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Regressed Dirty Spoon Becomes a Golden Spoon RAW novel - Chapter (24)
흙수저가 회귀하면 금수저가 된다-24화(24/405)
“…마시면서 해.”
영어 과외를 받으며 점점 집중력이 떨어져 가고 있는 윤슬에게 재언이 건네준 건, 휘핑크림이 가득 올려진 아이스 초코였다.
‘이거 사러 밖에 나갔다 왔구나.’
도서관 내부에서 팔지 않아 정문까지 나갔다 와야 했을 텐데.
제일 좋아하는 걸 받아든 윤슬은 환하게 웃으며 휘핑크림을 떠먹었다.
“그럼 이제, 수학 할까.”
“윽….”
재언은 이때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러나 재언이 간과한 게 있었다. 모두가 본인처럼 수학을 재밌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지어 윤슬은 고등학교 수학을 몇 년 만에 접해 본 직장인이었다.
간신히 10번 문제까지 도달했을 때, 윤슬은 아까보다 더 집중력이 낮아진 티가 났다.
‘그나마 영어 단어는 실생활에서 익숙하기라도 했지…. 고등 수학, 이게 얼마 만이야.’
머릿속은 거의 백지장이 되어 있었고 간단한 암산도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직장인은 세금 계산만 빠르게 할 수 있다고~! 3.3% 계산은 누구보다 빠르게 할 수 있는데….’
하나하나 식을 써 내려가며 계산하던 윤슬은 머리가 아프다 못해 답답했다.
“후….”
“어디가 어려워?”
윤슬은 아까부터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재언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럴 거면 공식이라도 외우고 가르쳐달라 할 걸 후회했다.
좌절하며 고개가 점점 내려가던 윤슬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재언은 윤슬을 따라서 점점 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괜찮아. 더 쉬운 것부터 해보자.”
어느새 한쪽 어깨를 책상 아래로까지 내리며 몸을 기울인 재언은 윤슬과 눈이 마주치자 느긋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홍석대 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야….”
“아냐. 충분히 나쁜 사람 같아.”
천천히 상체를 다시 세운 재언은 한 손으로 샤프를 돌리며 윤슬이 공식을 외우기 쉽게 사이사이 동그라미를 쳤다.
“이 계산은… 이 공식 먼저 대입하고, 옆은 아예 버려버려. 생각을 안 하면 되거든….”
‘놀고 있네….’
앞에서 백휘는 잘 풀고 있어 보이던 문제지 위에 샤프를 쥔 손으로 빠각, 샤프 끝부분을 뭉갰다.
지난번 윤슬이 말한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가 저 녀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쟤도 친구고 나도 친구인데 쟤한테만 연락했던 것. 정말로 백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짜. 아무렇지도.
오래된 친구도 아니고 자신과 똑같은 그저 중!학!교! 동창일 뿐이지만 저 녀석한테만 연락한 것. 진짜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보고 있는 척하던 시험지의 문제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 가장 이해가 안 가던 말을 백휘는 뼈저리게 이해하게 됐다. 옆에서 윤슬이 아~ 그렇구나. 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수시 쓸 거면 두 과목 합쳐서 최저만 넘으면 되는데, 수학 성적 올리는 것보다 영어 성적 올리기가 쉽지 않나? 국어랑 영어.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잖아. 윤슬이는 바쁘고. 음.’
이건 공정한 일이다. 윤슬이를 위한 일이다. 결론 내린 백휘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윤슬아, 오늘 수학 집중이 안 되면 영어 위주로 할까?”
* * *
사실 조금 솔깃했다. 수학은 회귀 전에도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었고, 또 가장 약한 과목이었으니까.
하지만 기껏 재언을 불러놓고 그렇게 할 수야 없었다.
“…나, 못 가르쳐?”
또다시 커다란 어깨를 구깃구깃 접어 풀 죽어있는 재언에게 ‘아니… 그냥 내가 멍청한 거란다.’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야, 다음 문제 풀 거야! 백휘야. 괜찮아. 나 수학할게.”
딱-
“…하하. 계속 말썽이네.”
끝부분이 망가진 샤프를 가죽 케이스에 넣은 백휘가 새 샤프를 꺼냈다.
비싸 보이는 샤프인데 끝부분이 왜 저렇게 종이짝처럼 구겨졌대.
“나, 다음엔 더 쉽게 가르칠 수 있어….”
짙은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재언이는 내 눈치를 봤다. 본인이 못 가르쳐서 내가 10문제 중 단 2문제를 맞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깔끔한 재언의 풀이와 대조되는 누더기 같은 내 풀이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네가 못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거야…. 원래 성인은 수능 끝나자마자 수학 공식부터 싹. 리셋 되는 법이거든. 다 그래….’
나는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부처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영어도 그다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제뉴어리 페브리어리 마치. 암기송을 외워야 악토버와 노뱀버를 헷갈리지 않는다. 나는 굳어버린 머리가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음? 다음?”
새 샤프를 손에 쥔 백휘는 재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엔 나랑 윤슬이 둘이서 하게 될 것 같은데. 수학 기출도 나한테 있거든.”
“…왜? 나도 겸사겸사 공부하는 거야.”
“집도 먼데, 여기까지 오기 힘들지 않겠어?”
‘아, 그러고 보니까 어플 만드는 시간도 부족할 텐데 나 수학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건…. 너무 이기적이려나.’
생각해 보니까 백휘와는 비교적 학교도 가깝고, 집도 가까웠지만 재언이는 아니었다. 압구정 사는 애를 매번 경복궁까지 부르는 것도 미안하고.
