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첫사랑을 대하는 이향의 자세 (2)
같은 쪽 손의 손가락 지문을 찍어 비교해야 이향이 이해하기 좋을 것이기에, 윤서는 바로 옆에 있는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저하, 손 좀 빌려주세요. 저하 손끝도 하나씩 찍어 비교해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더 쉽게 감을 잡으실 거에요.”
“······.”
이 여인은 진짜 하나에 골몰하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구나.
이향은 탄식하며 나란히 앉아 있어서 권가 쪽에 더 가까웠던 오른팔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팔만 내리면 권가의 어깨가 품 안에 쏙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리되면 도저히 자제할 수 없을 터여서, 이향은 망부석처럼 굳어진 몸으로 오른팔을 허공에 치켜올린 채 권가의 왼쪽 귓불에 난 작은 점에만 집중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 되었어요, 저하. 이제 편히 앉으셔서 제가 하는 걸 보세요.”
윤서는 이향의 손을 놓고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부스럭거리며 폈다.
이향은 의자에 다시 앉고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윤서가 하려는 일을 내려다보았다.
‘붓으로 가루를 뿌리려면 좀 몸을 수그려야 하고, 그러면 자칫 엉덩이가 우리 금욕적인 냉미남 세자 저하의 긴 다리에 닿는 불경을 저지를 수 있는데.’
윤서는 급히 이향에게 고했다.
“저하, 소인이 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자 이향은 고작 한 발자국 옆으로 비켜섰다.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 이리 소란인지 단단히 지켜보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이거,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는데.’
긴장하며 윤서는 종이 안에 담아온 숯가루를 족제비 털 붓끝에 듬뿍 묻혀 동그라미 위에 톡톡톡 털 듯 두드렸다.
열 개의 동그라미 위에 충분한 숯가루를 올린 후, 윤서는 다시 옆의 빈 종이에 대고 종이 전체를 옆으로 세워 조심스럽게 가루를 털어냈다.
그러자 열 개의 동그라미에 자잘한 손 주름이 층을 지어 나타났다.
···나타나긴 했는데.
너무 흐려서 도무지 열 개의 손가락 지문이 어떻게 다른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
윤서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과에 당황했다.
특수 약품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게 피부 분비물의 흔적이 남는 것이니 기름 같은 걸 묻혀야 할까.
“저하. 이, 이것이 지문이라는 것인데 사람마다 다 달라서······.”
당황한 윤서가 우물거리자, 이향이 말없이 손을 뻗어 촛대를 가까이 당겨 놓았다.
그리고 윤서의 어깨를 잡아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앉히며 “일단, 여기 앉아서 기다리거라.” 명하였다.
윤서는 팔걸이가 있어 훨씬 기대기 좋은 의자에 앉아 이향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향은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켜두었을 사각 등을 두 개를 더 들고 왔다.
그리고 윤서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환한 불빛 아래 종이를 내려놓고 몸을 기울여 열 개의 지문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윤서는 의자를 조금 옆으로 밀어 거리를 벌린 후,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이향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어느새 마른 긴 머리가 하늘색 도포 위에 나른하게 흐트러져 평소의 엄격함을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바꿔놓았다.
‘이러니 온 궐의 나인들이 이향 한 번 보기 위해 동궁전 나인들한테 노리개며 머리꽂이며 뇌물로 바치면서 은근슬쩍 놀러들 오지.’
요새 정무를 마치고 전하의 수라 시중을 들고 자선당으로 돌아온 이향은 이렇게 얇은 옷으로 갈아입은 후 비현각으로 와 밤늦게까지 일했다.
이향이 자선당 동온돌에서 나와 하늘거리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비현각으로 향할 때, 그 짧은 순간을 훔쳐보기 위해 나인들이 행각의 방마다 빼곡하게 숨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냉미남 세자 저하는 보기 좋은 떡이지 먹기 좋은 떡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도 저들이 저리 열광할까?’
아니지. 연예인 덕질은 외모 보고 하는 것이지 속사정까지 알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생각하며 윤서는 속으로 응큼하게 웃었다.
오늘처럼 매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격무와 완벽한 세종의 완벽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심인성 발기부전이나 조루가 되어서 이향이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라 추측하는 윤서는,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이향과 단둘이 있어도 별걱정이 없었다.
