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342
342화. 징벌의 새해 (3)
형벌을 결정하기 전 세종은 창덕궁 추국청에서 직접 죄인의 진술을 들었다.
정창손이나 윤사로의 혐의를 먼저 추궁하시리라 예상한 세상의 예측과 달리 상왕 전하께선 가장 먼저 김이도를 비롯한 선주들이 그간 권력층과 결탁해 저질렀던 온갖 범죄 사례를 파고드셨다.
김이도와 선주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저승길에 올라서고 남은 가족에게 최대한 피해를 덜 주고자 상왕께서 하문하시는 바와 하문하시지 않는 바까지, 성심으로 답을 올렸다.
“상왕 전하. 아직 공물을 바치는 호시절이었더라면 저희 같은 것들이 뭐하러 아깝게 그 귀한 세곡선이며 수송선을 침몰시켰겠습니까? 현감에게 은덩이 몇 개 찔러주고 백성이 구한 물품에 대해 ‘하! 나라님께서 이런 비루한 것을 어찌 쓰고 드신단 말이냐!’ 다그치며 무한정 퇴짜를 놓으면 값을 최소 대여섯 배에서 많게는 오십 배까지 받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요.”
“지방의 아전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니요? 아전 노릇 한다고 월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 그나마 수조권을 가졌던 경아전도 없어져서 곡식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먹고 살라믄 저희랑 짜고 칠 밖에요. 때때로 부과되지도 않은 공물을 거짓으로 꾸며내 착복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요, 전하.”
“윗전은 무엇을 하냐니요? 저희에게 고리대로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면 관찰사나 현감에게 엄포를 놓아 해결해주고, 또 더 많은 방납 품목을 우리 선단에서 취급할 수 있게 해주지요. 물론 그 대가로 이문의 삼 할에서 오할을 바쳤습니다. 가장 좋은 것들을 따로 빼어 두었다가 바치고요.”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함부로 고하는 것이냐는 형조 판서 조극관의 호통에도 사십 줄에 들어선 김이도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소리쳤다.
“상왕 전하! 이 천한 놈, 후회가 막심합니다요. 귀하신 분과 결탁해 배를 가라앉혀 곡식과 과일, 도자기 등을 빼돌리는 대신 차라리 그 배를 이끌고 일본에 도자기와 면포를 팔러 갔었더라면, 그러면 오늘 상왕 전하 안전에서 부끄럽고 비참하게 죄를 자복할 일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요. 그러니 전하, 권력을 가지신 분들이 소인 같은 상인을 말 부리듯 부려 먹는 일을 막아주옵소서.”
제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돌리는 비겁한 말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증언들 속에서 공납의 폐지가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를, 그리고 앞으로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곡식이 아닌 돈으로 부과할 때 더욱 투명해질 새 조세 제도의 결과를 낙관했다.
‘재물에 대한 탐욕을 이간 본성으로 인정하고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 사회 발전의 근원적 원동력이라고 권윤서는 말했었지.’
그러나 나라가 그 탐욕을 제어하고 징벌할 법체계를 미리 촘촘하게 마련해놓지 않으면 저렇게 온갖 비리를 통해 백성의 생명을 해하고 국고를 고갈시키는 자들이 나오니.
“들었느냐? 저들의 증언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그를 예방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규를 마련하라!”
세종은 세붓으로 부지런히 증언을 적고 있는 집현전의 성삼문 등에게 명을 내렸다.
부마 윤사로의 첫 취조는 형조 판서와 의금부 핵심 관원 서넛만 배석한 채 행해졌다.
왕의 사위이기에 포승줄에 양손이 묶였을 뿐 형틀에 앉지 않은 윤사로는 조운선과 수송선의 침몰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김이도를 비롯한 서강의 조운선 선주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몇 가지 일을 도와준 것도 사실이옵고, 또한 공물을 대납하는 방납에서 자금을 댄 것도 사실입니다, 전하. 하오나 그것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공신이나 왕족이면 거의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옹주께옵서 하가 하실 때 가져오신 궁방전까지 있는데 제가 무엇이 아쉬워 그리 무서운 일을 명하오리까.”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공신전을 받았든 궁방전을 받았든 재산과 노비가 넉넉한 자들은 모두 고리대를 놓고, 직간접으로 공물 납부에 관여해 재산을 불렸다.
게다가 윤사로는 서녀라고는 하나 아끼며 키운 옹주를 위해 자신이 고르고 고른 부마였다.
