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I was reincarnated, I was a discontinued nanny RAW novel - Chapter 92
92화. 한확에 맞서는 윤서의 막후정치 (2)
3월 말, 마침내 정조사로 북경에 갔던 한확이 명 황제에게 받은 칙서와 관복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의 하사품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오고 있다고 미리 선래 통사를 통해 알렸거늘.’
한확은 못마땅한 눈으로 왕세자를 따라 환영 나온 인원을 훑었다.
보통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사신을 맞이할 때는 각종 의장기가 줄을 이어 앞장서고 그 뒤를 문무 관원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임금이나 세자의 연을 취주악대가 앞뒤로 서 음악을 연주하며 장엄하게 행진한다.
그런데 오늘 세자는 취타대도 거느리지 않고 왕세자의 행차를 알리는 기린기와 몇 개의 의장만을 앞세우고 연이 아닌 말을 타고 신하 다섯과 함께 오십여 명의 호위군만 거느리고 자신을 맞이하러 나왔다.
작년 초겨울 북경을 향해 떠날 때만 해도 사위 계양군과 장차의 사돈 수양 대군 등이 모두 전별을 나와 홍제원에서 무악재를 넘어서는 길이 말과 가마로 가득 찼었는데!
‘종친도 부마도 다 하는 대납에 좀 관여하였다고 이리 괄세를 할 수가!’
방납 비리를 캐는 일의 엄혹함이 좀 누그러지길 기다릴 겸, 황제의 하사품과 칙서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더 키울 겸, 한확은 고된 사행길에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고 개성에서 열흘이나 정양을 하고 왔던 참이었다.
임금께서 어의까지 보내 극진하게 안부를 묻기에 다 넘어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때는 명 황제 영락제가 손녀 사위로 탐을 낼 만큼 수려하였으나 이제는 늙어 투덕투덕 살이 붙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확이 수염을 쓸 때였다.
“요사이 지방의 심한 기근을 피해 한양으로 흘러드는 유민을 구제할 겸 새로 길을 닦고 북악에서 청계천까지 물길을 내고 하느라 도성 안이 온통 파헤쳐져 있소. 그래서 간소하게 왔으니 서운케 생각하지 마시오.”
황제의 칙서를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끝마친 후 이향이 한확에게 말했다.
칙서의 내용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이향은 아직도 오만한 이자가 곧 직면할 현실에 저절로 드는 연민을 냉담하게 지워냈다. 권윤서가 이자를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거하려 한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이향의 말에 한확은 함부로 구겼던 얼굴을 억지로 폈다.
“아, 예, 세자 저하. 소신이 떠난 이후 많은 변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미리 개성으로 큰 수레를 보내주신 덕에 황제께서 하사하신 관복은 무사히 운반하게 되었는데, 성 안 도로가 그리 엉망이면 저 많은 수레가 다 왕궁으로 갈 수나 있을지 염려됩니다.”
한확은 부러 길게 줄지어 있는 황제의 하사품을 가리켰다.
방금 전 황제의 칙서에서 읽었던 구절 뒤에 길게 쓰여 있던 황제의 하사품이 이렇게 많음을 생색내는 발언이었다.
칙서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상국을 섬기는 정성이 오래될수록 더욱 정성스러워 우리 조종 때부터 은혜와 예도로 회무(懷憮)하길 다른 번국보다 더욱 융성하고 후하게 하였다. 짐이 대통을 이음에 조선의 왕도 선황제를 이어 충성하고 공경함이 진실로 돈독하였고 또 조공을 통해 정성을 표하고 특별히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던 바, 조선의 왕은 참 어질도다.이제 사신 중추원 부사 한확이 돌아가기에 특별히 관복을 주어 권우(權遇)하는 뜻을 표하노니, 조선의 왕은 짐의 지극한 마음을 본받아 예도로서 상국을 섬기라. 또한 조종으로부터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져 왔으니 그 인연을 더욱 공고히 하여 더욱 긴밀하게 충성과 공경을 바칠지어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26년 3월 26일자 부분 인용)
“저 맨 앞 수레에 높게 실린 것이 면복 일체로 머리에 쓰는 구류향조추사 평천관, 몸에 입으실 구장 견지사곤복(九章絹地紗袞服), 또 그 뒤의 수레에는 발에 신으실 심청장화와,”
“아! 그건 칙서에 적혀 있으니 지금 번거롭게 말할 필요가 없소. 또한 수레 움직일 길엔 판자를 깔아 대비해 놓았으니 경이 걱정할 바가 아니오.”