‘드라마에서는 팔 걷어붙이고 일에 몰두하는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이 여심 공략 포인트인데, 여기서는 지문 연구에 몰두한 우리 긴 머리 금욕적 세자 저하가 여심 공략 포인트네, 포인트.’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고 종이를 이리저리 불빛에 비추며 흐릿한 지문을 비교하는 이향의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하던 윤서의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간밤 세종께서 조만간 부르실 거란 소식을 전하며 각별히 말을 조심하란 이향의 엄한 경고에 낮 동안 긴장해 있었다가, 권가의 반쪽 동생을 만나고 또 한 시간 동안 우리 홍위와 마음껏 뛰며 쌓인 피로가 본격적으로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밖에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잠을 재촉했다.
윤서는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향은 의외로 지문 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처음에는 영민하기까지 한 권가가 또 무엇으로 놀래키려나 호기심 조금,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까이 다가서서 솜털 가득한 흰 목덜미와 모양 좋게 붙어 있는 귓불을 바라보기 위해 지켜보았던 것인데, 면밀히 살펴보니 정말로 열 개의 손가락 지문은 서로 다른 모양새였다.
각 손가락마다, 그리고 각 사람마다 정말로 이렇게 손가락 끝 무늬가 다르다면, 그리고 그 무늬의 흔적을 이렇게 가루를 통해 잡아낼 수 있다면, 그러면 이것은 여러 분야에 획기적인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다!
날이 밝는 대로 적당한 이들을 찾아 연구를 맡기리란 판단을 한 후에야 이향은 비로소 종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권가는 팔걸이에 올린 손을 괴고 잠이 들어 있었다.
환하게 쏟아지는 촛불 아래 권가의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고, 살짝 벌린 붉은 입술 사이로 부드러운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깨어 있을 때 권가는 지나칠 정도로 활달한 생동감으로 반짝이는데, 잠들어 있는 권가는 나른한 평온함으로 풀어져 있다.
이향은 문득 자신이 잠들어 있는 여인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붉은 노을 속에서 가쁘게 숨을 내쉬던 권가가 불러일으켰던 욕망과 다른 종류의 갈망이 이향의 마음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로 잠든 모습을 평온히 지켜볼 수 있는 존재, 만인지상 일인지하 세자란 특수한 위치가 주는 무거운 고독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
여인은 많았으나 마음 나눌 이 없어 적막했던 내게, 권가 너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주겠느냐.
깨워 묻는 대신 이향은 도포를 벗어 권가의 몸에 꼼꼼하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권가의 얼굴에 지나치게 밝은 빛을 뿌리는 사각 등 두 개를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동쪽으로 난 덧창을 열었다.
쏴아쏴, 기다리던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소중한 님이 찾아오시니 반가운 빗님도 함께 오시네.”
먹물처럼 새카만 어둠 속에 수줍은 고백을 털어놓던 이향은 문득 권가가 안고 왔던 함을 떠올렸다.
발끝을 세운 조용한 걸음으로 돌아와 이향은 종이 곽을 열고 안에 든 문서를 꺼냈다.
문서엔 권가(權家) 윤서(允瑞)가 마포나루(麻浦浦口) 도척지(都刺之)에게 은자 4백 냥을 빌리고, 이자는 년 10할로 한다는 내용이 한문으로 적혀 있고 권가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손이 수결 되어 있었다.
날짜가 2년 전, 홍위가 태어난 직후였다.
그때 권가는 아지 이씨 부인 곁에 딱 붙어 미련할 정도로 휴식 없이 오로지 홍위만 돌보던 것을 내 기억하는데. 언제 궐에서 나가 이런 문서에 수결 할 틈이 있었을 것인가.
‘이래서 권가가 저 손 무늬를 밝히려 한 것이로구나.’
자신의 손끝 무늬가 이 문서에 없음을 밝혀 이 빚문서가 거짓임을 증명하려 한 권가가 대견하면서도.
동시에 도척지란 흉악한 것이 감히 동궁전 나인에게도 이런 협잡질을 하니 다른 힘 없는 백성에겐 오죽했겠는가 하는 강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날이 밝는 대로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윤서야.”
이향은 여전히 단잠에 빠진 권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윤서야, 자선당으로 돌아가자.”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윤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껌뻑거리는 희미한 시야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수려한 사내의 모습이 환영처럼 잡혔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두뇌는 아직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 보검이보다, 잘, 생겼네, 세자 저하······.”
“!”
