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도원군과 부부인 윤씨 (2)
소헌 대비는 일평생 투기하는 모습을 밖으로 내보이신 적이 없다.
자신의 지밀 나인이었던 신빈이 십삼 년 동안 내리 6남 2녀를 낳을 정도로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을 때에 소헌 대비는 오히려 귀한 늦둥이 영응 대군의 양육을 신빈에게 맡기는 각별한 신뢰를 보이기까지 하셨다.
물론 이에 대해 윤서는 좀 다른 내막을 알고 있다.
지난 겨울 초입.
윤서는 자꾸 기력이 쇠하시는 소헌 대비를 위해 경복궁 후원에 있는 목욕탕 옆에 황토 찜질방을 지어드렸다.
편백 나무로 내부 벽을 대고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을 높이에 덧창을 낸 찜질방에서 얇은 옷을 갖춰 입고 몸을 덥히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시게 된 소헌 대비는 그곳에 마음에 드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기셨다.
주로 태종과 원경 왕후 소생의 정순 공주와 경정 공주, 폐서인 된 양녕 대군 때문에 덩달아 양인으로 전락한 수성 부부인, 효령 대군의 부인 예성 부부인 등 또래 왕실 여인들이었다.
흰 눈이 펑펑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내리던 날.
함께 찜질을 즐기던 분들이 이런 날 나돌아다니다간 낙상하기 십상이라고 모두 입궐하지 않은 날이었다.
윤서가 이들을 대신해 소헌 대비를 모시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현대의 찜질방에서 하듯 삶은 계란과 식혜를 나인에게 들려서였다.
느슨하게 쪽을 지어 올린 소헌 대비의 머리에 수건으로 양 머리도 만들어서 올려드리고, 뜨끈한 바닥에 누우신 대비마마 다리도 주물러 드리며 함께 덧창 밖으로 소아 주먹만한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바라볼 때였다.
소헌 대비께서 문득 말씀하셨다.
“죽어도, 좋을 것 같소, 중전.”
“···대비마마!”
이 좋은 날에, 왜!
“좋아서, 좋아서 그래. 좋고 평안해서. 북방에 가 있는 향이나 저 더운 남방에 나가 있는 유나, 커피 콩 키운다고 저 먼 섬에서 애쓰고 있는 임이나, 또 화포 제조술 가르친다고 북경에 가 있는 유나 모두 걱정스러워서 요새 잠을 잘 못 잤는데. 중전이 날 위해 지어준 이 뜨끈한 방에 누워 눈을 보고 있자니, 이만하면 할 만큼 하고 살 만큼 살았다 싶소.”
윤서는 소헌 대비께서 삶을 반추하고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서셨음을 직감했다.
노년기를 성공적으로 살다 삶을 마무리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적절한 순간에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으신다.
과거를 돌이켜 보되 서운함과 원한은 잊기를 택하고 대신 기쁘고 좋았던 순간만을 기억하려 하신다. 또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하여 버리거나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일상의 삶을 단출하고 정갈하게 꾸려가려 애쓰신다.
소헌 대비도 그 단계에 접어드신 것이다.
그래서 윤서는 적극적인 경청 자세를 취하며 질문을 드려 삶을 돌아보실 수 있는 실마리를 이어드렸다.
“사는 동안 무엇이 특히 좋으셨어요?”
“무엇이 좋았더냐. 혼인해서 좋았지. 아직 관례를 치르기 전이라서 함께 밤을 보내지 않아 먼발치에서 주로 전하를 뵈었는데. 그때 전하께서 밤마다 늦게까지 책을 읽으셨어. 그 낭랑한 옥음이 좋아서 밖에서 몰래 훔쳐 듣곤 했다. 그때는 그 풋풋한 설렘과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지난 삶을 돌아보시던 소헌 대비께서 신빈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었다.
“전하는 내가 신빈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막내 양육을 맡겼다고 생각하셨지만, 그것뿐이었겠느냐? 십 년 넘게 전하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신빈이 얄미워서 ‘너, 우리 염이 키우면서 한번 애 좀 먹어봐라.’ 하는 심사도 컸다. 그렇지 않니? 염이가 고뿔에라도 걸릴라치면 잠도 못 자고 얼마나 동동거리겠어.”