아들의 첩을 간음한 양녕 대군도 용서하였고, 첩을 두고 저희끼리 다투는 왕족도 여러 번 용서하였으니, 이번에도 김이도를 비롯한 상선의 선주와, 정창손 등을 엄하게 벌하고 넘어가도 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자부심이 선연한 음성으로 어떻게 인삼 재배에 성공하고, 또 그 시도와 성공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재배법을 배우러 오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가르쳐 주고, 또 그렇게 배워간 이들과 다른 작물 재배법을 실험한 기록도 기록하여 후대에도 계속 새로운 농법을 발전시켜나갈 계획까지 세웠는지를 고한 김포 농장의 촌장 이각주를 떠올렸다.
노비였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이각주는 이빨이 서너 개나 빠진 잇몸을 드러내며 뿌듯하게 웃고 답을 올렸다.
“중전마마께서 ‘노비라서 하지 못 할 일은 없다고 믿네. 나의 이 믿음을 이 촌장이 사실로 증명하면, 내가 그에 상응하는 신분의 속량, 재산의 증식,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할 것이네.’ 하고 약조하셨습니다. 노비로 태어난 자라도 존엄해질 수 있는 인간임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그 귀한 격려를, 소인은 정말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났으면 영의정도 너끈히 할 수 있었을 그 자부심 강한 늙은이가 말실수를 저질러 죽음으로 속죄할 각오로 바다에 들어갔던 손주를 끝내 잃고 차가운 갯벌에 엎어져 울지도 못하던 광경을 보았다.
함께 유희를 즐긴 친우가 자신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품에 안겨 융복이 흠뻑 젖도록 울던 손주 홍위의 떨림을, 가슴 시리게 느꼈다.
권윤서는 이각주가 손주와 가족을 잃을지 모를 공포 속에서도 정성껏 만들어 바친 홍삼 절편을 올리며 고했었다.
“서양에는 전하, ‘정의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죄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죄의 처벌을 행할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의 눈엔 가리개가 둘러져 있습니다. 눈을 가려 죄인의 신분도, 용모도 보지 않고 오로지 그 죄 자체만 따져 처벌하겠다는 사법 제도의 근본 개념입니다.”
함께 놀았던 일을 입 밖에 낸 행위가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죄라면,
탐욕으로 임금과 중전을 속이고 무고한 뱃꾼 두 명의 목숨까지 앗아간 죄는 얼마나 무거운 죄여야 하는가.
사적으로는 손주의 눈물에, 촌노의 비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적으로는 자신의 치세 하에 누적된 과오를 일소하여 새 시대에 걸맞는 형벌 체계를 신왕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라도!
세종은 영천위 윤사로를 물리고 다시 김이도를 끌어내 형틀에 앉혔다.
금방이라도 주리를 틀 물푸레나무 막대기를 든 나장과,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놓인 화로를 보자마자 허옇게 질린 김이도의 귀에 내관 조창의가 속삭였다.
“영천위가 네게 조운선이나 상선의 침몰을 지시했다는 증좌를 내놓으면 편한 죽음을 하사하실 것이다.”
조운선 세 척과 상선 열두 척을 거느린 대 선주이자 서강의 왈패 무리의 뒤를 봐주며 칠패 시장의 이권에 깊숙이 관여할 정도로 나름의 부를 이룩한 김이도가 이런 날을 위해 무엇인가 대비를 해 놓았으리란 추측에서 제안한 바였다.
세종의 추측은 맞았다.
내관 조창의가 내사옥을 관장하는 내관 무리를 이끌고 정현 옹주의 궁가 창고를 수색한 결과, 구석에서 눅눅하게 슬어가는 오승포 면포 팔백 필을 찾아내었다.
세종은 다시 영천위를 소환하였다.
“칠 년 전 을축 년에 전라도 나주에서 광흥창으로 세곡미 일천 석을 싣고 올라오던 김이도의 세곡선이 출항한 지 반 시진 만에 연안에 침몰한 일이 있었다. 영천위 네가 조사를 맡아 주상께 보고드리길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곡물은 물론 선군(뱃꾼) 넷마저 죽게 되었다 하였지. 그 후 김이도는 네게 빼돌린 곡물의 대가로 오승 면포 일천 필을 바쳤다고 자복하였다.”
“전하,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으시옵니까? 이익을 탐하는 천한 장사치가 저를 옭아매 죽음을 면해보려는 간악한 수작입니다! 전하! 제가 어찌 그런 명을 내리리이까!”
