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선천적 왕족과 후천적 왕족의 격돌 (1)
“나인으로 지엄한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처음이라 여러 우려가 있습니다만, 어린 나이에도 다방면으로 워낙 능력이 출중한지라 참으로 기대가 되옵니다, 중전마마.”
선왕 태종에게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래 총애를 받은 신빈 신씨의 장녀 정신옹주가 윤서를 힐끗 훑은 후 소헌 왕후에게 웃으며 고하였다.
마침 저 아래 공연대에서 연꽃 봉오리 세 개가 타악, 두둥, 악공의 박과 북소리에 맞춰 쩍 벌어지며 여악(女樂) 셋이 나와 빙그르 우아하게 도는 춤을 선보인 순간이었다.
‘드디어 시작인 건가?’
윤서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태연하게 앞에 놓인 약차 잔을 들어 빙긋거리는 입꼬리를 가렸다.
약점은 자격지심을 가진 이에게나 약점으로 작용한다. 희아와 홍위의 진실한 애착을 확인한 지금 윤서에게 상처가 될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그 여유, 계속 유지해야 해요. 이제부터 호의를 가장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신랄한 말의 향연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테니까.”
관례를 치르지 않아 긴 머리를 땋아 내린 여악 셋이 소매 끝에 늘인 오색 한삼을 우아하게 펄럭이는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정의 공주가 윤서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윤서의 동쪽에 앉아 있는 정의 공주의 입매가 가소롭다는 듯 비틀려 있었다.
단단한 판자를 쌓아 설치한 관람석의 배치를 보면 조선 상류층 내의 신분이 보인다.
뜰의 공연이 가장 잘 보이는 상석 중앙에 왕실의 지존 중전마마가 앉아 계시고, 그 옆에 정확하게 한 달하고 이틀 후 중전이 될 윤서가 앉아 있고, 옆과 뒷줄에 무품의 최고 신분인 여러 공주와 옹주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한 단 낮은 곳에 설치된 동쪽으로 임금의 후궁으로 정1품인 빈과 귀인이 대군의 부인인 정1품 부부인, 군의 부인인 종1품 군부인과 차례로 앉고 서쪽으로 남편의 품계에 따라 대부인, 국부인, 정숙부인 등의 작위를 가진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정의 공주가 예언한 대로 가장 상석을 점유한 태종과 세종 소생의 공주와 옹주들은 한층 우아해지는 춤은 건성으로 보며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야 세손의 목숨을 구한 것이 얼마나 큰 공인지 십분 공감하여 비록 나인 출신이라고 해도 세자빈으로 책봉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잖아요. 하지만 세간의 인심이야 어디 그런가요?”
이건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의 소생 정정옹주가 한 말이었다.
“그렇지요. 무엇보다 지엄한 왕실과 한낱 여염의 가문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닌데도, 앞으로 첩년에게 홀린 자들이 정실 부인을 몰아낸다고 할까 근심들이 크더이다.”
이건 세종의 후궁 상침 송씨의 소생 정현옹주가 한 말이었다. 정현옹주의 남편이 당대의 거부 윤사로로, 방납 비리에 걸려 귀양을 갔다가 최근 사면을 받아 겨우 돌아왔다. 게다가 윤사로는 고인이 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와 한집안 사람이었기에 정현옹주는 윤서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윤서는 아무 말도 없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신 소헌왕후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함을 곱씹었다.
‘나에 대해서야 그렇다고 치지만 중전마마께서 계신데 고작 옹주가 되어 어찌 저리 함부로 말들을 처하고들 계시는가.’
최고 상석에 앉아 거리낌 없이 말을 하고 있는 이들은 거의가 태종 소생의 옹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태종에게서 가장 큰 총애를 받아 자식도 3남 7녀나 낳고 원경왕후 민씨 사후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한 신빈 신씨의 소생 옹주들이 가장 거리낌 없이 말을 뱉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부부인 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제 곧 타고난 왕족들이 얼마나 오만한지 신물 나게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 이 광경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윤서는 비로소 왕족으로 태어난 여인과, 소헌 왕후나 자신처럼 혼인에 의해 왕족에 편입된 여인들 사이에 확연하게 존재하는 차이를 깨닫게 되었다.
