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도원군과 부부인 윤씨 (1)
“할마마마께서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으응? 무어라고 말씀하셨는데?”
되묻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니를 잃고 도원군이 말을 잃었을 때 곁에 두고 돌보시며 대비께선 무슨 말로 손주를 위로하셨을까.
그러자 세상의 고통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아이의 얼굴 위로 역사 속 정미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희아 경혜 공주와 정종의 아들 정미수는 아버지가 거열형을 당한 후,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가 거둬 궐에서 자라났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경혜 공주가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미수의 심정이, 지금 너 도원군의 심정과 같았을까.’
그래도 너는 아버지는 건재하니.
왕가의 일이란 본시 냉혹하고도 잔인한 법.
역사의 업보가 시공간을 뒤틀어 너와 너의 어머니에게 내렸으니, 도원군.
윤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도원군은 서늘해진 윤서의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호소하듯 말하였다.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으면 중전마마께 가 애원하라고. 그러면 중전마마께선 저를 살려주실 것이라고, 할마마마께서 말씀하셨어요.”
“!”
“그리고, 또한, 제가 여기 있어야 여송의 일도 순리대로 흐를 것입니다.”
“!”
자신이 인질처럼 한양에 머물고 있어야 여송과 나중 옮겨갈 호주에서 수양 대군의 무리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란 의미였다.
순진한 소리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수양 대군이 여전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한양에 머물러 있는 큰아들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권력의 경쟁자로 인식할 것이거늘.
그러나 윤서는 이 말은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쓸쓸할 아이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무게까지 더하는 것은 너무 잔혹한 일이다.
“그럼, 너의 혼사를 조율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양에 머물 방도를 찾아주마.”
“여동생도 혼사가 멀지 않으니, 한양에 머물러 배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중전마마.”
도원군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여동생의 안위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이렇게 신중하고 속이 깊은 아이였던가, 역사 속에서 도원군이.
아니면 고난을 겪으면서 성품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함께 뛰놀던 세자 사촌이 자신의 아비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게 되었을 때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영 알 길 없는 그 마음을 짚어보며 윤서는 도원군에게 확인차 물었다.
“한성판윤 한확의 막내딸과 혼약이 되어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이 혼사가 마음에 드느냐?”
한확의 막내딸, 역사에서 도원군의 아내로 훗날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가 되었던 한도산을 윤서는 몇 번 외명부 연회에서 눈여겨본 적이 있다.
출중한 미모로 이름 높은 한씨 가문의 여식답게 한씨 소저는 어여쁘고도 단정하고, 또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오만한 기세가 역력하였다.
그렇지만 도원군과 금슬이 좋았다고 역사서에 말했으니, 윤서는 응당 도원군이 그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제게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중전마마.”
다시 어두워진 얼굴로 묻는 도원군의 어조에 별다른 열의가 담겨 있지 않다.
“달리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 것이냐?”
“······.”
도원군은 끝내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날 이후 윤서는 여러 경로로 도원군이 마음에 품을 만한 소저를 찾아보았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윤서는 한확의 가문에서 이 혼사를 탐탁지 않아하기에 도원군이 우울해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
*
“도원군은 이미 한성부윤 한확의 막내와 혼약이 되어 있습니다.”
교태전 안.
소헌 대비가 중앙의 상석에 앉아 계시고, 윤서는 대비마마의 동쪽에 앉아 있다.
윤서 맞은편으로는 오랜만에 정의 공주가 들어 있었다.
역사를 알게 되신 후 한동안 극단적인 노여움과 회한에 휩싸여 계시던 세종께서 차츰 오지 않을 역사를 잊고 당대의 현실과 미래에 집중하시면서, 정의 공주도 다시 총애를 되찾아 활발하게 궐에 드나드는 중이었다.
이날은 수양 대군의 큰아들 혼사를 논의하는 자리니, 누나로서 참석해 의견을 밝히라고 대비께서 부르신 듯하였다.
