 곁에서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고요. 제가 즉위하면 중전이 되어 내명부 일도 살펴야 하는데, 거기에 또 지금 아바마마께서 전국에 여러 종류의 학당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내수사의 내탕고에서 일단 내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까지 윤서더러 관리하라고 하시니, 지금 윤서가 몸이 다섯 개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
세종께서 생각해 보시니 일이 많기는 많았다.
게다가 여기 연희궁에서 와서 보니 윤서 얼굴이 홀쭉하게 살이 내렸고, 또 금똥이가 부쩍 윤서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모양이 에서 말한 ‘분리불안’의 초기 증세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는 일이 많은데 언제 또 여기 연희궁까지 왔다 갔다 하겠습니까? 창덕궁은 걸어서도 이 각이 안 걸리니 훨씬 수월합니다.”
“···그래. 그러면 너 보위에 오른 후 창덕궁으로 옮기마.”
“그리고 아바마마. 너무 마음 쓰지 마옵소서.”
“!”
이향은 세종께서 광평 대군 외에 다른 자식들을 보지 않으시려 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기에, 먼저 역사를 알게 된 자로서 위로를 올렸다.
“신하는 결국 강한 권력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 일은 고금의 왕가에 늘 있어 온 권력 다툼일 것입니다. 제가 아바마마처럼 오래 살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오니, 부디 심려 거두시옵소서.”
오래 살면 될 일이다.
그 말이 세종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세자는 실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자식이자, 뒤를 이를 군주로서 엄격한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자식이었고, 어떤 때는 권력을 두고 다투는 잠재적인 경쟁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살뜰한 애정을 잊고 있었는데.
세종은 윤서가 왜 때로 세자와 홍위를 애달픈 시선으로 담는지 비로소 이해하였다. 그것은 언제 잃을지도 모를 존재에 대한 가슴 저미는 애정이었다.
눈물이 고이는 눈을 애써 감추며 세종께서 물으셨다.
“왕이 되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할 것이냐?”
“내년에는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시작할 것이고, 전문 군관 학교를 한양에 만들 것입니다. 이 학교의 인재는 무재와 학식을 겸비한 자들로 선별할 것이온데, 여진족 청년들까지 포함할 것입니다.”
“그래, 윤서가 말하길 오스만이라는 나라는 정복한 곳엔 어디나 학당과 도서관, 공공 건물부터 번듯하게 세워 그곳의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미래의 인재로 키워낸다고 하더구나. 이제 우리도 여러 여진 부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하지 말고 학당과 도서관을 번듯한 건물로 지어주고 글자와 기초 학문을 가르쳐서 우리 조선에게 자연스럽게 복속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 그래서 건축술을 익힐 인재들을 군기시에서 뽑아 칙사가 돌아갈 때 딸려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필요한 분야의 인재들도 보내거라. 배 짓는 인재들도 보내고.”
세종과 윤서는 다음날 경복궁으로 환궁하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향의 치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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