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왕실의 혼맥
도원군의 일은 윤서에게 여러 가지 감회를 일으켰다.
남몰래 원손 홍위 머리를 때릴 정도로 기고만장하던 악동이 세파에 상처 입은 소년으로 자라나 여인을 향한 연심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다.
그 세월 동안 우리 홍위도 의젓하고 굳건한 세자로 자라났으니 이제 곧 소녀를 마음에 담고 설렐 사춘기가 되겠지.
‘희아는 운명처럼 정종을 좋아했지만, 도원군을 보니 원래 역사에서 맺어졌던 인연이 이 역사에서는 달라지고 있어.’
도원군이 한확의 여식과 혼인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성종이었던 자을산군이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바뀌고 있다는 확실한 징표다!
이런 확신이 들자 윤서는 불현듯 이향이 몹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희아를 만나 정종의 누이 연화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군기시 분원 연구소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편전인 사정전으로 향했다.
월대 위 시위를 선 금군이 윤서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가운데, 낮에 늘 이향의 곁을 지키는 천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낮 동안 편전에 윤서가 찾아온 일은 처음이라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중전마마!”
“전하께서, 접견 중이신가?”
“호조 참의 정인지를 접견 중이십니다만, 중전마마께서 오셨음을 고하겠습니다.”
정인지와 접견 중이시라면 노비 세습제 폐지와 관련한 중요한 일일 것이다.
“아니, 아닐세. 공무 중이시니 나중에 협경당에서 뵙겠네.”
“공무 중이시나 중전마마께서 찾으신 공무보다 더 중한 일이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소서.”
천 내관은 그렇게 윤서를 만류하고 월대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른 후, 닫힌 문 앞에 서서 정중히 고하였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라 아뢰어라.”
정인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윤서의 마음을 헤아려 먼저 내보낸 후 들어오라 할 요량인가 생각하며 기다렸더니,
문이 양옆으로 벌컥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정인지가 아니라 이향이었다.
이향은 월대를 성큼성큼 내려와 윤서 앞에 서서 눈썹을 장난스레 치켜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쁜 일은 절대 아니고, 화급한 일도 절대 아니고. 무엇이오? 부인이 기뻐서 이렇게 낮에 날 다 찾아줄 일이.”
“호조 참의는요?”
“노비 세습제를 파하는 대신 황무지 토지 개간 권한을 보상으로 제공할 방안을 고려 중인데, 공법을 주도했던 정인지가 적임자라 지금 한창 적정 보상안을 계산해 보고 있소. 기밀인지라 다른 이 없이 홀로 계산해야 하니 한참 걸릴 것이오.”
정인지는 한동안 세종께 매일 불려가 화폐 발행과 적정 통화량 산정 등을 계산하더니, 이제는 이향에게 불려와 노비제 폐지 보상안을 계산 중이었다.
천재는 천재네, 정인지가.
“!”
‘천재’란 단어가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경숙 공주 선아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중전마마, 저는 부유한 자보다 학문이 월등하게 빼어난 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지금 조선팔도에서 머리가 가장 영민한 이를 꼽으라고 하면 신숙주와 정인지가 될 터이다.
선아가 이들의 자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
도원군의 혼사에 이어 선아와 금아, 홍위의 혼사가 이어질 것이기에 관심사가 자꾸 그 방향으로만 향하는 것을 애써 지우고, 이향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 경회루 쪽으로 거닐까요?”
“그거 좋소. 편전 안에 화롯불을 잔뜩 피워서 부인 말대로, 그, 뭐지, 음, 산소가 부족해서 머리가 좀 멍하던 차요. 그래서 바깥바람을 쐬고 싶던 차에 부인이 와 준 것이지.”
“그럼 우리 잠시 경회루에서 차담(茶啖)해요. 한 상궁, 약차 상을 보아 경회루로 내오게.”
“모두 오십 보 뒤로 멀찍이 따라오너라.”
이향은 뒤따르는 내관과 호위를 뒤로 물리고 윤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윤서는 작은 목소리로 도원군과 윤씨의 소식을 전했다.
“정말로 모두의 운명이 바뀌는 것 같아 안도가 돼요. 도원군도 스무 살에 요절하지 않을 것 같고, 또 정연화도 원래 역사와 달리 행복할 것 같고요. 도원군이 한확의 여식과 혼인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성종이라고 기록된 아이가 아예 태어나지 않을 것이니, 역사가 원래 가야 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 확실해지는 효과도 있고요.”
“음, 성종 다음이 연산군이라고 했던가?”
“예. 조선 최악의 폭군이라고 칭해지는 자이지요. 그러고 보면 한가의 여식은 정말 왕실에 아니 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라고 해도 죽일 것까진 없었는데 기어이 사약을 내려 죽게 했으니까요. 물론 가장 냉혹한 이는 세자까지 함께 만든 아내를 죽이라 명한 성종이지만.”
