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도원군의 혼인 (3)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와, 와! 함마마마, 어먼니! 정말, 예뻐요!”
“오오! 헝님 혼인 치른다고 한양에서 붉은 비단이 다 사라졌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봐.”
붉은 비단과 색색의 등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명례궁 풍경에 새벽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하고, 금동이는 담장과 지붕을 장식한 어마어마한 비단의 양을 가늠했다.
“화창한 날에 참으로 잘 어울리게 장식을 했구나.”
소헌 대비도 흡족하신 듯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불과 사흘 전까지도 왕족 내에서 명례궁의 혼인식에 참석할지를 두고 주저함이 많았다.
부부인 윤씨의 추문이 있었고, 수양 대군까지 그 의미가 모호한 ‘총독’이란 직위를 받게 되자 명례궁이 두 분 전하의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해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명례궁 앞엔 길례를 축하하러 온 왕족들 마차가 서로 얽혀 윤서와 대비마마가 탄 마차가 들어서는 데 한참 시간이 걸릴 만큼 축하 인파가 많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반전이 된 것은 수양 대군의 노련한 처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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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수양 대군은 이향에게 독대를 청하였다.
암적색 단령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편전에 든 수양 대군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하였다.
“전하, 여러모로 왕실의 위엄에 누를 끼쳐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비로서도 도원군에게 면목이 없고 참담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여 부처께 천 번을 절하며 고심한 끝에, 신 결단한 바가 있나이다.”
수양 대군은 도원군의 혼인을 기념하여 모든 노비를 당장 속량하겠다고 말하였다.
“두 분 전하께서 사해 만민을 포용하시는 고귀한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신하로서, 또 아들과 동생으로서 저는 두 분 전하의 뜻을 받자와 여기 조선에서나 또 장차 총독으로 부임할 여송과 새로운 섬에서나 노비를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날 이향은 협경당에 돌아와 윤서에게 말하였다.
“보상안을 공표하기 전에 먼저 노비제 폐지를 확고히 지지하고 나선 첫 사례요. 대군에다 조정 중신이기도 하니 그 파급 효과는 클 수밖에.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유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고 말이오.”
“!”
이향의 긴 머리를 빗겨주고 있던 윤서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놀라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 와 홍위가 무사히 장성하여 세종과 이향의 치세를 잇는 성군으로 장수하는 것 외에, 그리고 희아와 금동이, 새벽이, 소아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외에 윤서가 소명처럼 품은 바 하나가 노비제의 폐지이다.
이향의 교지로 그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고는 하나, 노비 소유주 절대 다수가 왕족과 공신 명문가이기에 앞으로 끈질긴 반대 움직임이 있으리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수양 대군이 가장 먼저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즉각 실행에 나서다니!
그것이 자신에 대한 불리한 여론을 단숨에 반전시키기 위한 정치적 처세술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고 해도, 결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님은 분명하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이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부군의 사기를 북돋고 불리한 전세를 반전시키려는 의도로 행해진 것이었다고 해도 그 선언으로 북부군이 승리하여 미국에서 노예제가 철폐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처럼,
수양 대군의 명시적 지지와 실행이 많은 이들의 지지와 수용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이 아이러니 앞에서 윤서는 가만히 빗을 내려놓고 이향의 너른 등에 뺨을 기대었다.
“······.”
“······.”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에 둘은 그 자세로 오래 침묵하였다.
둥둥.
북소리처럼 울리는 이향의 심장 박동 소리가 본능적으로 치미는 수양 대군에 대한 경계심을 둔화시켰다.
반사적으로 올라온 반감이 가라앉자 그 자리에 한 줌의 연민 섞인 이해가 자리하였다.
‘군주에게 충성을 증명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수양 대군은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거듭거듭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행동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전하와 상왕 전하의 신임을 조금이나마 되찾겠지.’
그러나 나는 죽을 때까지도 그를 향한 의심을 놓을 수 없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가 짙은 진리처럼,
심리의 극단은 늘 정반대의 추구를 의미한다.
