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319
319화. 세종과 홍위의 북방 순행 (2)
상왕 전하께서 세자 저하와 함께 북방 순행을 떠나신 후.
매일 아침 편전에서 개최되는 경연에서 본격적으로 세재 개혁을 논하기 시작했다.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를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유교의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의 내용이 정책 협의체적인 성격으로 변모한 것은 조선의 대내외 사정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적으로는 노비와 각종 천역 세습 신분이 폐지되면서 양천의 구분이 없어진 신분제의 변화가 있었고, 농본주의가 폐지되면서 상공업이 여기저기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북방 영토 개척과 장차 신대륙 개척을 추진하면서 자연스럽게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은 적극적으로 해외 무역과 교류를 넓히고 있다.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제도와 법률을 필요로 한다.
경연이 이렇게 성격을 달리하게 된 것은 작년부터였다.
작년 세종과 이향이 김종서와 황희 등 조정의 중신과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화폐 제도와 국가간 무역의 이점 등 경제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강론하는 경연에 윤서도 홍위와 함께 참석했었다.
윤서는 경연 내내 십오 세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십일 세기 미래인에 의해 갑자기 이식된 새 경제 체제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한계와, 또 때로는 놀라울 정도의 통찰과 혜안을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천추전에서 세종과 이향, 광평 대군과 홍위에게 달라지는 시대에 필요한 바가 무엇일지 현대의 체제를 들어 상세히 설명했다.
이를테면 국가가 고용 주체가 되어 빈민을 구제하며 동시에 경제 규모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을 논했던 날 윤서는 천추전에서 고하였다.
“조선에서는 지금까지 성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국가의 일들을 무상 노동력을 징발하여 행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무상 노동력 제공도 조세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국가의 고용이 경제 규모를 키운다는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일테면 미국이란 나라에서 큰 공황이 닥쳐 모두 일자리를 잃고 경제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국가가 테네시 강의 댐 건설을 주도하여 노동자와 여러 건설 회사에게 임금과 건설 비용을 지불하였고 이에 따라 민간에 돈이 돌면서,”
윤서가 토목 공사를 통해 국가가 인위적으로 경제 규모를 키우는 예를 상세히 설명을 드리면, 세종은 경연의 토론 내용과 윤서의 말을 종합해 집현전에 명하셨다.
“경제 발전에 있어 국가의 주도적 역할에 대해 학문적 개념으로 정립하고, 그 개념에 따라 지금 조선의 현실에서 국가가 주도할 수 있는 산업군을 조사하고, 이 산업의 진흥을 위한 제반 사회 여건을 조사하라!”
그러면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이석형, 최항 등 집현전의 여러 학사가 지금까지 정립된 지식과 사례에 더해 새 경제 이론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경제 발전안을 제시했다.
“경이 공법을 주도했었고 산학의 계산 능력이 탁월하니, 이 발전안에 소요될 국가 예산을 추산하여 제시하라!”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세종은 호조 참의 정인지를 따로 불러 집현전에서 제시한 산업의 진흥에 필요한 예산을 추산하라고 명하셨다.
날로 늘어나는 호조의 다양한 예산안에 더해 미래의 예산까지 추산해내느라 오십 대 중반의 정인지는 육십 대 후반의 김종서보다도 더 늙어 보였다.
‘세종께서는 정인지에게 이렇게 복수를 하시는구나.’
과로사가 머지 않을 정도로 가차 없이 부림을 당하는 정인지를 통쾌한 눈으로 지켜보며 윤서는 생각했다.
경제뿐 아니라 교육과 정치 등 사회 전반의 현안에 대해 이런 과정을 단계별로 거쳐서 최종 도출된 결론은 전폭적인 세제 개혁의 필요성이었다.
국가의 재정이 튼실해야 노비제 폐지로 양민이 된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겨울이면 얼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는 북방을 살만한 곳으로 변모시킬 수 있으며, 아직 석기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저 먼 땅에 제 2의 조선을 세울 수 있다.
한 마디로 국방, 과학, 교육, 복지 등의 모든 분야에 앞으로 많은 재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를 그 근간부터 다시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든 세금 수취 체제의 개혁은 기득권 계층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오고, 자칫하면 국체가 흔들릴 정도의 위기까지 불거질 수 있다!