“그런 업보가 쌓여 연산군이 나온 것이오. 백성들만 가여운 노릇이지. ···우리 홍위 배필은 누가 되려나.”
이향이 문득 근심스러운 얼굴로 홍위의 배필을 걱정했다.
“도원군처럼 우리 홍위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 소녀가 있다면, 어지간한 가문이면 그냥 혼인시킵시다. 홍위는 날 닮았으니 부인처럼 사랑스럽게 밝고 정도 많고 단호할 땐 또 단호한 그런 현명한 소녀를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요.”
세종과 소헌 대비께서 간택으로 뽑아준 세자빈과 두 번이나 이혼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이향은 간택 자체를 그닥 신뢰하지 않았다.
윤서로서는 왕실 혼인이 소수의 몇몇 가문과만 서로 겹겹이 통혼하는 것이 실은 더 놀라웠다.
정종만 해도 고모가 효령 대군의 부인인 예성 부부인이고, 원 역사에서 정연화는 영응 대군의 부인이 되었었다. 또 영응 대군의 첫 부인 송씨는 단종의 비 송씨의 고모였고, 세조 이후 왕비는 한동안 거의 죽은 윤씨 일족인 파평 윤씨 가문에서 독식했다.
남이 장군이 누군가 했더니 태종의 딸 정선 공주의 손주로 지금 한창 개구지게 뛰노는 여덟 살 꼬맹이였고, 그림으로 유명한 강희안은 소헌 대비의 조카로 이향과 외사촌지간이었다.
그러니까 한양에 거하는 한 줌의 세도가와 왕족이 주로 모계를 통해 통혼하면서 견고한 혼맥과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쏠림과 국토 불균형 개발이 이렇게나 유서가 깊다.
‘그렇게 좁은 유전자 풀 안에서 거듭 혼인을 하니 후대로 갈수록 왕실 후사가 줄고 이상한 자들이 나오지.’
그리고 중앙 권력에서 배제당한 지방은 더욱 강경한 주자학의 사회로 경직되어 가고.
그래서 윤서는 이향에게 생각해 둔 바를 이야기했다.
“전하, 이참에 왕실 여 학당 문호를 전국으로 넓혀야겠어요. 빼어난 소녀들이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게 되면 정의 공주와 양 소용을 통해서 홍위 배필로 물색해 볼 수 있고요. 그럼 홍위도 또 계동이나 오산군 등도 다양한 소녀를 만날 기회가 있을 터이니 꼭 맞는 짝을 찾기가 쉬워질 거예요. 그러면 왕실 혼맥이 전국으로 확장될 수 있고, 또 그 소녀들이 여기서 혼인하지 않고 학업을 마치고 지방으로 돌아가면 활달하고 선진적인 한양의 문화가 지방에 이식되는 거니까. 두루두루 장점이 많아요.”
“여 학당보다 상급 학교 하나를 더 만들어서 희아나 선아처럼 빼어난 규수들에게 수학 기회를 주는 동시에 왕실과 혼인할 가문 물색용으로도 활용하는 안이라. 오호, 나쁘지 않소. 한번 추진해 보시오.”
이향이 과거 두 번이나 이혼한 경험이 이럴 때 아주 개혁적인 안을 쉽사리 포용하게 하는 이점이 있다.
우리 홍위 배필, 또 계동이, 금동이, 수복이, 새벽이 모두 전국에서 인연을 찾아볼 수 있겠구나.
윤서는 뿌듯하게 웃으며 계피를 듬뿍 넣고 끓인 꽃차를 따라 이향 앞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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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내음이 물씬 섞인 바람을 맞으며 경회루에서 이향과 함께 차담을 나눈 후 비로소 군기시 분원 연구소로 향했더니, 새벽이가 먼저 종종종 뛰어왔다.
“어먼니! 눈님이 가으쳐 줘서, 이거, 모형 만드었쪄요.”
새벽이가 윤서의 손을 끌고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책상 위에는 기다란 나무 판과 작은 나뭇조각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은동이는 벌써 윤씨와 함께 명례궁으로 돌아간 듯했다.
윤서를 본 희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새벽이를 흐뭇하게 눈짓했다.
동생이 얼마나 빼어난 아이인지 직접 보라는 듯 눈짓하는 희아는 요새 부쩍 숙녀티가 나며 무척 새초롬하게 아름다웠다.
“자 봐봐요, 어먼니. 이거 종이, 그냥 이여케 놓으면 이 나뭇조각 무게 때문에 푹 꺼져요. 그언데! 이 종이를 이여케 구부여 세우면, 봐봐요! 나뭇조각이 그대로 있어요. 그애서, 소자가 이 조각으로 이어케!”
새벽이는 흥분해서 침까지 튀기며 소리치면서도 까치발을 선 자세로 신중하게 나뭇조각을 아치형으로 끼워 넣었다.