“일전에 신년 하례 모임에 정부인 홍씨가 데리고 입궐하였기에 불러서 몇 마디 나누어 보았는데, 생각과 행동거지가 신중하고 또 외모도 참하였습니다. 도원군도 성품이 사려 깊고 진중하니, 서로 잘 어울릴 것입니다.”
윤서는 방글거리는 소아를 품에 안고 계시는 소헌 대비께 몇 년 전 명나라에 있는 공신 부인이 이향의 정실 세자빈 자리를 자신의 오라버니인 한확의 딸로 채우려다가 실패하면서 대신 도원군과 맺게 된 혼약을 말씀드렸다.
그때 이향의 부인으로 넣으려던 한확의 딸은 권씨 가문의 자제와 혼인을 하였고, 이제 한확에게 남은 딸은 막내, 역사에서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로 유명해진 한도산 뿐이다.
“그 아이라면 나도 눈여겨보았지. 어린 나이에도 침착하더구나.”
소헌 대비는 여전히 소아에게 눈을 맞추고, “오구, 오구, 이렇게 기분이 좋아. 이렇게!” 어르는 와중에 용케 한도산을 기억해 내셨다.
“어마마마, 저도 왕실 학당에서 가르쳐보니 제법 영민하였어요. 물론 성품이 조금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나, 그거야 귀한 가문에서 귀여움 많이 받고 자라나서 그러한 것을요. 차차 고쳐질 것입니다.”
정의 공주도 한씨 가문 막내딸에 대해 나쁘지 않게 품평하였다.
그러자 아들 은동을 데리고 입궐한 부부인 윤씨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대비마마께서 자신의 아들에게는 소아에게 보이는 관심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은동이도 소주방 나인들이 내온 간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어서 아까부터 얼굴이 굳어 있었다.
‘도원군에게 한확 가문이라니. 이러면 한명회 가문과 짝을 맺을 우리 은동이가 밀리지 않는가 말이다.’
함께 여송으로 이주해갈 한명회의 안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윤씨는, 부군 수양 대군과 장차의 사돈 한명회가 애써 개척한 그 결실을 장차 도원군이 물려받을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속이 쓰렸다.
“하온데, ···한확 측에서 여전히 혼사를 이루고 싶어하는지, 그 의중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윤씨가 천천히, 근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소첩이 그렇지 않아도 신년 연회에서 홍씨 부인에게 넌지시 혼사를 물었더니, 막내딸이 아직 어리고 미욱하여 혼사를 논하기 어렵다고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렸습니다.”
“부부인은 이 혼사가 탐탁지 않은 것입니까?”
도원군에게 든든한 처가가 생기길 원하지 않는 윤씨의 속내를, 윤서는 바로 지적하였다.
그러자 윤씨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못마땅합니다, 중전마마. 그 아이는 저도 서너 번 보았는데 지나치게 오만하고 고집스러워 보였습니다. 학당에서 제일 공부에 빼어나다고, 여인도 지식을 갖추어 가내 경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하질 않나, 명나라에서도 우리 조선 물품을 높이 치니 공신 부인과 이복 오라버니를 통해 자신도 장차 무얼 대단하게 만들어 팔아보겠다고 하질 않나, 하여간 제 앞에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은 또 얼마나 또박 또박 하는지, 어른 무서운 줄을 모릅니다!”
흥분한 윤씨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큰소리에 소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씨를 보다가 “아앙!” 울음을 터트리며 소헌 대비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허! 어른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은 너도 마찬가지다. 어찌 이리 큰소리를!”
소헌 대비께서 기어이 한소리를 하고야 마셨다.
그러나 윤씨는 기가 죽지 않았다.
“옛말에 배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원군에게 지나치게 세가 강한 처가가 생기면, 장차 우리 자가께서 여송과 또 해외 개척지에서 하시는 일마다 명나라 황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말이 나올 것이 아니옵니까?”
“!”
“!”
“!”
