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중전과 후궁
“은애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만은, 여인이 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위로는 대비마마께서 계시고, 옆으로는 지극히 총애를 받는 신빈이 있지요. 또 전하 곁에는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승은 상궁들이 포진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늘 비교당하는 마음에 노심초사 종종거렸는데, 아예 여기 아니 계시니 편할 밖에요.”
한 사내를 두고 애정과 권력을 다투어야 하는 삶의 고단함이 단아한 미간 사이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나 혜빈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여인으로서의 근심을 털어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모든 것을 다 쥐고 살 수 있던가요. 승은을 입은 덕에 친정도 함께 부귀해졌고, 또 대비마마께서 우리 세자 저하의 양육을 맡겨주신 덕에 제 아들들의 장래도 더 밝아진 것이 아닙니까?”
혜빈은 영악하게 웃었다.
치밀하게 계산 끝에 윤서를 곱게 치장하여 동궁전에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윤서를 중전으로 만들어 이향은 물론 홍위까지, 삼 대에 걸쳐 자신과 아들들이 모두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승리의 미소였다.
그러나, 어디 그리 계산속만 있는 여인이던가, 혜빈이.
부귀영화와 권력만 탐하는 여인이었다면 수양 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을 때, 다른 이들처럼 혜빈도 홍위를 외면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왕족이, 심지어 정의 공주조차 침묵할 때 혜빈은 금성 대군과 한남군 등 아들과 함께 홍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가 귀양을 가 교살형으로 죽었다.
그러니.
“자가, 제가 내명부를 잘 이끌고 있습니까? 저는 대비마마와 다르게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윤서는 혜빈에게만은 허심탄회하게 물을 수 있었다.
박 상궁 마마님이 궁궐의 여인으로서 사업을 벌이는 데 가장 훌륭한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존재라면, 혜빈은 궐의 여인들을 다스림에 있어 가장 실질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다.
“잘하고 계십니다. 잘해 오셨고요. 승휘가 되자마자 홍 승휘와 부부인 윤씨를 제거한 것부터가 아주 잘하신 것입니다.”
윤서가 이향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결국 홍 승휘가 세자빈이 되고 이어 중전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홍 승휘가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홍위의 입지가 사정없이 흔들렸을 것이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윤씨와 수양 대군과 손을 잡고 불궤를 도모했을 것이라고 혜빈은 못을 박았다.
“대비마마께선 절대 투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요. 상왕께서 품은 궁인이 있으면 고운 비단과 장신구를 따로 챙겨 내리시며 전하를 잘 모시라고 당부를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비마마의 본심이기만 하셨겠습니까? 대비마마가 무엇을 하실 수 있으셨겠어요?”
혜빈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투기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가 전하의 총애를 잃기라도 하면요. 그러면 그나마 살아남은 친정붙이들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데요. 그러니 현숙한 왕후의 모습으로 다 감내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혜빈은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대비마마를 동정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그릇이니 끝까지 홍위를 지키려는 의리를 다하였을 것이다.
소헌 대비를 생각하자 수양 대군을 잃게 될까 마음을 끓이시는 모습도 덩달아 떠올랐다.
“하아, 정말로, 가여운 분입니다.”
마음 아프게 탄식하면서도 윤서는 수양 대군이 조선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마음에 조금의 변화를 두지 않았다.
모두를 위해 수양 대군은 새봄이 되면 부부인 윤씨와 함께 여송으로 가야 한다.
여송에 세워질 무역 기지를 기반으로 수양 대군은 그 밑의 열도를 따라 호주로 가는 뱃길을 개척해야 할 것이니.
“저, 자가. 대비마마께 정 귀인의 품계를 소용으로 강등시키고, 대신 궐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문 소용의 품계를 종2품 숙의로 올려달라는 청을 올리려 합니다. 혜빈 자가께서는 두 사람을 어찌 보셨습니까?”
세종의 재위 내내 혜빈이 궐의 대소사를 총괄하였다.
