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커피 향은 사랑을 싣고
명례군 내관이 금동이만한 자루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수양 대군이 고했다.
“형님 전하, 이것이 반드시 구해오라 명하신 ‘커피’입니다. 회회인들 언어로는 ‘카흐와’인지라 찾기 어려웠는데, (유 첨사가) 여송 일대를 샅샅이 훑어 마침내 구해냈습니다.”
여송 일대를 샅샅이 훑은 것은 유응부겠지만, 수양 대군은 교묘하게 주어를 생략해 마치 자신이 구해온 것처럼 말을 꾸몄다.
전 같으면 ‘역시, 수양이 수양하네!’ 속으로 비웃었을 윤서는 그러나, 밀봉한 기름종이를 뚫고 새어나는 향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도 잠시.
‘수유 중에 커피를 마셔도 되나?’
임신 중에 커피 한두 잔은 된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섭취한 카페인이 수유를 통해 우리 새벽이에게 섭취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본능적인 모정이 커피에 대한 강력한 열망에 제동을 걸어올 때였다.
삼 개월이 넘어가면서 목을 능숙하게 가누게 된 새벽이가 윤서의 품에서 몸을 비틀더니 “으어, 으어어.” 옹알이하며 커피 자루를 향해 작은 손을 휘저었다.
“어먼니, 해벽이가 저거어, 가지고 짚은가 바여. (어머니, 새벽이가 저거, 가지고 싶은가 봐요.) 구두한 냄대 냄대 나는데, 모까여? (구수한 냄새 나는데, 뭘까요?)”
새로운 것이라면 반드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금동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윤서에게 물었다.
“커피라는 씨앗인데, 갈아서 차를 내려 먹는 거야. 그런데 카페인이 많이 들어 있어서 아이들한텐 좋지 않아. 그래도 이따가 한 모금 맛봐볼까?”
“녜, 어먼니! 해벽이두?”
“아니, 새벽이는 너무 아기야. 그런데, 어머, 새벽아. 커피 향이 그렇게 좋아? 그럼, 엄마가 한 잔 마셔도 되겠구나!”
버둥거리는 새벽이 머리통에 뽀뽀를 하며 윤서는 그라인더가 없으니 대신 소형 절구를 이용하고, 거름종이가 없으니 한약재 짜내는 천으로 감싸 침전해서 추출하면 되겠구나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참으로 고맙구나, 유야. 내 정말로 커피를 몹시 소망했던 바이다.”
이향이 수양 대군을 크게 치하하고 세종에게 커피에 대해 고하였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이것은 저 먼 서역의 더운 나라에서 자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커피라 하는 것이온데, 볶아서 갈아 차로 내려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고 몸에 힘이 나며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마시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불면이 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하나 하루 세 잔 정도는 좋다고 하지요.”
“아니,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오지 않는다니!”
양녕 대군이 권한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으시며 세종이 수양 대군에게 물으셨다.
“유야, 이것이 구한 전부이더냐? 아예 나무를 구해다 심을 방법도 있을 터인데.”
“소자가 열 자루 넘게 가지고 들어왔고, 또 돌아오기 전 여송에 남아 있는 한명회에게 나무째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놓으라 명하였습니다, 아바마마.”
“한명회라면 한상질의 손주가 아니냐? 그자가 여송에 있어?”
“예, 아바마마.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소자에게 부탁하기에 호위 군관을 삼아 함께 나갔었습니다.”
수양 대군이 자신은 무려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 황제에게서 결정받아온 개국 공신 한상질의 손주를 휘하에 두었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면서 화제가 잠시 한명회로 흘러가는 사이,
‘커피 맛을 보시고 나면 세종께서는 필시 그 효용에 주목하실 터이니. 게다가 요즘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에 강렬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니, 한명회는 커피 구하느라 애를 많이 먹겠구나. 묘목까지 반드시 구해오라 명하실 터이니, 자칫하면 저 멀리 에티오피아까지 가야겠네.’
윤서는 뜻하지 아니하게 정화의 후예가 될 한명회의 운명을 생각하며 새벽이의 머리통에 입술을 대고 흐흐 남몰래 웃었다.
“부인, 커피가 그리 좋은 거요?”
한명회 따위는 수양 대군에게 붙여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향이 윤서의 웃음을 오해해 물었다
윤서는 그냥 싱긋 웃기만 하였다.
“아바마마, 제가 커피를 달여 올리겠습니다.”
평소 전복을 손수 손질해 보양죽을 만들어 올릴 정도로 효자인 이향이 커피를 직접 달이겠다는 말에 세종께서 온 얼굴로 환히 웃으시고,
“구수한 숭늉 같은 맛이려나? 우리 유가 참으로 형님을 위해 큰 수고를 했구나.”
소헌 대비는 수척해진 둘째가 영 마음이 아프신 듯 수양 대군의 공을 잊지 않고 언급하셨다.