저리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은 그만큼 다 쥐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표현이다.
상왕 전하와 형님 전하, 나아가 세상의 인정을 이토록 받고 싶어 하는 수양 대군의 열망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역사 속 그 권력을 향한 폭력과 반역으로 개화할 수 있음을, 윤서는 안다.
그리고 윤서가 아는 것을 이향은 더욱더 잘 알고 있으니.
침묵으로 공유한 이해의 끝에서 윤서는 조용히 속삭였다.
“두 분 전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응, 어마마마께서 유의 앞날을 무척 근심하셨는데, 참으로 다행이오.”
세종께서 안도하시리란 말은 하지 않았다.
억눌린 욕망은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으셨던 세종께선 요새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를 다시 통독하며 역사상 위대했던 군주들의 숨은 욕망과 그 비틀린 발현과 투사을 행간에서 읽어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향과 윤서만큼이나 세종께서도 수양 대군의 강력한 열망이 불러온 이 긍정적인 결과를 기뻐하심과 동시에 미래를 경계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이다.
이향에게 고한 대로 수양 대군은 다음날 도원군의 혼인날을 기해 무조건 노비를 속량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양민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택하는 노비들에겐 혼인 다음 날 바로 명례궁을 나갈 수 있게 하고, 여전히 명례궁과 궁방에 딸린 전답과 염전 등에서 고용되어 있고자 하는 노비에게는 하루 쌀 두 되분의 월봉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방문한 많은 나라에도 노비는 분명 존재하나 우리 조선에서처럼 대대로 세습되는 노비는 그 수가 희귀하다고도 말함으로써 국왕의 노비제 폐지안을 확고히 지지하고 나섰다.
이에 맞추어 부부인 윤씨도 신랑 신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불사를 도원사에서 크게 열고, 보릿고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곡식 백 석을 도원군 이장과 도원군부인 정연화의 이름으로 희사하였다.
이 덕분에 도원군의 혼례날인 오늘 명례궁에는 왕실 종친이 모두 성장을 하고 모여들었다.
그리고 불사를 구경하고 절 음식을 두둑히 얻어먹었던 백성들이 정연화의 본가 정릉에서 명례궁에 이르는 길을 가득 메우고 도원군의 혼인을 축복하고 있다.
부부인 윤씨가 내놓은 곡식 덕분에 한동안 굶주릴 걱정을 상당히 덜게 된 거지패들도 청계천 시냇물에 깨끗하게 세수하고 쑥부쟁이처럼 지저분한 머리도 손으로 빗어서 짚세기나 헝겊으로 단정히 묶고 찢어진 북이며 소고를 둥둥 쳐대며 신나게들 놀고 있다고, “혼인 잔치가 아니고 거지 잔치야요.” 하고 일찍 궁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온 매금이가 이미 귀띔해 주었다.
“어마마마! 중전마마! 오셨습니까!”
마차에서 내려선 소헌 대비와 윤서를 수양 대군과 부부인 윤씨, 먼저 도착해 있는 여러 대군과 종친이 나와 맞이하였다.
왕자의 대례복인 암갈색 단령을 입은 수양 대군이 소헌 대비를 부축하였다.
“인파가 몰려 마차 대는 것이 늦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마마마.”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와 도원군의 혼인을 축하하고 있으니 자신과 명례궁의 처지를 그만 근심하란 뜻이었다.
그러자 저 길 끝까지 늘어진 마차와 인파의 행렬을 죽 훑으신 대비께서 흡족한 표정으로 수양 대군의 손등을 토닥이셨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니 우리 현동이와 연화가 아주 잘 살겠어.”
“어마마마께서 부처님께 빌어주신 덕분입니다. 중전마마, 우리 도원군이 오늘 경사스러운 혼인을 올리게 된 것이 다 중전마마 덕분입니다. 못난 아비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서까지 깍듯하게 치하하는 수양 대군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촉촉하게 젖어 있다.