이를 잘 아시는 세종께서는 조세 제도 개혁이라는 시대의 과업을 금상 이향에게 전적으로 넘기시고 당신께서는 홍위를 데리고 북방 순행에 나서셨다.
새 시대는 새 국왕과 새 인재가 열어가라는 뜻이시자,
이미 일부 진행된 경제 개혁의 성과를 직접 점검하고, 가장 강대한 군사력이 모여 있는 북방의 민심을 미리 살피고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조세 제도 개혁안 논의 첫날.
그간 논의된 안을 최종 정리하여 개혁안을 집대성한 집현전을 대표하여 직제학 성삼문이 한 뼘 두께로 정리된 증빙 자료를 참석한 신료에게 제시하며 개혁안의 포문을 열었다.
“두 분 전하의 지도하에 집현전에서 만든 세제 개혁안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일원화(一元化)’입니다. 현재 우리 조선의 세제는 다원화 체제로 각 기관에 일정 토지의 수조권을 부여하면 해당 기관이 할당 받은 토지에서 생산된 소출을 직접 거둬 경비로 쓰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조직장 개개인의 성품과 편의에 따라 거둬들이는 조세 곡물의 양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와 더불어,”
자료에는 중앙과 지방의 각 조직이 나눠 가지고 있는 토지 수조권 현황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국가가 세운 유학 교육 기구인 향교조차 5~7결의 학전(學田)과 15구 정도의 노비를 지급받아 운영비를 삼고 있었다.
“토지는 한정적인 재화이기 때문에 그 소유를 반드시 명확히 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조선은 개국 초부터 공신전을 비롯 여러 명목으로 토지를 하사하였고, 지금 조정의 중신에게도 녹봉과 더불어 수십 결에서 수 결까지 토지의 수조권을 하사하는 바. 이것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온갖 비리를 낳으면서 동시에,”
이 말을 하자 좌중의 시선이 슬그머니 원로 자격으로 참관 중인 황희 대감에게 향하였다.
황희의 아들 황치신이 죄를 지어 몰수당하는 아우 황보신의 기름진 과전을 자신이 받은 과전과 바꿔치기를 하다 걸려 파면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
하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평생을 일하다 집에 있으려니 기력이 날이 다르게 쇠하는 중에 조세 개혁안을 논할 것이니 다양한 실무를 이끈 원로로서 참관하여 의견을 제시하란 어명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더니.
차라리 상왕 전하 따라서 북방이나 유람할 것을. 지금쯤 영변의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지천일 것을.
후회가 머리 끝까지 올라왔지만 황희 대감은 언제나 그래왔듯 검버섯조차 없는 흰 얼굴에 온화한 낯빛을 지어내며 성삼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여 모든 세금을 다 일원화하여 중앙에서 일괄 수조하고, 수조한 예산을 필요 부처에 배정하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하! 그러려면 필요 인력이 대체!”
“아, 그에 대한 개혁도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지방의 수령이 조세 수조권까지 감독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조세의 수취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 따로, 광범위하게 필요합니다!”
“···그럼 관료에게 지급된 토지의 수조권도 없어진다는 말이오?”
“물론입니다, 호조 참의 영감! 나라에서 거둬서 지급하면 깔끔할 것입니다.”
“······!!”
“······.”
토지의 수조권을 가진다는 것은 실은 그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에 대한 인신 지배권까지 가지는 것을 의미했다.
‘노비도 다 속량한 차에.’
토지 수조권까지 잃게 되면 지금까지 누려온 절대 지배자로서의 권세를 어디서 느낀단 말인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까지 노비를 가졌던 신료들이었기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인 인지상정이었다.
그러나 경연을 통해 함께 공부하며 도출한 개혁안이기에 대놓고 반발할 신료는 없었다.
‘어서 북방의 개척이 본격 시작되고, 또 그 신대륙 섬의 개척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속량한 노비 열 구당 일 결씩 불하받은 개척, 개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
“조선은 지금까지 농본주의인지라 토지와 사람에 주로 조세를 부과하였고, 시전의 상인, 여러 분야의 장인, 염전, 광산 등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공업이 발달하며 다양한 형태의 직업과 사업이 생겨나는고로, 이러한 임금 노동자와 사업 소유주의 소득에도 세금을 매겨야 하며, 또한 인천과 부산 등지에서 일어나는 해외 상인과의 교역에도 세금을 메겨야 할 것입니다!”
