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335
335화. 홍위의 시대 (1)
양위한 이래 단 둘만 있는 사석에서조차 ‘주상’이라 부르며 지나칠 정도로 예를 다했던 상왕께서 금상에게 닥치라고 소리치실 때.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세자가 서리하다 볼기를 맞았다더란 소식은 마방 앞에 있던 구사 등 시종꾼들의 입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소식은 궁중에 끈을 대 긴밀하게 동향을 살피는 윤사로의 부인 정현 옹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정현 옹주는 근자에 부쩍 가까워진 이복 언니 정의 공주에게 광희문 밖에 조성 중인 의녀 양성소 현장을 안내하고 있었다.
건축 기간을 이 년으로 잡은 의녀 양성소는 이제 막 건물 지반을 단단히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기 동쪽에 기숙사가 들어설 것이고, 여기 중앙에 삼 층으로 교실과 선생의 집무실이 들어설 것이고요. 그리고 서쪽에 한 번에 백 명까지 수용 가능한 식당과 조리실이 들어설 것이에요.”
“그럼 숙식도 모두 제공한다는 것인가? 무상으로?”
정의 공주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신의 남편 안맹담은 술이 과해 아바마마께 자주 꾸중을 듣지만 전조 고려 공민왕의 왕비 정비 안씨와, 우왕의 왕비 현비 안씨를 배출한 전통의 명문가 후손답게 서예에 조예가 깊고 불경의 해석에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이복 여동생 정현 옹주의 남편 윤사로는 똑같이 고려 시대부터 명문 거족인 파평 윤씨 가문의 후손이면서도 인색하고 탐욕스럽게 남의 재산을 가로채 부를 일군다는 혹평을 받는 인사였다.
또한 끝까지 후궁 첩지를 받지 못한 궁인 상침 송씨의 소생이란 이유로 정의 공주는 그간 여동생을 멀리해왔다.
“예! 무! 상!으로요!”
정현 옹주는 중전 권씨가 자신을 불러 미모가 있는 여종 출신 소녀들에게 기초 의술을 가르친 후 해외에 노예로 팔려 하는 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중전이 의녀 지망생들은 전국의 관노비 출신 소녀들이 대부분일 터이니 기숙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더이다. 하! 운영비를 대는 것은 우리 윤씨 가문인데 감 놔라 배 놔라, 아주 유세가 대단하지요.”
“그렇다고 네가 손해를 볼 리 있니?”
“물론입니다, 언니. 우리 영천위(윤사로)가 전국에 의원을 세우고 여기 출신 의녀를 채용할 거라지요. 학당에 다니면서 글을 익힌 자들은 아프면 전처럼 굿을 하거나 부적을 쓰지 않고 약방을 찾으려 들잖아요. 겸사겸사 약재도 함께 유통하고요.”
“역시. 너희 부부는 정말 다 계획이 있구나!”
정의 공주가 감탄 반 경멸 반을 섞어 대답하며, 고등 여 학당을 떠올렸다.
기부 입학금이 운영비의 주가 되고, 모자라는 부분은 중전이 개인 재산을 내어 운영하는 그 여 학당의 운영 방식에서 중앙 명문 세족의 여식 위주로 선발하자는 자신의 의견은 사십 명 정원 중에서 겨우 다섯 명을 관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언니 정소 공주가 죽은 후 유일한 공주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세자 오라버니와 대군 동생들의 애정을 독차지했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따로 학당을 세울까.’
그런데 그러려면 재산을 상당히 내놓아야 하는데.
재물은 내어놓기 싫지만 중전이 가진 영향력과 명성은 누리고 싶은 마음에 정의 공주가 입술을 깨물 때였다.
“저, 옹주 자가!”
정현 옹주의 집에서 부리는 여인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와 은밀하게 무엇인가를 보고했다.
말을 듣는 옹주의 얼굴이 점점 환하게 피어났다.
“언니. 하아! 이거 참. 하늘이 우리 왕족을 버리지 않으시군요!”
“······?”
“세자가 중전이라면 꺼뻑 죽는 시늉이라도 할 정도로 지극하잖아요. 중전도 세자를 업고 안고 키워서 친아들보다 더 극진하고요. 그러니 세자의 일탈은 곧 중전 탓이 아니겠습니까?”
“본론만!”
“세자가요, 언니.”
같은 무품이면서 어지간히도 공주 노릇을 하네 속으로 반감이 들면서도 정현 옹주는 마방 앞에 있었던 일을 고했다.
“!”
“중전 탓입니다. 중전이 그 김포 농장의 노비들 기를 얼마나 높여놨으면!”
“···노비는 이제 없지 않느냐.”
“그게 문제지요. 입혀주고 먹여주며 살뜰하게 돌봤고 필요하면 소처럼 팔아 당장 현금을 만들 수 있는 재산이 하루 아침에 오히려 월봉을 주고 거둬야 하는 짐덩이로 변한 것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무수합니다. 다만 서슬 퍼런 두 분 전하 때문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할 뿐.”
“땅으로 보상을 받지 않느냐?”