“!”
말단 관원들에게까지 부드럽게 대하기로 유명한 세자의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한확은 이제야 세자 뒤에 서 있는 하연과 김종서 등 조정 중신의 표정을 상세히 살폈다. 세자가 거느리고 온 이들은 공교롭게도 명나라 황실 인척인 자신과 거리를 두던 이들뿐이었다.
그래도 기본 예의는 갖추던 이들이었는데. 한확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김종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딱딱한 목소리로 추궁하였다.
“대감, 칙서의 말미에 쓰인 ‘아름다운 인연’이란 구절은 황제께서 정확하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물론 한씨 가문을 매개로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의 인연을 잇자는 뜻이라고, 누이 공신 부인이 쓴 서신에 쓰여 있다. 그러나 그 노골적인 내용을 다른 이도 아닌 예학과 동서고금 역사에 두루 밝은 원칙주의자 김종서에게 공개적으로 밝히기는 곤란하였다.
“그건 외교 문서에 쓰이는 수사적인 말로서,”
“관례상 쓰인 말씀이란 뜻이오? 우리 조선이 지극하게 명과 명나라 황제를 섬겨온 것에 대한 관례상의 수식적인 표현이란 말씀이오?”
역시 김종서가 깐깐하게 파고 들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오. 내 따로 받아온 서신이 있어서.”
어째 말을 할수록 한확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모두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자신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을 세자의 호위병들조차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쏘아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빛나는 건 지난 세월 명 황실의 인척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경멸’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왜, 이런 일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고귀한 하사품을 받아왔거늘, 왜 이런 일이!’
명 황제가 친히 하사한 곤복을 받아오는 건 이제까지 몇 번 있지 않은 큰 경사였다. 그런데, 왜!
그간 한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한확이 당혹스럽게 주변을 살필 때였다.
“일단 경은 저택으로 귀가하여 몸을 보하고 계시오. 긴 사행길에 몸이 축나 곧바로 전하를 뵈러 오지 못하고 개성에서 열흘이나 요양하지 않았소?”
“저, 저하!”
“여봐라! 한확을 집으로 모셔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저하! 황실에서 보내온 서신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확은 차갑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세자를 다급하게 불렀다.
“이것까지 보시옵소서.”
“황실에서 보내온 것이라면 내게 주시오. 외교 문서는 우리 예조에서 관할하지 않소?”
예조 판서 김종서가 앞으로 나섰다.
“아, 아니오. 이것은 개인적인 내용이 들어간 서신인지라,”
“외교의 일에 개인이 어디 있습니까, 한확 대감? 누가 되었든 황실 인사가 우리 전하나 저하께 보내는 소식이라면 모두 다 조정의 일이고 나라의 일이오!”
‘외통수에 걸렸구나.’
한확은 이제 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식은땀 속에서 생각했다.
어쩐지 동지사 부사로 함께 돌아오던 정인지가 요동에 들어서자마자 새롭게 시행할 수세법(收稅法)을 돕기 위해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선래 통사와 함께 귀국을 서두르더라니. 그 여우 같은 놈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먼저 귀국하여 보신을 하였구나! 그놈이 칙서에 담긴 사적인 혼사의 의도를 흘렸구나!
지극히 당황하는 속에서 한확은 이를 악물었다. 다년간의 외교 현장 경험과 그 두려운 영락제 앞에서도, 또 성군이라 칭송받는 선덕제 앞에서도 서 본 영광의 순간이 마침내 그에게 침착함을 되찾아 주었다.
‘내게는 명나라 황제가 있다! 비록 누이 여비가 죽고 선덕제도 죽어 총애받지 못한 선황제의 후궁으로 내궁에 시들어가는 누이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대명 선황제의 후궁은 후궁! 대명 제국의 황실을 인척으로 둔 내게 감히!’
생각을 정리한 한확은 등을 쭉 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한계미에게 눈짓했다. 한확은 오촌 조카인 한계미를 서장관으로 삼아 사행길에 동행시켰다.
“세자 저하, 이는 선황제의 후궁으로 계신 공신 부인의 서신이옵니다.”
한계미가 이향에게 공손히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꾸러미를 바쳤다.
그러자 김종서가 나서 대신 비단 꾸러미를 받았다.