“부인, 차 달이는 식으로 하면 되는 거요?”
하도 여러 번 커피 예찬을 들어 이론으로는 훤하게 알고 있지만 실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없는 이향이 윤서에게 몸을 기울이고 슬쩍 물었다.
“달이는 것은 제가 할게요, 전하. 전하는 커피 콩을 갈아만 주세요.”
“좋소. 여봐라! 다구와 작은 절구를 가져오너라.”
“한약재 짜는 천도 열 장 가져오게.”
세종의 직계와 양녕 대군과 효령 대군이 모인 곳은 창덕궁의 조계청이었다. 훗날 편전으로 쓰인 이 건물은 상왕으로 물러나신 세종께서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계셨다.
내관과 상궁이 다구 일체와 작은 절구를 가져왔다.
대전 내관이 자루를 펼치자 구운 커피 알 특유의 고소한 향이 강렬하게 터져나왔다.
“오호! 잘 말린 낙엽을 태우는 향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군요.”
미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목을 가진 안평 대군이 스륵 자리에서 일어나 이향 곁으로 다가왔다. 어찌하는지 보고 배워 즐기기 위해서였다.
윤서 옆에 앉아 있던 희아가 새벽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새벽아, 누나한테 와. 금동이도 누나 옆으로 와. 차 물이 뜨거워서 위험해.”
금동이는 고분고분 누나 옆으로 가 앉으면서도 대체 커피가 어떤 것인지 목을 쭉 빼고 보고, 새벽이는 희아 품에 안겨서도 작은 코 망울을 열심히 벌름거리며 방긋방긋 웃었다.
이향은 적당히 볶아진 다갈색의 커피 콩을 한 줌 절구에 넣어 쿵쿵 찧기 시작했다. 분쇄가 될수록 고소한 향이 더 강해졌다.
“이만큼이면 되오?”
“참깨 정도 크기로 분쇄하셔야 해요, 전하.”
“협경당에서 달여 마실 때 분쇄는 반드시 강 내관에게 맡기시오. 부인 손목이 남아나질 않겠어.”
아무리 왕실 직계만 모인 가족 모임이라고 해도 상왕 전하 내외와 개차반이긴 해도 백부 양녕 대군과 숙부 효령 대군까지 다 함께 상석에 앉아 있는 자리였다.
왕실 최고 웃어른이 포진해 있는 자리인데도 이향은 아랑곳없이 윤서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세종은 피식 웃으시며 중전이 이향이 빻은 짙은 갈색의 가루를 천으로 감싼 후, 팔팔 끓는 물을 한 김 식힌 주발에 담궈 우려내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소헌 대비는 큰아들 내외와 희아와 새벽이, 금동이 그리고 저쪽에서 도원군과 계동이와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세자 홍위까지 둘러보시고, 새삼 박복하다던 큰아들이 이룬 화목한 가정에 뿌듯한 눈물을 슬쩍 닦으셨다.
국왕 부부를 바라보는 여러 대군의 마음은 제각각이었다.
‘중전 덕에 부인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였지.’
수양 대군은 흑갈색으로 우려낸 커피 물을 차호에 옮긴 후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찻잔에 옮겨 따르는 중전의 우아한 손놀림을 보며, 명륜당 안채에 들어서자마자 두 팔로 목을 안고 흐느끼던 어린 아내의 말을 생각했다.
“청지기가 그러는데, 중전께서 마음만 먹었다면 절 폐서인할 수도 있었대요.”
저주 제웅을 꾸민 이로 자신을 몰아갔으면 자가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폐서인되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갔어야 했을 거란 말을 한 후, 아내가 돌연 팔을 풀고 절을 올렸다.
“제가 어리고 미욱하며 대군 자가께 큰 폐를 끼칠 뻔하였어요. 이제부턴 신중하고 현명하게 자가를 보필하겠습니다.”
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행동이 의젓해져서 건성으로 돌보던 의붓딸 예분도 꼼꼼하게 살피고, 창덕궁에 머물던 도원군도 명례궁으로 데려와 잘 돌보고 있었다.
수양 대군은 자신이 가져온 초록색 앵무새를 어린 세자와 여러 대군의 아들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아들 도원군을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여섯 달이라서 조금 더 커야 말을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자 저하, 제가 기본적인 말을 가르쳐서 드리겠습니다.”
친모가 죽은 후 처음 보이는 활달함이었다.
저 생기발랄함도 중전 덕분일까.
대비마마께서 내리신 칩거령이 해제되지 않아 부인과 어린 아들은 명례궁에 두고 입궐하는 길, 도원군과 예분과만 마차를 타고 오는데 아들이 문득 말하였다.
“할마마마께서 만약에 당신께서 승하하시고 아바마마께서 멀리 해외에 나가 계실 때 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무조건 중전마마께 가라고 하셨어요.”