친정 멸문이라는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후궁을 질투하는 방법이 고작 ‘너, 고생 좀 해 봐라.’ 하는 의미로 늦둥이 아들을 맡겨 키우게 하는 심성을 가지신 분이기에, 소헌 대비는 후궁의 아이들을 해친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죽은 윤씨가 동궁의 아이들에게 손을 뻗는 것을 그리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하셨고, 일이 밝혀졌을 때조차 믿으려 하지 않으셨는데.
이런 소헌 대비에게 윤씨가 울먹이며 고하였다.
“도원군을 한양에 남기고 가라시는 말씀은 우리 자가를 전하와 상왕 전하께서 의심하신다는 뜻으로 세간에 비춰질 것입니다. 우리 자가를 믿지 못하시어 도원군을 볼모로 잡아두신다고 남들이 생각하면, 그러면 낯선 이방의 땅에서 두 분 전하와 조선을 위해 헌신하고 계신 우리 자가의 입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너무하시옵니다!”
“!”
“!”
얼핏 들으면 두뇌가 모자라 도를 넘는 발언처럼 들리지만, 나름 명분이 뚜렷했다.
윤서는 듣는 이에 대한 배려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다 하는 윤씨의 저 경솔함이 철저하게 계산된 행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철없이 막말하는 평소의 인상을 이용하여 윤씨는 아까 소헌 대비의 트라우마, 부친과 숙부님을 잃고 친정이 멸문된 깊은 공포를 자극하여 수양 대군과 자신도 심씨 일가와 동일한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대비마마께 교묘하게 호소하고 있다.
또 도원군이 한양에 남게 될 때 수양 대군에 쏟아질 세간의 의심을 들면서, 효성 지극한 아들이라면 마땅히 자처해서 여송 행을 고집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고 있다.
‘막말 속에 명분을 담을 줄도 알고. 많이 컸네, 윤씨.’
정의 공주도 똑같이 느꼈는지 윤서를 바라보았다.
노여움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저거 좀 우리 어마마마 앞에서 치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윤씨와 정의 공주가 모르는 점이 있다.
소헌 대비는 윤서에게 여러 형태로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과거의 공포가 공황 발작처럼 올라오는 증상을 상당히 이겨내셨다.
그리고 지금 이향의 치세에서 선친 심온과 숙부 심정이 복권되고 출사를 금지당했던 남동생 심회와 심미, 외조카 강희안 등이 관직에 등용되면서 드디어 친정 멸문의 비극을 이미 지나간 과거로 떠나보내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윤씨는 모르고 있다.
“······.”
“······.”
“······.”
교태전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무거워졌다.
윤서는 최 상궁과 조 상궁을 불러들였다.
“최 상궁, 은동이를 새벽이 노는 곳에 데려다주게. 은동아, 새벽이가 군기시 분원 작업장에서 경혜 누님과 함께 신기한 것 만들고 있을 거야. 가서 함께 놀거라.”
“주, 중전마마. 왜 우리 은동이를?”
“대비마마께서 내리실 말씀이 있으시네. 어린아이들이 듣기에 무거운 이야기네. 조 상궁, 소아를 유모에게 데려가게.”
“예, 중전마마.”
조 상궁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소헌 대비에게서 소아를 받아들었다.
“소아야, 할미랑은 이따가 또 놀자.”
소헌 대비는 조 상궁 품에 안긴 소아에게 자애롭게 웃어 보이신 후, 소아를 안고 어르느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셨다.
양 손에 약과를 쥐고 먹던 은동이는 모친 윤씨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먼니! 해벽이앙 노고 있으께요. 함마마마, 둥전마마, 고모님, 이만 문너가옵니다.”
하고 최 상궁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어른들만의 시간이자, 징치의 시간이다.
늘 자애롭게 웃는 표정이신 소헌 대비께서 엄격한 시선으로 윤씨를 바라보았다.