성상문이 설명하는 개혁안을 주의 깊게 듣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따지던 이들은 마침내 개별 임금, 사업 소득에도 ‘소득세’를 부과하는 근대적 개혁안을 논하기 시작했다.
이향은 어좌에 앉아 항목별로 빈틈없이 근거 자료를 제시하며 일목요연하게 개혁안을 발표하고 있는 성삼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바마마께서 유독 아끼신다 하였더니.’
윤서에게서 역사를 듣고 난 후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을 두루두루 아끼시던 부왕께서 성삼문과 이개, 하위지, 허조의 아들 허후 등을 은근히 많이 아끼셨다.
윤서는 홍위의 스승이었던 데다가 자신이 살았던 홍성의 본가가 성삼문의 외가가 있던 곳과 아주 가까웠다고, 시대를 뛰어넘는 동향 사람이라는 구실로 성삼문을 유난히 좋아하고 그 부인과 식솔까지 챙기지만 어디 그 이유뿐이랴.
성삼문은 개혁안을 만드는 내내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적인 이해관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잘 이해 가지 않는 ‘관세’ ‘소득세’ 등의 새 지식을 상왕 전하나 광평 대군에게 묻고 또 물어,
(그러면 그 질문을 전달받은 윤서가 관련한 경제학 지식과 역사적 지식, 현실 경험 등을 더듬어서 다시 답하고, 아바마마께선 지금의 조선 현실을 고려하여 조율한 대답을 다시 성삼문에게 다시 전달하는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었다.)
스스로 완벽하게 이해한 후 동료 학사와 조정 신료들에게 해당 개념을 전달하고 개혁안을 만들었다.
‘과연 새 조선을 함께 만들어갈 인재로다.’
저리 치열하게 시대의 요구를 담아낼 줄 아는 헌신과 열정에 죽음을 불사할 충성심까지 지닌 인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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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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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제법이오. 고르게 잘 닦여 있어서 서너 시진을 타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오.”
개성에서 황주까지 올라갔다가 동북쪽 함경도로 향하는 순행 길.
근위군이 떠멘 연을 타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던 기존의 어가 행렬과 달리 세종은 이번 순행에서 세 마리 말이 끄는 어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이 도로도 우리 갑사와 전문 팽배군이 만든 것인가?”
“예, 전하. 북방에 상주하는 우리 군인들이 땅을 고르고 모래를 깔은 후 흙을 덮고 그 위에 구운 벽돌을 박아 넣으며 만든 길입니다.”
상왕 전하를 호종 중인 병조판서 김종서가 뿌듯한 얼굴로 답을 올렸다.
명나라 토목보의 변을 기회로 북방의 국경을 오서산 인근 환인과 공험진까지 밀어올린 후.
기병 갑사 일만 명과 팽배군(칼과 방패를 든 보병) 일만 명의 거취가 문제가 되었다.
일부는 여송에서 그 남쪽 호주를 개척할 임무를 가진 유응부를 따라갔지만, 그것도 수군에 합류할 정도의 수영과 항해 기술을 익힌 경우라야 가능했다.
매월 종 9품에서 정6품에 이르는 월봉을 받는 이만 명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세종과 이향은 윤서가 말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를 기억해 냈다.
천 년도 훨씬 전에 서양의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로마의 군인들은 또한 정복한 곳까지 이어 도로를 건설하고 물을 끌어오는 수로와 다리를 짓는 건설 전문 공병이기도 해서, 로마 시대에 깐 도로와 수로, 다리가 윤서 시대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 조선에 도로가 없어 늘 운송이 문제가 아니냐. 게다가 호주에 가서 우리 백성이 살 집과 관리들이 일 볼 관공서도 지으며 동시에 돌도끼 들고 쳐들어올 원주민을 막아 문명인으로 키워낼 군사도 장차 필요하고!”
그리하여 조선 팔도의 직업 군인은 모두 각종 건축 기술을 익혀 전투가 없을 때는 도로와 다리, 성곽의 건설, 광산 개발을 위한 발파 등에 종사하라는 어명이 내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화승총을 쏘고 방패 잡고 칼 휘두르던 용맹한 군인들인데, 곡괭이와 삽 들고 길 닦으라고 했을 때 불만이 참 컸겠습니다. 어떻게 설득했다던가요?”
말을 타고 오는 내내 개울마다 세워진 다리와 번듯하게 잘 닦인 길에 감탄했던 홍위가 김종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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