어마마마께선 지금의 아내보다 중전을 더 믿고 계셨다.
형님 전하께 납작 엎드려 충성을 다하기로 결심하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창자가 꼬이듯 마음이 쓰렸다.
형님 전하가 저리 노골적으로 어여뻐하는 중전이 아들의 마음마저 얻은 것 같아, 한쪽으로는 불쾌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마음이 놓이는 모순의 상태에서 수양 대군은 “그저 쓰기만 한 커피 따위가 뭐가 좋다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안평 대군은 커피도 커피지만 저 회회청 가루로 마음에 쏙 드는 도자기를 만들어 볼 의욕에 중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중전이 사적으로 소유한 도요에서 과감한 도안의 찻잔이 많이 나오는데, 안평 대군의 높은 안목으로는 제대로 된 발색이 안 나는 것이 딱 하나 흠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아하게 투명한 색을 낼 수 있는 청색 안료가 들어왔으니. 유백색 자기가 얼마나 완벽해질 것인가.
‘형님 전하께서 북방 경영과 내정에 집중하시는 동안 중전께서는 아바마마와 함께 학문과 의학과 건축, 회화 등을 앞서 이끌고 계시니.’
작년 늦가을 궐 안에서 여기들에게 춤을 추게 한 일로 어마마마는 물론 중전께도 단단히 노여움을 샀다.
어서 그 미진한 평가를 만회하여 중전마마의 적극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다양한 예술 발전을 이끌고 싶은 것이 안평 대군의 야심이었다.
광평 대군이야 워낙 중전을 기이한 지식을 가진 현인 보듯 하고 있고, 금성 대군은 형님 전하와 함께 화포를 개량하고 무기를 새로 만들어 북방을 경영하는 일에 푹 빠져 있어서 중전께는 그닥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고.
작년부터 강원도 석탄 광산 개발 업무에서 놓여나 완전히 한양으로 돌아와 금성 대군과 함께 화포 개량에 힘을 쏟고 있는 임영 대군은 자신과 달리 색욕이 거의 없던 형님이 아이를 둘이나 낳은 중전에게 여전히 푹 빠져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길 따름이다.
“한번 드셔 보시옵소서.”
드디어 커피 네 잔이 나왔다.
윤서가 잔을 소반에 올리자, 이향이 직접 들고 가 세종 내외와 양녕 대군, 효령 대군에게 올렸다.
“엉겅퀴 삶은 것처럼 쓰구나.”
양녕 대군은 한 모금 마시고 얼른 독한 술로 입을 헹구고,
“양기가 강한 차인 듯하오. 수련하는 이에겐 그닥 적합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차 평을 내린 효령 대군은 마시기보단 향으로 즐기시겠다는 듯 잔을 들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맛이 쓰기도 하며 신맛도 좀 섞여 있구나. 끝맛에는 말린 과일의 달콤한 향도 조금 섞여 있고. 나는 술을 즐기지 않으니 계속 마셔보겠다.”
세종께서는 그리 평하셨다.
소헌 대비는 한 모금 마시시고, 눈살을 미세하게 찌푸린 후,
“우리 며느리 솜씨가 참으로 일품이다.”
영혼 없는 칭찬을 하셨다.
그러는 사이에도 윤서는 이향이 빻아놓은 가루를 새 면포에 싸서 계속 커피를 우리고 있었다. 한 모금 맛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대접하는 입장에서 객에게 모두 돌린 후 마셔야 한다.
윤서는 새로 우린 네 잔의 커피를 국왕인 이향부터 올렸다.
이향은 잔을 들어 마시는 대신 안평 대군에게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지 내내 지켜보았지? 이제 용이 네가 우리거라. 중전께서 커피 맛을 좀 보셔야 하니.”
그리 말한 이향이 윤서의 손에 잔을 건넸다.
“맛보시오, 부인.”
다정하게 말하는 이향의 음성에는 그간 얼마나 커피를 구해주고 싶었는지 절절한 진심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윤서는 기꺼이 잔을 받아 먼저 깊게 향을 들이마신 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
신맛이 강한 커피 알이었다. 이럴 경우 적당히, 약배전으로 볶아야 하는데 과하게 볶아져서 탄 맛이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인을 갈망해온 영혼의 허기가 단숨에 메워지는 느낌이었다.
윤서는 고개를 들어 이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안평 대군이 앉아 열심히 주발에 커피를 우려내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전하.”
“뭘, 이런, 걸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향은 수염 아래 입꼬리를 기분 좋게 쑥 올리고.
안평 대군은 ‘두 분, 미친 거 아니십니까?’란 눈빛으로 시선을 흘기고.
뒤에서 자꾸 꼼지락거리는 새벽이를 당겨 앉으며 희아는 생각했다.
‘정종이 커피를 우려주면, 나도 말해줘야지.’
사랑해, 정종.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