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48
48화. 검은 밤 우리는 (2)
윤서의 몸이 기계적으로 물살을 가르며 한강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오래 달리다 보면, 유속 느린 깊은 물을 오래 헤엄치다 보면 문득 그러한 순간이 찾아온다.
온몸의 근육이 기분 좋게 풀어져 평지를 걷듯 호흡은 편안해지고, 머리 위 하늘과 발밑의 땅과 물과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된 것처럼 고요해지는 순간.
이대로 끝없이 달리고 물을 가르며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고 이대로 달리다가 숨이 멎어도, 이대로 물길을 가르다가 가라앉아도 삶이 아쉬울 것 없을 것만 같은, 삶의 많은 것들이 연연할 것 없이 시시한 것들로 느껴지는 절대의 평온이 찾아오는 순간들이 드물게 있다.
몸 위를 흘러가는 물줄기를 헤치며 저 멀리 새하얗게 빛을 내는 남쪽 모래톱을 향해 헤엄치는 윤서는 그러한 드문 평온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궁궐이라고 해도 반경 2km는 넘지 않을 좁은 공간에 주로 갇혀 있는 답답한 일상도, 엄혹한 신분 질서의 맨 하단에 위치하여 겪어야 하는 설움도, 그 무엇도 털어버린 채 몸을 움직이는 순수한 조화에 몸과 정신 모두가 환호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강을 가로질러 남쪽 모래톱을 20m 남짓 남겨두었을 때, 갑자기 허리에서 팽팽한 당김이 느껴졌다.
“!”
허리에 묶은 끈이 윤서를 뒤로 잡아끌었다.
순간 윤서는 몸을 일으켜 발과 왼팔만 휘저으며 물속에 일자로 몸을 세웠다. 오른손은 저절로 허리춤의 끈과 그 옆 작은 주머니 속에 든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끊을까.’
조선에 와서 처음 하는 수영 도중 혹시 발에 쥐가 날까 작은 단도를 허리춤 주머니에 넣어왔다.
단도를 꺼내 끈을 끊어내고, 이대로 더 서남쪽으로 헤엄쳐 내려가 적당한 곳을 골라 올라선 후 사라진다면.
어딜 가서도 결국 층층시하처럼 복잡한 규율과 의무와 두려운 세종이 가득한 궐에서보다는 잘 살 자신은 있었다.
윤서는 온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편안히 드러누웠다.
물결에 맡긴 몸이 조금씩 한강 하류를 향해 떠내려가고, 눈 한가득 유혹처럼 달빛이 밀려들었다.
눈을 크게 떠 조금 이지러진 달을 눈동자에 가득 담는 순간 오른손이 저절로 주머니 속 단도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윤서야!”
이향의 목소리가 달의 주술을 깼다.
“권윤서!”
애달프게 초조한 이향의 목소리가 주술처럼 윤서의 고개를 목소리의 방향으로 돌리게 했다.
강의 중앙까지 작은 배 하나가 등롱을 단 채 노를 저어 쫓아오고 허리춤의 끈은 더욱 팽팽히 당겨졌다.
윤서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러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빠르게 달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돌아가라는 듯.
달빛에 홀려 넋을 빼고 도망치지 말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지 못해 안달하는 조선의 저 사내에게,
빈 치맛자락을 꼭 쥔 채 설움 없이 잠든 우리 홍위에게,
돌아가라 등을 떠밀 듯 검은 먹구름이 맹렬하게 달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심을 촉구하는 징조이자 계시였다.
윤서는 눈을 감으며, 구름에 먹히는 달을 향해 속삭였다.
“반지의 소환은 강제였지만, 지금은 내 선택이야.”
이향, 당신의 기다림은 끝이 났습니다.
윤서는 몸을 일으켜 다시 팔다리를 휘저으며 강의 중앙을 향해, 매혹적으로 반짝이는 등롱의 불빛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윤서의 마음이 윤서의 몸보다 앞서 이향에게 물 위를 미끄러졌다.
“윤서야!”
점점 더 어두워지는 밤의 장막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던 윤서가 마침내 찰박찰박 물살을 가르며 나타났을 때.
이향은 너무 반가워 발을 구르다 “저하, 배 뒤집힙니다!” 천가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
“저하!”
윤서가 마치 땅을 딛고 선 것처럼 몸을 세워 자신을 불렀다.
“윤서야. 이리 올라오거라.”
이향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저하, 하늘 좀 보세요. 먹구름이에요.”
