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수양 대군의 탄식 (3)
“대체 소자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은동 어미마저 죽이려 하는 것입니까!”
예상했던 대로 아들은 아내가 전처의 아들을 해치려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윤서가 정리해 준 ‘죽음의 수용 5단계’ 중 첫 반응인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고약한 점은 아내의 죄를 부정하기 위해 이미 인정하고 죽은 전처의 잘못까지 모두 권윤서의 모함으로 왜곡하는 비틀린 심성이었다.
‘본시 저런 아이였던가.’
보위에 오른 후 자신은 사족(士族)을 심하게 고신한 적도, 죽인 적도 없다.
부왕 태종의 시대 정부 관료와 공신에게 가해진 고문은 이미 ‘숙청’이란 결론을 정해놓고 혹독한 고통을 가해 그 결론을 인정하게 하는 수단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건국 초 불안정한 왕권을 공고히 세우기 위해 피치 못한 처형이었고, 그 과정에서 외가와 처가가 멸문 지경에 이르렀기에, 그 피 웅덩이 속에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며 부왕께서 “너는 성군이 되거라!” 간곡히 당부하신 바를 일평생 따라왔건만.
세종은 추국청에 아들을 앉혀놓고 그 앞에서 그 흉악한 것에게 고신을 가하여 스스로 죄악을 자복하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리되면 아들의 입지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세종은 제 손으로 역모를 저지르지 않은 아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하였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접하였을 때 인간은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비로소 수용에 이른다고 하지. 넌 지금 부정과 분노의 단계여서 내 말한 바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느니라.”
“아바마마!”
“기괴한 지식이라고 하였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중금속이니, 세균이니 하는 것들이 허황하다고 하였느냐? 금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네 전 부인이 한 대로 처방하여 은동이 입 속에 쳐 넣어봐야 네가 믿을 것이냐!”
“아바마마아!”
“무슨 원수를 졌냐고? 네가, 감히, 어찌 그런 말을 해. 향이가 조금만 더 마음이 강퍅했더라면, 자신이 군주임을 내려놓고 아비가 되고자 하였더라면 네놈은 벌써 현동 어미와 함께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
“명례궁에 가서 네 눈으로 직접 보거라. 네 그 알량한 부인이란 것이 네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고도 결론이 같다면!”
“아바마마!”
“너 같은 아들은, 없는 걸로 치겠다!”
최후의 통첩을 날린 세종이 융복의 소맷자락을 차락 털어낸 후 천막에서 나가버렸다.
처음 목격하는 부왕의 진노에, 수양 대군은 넋이 나간 듯 천막의 입구만 바라보았다.
“형님, 현동이의 말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중전마마 탓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도 모함이 아니라 죗값을 받으신 것이고요. 기괴한 지식이 아닙니다, 형님. 중전마마의 지식 덕분에 말의 농양에서 채취한 침으로 인간 두창을 예방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냉철해지세요. 형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현동이와 은동이를 위해서도 냉철해지셔야 합니다.”
안타까운 어조로 당부한 광평 대군이 부왕을 부축하기 위해 천막을 달려 나갔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음악은 연주하고, 예조 관원은 왜 모두 나와 환영하였던가.
어째서!
세상이 다 짜고 자신을 조롱하는 것만 같아 수양 대군은 바닥을 쾅쾅 치며 절규하였다.
*
*
*
어떻게 명례궁으로 돌아온 것인지.
현동이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 혼이 빠져나간 텅 빈 눈으로 명례궁 높다란 솟을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
수양 대군을 맞이한 것은 주인에게 엎드려 인사 올리는 무수한 노비들과 함께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대단한 미인 한 무리였다.
그러나 수양 대군의 넋 나간 시선은 요염하고, 청순하고, 가련하고, 비파가 썩 잘 어울리는 다채로운 미인을 무심히 비껴, 대체 무슨 모함을 당한 것이냐 위로해야 할지, 대체 무슨 짓거리로 이 사단을 내었냐고 냅다 후려쳐야 할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어린 부인을 찾아 헤매었다.
“자가, 이들은 대비마마께서 자가께 맺어 주시기로 결정하신 측실들이옵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수양 대군에게 대비전의 지밀 최 상궁이 다가섰다.