“공신 부인이 사사로이는 대감의 누이이나 서장관이 말한 것처럼 선황제의 후궁이니 우리 예조에서 접수하겠소이다. 이의 내용에 대한 답변도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다음 공식적으로 답을 할 것이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두 사람의 기세가 맹렬하게 충돌할 때 이향이 뒤의 호위 무관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한 대감을 댁으로 뫼시어라!”
말은 뫼시라는 명이었지만 실제는 유폐와 다름없는 가택 연금이라는 것을 한확은 바로 깨달았다.
‘하! 그래도 의주에서 목에 칼을 쓰고 끌려온 것보다는 나은가. 대체, 이 나라 왕실 것들은 사신으로 보내놓고 죽이지 못해 매번 이리 안달을 하는가!’
그러나 왕세자의 늠름한 자태를 보기 위해 길가에 모여든 백성들 사이를 호위 별감에 둘러 싸여 집으로 향할 때 한확은 다시 무엇인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인두겁을 쓰고 어찌 그리 매정할꼬!”
“누이의 목숨을 팔아 누린 영화가 그리도 좋더냐?”
“왜, 딸도 팔지 그러느냐? 딸은 차마 아까워서 못 판다더냐?”
외치는 경멸 섞인 조롱이 간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누이 둘을 명 황실에 후궁으로 보낸 일로 세간의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노골적인 비난과 경멸은 처음이었다.
한확은 불과 반 년이 채 안 되는 사이 확 달라진 분위기가 무엇 때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심이 담긴 칙서를 받아왔다고는 하나 그 내용이 벌써 새어나갈 수도 없었고, 설사 새어나갔다고 하더라도 무지렁뱅이 일반 백성이 그 함의를 알 이유도 없었다.
그 이유를 한확은 대궐처럼 화려한 저택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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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엇이냐?”
깎아놓은 옥처럼 훤한 아들 셋, 저희 고모들 못지않게 어여쁜 딸 여섯과 부인 홍씨가 모인 안방에서였다.
온 가족이 모여 귀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둘째 딸, 계양군의 부인이 슬그머니 한확 앞으로 소책자 하나를 내놓았다.
책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닥종이 결이 그대로 살아 있어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이 질 나쁜 종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책의 표지에는 한확이 모르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진어도 아니고, 왜어도 아니고.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말이더냐?”
“아버님께서 사행길에 나서신 후 임금께서 새 문자를 만들어 반포하셨어요. 이게 바로 정음이라 불리는 그 문자입니다.”
“그래? 어허. 조선의 문자라. 임금께서 총명하신 줄을 알았지만 문자를 만들다니. 허어. 그래서 대체 무어라고 쓰여 있는 것이냐?”
“······.”
“······.”
다들 눈치만 보며 감히 답하는 자식이 없었다.
한확이 너털 수염을 쓸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문자 만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라더냐? 여러 일 벌이기 좋아하시는 임금께서 문자의 형상을 빗대 무얼 만드셨다만 영 배우기가 어려운 모양이지? 일찍부터 한학을 익힌 너희도 깨치지 못할 정도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버님. 글자는 너무 쉬워서 저는 하루만에 배웠어요.”
새해 들어 왕실에서 운영하는 여학당에 다니게 된 막내딸 도산(桃山)이 말했다. 올해 여덟 살로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과 혼인하기로 암암리에 약조가 되어 있는 도산은 딸 중 가장 영특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사내아이 못지않게 강했다.
“그래? 그럼 우리 막내가 이 아비한테 읽어주려무나. 대체 이 허접한 종이 뭉치의 제목이 무엇이라더냐?”
“그 책의 제목은······. 언니, 언니가 말씀드려요.”
매사 똑 부러지는 막내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다는 듯 책을 내어놓은 계양군의 부인 한씨에게 답을 미뤘다.
“아버님, 전하의 새 문자를 아는 이들은 거의 다 이 책을 읽었어요. 도산이가 말한 것처럼 그 문자는 배우기가 너무 쉬워서 궐에서 일하는 무수리와 방자들까지 다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제목이 무엇이라고!”
자꾸 눈치만 보며 서로 답을 미루는 식구들에게 짜증이 난 한확이 역정을 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권력과 재물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 명나라 황실이 뒤에 있으니 그런 것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평판은!
한번 더렵혀진 평판은, 그것도 무수리들까지 쉽게 배운다는 문자로 박제되는 평판은!
“설마, 설마!”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