공주와 옹주는 어릴 적부터 유모, 상궁, 나인에게 둘러싸여 고귀한 삶을 살다가 왕이 고르고 고른 명문가의 자제와 혼인을 올리게 된다. 공주로 책봉될 때 토지 850결, 옹주로 책봉될 때 토지 800결을 받고 노비와 궁까지 하사받아 살기에 시댁의 어른과 부딪칠 일이 없고 (실상 임진왜란 전까지 어지간한 집에서는 딸들은 친정에 계속 살고 사위가 와서 거하는 경우가 거의 다였으니 시집살이가 없는 것이 특별한 형태가 아니지만), 왕실이 두려운 남편은 노골적으로 첩을 두지 못한다.
그러니까 공주나 옹주는 축첩이 용인되는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말 그대로 ‘공주님’처럼 떠받들려 영화를 누리면서 남편을 독점하고 살 수 있는 예외적인 신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왕족으로 편입된 여인들은 고귀한 신분을 얻었으나 다른 후궁이나 첩과 남편을 나누어야 하고 언제든 총애를 박탈당할 수 있는 불안정한 처지에, 친정이 역모에라도 휩싸이게 되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어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니 공주나 옹주의 입장에서 보면 왕비, 세자빈, 왕과 세자의 후궁들, 대군과 군의 아내 등은 모두 태생이 자신들처럼 귀하지 않고, 여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 처지가 썩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타고난 신분에서 오는 오만이 오늘 제석 나례 연회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태어나길 잘 태어났다고 저렇게 오만하게 구는 것을 받아주어야 하는가.’
여기서 그냥 두면 두고두고 또 떠들며 왕실의 권위를 지속적으로 훼손할 것이다.
윤서는 소헌 왕후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슬며시 속삭였다.
“중전마마, 오늘 참석한 이들에게 나눠줄 왕실 선물이 동백 기름과 벌꿀, 진주 가루 등을 넣어 만든 최고급 미용 비누에, 마찬가지로 피부에 극히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각종 약재 추출물에 밀랍, 말 기름, 동백 기름 등을 주원료로 하여 만든 최고급 화장품입니다. 아류가 많이 생기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최고급 화장품과 비누를 만들어 파는 상점이 저와 박 상궁의 공동 소유임을 잊지 마옵소서.”
“···으응?”
소헌 왕후께서 이것이 무슨 의미냐는 듯 윤서를 바라보셨다.
윤서는 다시 소헌 왕후의 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요사이 밥술이나 뜬다 하는 집들에서는 아녀자들이 병이 나거나 출산할 때 때 모두 혜민국의 여자 의원과 의녀를 가정으로 부르지요. 또 옆에 계신 옹주 자가들처럼 재산이 더 많은 귀한 분들은 아예 혜민국 입원실에 상주하며 침이며 뜸, 안마 등의 온갖 치료 요법을 받기를 즐기는데, 혜민국 또한 왕실에서 관리하고 있고 의녀 관리는 제 소관이옵니다.”
“···으으응?”
하필 지존의 자리에 올랐을 때 친정이 역모로 멸문지화를 당한지라 시누이 격인 태종 소생의 옹주들이 함부로 혀를 놀려도 평생 구순하고 부드럽게 대하기만 해오신 소헌왕후께서는 윤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셨다.
그러고 보면 이 자리에서 중전마마 버금으로 신분이 고귀한 태종 소생의 적통 경성 공주, 정순 공주 등은 모두 입을 꾹 다문 채 점점 더 화려해지는 춤사위 감상에 집중하고 계셨다.
옹주보다 온전히 더 귀하나, 그 귀한 신분이 있기까지 어머니 원경 왕후께서 어떤 고통을 겪으셨는지 똑똑히 보았기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고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정의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정의 공주도 입매만 비틀어 오가는 대화를 냉소하다가, 윤서가 중전마마께 고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윤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평생 현모양처의 모습을 입어오신 소헌 왕후께 다시 고하였다.
“게다가 중전마마께서는 왕실에서 설립한 여학당의 책임자이십니다.”
“···윤서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니, 어마마마.”
윤서가 노골적으로 실마리를 드리는데도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시는 중전마마가 답답했는지 정의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헌 왕후 곁으로 왔다. 그리고 윤서와 소헌 왕후 사이에 끼어 속삭였다.
“저들의 막말을 전처럼 그저 참고 계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게다가 어마마마는 곧 있으면 이제 대비마마가 되실 것이고, 그러면 외가의 신원도 곧 이루어지실 것을요!”
“!”
소헌 왕후께서 눈을 크게 뜨시고 윤서와 정의 공주를 번갈아 보셨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이어 다시 속삭였다.