발악하는 윤사로 앞에 곰팡이 냄새가 훅 끼치는 면포 한 필이 떨어졌다.
“오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게 쌓인 너의 창고에서 발견한 면포다. 김이도는 뇌물로 바치는 면포에는 꼭 표식을 하였다고 하지. 보거라. 그 면포 귀퉁이에 좁쌀만하게 쓰여 있는 네 글자를!”
조창의가 면포 귀퉁이에 수정을 볼록하게 깎아 만든 확대경을 대어 주었다.
손톱만하게 확대된 글자는 ‘乙丑 羅州 (을축 나주)’ 네 글자였다.
“제가, 제가 새기라 한 것입니다! 제가 면포에 글자를 새기라 한 것입니다!”
“총 몇 개에 새기라고 했더냐?”
“처, 천 필입니다!”
“······.”
평소 얼마나 많은 뇌물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기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진 상왕 전하의 눈길에 윤사로는 더 이상 변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윤사로는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려 애원하였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오나 침몰을 명하지는 아니하였고 이미 일어난 사고를 무마해 주었을 뿐입니다!”
“······.”
“전하, 모든 재산을 다 내어놓고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전하! 옹주 자가를 생각하시어 제발 목숨은, 목숨만은 살려주옵소서!”
“···너의 목숨값이 그 침몰로 죽은 백성 넷의 목숨, 이번 과일 수송선 침몰로 죽은 백성 둘의 목숨보다 더 중하다더냐!”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범이란 아이의 목숨보다 더 중하더냐!
“전하! 저만 이리한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 파헤쳐보면 규모는 다를지언정 다들 한발씩 걸친 일들이옵니다, 전하!”
“······.”
“전하! 왜 제게만 이리 혹독하십니까, 전하! 잘못하였습니다! 전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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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로 조운선과 수송선을 침몰시킨 것으로 밝혀진 김이도와 서강 유역의 선주 셋에게 떼강도를 저지른 죄인들이 받는 능지처사 형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상왕과 금상 사이를 이간질하는 상소를 올린 이복 동생 익녕군은 작첩을 회수하고 제주에 십 년간 유배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유학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불온한 주장을 선동한 정창손 무리는 관직에 영영 재등용하지 못함과 동시에 모두 단천의 은광에서 십 년간 노역하게 하는 형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세종은 영천위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목숨은 부지하게 해주어야 할지를 쉽게 결단하지 못하였다.
상침 송씨를 통해 정현 옹주가 곡기를 끊고 누워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뇌하시는 부왕을 보다 못한 이향이 고하였다.
“윤사로가 명을 내렸다는 직접 증거는 없으니 그를 폐서인하고 재산을 모두 몰수한 후 정창손 무리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바마마. 왕실의 종친이나 부마를 아예 폐서인하고 강제 노역을 시킨 경우가 일찍이 없었으니 그만으로도 충분히 경고가 될 것입니다.”
이향의 이 말은 오히려 세종이 엄혹한 결단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로 인재의 절반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다운 의지로 홍위의 비극에 관여한 자들의 이름을 묻지조차 않았다는 금상은 자신을 닮아 효성스러웠고 이복 여동생에게도 자비로웠다.
“주상의 시대는 해외로 뻗어나가고 또한 상공업이 흥하는 새 시대요. 이러한 시대에는 재물을 둘러싼 비리에 더욱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만 백성과 나라를 상하게 할 탐욕을 절제하게 할 수 있소. 윤사로는 부를 추구함에 있어 국법을 지키는 준법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선의 국왕은 신분에 관계 없이 법을 지키지 않은 자를 벌할 것이란 준엄한 의지를 보이는 표상이 될 것이오!”
그리하여 2월 중순.
다시 겨울이 온 듯 차갑기만 한 바람 속에서 윤사로와 김이도, 그리고 강호재, 이수욱, 한개의 거열형이 집행되었다.
죄목은 고의로 조운선과 수송선을 침몰시켜 국고에 해를 끼치고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해한 죄였다.
다만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상왕 전하이셨기에 형 집행에 앞서 죄인들에게 독극물을 내려 사지가 찢기는 고통은 당하지 않게 배려하셨다.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사약 사발이 올려진 소반 앞에서, 다섯 명의 죄수는 천천히 약사발을 비웠다.
피를 토하며 죽은 부마의 시신이 갈기갈기 찢길 때.
숙연하게 지켜보는 모든 백성은 정말로 엄정한 법 집행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실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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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월 말.
드디어 유응부가 호주의 동부 해안에 도착하였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