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341
341화. 징벌의 새해 (2)
윤사로가 의금부 도사에게 추포되어 의금부에 구금되던 날.
곧 이어 서강과 마포, 노량진 일대의 선주 중 세곡미의 운송에 관여했던 이들이 모조리 의금부에 잡혀가고,
정창손과 예문관 봉교 이효춘, 성균관의 박사 김오겸, 성균관의 생원 유해소 등의 유학자 무리와, 태종의 서자 익녕군 등도 줄줄이 의금부에 잡혀 들어갔다.
“추국청이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선정전 앞에 차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경복궁에는 아직 어리신 아기씨들이 계셔 그러한 것일까요?”
“상왕 전하 치하에서는 아무리 중한 죄를 저질렀어도 사족(士族)이 형을 받아 죽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금상께서 상왕 전하께서 머무시는 경복궁 연생전과 멀리 떨어진 창덕궁에 추국청을 차리게 하신 것이 아닐런지요?”
“하오나 모두 잡아들이란 추포 명령은 상왕 전하께서 직접 내리셨다고 합니다.”
삼십 년 넘게 이어지던 정치적 태평성대의 평온이 깨어지자 중앙의 정치권과 왕실 종친 사회에서는 두 분 전하의 진의를 둘러싸고 혼돈에 빠졌다.
반면에 도성의 백성들은 사대문과 시장 어귀에 놓인 철전 서푼짜리 한 장의 호외지를 읽고 분통을 터트렸다.
인양된 수송선의 판화 그림이 삽화로 들어 있는 호외지는 일부러 배를 침몰시킨 서강 선주 김이도 일당의 만행과, 그 만행에 희생된 선원 두 명과 인양 과정에서 실종된 이범이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니, 그 우리 세자 저하께서 그렇게 아끼신 아이가 이번에 죽었다고. 아이고, 세상에. 죽은 아이도 가엾고, 우리 저하는 어쩌신댜. 아이고.”
“지어낸 말도 아니고 그저 우리 저하랑 서리하다가 잡힌 이야기를 한 것인디. 그런 것이 송구해 죽을죄면, 그러면, 응! 기근에 굶어 죽는 이들이 수두룩할 때 세곡미를 바다에 빠친 것들은 어찌해야 하는 거여!”
이렇게 한양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한 날.
상왕께서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달린 어차를 보내 황희를 창덕궁의 선정전으로 불러들였다.
지난 가을 영의정 직에서 물러난 후 아끼는 후배 김종서의 새해 문안까지 마다할 정도로 정치권과 담을 쌓고 있던 황희가 상왕의 부름으로 창덕궁에 들자, 세간의 시선이 온통 선정전으로 향하였다.
“나의 치세의 시작에 경이 있었으니, 내 치세의 종결에도 경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여섯 달 만에 불려와 엎드린 노 신하에게 상왕께서 말씀하셨다.
“부왕께서는 양녕을 폐세자하시고 나를 세자로 책봉하신 지 두 달 만에 양위하시어 왕위 승계를 굳건히 하셨지만, 그러시면서도 군권만은 계속 쥐고 계셨소.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추측이 분분하였지만, 경만은 부왕의 진의를 알 것이다.”
“예, 전하. 신이 어찌 태종 대왕의 그 넓으신 뜻을 모르겠나이까?”
황희가 모를 리 없었다.
태종께서 신왕을 허수아비로 세워두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군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세자로 있던 양녕 대군이 혹여 불온한 무리들과 작당하여 난을 일으킬 때 당신의 손으로 피를 보고자 하는 의지였다.
조사의를 부추겨 자식의 왕권을 해하려 하신 태조 대왕과 달리, 태종께선 모든 피를 당신의 손에 묻히고 흠결 없는 성군의 치세가 가능한 조선을 아들에게 물려주시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면 오늘 내가 저승길로 편히 걸어가고 있는 경을 다시 불러들인 이유도 알겠구려.”
“예, 전하. 신 전하의 어심을 받들다가 죽겠습니다.”
필요한 숙청을 망설이지 않는 결단으로 왕권을 반석 위에 올리신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상왕께서도 당신의 손으로 구시대의 매듭을 종결짓고 금상께 새로운 성군의 치세의 반석을 깔아주시겠다는 어지(御旨)였다.
눈에 띄게 위엄이 대단한 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황희는 정성껏 먹을 간 후 붓을 들어 조목조목 윤사로 무리, 익녕군 무리, 그리고 정창손 무리의 엄벌을 주청하는 상소를 적었다.