“외척이 지나치게 강성하면 어찌 되는지는,”
“부부인, 그 입, 다무세요.”
소헌 대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살핀 윤서가 서둘러 경고하였다.
그러나 윤씨는 심중의 말은 반드시 뱉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대비마마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아.
소헌 대비의 눈빛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이전 같으면 이런 말에 과호흡이 올 정도로 과거의 비극에 발목 잡혀 계셨을 소헌 대비는 그러나, 소아를 어르는 동작을 계속하시며 깊은 심호흡 서너 번으로 감정을 추스르셨다.
그리고 윤서에게 다시 차분해진 시선을 주셨다.
“중전의 생각은 어떠하오? 저 아이 말이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은데.”
여송을 거쳐 들어오는 초석, 유황, 궁각, 백은, 향신료의 무역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해외 개척지가 저 북방 개척처럼 새로운 국토를 개척하는 것에다 경제적으로도 큰 이문이 달려 있어, 머지않은 장래에 그 관할을 두고 갈등이 첨예하게 불거질 것을 점치고 있었다.
이를 아시는 소헌 대비는 그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아들과 손주가 다치는 비극이 생길까 두려워하시는 것이다.
이문을 두고 다툼이 격해지면 결국 이향이 나서서 정리할 수밖에 없고, 그 와중에 수양 대군은 내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윤서도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원 역사에서 세종 승하 시기에 이미 문종은 병약하였고, 그래서 수양 대군이 명나라 공신 부인을 염두에 두고 한확과 혼인 동맹을 맺어 결국 권력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향이 건강하고, 역사를 아는 내가 있고, 수양 대군에겐 한명회란 변수가 여전하지.’
한명회의 수완 덕분에 수양 대군이 여송의 무역소와 조선 상인 거주 지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또 저기 앉아서 열심히 약과를 우물거리고 있는 은동이가 한명회의 여식과 이미 혼인하기로 수양 대군과 한명회 사이에 이미 약조되어 있다는 사실도 은밀하게 파악하고 있다.
수양 대군으로서는 한확과 한명회라는 든든한 동지를 얻는 셈이지만, 이전 역사와 달리 도원군과 은동이는,
어머니가 다르다.
이제 노골적으로 제 아들을 앞세울 욕심을 감추지 않는 저 윤씨도 변수가 된다.
‘권력과 큰 이문 앞에서는 형제의 의리도, 심지어 부자간의 천륜도 끊어지는데. 윤씨와 한명회, 한확과 공신 부인이 모두 제각기 꿈을 꿀 터이니.’
“부부인이 무얼 염려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또한 부부인의 말이 아주 일리가 없지 않은 말이라는 대비마마 말씀도 옳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윤서는 모두에게 적당히 좋고, 그리고 장차 홍위에게 가장 좋을 안을 내놓았다.
“왕가의 혼약은 신성한 것입니다. 한확이 다른 마음이 들었다고 해도 지금 와서 감히 거부 의사를 비추는 것은 불충한 일이니 감히 그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명나라 황실과 끈이 있는 한확의 여식이 도원군과 혼인하여 여송에 가게 되면 부부인이 염려하는 대로 여러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 혼인을 우리 측에서 무르자는 말씀이지요?”
뜻하는 바대로 파혼을 하게 될 것이란 기대에 얼굴이 환해진 윤씨가 손뼉을 치며, 물었다.
“무르다니요? 도원군이 여기 한양에 계속 머무르면 되는 것을요.”
“!”
그리되면!
큰아들을 지극히 아끼는 자가께서 과감한 행보를 벌이시기가 어려워지는데.
그리고 낯선 풍토에서 걸리기 쉬운 질병을 구실로 벌이려던 그 은밀한 모사는!
“그, 그것은 우리 자가께서 원하시지 않을 것이옵니다! 도원군을 얼마나 아끼시는데요! 저도 큰아들을 두고 차마 어찌 떠난답니까!”
갑자기 윤씨의 어조가 절절해졌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