“저 미인들이 어찌 명례궁에 뽑혀들어오게 된 지는 도원군께서 상세히 고할 것입니다.”
“···부부인은, 어디 계시는가?”
“부부인은 금족령을 받으신지라 내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실 수 없습니다.”
“···못 나오면, 내가 들어가면 될 것을.”
“아버님!”
도원군이 안채로 향하려는 수양 대군의 옷 소매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곡히 고하였다.
“먼 길 항해 해 오시느라 존체며 의복이며 모두 바닷바람에 절여져 있습니다. 욕탕에 온천물 길어온 것을 데워두라 하였으니, 먼저 피로를 씻어내시며 소자의 말씀을 들어보소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엎드려 애원하는 아들의 부탁 따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양 대군은 “너 같은 아들은, 없는 걸로 치겠다!” 선언하신 아바마마의 옥음까지 무시할 용기는 없었다.
그 말씀을 하실 때 부왕은 정말로 자신을 자식으로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이셨다.
“하아.”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처음부터 다 차근차근 되짚어봐야 한다.’
이대로는 한양의 기반은 물론 저 먼 땅에서 겨우 쌓아 올린 기반까지 싸그리 잃을 수 있다.
수양 대군은 갑자기 비단 도포에 밴 바다 비린내가 참을 수 없이 역겨워졌다.
*
*
*
명례궁 바깥채에 딸린 향나무 욕탕에서 이천 온천에서 공수해 온 물에 몸을 담갔을 때.
수양 대군의 목욕 수발을 든 이는 새로이 들인 미인 측실이 아니라 장자 도원군이었다.
도원군은 소금기에 찌든 부친의 머리카락을 비누 거품으로 씻어내면서, 자신이 겪은 계모의 만행을 낱낱이 고하였다.
“처음에는 괜찮았습니다. 어딜 가든 요새 후추나 강황, 정향이나 육두구 가루 뿌린 음식은 흔하기에 아버님께서 보내주신 향신료가 든 음식도 즐겁게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난히 강황과 육두구의 향이 강했던 날, 소고기를 먹고 밤새 토사곽란에 시달렸습니다.”
학당의 수업에서 토사곽란이 났을 경우 설탕과 소금을 연하게 녹인 물을 계속 마시라고 배웠기에 그대로 행하였다고 하였다.
먹고 한 번 탈이 난 음식은 계속 탈이 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향신료가 든 음식을 자제하려고 하였더니, ‘부부인’이 계속 먹으라고 윽박질렀다고도 하였다.
“이상하지요, 아버님. 소자가 마지 못해 조금 먹고 남긴 음식은 ‘부부인’이 보란 듯 다 먹으며 소자를 혼을 내었는데, 혼만 내면서 소자가 남긴 음식을 그대로 둔 날이 정확하게 네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에만 소자는 밤새 또 죽을 듯이 괴로운 토사곽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날짜와 음식을 소자, 다 기록해 두었습니다.”
“······.”
“뜰에 서 있던 미인들을 보셨습니까? ‘부부인’이 저의 거처에 넣었던 노비들입니다. 여인뿐 아니라 남색을 즐기는 자라면 기꺼이 품을 미남도 여럿, 제 거처에 생겨났습니다.”
“!”
욕탕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아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수양 대군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렇게 눈을 부릅뜬 수양 대군에게 눈물범벅이 된 아들이 울부짖었다.
“오죽하면 제가, 중전마마께 가 살려 달라 빌었겠습니까. 아버님! 오죽하면, 제가!”
“···네가, 누구한테 가서, 뭘, 빌어?”
수양 대군은 방금 자신의 귀로 들은 내용을 믿을 수 없어 떠듬떠듬 반문하였다.
“···누구한테, 뭘, 빌었다고?”
“중전마마께 가서 빌었습니다. 여송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예분이와 한양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고. 제가 엎드려 빌었습니다. 할마마마께서 소자에게 늘 목숨이 위태로울 땐 중전마마께 가면 살 수 있다 일러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것한테 가서, 빌 수가 있더냐! 어떻게! 네 어미를 죽게 한 것이 누군데!”