[윤사로는 임금의 사위로 귀한 신분과 부를 누리면서도 탐욕을 절제하지 않고 오히려 간악한 무리의 죄를 뒤에서 사주한 점은 죽어 마땅한 중죄이옵니다.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급변하는 시류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혼돈을 왕실의 인척으로 잠재우려하기는커녕 그 혼돈과 탐욕을 조장하여 이익을 취하고 백성의 고귀한 목숨을 여럿 상하게 하였으니 그 무리들과 함께 엄벌에 취하여 만세의 경고로 삼으소서.
(중략)
익녕궁은 태종 대왕의 서자로 왕족으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관청에 딸린 공노비와 내수사에 딸린 사노비를 먼저 속량시키며 모범을 보이신 두 분 전하의 뜻을 받들기는커녕, 있지도 않은 왕실 위엄 훼손을 운운하며 두 분 전하의 아름다운 사이를 곡해하고, 또한 세자 저하의 간곡한 애민의 마음을 폄하하였습니다.
이것이 고귀한 신분의 특권만 누리면서 왕족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는 이행하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용렬함을 넘어 신하 된 자로서 감히 전하의 시책에 맞서는 강상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중략)
정창손의 무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백성이 평안해진 이 시대를 ‘성현의 가르침에서 천년을 떨어져 있는 타락의 시대’라는 유언비어로 순진한 유자(儒子)와 젊은이를 선동하였습니다.
정창손은 특히 상왕 전하께서 백성을 위해 만드신 문자와 학당에서 가르치는 신지식을 평소 부정하며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 모두 타고난 자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르침이 있을 뿐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라 이르시며 바른 가르침을 통해 수양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마저 부정하는 이단의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제멋대로 왜곡한 얕은 지식과 사특한 혀로 불온한 선동을 일삼는 정창손의 무리를 엄벌에 처하시어 시류를 바로잡으소서.]
상왕 전하의 치세를 함께 완성한 노 신하의 상소 내용이 알려지자, 세상은 이번 숙청이 상왕 전하의 의지임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승하하신 태종께서 왕권에 도전하는 자는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숙청으로 천명하신 것처럼,
양위하신 상왕 전하께서도 세습 노비가 없는 새 신분 질서와 왕족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공평한 조세의 원칙, 그리고 신지식을 배척하는 구시대적 작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의지를 천명하시자 도성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윤사로와 익녕궁, 정창손 무리를 엄하게 처벌하고, 세곡선과 수송선을 고의로 가라앉힌 탐욕의 무리를 모두 밝혀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대 착오적 작태에 철퇴를 내리쳐 새 시대의 문을 굳건하게 열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세로 자리잡고,
그리하여 상왕께서 창덕궁 선정전 앞 추국청에서 몸소 죄인들을 심문하며 드러난 죄상을 바탕으로 금상의 새 시대를 뒷받침할 새 법령을 만들어가시는 가운데.
조선은 이제 결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흥분과 설렘, 일각의 좌절이 온 도성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흐름의 발단이 된 세자 홍위는 정작 이 흥분과 좌절의 격정에서 물러나 있었다.
“배가 인양된 후 자선당에서 홀로 식사할 땐 소채만 먹는다고 들었다.”
배가 인양되고, 혹독한 심문을 거쳐 처벌의 윤곽이 서서히 정해지기 시작한 2월 초..
윤서는 협경당의 서재에서 홀로 홍위를 대면하고 있었다.
지난 이십 일 남짓.
홍위는 동생들에겐 여전히 좋은 형님이자 오라버니였고, 협경당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엔 별다른 내색 없이 골고루 찬을 비웠다.
하지만 집현전에서 올린 법률안을 상세히 연구해보고 싶다, 장탄복이 만들고 있는 증기기관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어서 옆에서 그 원리를 배우고 싶다, 또 할바마마께서 만드신 악기를 박연과 함께 연주하며 현을 개량할 점을 찾아보려 한다 등 여러 구실을 대며 식사를 함께 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내관 자선을 통해 알려오기 일쑤였고.
그런 날이면 자선당에서 혼자 상을 받아서 고기와 생선, 심지어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수유(酥油, 치즈를 이르는 말)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물린다는 사실을 윤서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홍위는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자가 아닌 소년 이홍위로 즐긴 여흥의 여파가 새로운 시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자부심보다, 끝내 세자일 수밖에 없어서 범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을, 그리하여 이제 앞으로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혼돈과 슬픔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향은 여러 번 홍위를 불러 어둠이 내린 궐 안을 나란히 걸으면서 위로하였다.