윤서의 행방을 찾아 어둠 속 강물 위만 뚫어져라 살피던 이향과 천가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저하! 기우제의 효험이 벌써 나타나나 봅니다!”
먹구름을 본 천가가 흥분해 소리치다 자칫 노를 놓칠 뻔했다.
“돌아가요, 저하.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아요.”
말을 한 윤서가 먼저 북쪽, 매금이와 다른 호위 내관이 서 있는 강변으로 힘차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수영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자유형을 변형한 거센 팔놀림이었다.
착착 팔로 물을 가르고 차라락 발로 물을 튀기며 빠르게 강변 모래톱을 향해 돌진하는 윤서의 뒷모습을 보던 천가가, 역시나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이향에게 말했다.
“저하, 권가 항아님을 우리 수륙군에게 수영을 가르치시게 하시면······.”
그러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열심히 노를 저어 윤서의 뒤를 따랐다.
이향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를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고요하던 강물을 헤집기 시작했다.
배가 나루에 다다랐을 때, 윤서도 마침 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매금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윤서야.”
이향은 배에서 내려 윤서에게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윤서야, 저기 정자 위에 몸을 따스하게 할 모포가 있으니, 그리로 가자.”
세종이 효령 대군에게 지어 하사한 망원정 정자에는 어느새 간이 차일이 드리워 사방 벽을 이루고 있었다.
등롱을 가져다 놓았는지, 차일 안에서 부드러운 빛이 꿈결처럼 흘러나왔다.
이향이 물을 뚝뚝 흘리는 윤서의 손을 잡고 정자 앞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서 번쩍 번개가 치더니 꽈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후둑 후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갈아입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요.”
파랗게 질린 입술로 윤서가 덜덜 떨며 달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온통 새카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이향은 차일을 들춰 정자 위로 윤서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감기 걸린다. 일단 말리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모포를 두르고 돌아가자.”
윤서는 정자 위로 난 계단을 오르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향은 윤서를 밀어 올린 그 자리에 그대로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이번엔 내, 선택이야.’
윤서는 다시 나무 계단을 한 칸 내려서 이향과 눈높이를 맞췄다.
어둠 속에서 이향의 눈빛은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단단하고 절제된 눈빛으로 윤서의 눈을 의아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하!”
윤서는 팔을 뻗어 이향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향이 흠칫 몸을 굳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하!”
윤서의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낮아졌다.
“···저하!”
“응?”
“몸을, 말려주세요.”
“!”
“비가 오잖아요. 기우제까지 몸가짐을 삼가야 하는 것, 오늘 밤은 멈춰도 되지 않을까요, 저하.”
“···윤서야.”
“이제 그만 기다리세요, 저하. 저는 오늘 밤, 저하를 온전하게 제 마음에 담았습니다.”
속삭이며 윤서가 이향의 손을 잡아 차일 안으로 이끌었다.
나무로 된 바닥 중앙에 이향의 명령에 따라 준비된 두꺼운 모포와, 몸을 말릴 수건이 석 장, 그리고 윤서가 준비해 온 옷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윤서가 대담하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었다.
부드럽게 퍼지는 등롱의 불빛 속에 윤서의 흰 속저고리가 드러나려는 순간, 이향이 모포를 들어 윤서의 몸을 벙벙하게 감쌌다.
“그림자가 다, 비칠 것이다.”
“···예?”
“여긴 환하고 밖은 캄캄하니 네 몸의 선이 다 밖에 그림자로 비칠 것이라고.”
“하지만 저하, 아까 뒤로 돌아 서 있으라고 명을······.”
“내가 이 안에 들어와 있는데, 양물이 없다 하나 사내들 본능에 뒤로 돌아서 있겠느냐?”
“······.”
뭐지. 이 양반은!
왜 그때는 그렇게 거리낌이 없으시더니, 오늘은 왜!
당황한 윤서가 멍하니 보자, 이향이 모포 안으로 드러난 흰 목선과 그 아래 살짝 보이는 가슴을 뜨겁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윤서 네 말이 맞더구나. 이리 어여쁜 너를, 이리 당당한 너를 내 너무 과시하듯 안았어.”
“···저하.”
“그러니 권윤서. 이 모포로 가려줄 터이니 어서 옷을 갈아입거라. 어서 가자. 동온돌로, 가자.”
이향의 말이 유혹하듯 빨라졌다.
윤서는 이향이 둘러준 모포 속에서 꼬물거리며 젖은 옷을 벗었다.
키가 큰 이향의 눈길 아래 차츰차츰 부끄러운 속살이 드러났다.