이향이 왕이 되어서는 대외 일에 분주한 윤서 대신 처음에는 정 귀인이, 그리고 지금은 문 소용이 혜빈에게 배워 내명부에서 주관해야 할 행사를 감독하고 있다.
“정 귀인은 처음부터 너무 오만했어요. 저한테도 어찌나 뻣뻣하게 구는지, 솔직히 제가 증전마마였다면 벌써 품계를 내렸을 것입니다. 아니 왕손도 낳지 못하고 전하의 총애도 받지 못하는데 대체 무얼 믿고 그리 오만한지, 게다가 음침하기까지 합니다.”
혜빈도 새벽이를 낳을 때 산실 마루 밑에서 발견된 저주물이 정 귀인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다.
“문 소용은 내명부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빨리 배우고요. 다른 후궁도 제법 잘 이끌어주려 하더군요. 얼마 전에는 양 소용과 같이 왔더이다. 양 소용이 학당을 맡게 되었는데, 내명부에서 어찌 도와주는 것이 좋겠냐고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더군요. 양 소용도 제법 진지한 자세로 세붓으로 삐뚤빼뚤 적으면서 듣더라고요. 그래도, 중전마마.”
혜빈이 윤서의 손을 잡았다.
“후궁에 대해서 마냥 안심하지는 마세요. 지금이야 전하께서 도통 자신들에게 관심을 안 보이니 중전마마의 총애라도 얻어 권력을 가지고자 저리 고분고분 참한 모습을 보이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커다란 권력은 그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요. 어느 날 갑자기 중전마마만 안 계시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란 꾀임에 속아 넘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 또한 궐의 여인들입니다.”
“그것이 어찌 후궁들만 그러하겠습니까?”
“···예?”
놀란 듯 되묻는 혜빈에게 윤서는 얼마 전에 들었던 말을 차마 옮기지 못했다.
이향이 지난 겨울 북방 순행을 갔을 때 여진의 무리 중 하나가 엄청나게 미인인 소녀를 바치려고 했다는 말을.
박 상궁이 분개하여 전한 말에 따르면 사정은 이러했다,
“두만강 이북의 한 부족이라는데, 글쎄 침어낙안(沈魚落雁, 물고기가 부끄러워 물 속으로 숨고 기러기가 땅으로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미인을 뜻하는 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예쁜 소녀를 사내아이처럼 꾸며 바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알현 자리를 빙자해 데려와서는 시위로 써달라고 했다더군요. 하아, 전하께서 그 의도를 모르는 척 돌려보냈기 망정이지, 내 원 참. 그런 부족은 싹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앞으로 건주 여진을 제거하고 여진의 여러 부족을 조선의 세력권 내로 넣으면,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는 여진의 관례상 어여쁜 여인을 바쳐 더 긴밀한 관계를 보장받고자 하는 일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군주의 호의가 곧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이 세계에서, 순행을 가는 곳마다 이향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여인들은 넘쳐날 것이다.
“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금상 전하께서 마음에 두시는 여인이 생겼습니까?”
윤서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혜빈이 근심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전하가 아닙니다. 그런 염려들 때문에 제가 잠시 미쳐서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까, 그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에이.”
박 상궁에게 그 말을 들을 때 겉으로야 평온함을 유지하였지만 속으로는 큰 칼이 박히는 듯 가슴이 아파서, 그날 저녁 머리를 빗기다가 몇 번이나 이향의 쥐어뜯을 뻔했는데.
“중전마마께선 벌써 양 소용이 몇 번이나 전하를 침소로 모시려 한 걸 아시면서도 오히려 학당 운영까지 맡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계속 너그럽게 대하세요, 중전마마. 후궁은 후궁일 뿐입니다. 후궁은 절대 정궁을, 그것도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또 대군을 둘이나 생산하신 정궁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중전의 자리만 유지하는 것이 아니니.
윤서는 고개를 저어 혜빈의 말이 가져온 여파를 털어내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이향을 닦달하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하는 말처럼 오히려 이향에게 다른 생각이나 불러일으키겠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궁인의 처우에 관한 것이에요.”