“홍위 너의 잘못도, 또 범이란 아이의 잘못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범이는 백성된 마음으로 친우이자 세자인 네게 폐가 될까 고심하였고, 그에 대한 나름의 판단에서 일을 행하다 그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홍위야. 네가 기억하거라. 범이의 그 마음을. 그리고 너의 치하에서는 범이의 죽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 아이를 추모하는 방식일 것이야.”
“예, 아바마마.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아직은 저를 향해 웃던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으니 시간을 조금 더 가지겠습니다. 몸 상하지 않도록 유의할 터이니 심려 마옵소서.”
그렇게 의젓하게 답을 하였지만 여전히 채소만을 먹으며 홍위는 수척해져갔다.
보다 못한 윤서는 홍위를 불러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다.
“바다에는 물길이란 것이 있어. 느껴보았니?”
윤서는 부모님과 함께 갔던 당진의 왜목마을 바다에서 느꼈던 물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서해는 보통 얕은데 거긴 조금만 헤엄쳐 들어가도 깊어서, 거기서 혼자 몸을 세우고 팔다리만 이따금 휘저으며 떠 있는데, 뭔가 차가운 것이 몸을 스윽스윽훑고 지나가는 거야. 뱀 같기도 하고, 비단천 같기도 한 그런 차가운 것이.”
그것이 왜목마을 앞바다를 흐르는 물길이라고 보트를 타고 구조를 하는 해상구조 요원이 알려주었다.
물길이 세서 잘못하면 순식간에 저 멀리 떠내려가니 조심하라는 경고에도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홀로 수영하고 있었을 때.
십 대 후반의 남학생 하나가 까르르 까르르 애교 있게 웃는 여자친구를 튜브에 태우고 윤서가 수영하고 있는 쪽으로 헤엄쳐왔다.
물속에 똑바로 서 있는 윤서의 머리를 보고 그곳이 발이 닿는 얕은 곳이라 착각했던 남자아이는, 몸을 세웠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자 순간적으로 공포에 빠져 여자친구가 탄 튜브를 버린 채 미친 듯이 홀로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가고.
그 잠깐의 사이 울부짖는 여자아이를 태운 고무 튜브는 물길에 실려 저 멀리 먼바다로 떠내려갔던 것이다.
“구조 요원이 그 증기기관 원리가 구현된 전기 보트를 타고 가서 그 여자아이를 건져왔지. 바다의 물길이 그렇게 세고 빠른 줄 처음 알았어. 이 이야기를, 홍위야.”
윤서는 가까이 다가앉은 홍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슬픔과 자책에 깊게 가라앉았던 눈망울이 소년다운 생동감으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에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 이향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향은 만백성을 다스리는 조선의 국왕이고, 그래서 윤서는 이향의 아내이지만 또한 신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아파하는 홍위를 보면서도 차마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이 일이 밝혀지면 두 분 왕을 속인 기군망상 죄는 윤서 홀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물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이 촌장에게도 했단다.”
영민한 이 촌장은 윤서가 에둘러 말하는 이야기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배가 인양되고 사흘 후 이 촌장이 이 서찰을 올렸어.”
윤서는 유려한 필체로 쓰인 서찰을 홍위에게 보였다.
[중전마마.물길에 떠내려간 범이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천운으로 목에 걸어주었던 은목걸이는 발견하였습니다.
손에 쥔 그 목걸이의 온기 하나로 저는 충분히 감읍하며 살 수 있으니, 중전마마께옵서도 부디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그간 베풀어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죽을 때까지, 죽어 저승에 가서도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미리 약속한 곳에서 범이가 묻어 놓기로 한 목걸이를 발견하였다는 말이자, 범이는 신분을 감춘 채 먼 곳으로 떠나 살아갈 것이란 말이었다.
“어머니!”
“누구나 다 판단을 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진단다. 나도 내가 가진 땅에 기대어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옳다고 판단하는 바를 행해야 했던 것이고, 그 결과를 기꺼이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홍위야.”
“···예, 어머니.”
“고기, 먹어. 한참 클 때라 단백질 많이 먹어야 해.”
“···예.”
“중비더러 소갈비 재워놓으라고 했다. 여러 가지 일로 바빠도 이따가 올 거지?”
“예. 꼭 오겠습니다.”
“그래. 소아가 맨날 큰 오라버니 안 온다고 숟가락으로 상 두드리며 울었는데 오늘부턴 조용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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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후, 2월 중순.
꽃샘추위가 차가운 바람을 부려놓는 가운데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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