“하! 언니!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보상 따위를! 황무지를 개간해 농토로 소유하는 것이야 지방관에게 언질만 하면 되었던 것을요.”
“······.”
“게다가 궁방전을 받은 왕족들도 이제 그 땅 몰수되게 생겼잖아요.”
“그게 왜 몰수야. 직접 일 할씩 거둬들이던 수조권을 내수사에서 회수해서 거둬들이고 그만큼을 은자로 나눠주겠다는 거지.”
“어머나, 언니. 말이 수조권이었지 거의 소유지나 다름 없었던 것을 이제 겨우 소출의 일 할만큼만 딱 나눠준다니, 그게 몰수가 아니면 뭐게요.”
맞는 말이었다.
공주며 옹주, 대군과 군, 후궁 등 봉작되면서 궁방전을 하사받았던 왕족들 모두 수조권을 회수당하는 일에 지금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하급 세무 관원을 대대적으로 선발하며 전국적으로 공신전부터 관아에 딸린 토지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하였으니 왕족만 대놓고 반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자가 볼기를 맞은 일과 실추된 왕족의 권위를 연결지어 문제 삼으면.’
그러면 왕족의 위기라고 들고 일어설 이들이 윗대 왕족도 많을 것이고. 그러면 아바마마도, 오라버니 전하도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우실 터.
정의 공주가 하나씩 짚어볼 때였다.
“언니, 언니는 입궐하셔서 아바마마께 말씀드리세요. 중전이 공자께서 정치의 근간이라 하신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의 덕목을 어지럽히고 있다고요. 나머지는 제가 좀 움직여보겠습니다.”
“······.”
“언니!”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정의 공주가 짐짓 엄하게 꾸짖었지만, 말하는 자신도 듣는 정현 옹주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알겠어요. 언니는 여쭙기나 하세요. 저는 신중하게 제가 할 일을 할께요.”
왕실이 주축이 되어 최근 은행(銀行)이란 것이 생겨났다.
윤사로나 박종우, 정인지 등 자산가도 은자 오천 냥에서 일만 냥까지 출자를 하긴 하였지만, 은이 돌아다닌다는 뜻의 은행이란 명칭이 무색하게 왕실 은행에는 은이 적었다. 그래서 적은 자본금으로 겨우 화폐의 통화량 조절 정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천에서 나오는 은의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고 무엇보다 일본 대내전의 땅에서 도주 다다량 가문과 합작으로 개발한 은광에서 어마어마한 은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언니! 왕실 은행에서 고리대 업무도 시작할 거래요. 내수사에서 기존에 장리를 삼 할에 놓았는데, 은행에서는 이 할로 할 것이라지요.”
“······!!”
윤사로를 비롯한 거부들이 재산을 늘리는 주요 수단은 이자가 오 할에 이르는 고리대였다.
그런데 다량의 은을 확보하여 자본이 충분해질 왕실 은행에서 이 할의 고리대 대부 업무까지 하게 되면!
“일이 어찌 될지 알겠지요? 언니는 중전이나 좀 묶어 놓으세요. 폐비까지야 못 만들겠지만 이번 일을 잘 키우면 협경당에서 얌전히 반성하게 만들 수는 있잖아요.”
은행에서 저리로 서민과 상인에게 필요 자금을 빌려주어 농업과 공업, 국제 무역을 전략적으로 키워낸다는 전하의 시책 뒤에 중전이 있다는 말이 돈다.
중전의 손발이 묶인다고 전하의 금융 시책이 폐기되지야 않겠지만, 흔들림 없이 추진하시는 그 굳센 어심이 동요하실 것이고, 그러면 세월과 함께 흐지부지 될 수도 있는 법.
자고로 거부를 쥔 자들과 척을 지는 정책이 성공한 사례가 고금에 거의 몇이나 되던가.
문제는 중전이 조선 팔도를 움직일 거부 중 하나이자, 새 제품을 만들고 해외에 상단을 부려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 비상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
정의 공주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공주로 누려온 많은 것들이 함부로 두 분 전하의 반대편에 서지 못하게 하지만, 노비를 시켜 오 할의 장리를 놓아 재산을 불려온 입장이기에 정현 옹주의 제안을 거절할 처지도 아니다.
그래서 침묵으로 중립을 표명하면서 뒤로는 유리한 측에 힘을 싣기로 계산을 할 뿐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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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볼기를 맞다니! 사대부 따위도 은자나 면포로 대신 매 값을 치르거늘! 국본이 되어!”
“···송구하옵니다.”
“너, 너, 그 엉덩이에 맞을 곳이 어디가 있다고!”
“할바마마.”
세종은 국본이 엉덩이를 맞을 정도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 일이 기가 막힌지, 바라볼 때마다 대견하고도 애달픈 손주가 맞았다는 것이 가슴이 저미는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면서도 진노를 멈추지 않았다.
“아바마마, 소자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가,”
“흥! 네 그 잘난 마노라 노비들이 벌인 이 지경을 보아라! 대체, 응, 시대가 달라졌으면 생각도 달라져야지, 원! 중전이 천지 분간을 못하고 세자도 노비도 끼고만 돌아서!”
“할바마아!”