서로 누르고 미는 힘의 조각들이 딱 맞물리자 아치 모양 다리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이가요. 여기 이어케 내리누으는 힘, 여기 미어온니는 힘, 그이고 또 옆에서 미는 힘이 다 균형을 이누는 거예요. 이여케 놓으면 음, 긴 다이도 놓을 뚜 있고, 또 건문도 높이 온니 쭈 있쪄요. 아이, 신나!”
이렇게 신이 나서 수다스럽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윤서는 새벽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새벽이가 두 팔로 목을 감고 “눈나한테 배웠쪄요. 눈나 너무 멋쪄.” 하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윤서도 새벽이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 새벽이도 멋져. 가르쳐주는 걸 다 이해하려고 매일 열심히 노력하는 우리 새벽이도, 희아 누님처럼 멋져.”
윤서의 칭찬에 새벽이가 귀까지 발갛게 물을 들였다.
윤서는 새벽이를 안은 채 구조물을 살피며 아치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주었다.
“이런 구조물을 아치형 다리라고 해. 이렇게 놓은 구조물은 천 년을 넘게 버틸 수 있어. 경주에 가면 불국사란 절에 부처님이 계신 석실이 이렇게 타원형 아치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신라 시대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오백 년 이상 아주 우아하게 버티고 있어. 그러니까 새벽이가 누나한테 서로 밀어 내리고, 밀어 올리고 수평과 수직으로 지탱하는 무게 분산 원리를 잘 배워서, 이 다음에 돔 모양으로 천정이 높은 건축물도 만들고, 또 한강에 다리도 멋지게 놓자.”
“응! 그언데 아치가 뭐에요, 돔은 또 뭐에요, 어머니?”
“응, 이 둥그런 것이 아치야. 돔은 이렇게 생긴 지붕과 천정이고.”
윤서는 새벽이를 허리에 걸치도록 한 손으로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붓을 들어 파리의 개선문과 로마의 콜로세움 건물, 그리고 석굴암을 그려주었다.
이미 이 그림을 본 적 있는 희아는 새벽이에게 그림을 넘겨주었다.
새벽이는 신이 나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동동 흔들며 석굴암 석실 천정 모양으로 나뭇조각을 짜 맞추는 데 이내 집중했다.
“요새 도원군이 자주 왔었다고?”
윤서가 묻자 희아가 무엇을 물으려고 하는지 안다는 듯 눈을 반짝 빛냈다.
“연화 누이한테 직접 물으세요, 어머니. 지금 여 학당에서 기초 산학을 가르치고 있을 시간이에요.”
정연화는 원래 소원했던 대로 왕실 여 학당에서 기초 산학을 가르치고 있다. 여 학당이 경복궁 서북쪽에 있는지라 희아의 궁과 아주 가까워서, 희아는 시누이 연화와 시어머니 민씨를 자신의 궁 널찍한 별채에 옮겨와 사시도록 하였다.
처음에 이 결정을 들었을 때 불편하지 않겠냐는 윤서의 우려에 희아는 고개를 흔들며 “공주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경우 없으신 분들은 절대 아니에요.” 하고 말했었다.
“그럼 같이 가볼까? 그 반에 금아가 공부하고 있지? 금아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실은 그 반에 송씨 가문의 아이, 이전 역사에서 홍위의 짝이 되었던 아이도 공부하고 있다.
도원군의 혼사가 불거지니, 홍위가 혼인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홍위 배필이었던 아이도 공연히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초조함이 들었다.
우리 홍위가 좋아할 만한 소녀인지. 전에는 쑥스러워서 그런가 너무 차분해서 조금 침울해 보였는데 지금은 많이 밝아졌는지.
“아유, 중전마마께서 연통도 없이 이리 갑자기 가시면 양 소용도 그렇고 고모님도 불편하실 거예요. 미리 연통하시고 내일이나 모레 가시는 것이 좋겠어요.”
늘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던 희아가 이렇게 넓게 배려할 줄 알게 된 것도 정종의 사랑과 더불어 성품이 자애로운 민씨 부인의 아낌없는 애정 덕이리라.
사랑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가지는 특유의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희아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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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윤서는 유 소용, 양 소용, 정 소용, 민 숙의와 함께 여 학당의 기초 산학 수업을 참관하였다.
말이 나온 김에 왕실 여 학당의 상급 학교 건립도 정의 공주와 함께 왕실 차원에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기초 산학 수업은 마침 비례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옹주님, 손가락이 모자라시면 제가 만들어 드린 거 꺼내어 셈 하셔도 괜찮아요.”
숫자 개념이 약한 금아가 두 손의 손가락을 모두 굽혔다가 폈다가 하며 애를 먹자 정연화가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하였다.
내수사에 갇힌 명례궁 궁인들 조사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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