“중전마마께 빈 그날로 궐에서 숙수가 나와 저와 예분이에게 따로 밥을 지어주고, 내의가 와서 이제 아주 소량의 향신료나 조금 상할 기미가 있는 고기를 먹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배앓이를 하는 제 증상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제게, 어머니가 있다면, 그게, 누구입니까, 아버지! 그게, 누구입니까!”
“이, 이 못난 자식이!”
“살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제게 부디 오래만 살라 명하셨습니다. 소자,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살아,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습니다!”
“으아아아아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동에 수양 대군은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물을 끼얹는 바가지와, 귀한 동백유 비누 조각과, 몸을 말릴 때 쓰는 부드러운 수건과, 피부를 위해 바르려고 둔 화장품 용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아버님! 제발, 고정하소서!”
도원군이 팔을 잡으며 애원하는데도 욕탕 내 모든 물건을 다 때려 부시던 수양 대군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부인, 부인! 이 꼴 안 봐, 얼마나 좋으시오!”
차라리 의식을 놓아 이 믿기지 않은 현실을 다 잊고 싶었지만 사내가 되어, 대군이 되어 그럴 수는 없기에.
수양 대군은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옷가지를 집어 걸치고 내궁으로 달렸다.
어느새 달빛이 무정하게 빛을 뿌리는 가운데 내궁으로 통하는 대문에 들어설 때였다.
“자가께서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확인하였으니, 소첩 여한 없이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 부인이 내궁 뜰 한가운데 홑옷 차림으로 머리를 풀고 맨땅에 엎드려 있었다.
봄이 왔다 해도 밤은 여전히 써늘한데.
서리가 얇게 내린 바닥 위에 날카롭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는 칼 한 자루를 놓아둔 채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려 있던 여인은 이슬 같은 눈물을 매달고 애달픈 어조로 수양 대군을 향해 고하였다.
“자가의 명예에 누가 되었으니 소첩, 이 자리에서 죽음으로 속죄하고자 하옵니다. 하오나,”
“······.”
수양 대군은 달려들어간 그 자세에서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서너 걸음 떨어져 있는 부인을 귀신 보듯 바라만 보았다.
정말로 귀신처럼 창백한 낯으로 부인이 단호하게 고하였다.
“향신료 건만은 사실이 아닙니다. 어여쁜 계집들과 낭창한 사내들을 모아 도원군 처소에 넣은 것은 사실이나, 향신료는 아닙니다. 그것만은 오해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믿지 않기에, 의붓아들조차 믿지 않기에, 두말없이 죽어 제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부인은 보기에도 서늘한 칼날을 제 목에 대었다.
살을 파고든 칼날을 따라 붉은 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너무 반듯한 의붓아들이 중전만을 따르기에 속이 상해서, 그래서 좀 흐트러지라고, 색사를 알고 나면 재물도 필요할 터이니 명례궁 재산과 도원군 봉작 재산 관리도 맡고 있는 제게 겉으로라도 순종하지 않을까 싶어, 그래서 미인들을 집어넣었습니다.”
“······.”
“그래도 자가의 반듯함을 닮아, 도원군은 그것들에게 손끝 하나 아니 대었지요. 이것이 죄라면 죽겠습니다.”
“······.”
“하오나, 향신료는 아닙니다. 여송에 가 살아야 할 몸이기에, 자가께서 목숨을 걸고 개척하신 그곳을 물려받아야 할 명례궁의 장자이기에, 미리 적응하라고 주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니, 두말없이 죽겠습니다.”
“······.”
부인은 칼날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홍옥 보석처럼 앞섶에 물들이며, 어린 부인은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수양 대군을 향해 하직 인사를 올렸다.
사뿐, 우아하고 처연한 자태로 꿇어 이마를 조아린 부인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자가, 부디 만수무강하시어, 바라시는 바, 모든 뜻을, 이루소서.”
말을 끝마친 부인이 칼을 향해 손을 뻗어, 그대로 목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왕가에서 내쳐져 가문도 자신도 죽을 운명을 앞둔 윤씨의 목숨 건 도박이었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