“저하, 저하도 눈을 좀 감고······.”
“이미 다 본 적도, 만진 적도 있습니다, 부인.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시긴.”
“······.”
핥듯이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이향의 뜨거운 시선 아래, 윤서는 점점 더 떨리는 손으로 물에 젖어 떨어지길 거부하는 옷을 하나씩 벗고, 이향이 건네준 수건으로 몸을 말리고, 또 이향이 하나씩 건네주는 마른 옷으로 다시 몸을 가렸다.
차일을 들추고 밖에 나왔을 땐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졌다.
윤서도, 이향도, 그리고 호위 내관과 매금이도 모두 말에 올라타 천천히 어둠을 헤쳐 궐로 귀향하였다.
달려올 때와 달리 윤서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단히 두른 모피 위로 가슴께를 단단히 두른 이향의 팔과, 등에 느껴지는 이향의 체온과, 말의 움직임에 따라 밀착했다 떨어지는 접촉 모두를 생생하게 인지했다.
호위 내관 다섯 중 셋은 앞에, 그리고 나머지 둘과 매금이는 뒤에서 세자와 권가 나인을 호위하고 있으나, 어쩐지 저하로부터는 좀 거리를 두어야 할 것만 같아 모두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넓게 거리를 두고 구보했다.
“저하.”
“응?”
“저하는 여색도 안 즐기고 노래와 음악도 안 즐긴다고 역사서에 써 있었는데 정말로 그러신가요?”
“···부인이 불러주는 노래라면 아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특히 그거, 저번에 써 보내준 그 유행가 가사라는 거 말이오.”
“어느 거요? 아는 노래 다 써 보내서 어느 걸 말씀하시는지.”
“‘그대 고운 목소리에’로 시작하는 거 말이오.”
아!
정태춘 박은옥 님이 함께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를 말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콘서트에 가서 들은 적이 있던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
“음, 그럼 저하만 들리게 불러 드릴께요. 이 노래는 부부가 지어 부르신 노래라서 함부로 퍼져나가면, 미래의 그분들 저작권 수입에 막대한 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니 저하만 들으셔야 해요.”
이향이 또 가슴을 들썩이며 웃더니 윤서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윤서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나직나직하게 노래를 불렀다.
[그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 흔들리고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랑하게 되었네]
검은 비단 장막처럼 거센 빗줄기 속에 속삭이듯 부르는 윤서의 노랫소리가 고요히 섞여들었다.
그날 밤 동온돌의 밤은 다정하게 은밀하였다.
누구에게 과시하여 지킬 필요 없이 스스로 강하게 제 길을 만들어가는 미래의 여인을 이향은 조심스럽고도 집요하게 탐닉했고,
주변을 모두 물린 어둠 속에서 쾌락의 신음을 가려주는 거센 빗소리 속에서 윤서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이향의 전부를 받아들였다.
그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5월 17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비 왔다. 각처에 기우제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그리고 그날부터 궐에는 은밀한 소문이 떠돌았다.
“권가 나인은 한강의 용신을 깨워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
그런 소문과 관계없이 이향은 창덕궁 뒷산인 응봉산 기슭에 있는 금위군 훈련소의 공터에서 윤서가 새벽에 달리기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세자가 소수 호위 내관과 함께 새벽마다 활쏘기와 체력 단련을 한다는 구실로 인원을 통제해 만들어준 기회였다.
늦게까지 몸을 섞었으면서도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 여명 속, 반 시진 넘게 쉬지 않고 맨발로 달리는 윤서를 보며 이향은 골똘히 생각했다.
백 리를 쉬지 않고 달린 후 강에 풍덩 뛰어들어 수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려면 한양과 개성, 의주를 잇는 길 외에 한강 이남으로 난 번듯한 길을 닦아야 할 터인데.
한강 이남 경기 쪽에서 현물인 공물 대신 쌀로 거둬들인 세곡미도 운반해 올 육로도 닦아야 하니 겸사겸사 우리 윤서 달리기 길로도 함께 만들어볼까.
조세를 공평히 징수해 백성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는 바른 명분이 있으니.
그리하여 세종 말기부터 이향의 치세 내내 농한기와 춘궁기, 기근 시기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과 삯을 유상으로 제공하며 전국의 도로를 닦는 대토목 공사가 실은 윤서에게 달리기 좋은 길을 만들어주고 싶은 늦사랑 세자의 연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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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는 열사흘 뒤인 5월 말, 혜민국 방문 세 번째 날에 비로소 수양 대군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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