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세종과 신빈
“중전께서 오셨다 하여, 그간 격조했는지라 그리운 마음에 부르지 않아도 들었습니다. 무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옵소서.”
신빈이 조심조심 걸어와 두 손을 이마 앞에 모으고 절을 올렸다.
“!”
상왕의 후궁은 보통 허리를 깊게 굽히는 정도의 예만 표할 뿐인데 절까지 올리는 과한 예를 만류하려다가 윤서는 살짝 고개만 굽혔다.
“혜빈, 연통도 없이 무작정 와서 송구하네.”
“아닙니다.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한가하기만 한 것을요.”
“···뒷방 늙은이는 무슨. 문 소용과 양 소용 가르치느라 분주하시다 들었는데.”
한차례 인사말이 오간 후 전각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렸다.
윤서는 그린 듯한 미소만 지은 채 신빈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혜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 내렸다.
‘궐 생활에 닳고 닳은 양 소용이 한참 어린 중전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왜인가 싶었는데.’
저리 미소 짓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절로 무엇인가 고백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또 잘 못 말하면 큰일이 날 것 같고. 앞에 앉아 있는 이를 침묵으로 압박하는 재주가 있으시네, 우리 중전마마.
평소 무해해 보이는 눈망울과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상왕 전하와 대비마마의 호감을 사던 신빈이 초조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는 모습이 혜빈은 퍽이나 통쾌하였다.
“저, 오늘 중전을 뵙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침묵의 압박감을 못 이기고 신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에 명나라를 다녀온 한성부윤이 며느리를 통해 신첩에게 선물한 것이 있사온데, 명의 영락제께서 크게 효험을 보신 보약재였습니다. 중전께서 내명부를 이끄시고 세자 저하와 대군 아기씨를 키우시는 것만도 분주하신데, 연일 상왕 전하의 부름을 받아 여러 일을 하시느라 고단하시다고 하여 근심하던 차에 혜빈의 거처에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바치고자 가져왔습니다. 오 상궁.”
외워 온 듯 빠르게 말한 신빈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아예 밖에 시립해 있는 자신의 상궁을 불러들였다.
문이 열리고 오 상궁이 붉은 비단 보자기에 쌓인 사각의 함을 눈썹 앞에 치켜들고 허리를 기역 자로 굽힌 채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윤서 앞에 공손하게 내려놓고, 들어온 자세 그대로 다시 공손히 물러났다.
뇌물이었다.
매일 상왕 전하를 알현하고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금상 전하와 함께 생활하고, 또 미래 권력인 어린 세자의 절대적 신뢰를 받는 중전에게 자신의 아들을 신원하게 도와달라는 뇌물.
금실과 은실, 색색의 비단실로 약사여래불을 정교하게 수놓은 붉은 비단 보자기만으로도 도성 내 서른 칸짜리 기와집은 너끈히 사고도 남아 보일 정도로 아주 값비싼 뇌물이었다.
그러나 신빈은 알까.
이 뇌물을 바치며 한 말이 요새 셋째를 가지면서 잠시 느슨해져 있던 윤서의 마음을 제대로 깨웠다는 것을.
바라던 대로 딸인 것만 같아서 어여쁜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려던 노력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평창으로 귀양을 갔다곤 하나 죽으러 간 것도 아니고 또 듣자 하니 부부인 한씨와 시중들 노비까지 넉넉하게 데려갔다는데. 그게 무슨 귀양이야, 휴양이지. 그리고 귀양 간 지 반년도 흐르지 않았거늘 벌써 여러 번 소헌 대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해 덩달아 대비마마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 것도 모자라, 영락제가 먹었다는 약재를 바치며 부탁을 한다라.’
황제 귀양을 간 아들을 위해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어려운 약재를 바치며 구명할 정도이면서,
우리 홍위가 곤경에 처했을 땐 인삼 한 뿌리라도 세조에게 바치며 그 궁벽한 곳에서 목숨은 부지하게 하는 것이 인륜이라고, 말이라도 한마디 꺼내 보셨습니까, 신빈!