불똥이 어머니에게로 튀자 홍위가 일어나 세종의 품을 파고들었다.
금동이가 기막힌 일을 저지른 후 꾸짖는 어른들의 화를 풀기 위해 곧잘 하는 어리광이었다.
“어딜 안기는 것이냐! 네가, 국본이 되어서! 대체!”
“할바마마, 소손은 할바마마의 가르침을 깊게 새겼을 뿐입니다.”
“무어라!”
“할바마마께서 글자를 만드신 것이 억울해도 하소연을 하지 못하는 백성을 가엾게 여기셔서가 아니옵니까. 그만큼 백성을 아끼시는 그 성심을 소손이 보고 배운 것입니다.”
“하! 무슨 말만 하면 그놈의 문자 만든 것이 만세에 남을 성군의 치라고 입을 막는 제 어미를 닮아서! 내가 그런 것에 넘어갈 것 같으냐?”
“하오나 정말로 제가 그때 세자임을 밝혔으면 범이와 창오, 산국은 맞아서 죽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관은 실록에 ‘사관은 논한다. 세자의 실책으로 가여운 백성이 셋이나 죽음에 이르렀다.’고 적었겠지요. 이는 저의 치부이자 나아가 아바마마의 치부이기도 하옵고 우리 왕실의 치부가 될 것이옵니다.”
“하! 이제는 사관까지 끌어와서!”
“할바마마아. 소손이 행복하였습니다.”
“!”
“소손이 태어나서 그날만큼 즐거웠던 적이 처음이었습니다.”
“!”
“!”
세종의 무릎에서 내려온 홍위가 다시 무릎을 꿇고 조근 조근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달빛이 휘영청 너무 밝아서 진흙을 칠하는데, 말캉하고 서늘한 감촉이 너무 좋았어요. 태어나면서부터 원손이었고, 그래서 뒷간까지 내시를 달고 다녀야 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다른 아이들처럼 걸리는 것 없이 놀아보았어요, 할바마마.”
“···홍위야.”
“조선에서 제일 귀한 아이로 컸지만 혼자 자유롭게 놀러 가 본 적이 없고, 조선 팔도를 다스릴 것이라지만 그 조선 팔도 중 어딜 자유롭게 가 본 적이 없었어요.”
“······.”
“······.”
“저는 그날 세자가 아닌 아이 이홍위로서 행복하였습니다.”
세종과 이향의 눈이 무겁게 맞물렸다.
이제야 상왕과 금상은 권윤서라는 미래인이 조선에 와 키워낸 세자가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실감하였다.
이향은 부인이 밤안개가 자욱하던 늦가을의 밤에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몸을 섞고 열기를 식히기 위해 덧창을 열었더니 달빛 아래 안개가 짙었다.
그러자 윤서가 쿡 웃더니 추억을 하나 풀어놓았다.
“저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매일 열두 시까지 하는 야자가 지겨워서 친구랑 밤 아홉 시에 담장 넘어서 도망친 적이 있었어요.”
공부가 지겨워서 친구랑 두 바퀴가 달린 자전거라는 기물을 훔쳐서 도로를 마구 달렸다고 하였다.
흰 안개가 구름처럼 자욱하고 속도를 높여 달리면 달릴수록 서늘한 밤기운이 온몸에 젖어드는데, 인적 없는 시골길을 괴성을 지르며 ‘미친년’처럼 달리다가 길 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한 알씩 훔쳐서 우적거리고, 또 다시 달리고 달리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왔다던가.
“그러고 났더니 가슴 저 밑까지 뻥 뚫리듯 시원해져서 다시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시험을 세 문제만 틀렸어요. 그날의 일탈이 숨구멍이 되어 준 것이지요.”
단 두 달의 세자 시절을 거쳐 곧장 왕위에 오르신 아바마마와 달리 자신은 어릴 적부터 세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그나마 자신은 다섯 살까지 대군의 아들로 편하고 재미있게 잠저에서 컸지만 홍위는 정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손이었으니.
부인의 말처럼 매사 긴장하고 살아야 하는 세자의 삶에서 그날의 일탈이 우리 홍위에게는 행복이 되었구나.
한 치 어긋남 없이 완벽한 세자 노릇을 하다가 부인 문제에서 어깃장을 놓으면서 숨을 좀 쉬었던 자신과 달리 우리 홍위는 어릴 적부터 제 나름대로 숨 쉴 구멍을 찾아내었구나.
뿌듯하고 대견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이향과 달리, 세종은 권윤서가 말한 ‘근대’라는 새 시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근대의 시작.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눈으로 홀로 독서를 하면서 집단과 전통에서 독립된 개인이 전면으로 등장한 것이 근대라고 하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겠다고 제 목소리를 높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평등’이라고 했던가.
그 자유와 평등이 폭넓게 보장되었던 사회에서 온 자가 키워낸 세자가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다스리는 조선은 그리하여 정말로 다르겠구나!’
경제와 정치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상과 윤리까지 달라지는 조선이 우리 홍위 치하에서 생겨나겠구나.
그것을, 용인할 것인가.
세종은 힘주어 다시 금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