“도원군 성품이 반듯하고 다정하고, 또 정연화는 서글서글하게 밝고 명랑하니 서로 잘 아끼며 살 것입니다.”
원하였던 혼사는 아니지만 적어도 도원군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라는 듯 어룽어룽 눈물을 담고 있는 수양에게 윤서도 진심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아직 신랑 신부 혼례 행렬은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서부터 둥둥 흥겹게 북을 치는 박자에 맞춰 피리와 대금 소리 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윤서는 소헌 대비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갔다.
명례궁 너른 뜰에 귀빈을 모시기 위한 붉은 장막이 여러 개 세워져 있다.
신랑과 신부가 마주 서서 절을 하는 동뢰연 연회 상은 벌써 뜰 한가운데 정갈하고 정교하게 차려져 있었다.
금동이와 새벽이는 계동이와 수복이 등 왕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윤서는 대비마마를 모시고 내외명부 최고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중앙 장막으로 갔다.
곧이어 “상왕 전하 납시오!” 하는 소리와 함께 영응 대군의 부축을 받으신 세종께서도 뜰 안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나, 상왕 전하께서는 아니 오실 줄 알았는데.”
태종의 소생 경정 공주가 소헌 대비에게 놀랐다는 듯 속삭였다.
도원군에게 저지른 흉악한 짓에도 불구하고 수양 대군이 윤씨를 내치지 않아 상왕 전하께서 진노하셨다는 소문이 파다했음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아들 욕하는 소리를 기뻐할 어머니는 세상에 없다.
“도원군이 그냥 손자입니까? 우리 경혜 공주 다음으로 사내 손주로는 첫 혼인인데, 당연히 오셔야지요.”
소헌 대비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상왕 전하께서 여러 종친과 함께 자리를 하시자, 궐 대문이 소란해지더니 점점 커지는 음악 소리와 함께 신랑 신부가 도착했다.
혼주 역할을 맡은 안평 대군이 먼저 들어서고, 그 뒤를 도원군과 사자들이 뒤따라 들어오고, 곧이어 붉은색 신부복을 입은 정연화가 수모의 부축을 받아 들어왔다.
악공의 연주가 고요하고 장중하게 흐르는 가운데 동뢰연이 시작되었다.
윤서는 아직 수염도 안 난 앳된 얼굴로 차분히 표주박에 든 술을 정연화와 나눠 마시는 도원군을 바라보았다.
표주박 너머로 정연화를 바라보는 도원군의 눈동자에는 풋풋하고 따스한 애정이 넘실거렸다.
‘다정하게, 오래오래, 살렴.’
네가 운명을 딛고 네 의지로 배필을 택하였듯 너의 짧았던 수명도 바뀔 것이니, 도원군. 부디 오래도록 연화와 행복하길.
윤서는 고개를 돌려 어느새 세종 곁에 앉아 있는 홍위를 바라보았다.
마침 홍위도 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홍위는 윤서의 역사에서 도원군의 짝이 한확의 여식이었고, 도원군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요절했음도 들어 알고 있다.
그리고 홍위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신의 배필이었던 이에 대해서는 함구하길 부탁했다.
“그 여인을 택한 것이 자의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께서 서둘러 맺어주신 누님과 영양위와 달리, 그 여인과 저는 필시 서로를 만나 불행하기만 하였겠지요.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아요. 설사 이 생에서 그 여인과 다시 혼인하게 된다고 해도 그 불행의 그림자를 안고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럴 때 홍위는 이향을 아주 빼닮아 있다.
단종을 버리고 수양 대군에게 협력했던 역신들을 이미 지나간 역사 속 인물로만 치부하고 이 생의 역사에서는 충신으로 거느리리라 다짐했던 이향처럼,
우리 홍위도 누굴 만나든 과거의 그림자 없이 오롯하게 이 생의 여인으로만 만나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윤서는 이향에게조차 홍위의 비극을 자세히 말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송가의 여식이 그 불행한 왕비였음을 홀로만 알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선을 마주한 홍위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찬란하게 밝은 봄날의 햇살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