부당한 분노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신빈은 소헌 대비의 지밀 나인 시절, 밖에서 크다가 늦게야 궐에 돌아와 형제들과 겉도는 수양 대군을 돌보았고, 그 인연으로 심정적으로 세조와 긴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또 계양군의 부인 한씨와 세조의 아들 도원군의 부인 한씨가 서로 자매인 까닭에 혼맥으로도 밀접하게 얽혀 있었던 것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홍위를 위해 싸우다가 교수형을 당한 혜빈의 앞에서 고작 귀양 가 있는 아들을 위해 이리 노골적인 뇌물을 바치는 신빈의 모습을 보자 눌러두었던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마마마! 혜빈 자가!”
때마침 밖에서 들려온 홍위의 목소리가 윤서의 오랜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어머나, 우리 저하 오셨나 봐요.”
혜빈은 반색을 하며 달려 나가고,
윤서는 천천히 신빈에게 말했다.
“명의 황제가 복용할 정도로 귀한 약재라니, 잘 간직했다가 소중한 곳에 쓰겠습니다. 마침 상왕 전하께서도 경복궁으로 환궁하실 듯한데, 저와 함께 인사를 가시겠습니까?”
뇌물을 받았으니, 받은 값은 해야지요, 신빈.
“정말로, 그리해주시겠습니까?”
윤서의 말에 신빈이 눈을 아름답게 치켜떴다.
그간 뵙고 싶어도 한사코 마다하셨기에 용안을 뵈올 기회가 없었는데!
“돈화문 밖에 어차가 세워져 있습니다. 상왕 전하께서 그리로 향하실 것이니, 저와 세자를 전별한다는 구실로 함께 가시면 되지요.”
“감사해요, 중전. 내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가시지요.”
윤서는 매금이를 불러 “귀한 것이니 소중히 다루거라.” 명하였다.
거의 매일 반송방 보육원에 가 무예를 지휘하다가 모처럼 윤서를 따라나섰던 매금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치마 속에, 감춰, 요?”
그 말을 들은 신빈이 푸흡, 입을 막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에 잘 안아, 매금아. 감히 누구라도 빼앗지 못하도록.”
“응! 아니, 예! 중전마마!”
매금이는 궐의 금군이 모두 달려든다 해도 빼앗기지 않을 태세로 가슴에 꼭 비단 함을 껴안았다. 너무 소중히 껴안고 있어 누구라도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저돌적인 자세였다.
‘전하께서 보시면 노여워하지 않으시려나.’
신빈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평소 행동이 극도로 신중해 상왕 전하께 지극히 신임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한 중전이 내린 결정이니. 뇌물을 바친 것이 노여울 일이면 받은 중전은 더 큰 노여움을 살 일이리라.
‘게다가 중전은 회임을 한 것을.’
왕자 여섯과 옹주 둘을 낳아본 경험으로 판단하건데 평소 서늘한 인상의 미인인 중전의 뺨에 옅은 홍조가 올라 있고 더운 듯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 회임이 틀림없었다.
‘태중의 아기씨를 위해 귀한 약재를 올렸다고 하면 공이 더 크겠지.’
그리 안도한 신빈은 오 상궁에게 재빨리 자태를 살피라 이르고 옷깃을 단장하고 연지를 다시 바른 후 중전 일행을 따라나섰다.
윤서는 혜빈의 품에 안겨 있던 홍위의 손을 잡았다.
“혜빈께선 예서 작별하시지요.”
“!”
혜빈은 매금이가 무서운 눈빛으로 어보라도 되는 양 안고 있는 비단 함과, 윤서의 차가운 눈빛에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읽어내었다.
새삼 권가를 중전으로 민 자신의 안목을 감탄하며, 혜빈은 홍위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세자 저하. 또 오세요.”
“예, 자가. 자가께서 자선당으로 놀러 오셔도 좋아요.”
“어머나, 벌써 자선당에 혼자 거하십니까?”
혜빈이 대견한 듯 묻자 홍위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닙니다. 잠은 협경당에서 자는데, 낮에 서책 볼 때만 자선당 동온돌에 있어요. 금동이랑 새벽이도 같이 있을 때가 많아요. 모두 혜빈 자가, 보고 싶어 할 거예요.”
“그래요. 아기씨들도 뵐 겸 조만간 가겠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하고,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고 창덕궁의 남문인 돈화문으로 천천히 향하였다.