“!”
윤씨는 안절부절못하며 도움을 청하듯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윤서도 윤씨에게 지극히 실망하고 있었다.
의붓아들보다 친아들을 더 위하고 싶은 것이야 본능의 영역인지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그간 소소한 일들은 모른 척하며 따로 은밀하게 도원군과 예분 향주를 챙겨왔다.
도원군이 와서 윤씨가 해칠지 몰라 여송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건 그저 도원군이 새어머니를 지극히 싫어하는 마음에서 과장해 말하는 것이라고, 설마 목숨까지야 위태롭게 하겠는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명문가 여식과 혼인시키는 것도 싫고, 한미한 가문의 여식과 맺어준 후 여송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고 고집하다니.
그건 여송에서 일을 벌였을 때 문제 삼을 처가를 아예 만들지 않을 속셈이 아니고 무엇인가!
윤서가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시선으로 노려보고, 정의 공주조차 싸늘한 시선을 던지자 윤씨가 겁을 먹은 모양새로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 대비마마. 제가 또 무엇을 잘못 고한 듯합니다. 소첩은 그저 우리 자가께서 세간의 오해를 받는 것이 안타까워 도원군도 여송에 가야 한다고 고하였을 뿐, 결단코 다른 뜻은 없습니다.”
바들바들 어깨까지 떠는 모습이 일견 가여워 보였지만, 윤서는 이제 저 모습에 속지 않는다.
“그게 왜 세간의 오해라더냐?”
소헌 대비도 속지 않으셨다.
“예?”
“대군의 처지는 누굴 만나도 구설수에 오르기 쉽고, 그래서 매사 칼날 위에 올라선 것처럼 위태롭기에 스스로 행동을 삼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너는 현동 어미의 일을 들었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
“대, 대비마마!”
“오해라니! 세간의 오해라니! 나는 어미라서 유를 믿는다만, 세간이 어찌 유를 믿어! 그것이 왕가에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가로 치뤄야 할 업보임을 너나 유가 아직도 모른다면. 내가 설사 저 회랑 붉은 기둥에 머리를 꽝꽝 부딪치며 애원한다고 해도 주상이 너희를 지켜줄 수 없음을 왜 모르는 것이야!”
“!”
“!”
윤씨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의 공주도 처음 보는 모친의 강경한 모습에 놀라 “어, 어머니!” 하고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윤서는 소헌 대비처럼 등을 꼿꼿히 세우고 앉아 엎드린 채 연신 꺽꺽 숨을 몰아쉬는 윤씨를 내려다보았다.
“왕가에 들어온 지 오 년이나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본심을 숨길 줄 모르다니! 현동이가 설사 밉더라도 어여쁜 척을 했어야지. 감히 내 손주를 어디 한미한 집안에 찍어 붙이려고 하다니!”
“그, 그것이 아니오라, 소, 소첩은 우리 자, 자가를 위해서,”
“유를 위해서? 하! 어째서 명례궁에 드는 것들은 하나같이 괴물이 되는 것이냐! 어째서! 내 손주들 잡아먹으려는 괴물들이 되는 것이야!”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분노하시는 소헌 대비를 보며 윤서는 세종과 이향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원래 역사를 대비마마께 숨기려 하시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도원군을 해치려는 마음을 먹었다는 심증만으로도 저리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시는데, 우리 홍위의 역사를 아시면······.
묵직하게 가슴을 치는 과거를 지우며, 윤서는 대비마마를 위로했다.
“대비마마, 심기를 굳건히 하시고 노여움을 가라앉히소서. 자칫 옥체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예, 어머니. 생각만 한 것을요. 노여움을 가라앉히세요. 정말 이러다 큰일 나십니다.”
“아닙니다, 대비마마. 소첩 그런 무서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실은, 도원군이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처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도원군을 위해서!”
으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어라! 그게 어느 가문 규수냐?”
“그, 그것까진 모르나 연서를 여러 장 썼다가 찢었다가 썼다가 찢었다가 한 종이를, 모아두었습니다. 당장 가져오라 해서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