권윤서는 이 어여쁜 입술에 감히 다른 사내의 이름을 담고 다시 잠 속에 태평하게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윤서는 온몸을 죄어오는 통증에 눈을 떴다.
“!”
서책과 상소, 장계가 잔뜩 쌓인 낯선 광경에 놀라 후다닥 몸을 일으키니, 붉은 비단에 온갖 수가 어여쁘게 놓인 이불이 툭 떨어지고, 그 아래로 목까지 꼼꼼하게 둘려진 하늘빛 도포가 보였다.
비현각 안이었다.
윤서는 이향이 평소 앉던 의자에 기대 잠을 잔 것이었다.
동창을 보니 여전히 캄캄한 밤이었다.
‘홍위! 우리 홍위가 자다 깨서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윤서는 가짜 빚 문서가 든 종이 곽을 찾았지만 책상 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향이 가지고 간 듯했다.
일단 자선당 서온돌로 돌아가기로 하고, 윤서는 이불을 개어 책상 옆에 두고, 이향이 입었던 도포도 몸에서 걷어내 얌전하게 잘 개어 이불 위에 두고 대청 마루로 나왔다.
평소 저하의 밤 시중을 드는 젊은 내관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이 몇 시입니까? 파루가 울렸습니까?”
“축시가 방금 지났네.”
“아, 다행입니다.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윤서가 대청마루를 내려서려 하자, 내관이 지우산을 내밀었다.
“이거 쓰고 가게. 저하께서 깨어나면 쓰고 가게 준비해 두라 명하셨네.”
“아, 저하는 동온돌에 드셨지요?”
“아까 반 시진 전에 돌아가셨네.”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윤서가 지우산을 받아들고 댓돌에 벗어두었던 신을 신고 있는데 내관이 물었다.
“보검이가 누구인가?”
“예?”
“저하께서 아까 이불을 가져오라 하시어 자네한테 덮어주고 나오시며 내관이며 호위며 싹 다 뒤져서 보검이란 자를 찾아내라 명하셨네. 자네가 아는 자가 아닌가?”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내가 아는 보검이는 우리 꽃미남 박보검 배우뿐인데. 21세기 배우가 15세기 궁궐에 있을 리가 없으니.
윤서는 태평하게 그리 생각하며 빗물이 고인 길을 자박자박 걸어 서온돌에 돌아갔다.
겨우 마음에 품게 된 여인의 입에서 다른 사내의 이름이 나온 충격에 반 시진이나 자신을 노려보던 이향이 이대로 있다간 권윤서를 어떻게 하고 말 것 같아 이불만 덮어주고 분노한 발걸음으로 자선당에 들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였다.
******
다시 또 새날이 밝았다.
낮번과 교대하고 엄 상전의 거처에 돌아와 두 시진 잔 후, 윤서는 엄 상전을 찾아갔다.
“주상 전하께서 조만간 부르실 것이라 하시는데, 오늘 부르실까요?”
“전하를 알현하는 것은 늦어도 하루 전에 확정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연통이 오지 않았어. 그러니 오늘은 아니 부르실 걸세.”
“아, 그럼 다행입니다. 저는 반송방에 가서 여러 약재를 기름에 온침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음, 색장 나인도 아니면서 궁 밖 출입이 잦으면 공연히 구설수에 오르기 쉬우니 내관 복장을 하고 가게나.”
내관들은 밖에 나갈 때 보통의 사내들처럼 도포를 입고 갓을 쓴다.
펄렁거리는 치마를 입고 말을 타기 불편했는데 잘 되었다.
“저하께서 자네가 말한 그 지문이라는 걸 선명하게 보이게 할 방도를 찾으실 모양이야. 오후에 궐내 여러 분야의 장인들을 저기 비현각 집무실로 불러오라 하시었네.”
어서 가서 사내 옷으로 갈아입고 매금이와 반송방으로 가려고 서두르는데, 엄 상전이 말했다.
문종이 세종 못지않은 성군이셨다더니, 이향은 정말로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구나.
새삼 존경심이 들어 어서 가서 자운고를 만들 약재를 기름에 온침해 두려는데, 엄 상전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근데 자네, 보검이란 자를 아는가? 좀처럼 노하시는 일 없는 우리 저하께서 상당히 언짢은 낯빛으로 당장 온 궐을 다 뒤져서라도 보검이란 자를 찾아내라 명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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