“수양 숙부께서 비현각에서 천축국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 해 주시기로 하였어요. 어머니, 천축의 비자야나가라 왕국에서는 전투할 때 코끼리의 긴 이빨에 칼날을 달아 돌진시킨대요. 하지만 아무리 코끼리가 쿵쿵 뛰어온다고 해도, 대포를 쏘면 도망치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본 수양 숙부가 전처럼 두렵게 느껴지지 않아 기분이 좋아진 홍위는 홀로 어엿하게 걷던 평소와 달리 윤서의 손을 잡고 겅중거리며 종알종알 희정당에서 들은 이야기를 옮겼다.
“전에 코끼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저 먼 섬에 유배를 갔다고.”
“예, 어머니. 소자도 들었어요. 태종 대왕 때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래요. 소자도 코끼리가 보고 싶어요.”
“이번에 수양 숙부 출항하시면 한 마리 보내달라고 하자. 코끼리는 사람처럼 영리해서 기억력이 아주 좋아. 등에 큰 안장을 올려서 타고 다닐 수도 있고.”
걸을 때마다 좌우로 엄청나게 흔들려서 좀 무섭기는 했지만.
그렇게 인도의 코끼리 이야기를 하면서 돈화문을 나섰다.
마침 세종께서는 여러 궁인과 호위군이 시립한 가운데 수양 대군의 부축을 받아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에 오르려 하시는 참이었다.
윤서와 홍위가 타고 갈 어차는 그 뒤에 서 있다.
“할바마마! 소손도 어마마마와 함께 환궁하려고 합니다!”
홍위가 통통 튀는 목소리로 외쳤다.
“으응? 벌써 돌아가느냐? 혜빈 전각에서 한참 있다가 간다고······. 매금이 너는 무엇을 그리 꽉 안고 있느냐?”
“귀한, 것, 입니다!”
매금이는 상왕 전하가 내놓으라고 명하셔도 절대 드릴 수 없다는 듯 더욱 세게 안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허, 무엄하구나!”
세종을 모시는 내관 조창의가 눈을 부라리는데, 여러 번 매금이를 본 적 있는 세종께서 손을 저으셨다.
“두어라. 저 아이는 원래 그러하니. 무엇이길래 저리 안고 있는 것이냐?”
대신 윤서에게 물으셨다.
기다리던 하문이었다.
“예, 전하. 대비마마께 달여 올릴 귀한 보약재입니다. 신빈 자가께서 명나라 영락제가 드셨던 약재를 제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빈이?”
“예, 한성부윤 한확이 공신 부인을 통해 받아온 명 황실 내의원 약재라고 합니다.”
때마침 신빈이 아리따운 자태로 나타났다.
“···전하, 이리 강녕하신 모습을 뵈니 신첩 기쁘옵니다······.”
세종은 자신을 향해 속삭이는 신빈을 바라보았다.
가장 밑바닥 노비 출신의 나인부터 시작했기에 베풀어주는 모든 것마다 진심으로 감읍하던 후궁이 중전의 눈빛을 하고 자신을 애타게 응시하고 있었다.
‘전하, 역적의 혐의를 받고 자진하신 제 아비를 신원해주세요!’
중전이 차마 말로 못 하고 눈으로 호소하던 그 눈빛으로 신빈은 호소하고 있었다.
‘계양군을 도로 신원해주세요, 전하. 그 아이는 전하께서 가장 어여뻐하는 아들이 아니옵니까! 저와 함께 한 세월을 보아서라도, 전하!’
중전에 대한 마음이 연민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애정이었다면, 혜빈은 당차게 자신을 주장할 줄 알아서 어여뻐하였다.
그리고 신빈은 바라는 것도 주장하는 것도 없이 오로지 자신과 중전을 진심으로 섬기기에 오래도록 곁에 두고 애정하였는데.
세종은 천천히 눈을 돌려 홍위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역사의 증인 권윤서를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중전은 웅변하고 있었다.
‘신빈이 아무런 사심 없이 오로지 전하를 섬기기만 하였던 것은 그 무엇도 주장할 필요가 없어서였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다 주셨으니까요. 계양군에게 조선에서 가장 큰 뒷배를 가진 한확의 여식을 부인으로 주셨습니다. 보세요. 주장할 필요가 생기면 신빈도 무엇을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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