“해양 길이 개척되면 저 먼먼 곳에 가 새로이 땅을 일궈야 할 인재가 많이 필요해요. 전에는 죄를 지으면 땅이 좁은지라 궁벽하다고는 하나 대여섯 날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기껏해야 배로 하루면 가 닿는 제주에 가서 잠시 반성하는 척하다가 한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말 그대로 ‘천리길’로 떠나야 할 것입니다!”
“맞아요, 어마마마. 무례가 심해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세요. 늙어가면서 어째 더 저리 언행에 거침이 없어지는지, 원.”
어머니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본 정의 공주가 사납게 옹주 무리를 흘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
소헌 왕후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으나 침중하게 위엄 있던 얼굴에 한줄기 생동감이 더해졌다.
때마침 연꽃에서 나와 춤을 추는 정재 공연이 끝이 났다.
어둑어둑해져가는 뜰에 재인들이 입으로 화악 불을 뿜고, 줄 위에서 높이 뛰어오르고, 통 속에 들어간 소년이 어여쁜 소녀로 변신해 나오는 환술 등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나인들이 줄을 지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탕과 다양한 종류의 전, 향긋하게 데운 술을 내어왔다. 본격적인 요기 시간이었다.
이 시간 후에는 완전히 어두워진 뜰에서 처용무를 추고, 붉은 옷을 입고 탈을 쓴 아이들이 궐 곳곳을 다니면서 악운을 몰아내는 벽사 행위를 하게 된다. 그 동안 여기 연회장에서는 내외명부 여인들이 중전마마와 차기 중전인 윤서에게 차례로 예를 올리며 준비한 선물을 바치고, 마찬가지로 왕실에서 하사하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 후에는 경회루 앞에서 세 번 포를 쏜 후 제석 나례가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근정전에서도 나례가 열리는데 전에는 북방 여진족이나 남방 왜의 사신들은 따로 좀 추레한 장막에서 접대를 하였는데 올해는 굉장히 화려하다면서? 그렇게 차등을 두지 않은 거 참 좋은 안인 듯 해.”
꿩고기 육수를 내어 만든 탕을 먹으며 정의 공주가 윤서에게 속삭였다.
“사람은 본시 차별을 가장 서러워하지요. 전에는 명나라의 사신만 귀하게 대접했는데, 세자 저하께서는 이제 그러하지 않으실 계획이신가 봅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으니까요.”
“참, 그, 칙사 함평준이 이제 곧 돌아갈 터인데 돌아가기 전에 그 혼사 말이야. 혼사에 대해서 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아마도 유와 혼사를 맺을 모양이야. 유가 홀로 되었으니.”
“···그렇지요.”
한확의 누이 공신 부인이 명나라 황실을 통해 청해온 혼인에 대해서 마냥 답변을 미룰 수 없어서 근자에 세종과 이향이 고심을 하시는 중이었다.
이전이라면 수양 대군이 한확의 가문과 합쳐지는 것을 극구 막아야 했겠지만, 지금 천축국을 향해 가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시 유구국에 돌아와 있다는 수양 대군은 장차 호주 개척을 맡을 예정이었다.
이향은 전략적으로 수양 대군에게 이전 역사에서 그의 편에 섰던 이들을 붙여 호주에 파견할 안을 따져보고 있었다.
윤서가 조선에 와서 처음 맛보며 감탄했던 향온주 한 모금을 홀짝이며 명나라 황실의 칙사와, 유구국에서 배를 몰고 머지 않아 돌아올 수양 대군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중전으로 공식 책봉된 것이 아니니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지요. 솔직히 나인 신분으로 지극히 존엄하신 국모의 자리인 중전에까지 오르게 되는 일이 생기면 어떠할까요? 왕실은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선가 혀가 좀 구부러진 소리가 들렸다.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는 천한 것들이 신분 한번 바꿔보겠다고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할까요? 아까 연꽃에서 뛰쳐나왔던 기생을 좀 보세요. 그런 앳되고 풋풋한 애가, 아니 또 그와 다른 맛을 가진 지성미 넘치는 어린 것이,”
‘지성미’라는 단어를 더욱 강조한 말이 선명하게 막 어둠이 내린 관람석을 흔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혹독하게 매를 벌고 있구나.
윤서와 정의 공주는 싱긋 웃음을 나누며 언제 마셔도 향이 기가 막힌 향온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