말이 나온 김에 윤서는 궁인의 출궁 문제를 논의했다.
“지금은 전하께서 추진하시는 북방 경영에 온 궐의 역량을 모아야 할 때라 미루고 있는데, 그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나면 말입니다, 혜빈 자가. 저는 윗전 상을 당하거나 병이 들어야 출궁할 수 있는 궁녀의 처우를 바꾸고자 합니다.”
“예에?!”
뜻밖의 말이었는지 좀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는 혜빈이 쉽게 대답을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뼉을 딱 쳤다.
“정말로 하시려는 거군요, 중전마마.”
“예. 제도를 정교하게 보완해야겠지만 궁녀의 근속 연한에 상한을 두고 혼인에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출궁할 수 있게,”
“아니, 노비 세습제를 없애는 것 말입니다. 요새 아무래도 노비 세습제가 폐지될 것 같다고들 수군거리더니. 궁인을 출궁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그 일환이 아닙니까?”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지만 궁인을 출궁할 수 있게 하는 것에는 따져봐야 할 사안이 너무 많아요. 당장 중전마마 말씀처럼 혼인할 수 있게 출궁 가능하다고 하면 궁녀 선발에 세도가 여식들도 대거 지원을 할 것이고, 그중에는 아마 월나라 서시도 울고 갈 미인들도 대거 섞여들 것입니다!”
“왜요?”
가문 좋은 경국지색 미녀가 고되고 엄격한 궐의 일에 왜 지원한다는 말인가.
윤서가 의아해하자 혜빈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왜겠습니까? 운이 좋으면 전하나 다른 왕족 눈에 들 터이고, 운이 나빠 눈에 들지 못하면 출궁하여 혼인을 하면 되는데요.”
“아!”
“아? 하! 전하께서 여색에 무심하시니 우리 중전마마께서도 덩달아 이쪽엔 이리 순진하십니다. 허, 참!”
축첩이 허용되는 혼인 제도가 모든 좋은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구나!
혜빈의 말을 듣고 윤서가 한탄할 때였다.
밖에서 한 상궁이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혜빈 자가, 신빈 자가께옵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그러자 혜빈이 얼굴을 굳히더니 빠르게 속삭였다.
“계양군의 구명을 청탁하러 왔나 봅니다. 하지만 그 처분은 상왕 전하께서 직접 결정하신 사안인데다가 신빈의 청을 받으신 대비마마께서도 말씀을 하시려다가 노여움만 사신 사안이에요. 그냥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전마마.”
그러나 윤서는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
그간 지켜본 바로는 세종께서 여인으로 가장 아끼는 후궁이 신빈이었다.
지금이야 여러 복잡한 심정에 아니 찾으신다고 하나 결국 수양 대군도 마주하실 정도로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구분 짓는 성품이시니.
어느 날 우연을 빙자해 세종과 마주친 신빈이 애처롭게 눈물을 떨구면 오랫동안 쌓인 정이 새록새록 올라올 것이고, 그러면 세종께선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신빈의 거처를 다시 찾으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어려울 때 덩달아 돌을 던진 격인 오늘의 거절이 사무쳤을 신빈은 세종이 가장 기분 좋을 때 지나가는 말처럼 속삭일 것이다.
“전하, 중전은 참으로 예가 바르고 효심이 깊어 전하와 대비마마를 극진히 모시며 매사 신중하지 않습니까? 혹여 전하의 성심에 누가 될까 일전에 제가 간곡히 뵙기를 청했는데도 단호히 물러가라 하셨어요. 그때는 참으로 모욕감과 수치심까지 느꼈는데, 지금 생각하니 전하와 대비마마를 지극히 위하시는 효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세종께서는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신빈을 중전이 감히 문전박대 했다고 노여움이 드실 수밖에!
궐 안의 처신이 이렇게나 복잡하다.
끙 이를 앙다물며 윤서는 밖을 향해 외쳤다.
“드시라 하게.”
이윽고 문이 열리고 마음고생이 심하여 처연한 미가 더욱 돋보이는 신빈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