“…우린 공부 말고도 따로 할 얘기도 있어서. 그러니까 윤슬이는 나 필요해, 그렇지?”
“우리…?”
차분하게 웃는 백휘의 머리 위에서 스킬이 미친 듯이 반짝거렸다.
「[스킬: 알 수 없지만 (A+)]」
‘백휘야… 눈부시다.’
선글라스가 있다면 당장 꺼내 쓰고 싶을 정도의 반짝거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친구의 사소한 비밀을 모르면 서운할 때니까 어쩔 수 없지.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니까 저렇게 스킬이 반짝이는 걸 보면.
참… 별게 다 서운할 나이다.
“아, 재언이랑 어플 만들기로 했거든!”
“어플?”
“응. 사진 보정 어플! 지난번부터 내가 사진 색감 아쉽다고 했었잖아.”
그러니 이번엔 옆에 있는 재언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난번?”
“응. 백휘랑 만나서 사진 얘기 했던 적이 있거든.”
학교에서처럼 친구들을 달래고 있다 보니 급하게 당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저 아이스 초코를 급하게 마셨다.
쪼로로록-
얼음 때문에 다 마신지 몰라 다 마셔버린 컵이 누가 봐도 ‘나 지금 비어있어요’ 소리와 함께 청명하게 울렸다.
“…하나 새로 사 올게.”
“내 거 마셔. 난 입 안 댔어.”
다시 사 오겠다고 일어나는 재언과 동시에 백휘가 본인의 아이스 초코를 내밀었다.
“어? 아까부터 안 마셨던 거야?”
“응. 난 단 거 잘 안 먹거든. 슬이 너 마셔.”
* * *
‘웃기는 새끼네….’
재언은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어이가 없었다. 윤슬의 것만 사다 줄 수 없어 기껏 사내놈 것까지 사다 줬더니. 고맙다며 환하게 웃는 슬의 얼굴이 저쪽을 향해 있다.
다음부터 저놈은 수돗물이나 마시라고 해야겠다.
“근데, 사진 보정 어플이라면….”
“별거 아냐~”
“별 게 아니긴. 윤슬이가 생각한 건데 대단하지.”
재언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뭐 이런 게 다 있지?
재언은 이런 식의 말싸움에서 져 본 적이 없었다. 민준을 자유자재로 놀려먹던 솜씨는 압도적인 실력 차로 패배해 버렸다.
“히히, 그런가.”
윤슬은 뿌듯한 표정으로 휘핑크림을 다시 떠먹었다. 재언은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근데 뭐라고 말하지? 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내가 먼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아니, 대단하긴 한데, 그게 아니고….’
재언은 살짝 입을 벌린 채 커다란 손으로 목 뒤를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그 와중에 백휘는 착실하게 윤슬을 설득했다.
“사진마다 보정 값이 다를 텐데, 그거 전부 신경 쓸 수 있겠어?”
“어?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음…. 아무래도 사진을 많이 봐야 보정 값도 잘 보이니까.”
저 능글거리는 놈이 다정한 목소리로 위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재언은 불길했다. 너는 같은 반도 아니었으니 끼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어느새 재언은 마음속으로 [압구정 중학교 1-3 모임]을 만들어 백휘를 배척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지금 문제지들이 펼쳐진 책상 위에 직접 선을 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도와줄까?”
“진짜?”
“…네가 왜.”
우리 둘이 해도 되는데, 굳이?
재언은 절대로 백휘와 함께 뭔가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저 녀석은 일학년 삼반 출신도 아니니까. 같은 반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고맙지! 재언아, 백휘 사진 정말 잘 찍어.”
…하지만 윤슬이 너무 환하게 웃었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많은 게 좋지….’
재언은 입을 꾹 다문 채 또다시 끄덕끄덕.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바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되는 거랬다. 그럼, 이건 합리적인 선택일 뿐이다. 절대 저 녀석한테 놀아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끼어드네….’
‘표정 관리 안 하네?’
‘갑자기 합류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쟨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은근히 잘 맞는 둘은 머릿속으로 또 같은 생각을 했다.
* * *
“형, 왔냐.”
“…….”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재언의 동생 태언은 신나서 나간 형이 풀 죽어 커다란 덩치로 소파에 푹 엎드려 누워 버리는 걸 보고 직감했다.
‘…차였다.’
빠바빠 빠 빰 빠빠빠 빰 빰 빰-
같은 날 오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핸드폰 알람을 끄려고 확인할 때, 태언은 눈을 의심했다.
[오늘 무슨 일 있어도 여덟시에 깨워줘] 02:10 [안 일어나면 얼음물 부어라] 02:10야행성 인간인 둘째 형이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어도 8시에 깨워달라며 문자를 보내 놓은 것이 이상했다.
‘데이트 있네.’
그렇게 형에게 얼음물을 부을 각오를 하고 문을 열었을 때.
“…헐. 형 미쳤어?”
재언은 이미 일어나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었다.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1초에 한 개씩. 그 속도로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재언은 웃고 있었다. 웃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오늘 날씨. 너무 좋지.”
“뭔 소리야….”
재언이 바라본 창문 밖은 강풍과 황사로 뒤덮여 누가 봐도 텁텁한 날씨였다. 태언은 어리둥절하게 흘러나오는 TV의 뉴스 화면을 바라봤다.
“주말인 오늘 전국 대부분 지역에 올봄 첫 황사가 관측되고 있습니다.
건조한 날씨에 강풍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박보현 캐스터!“
“네, 어제저녁부터 보이시는 것처럼 서울 도심은 뿌연 먼지 장막에 갇혔습니다.”
삑-
오늘 날씨가 얼마나 후진지 말하는 일기예보를 자비 없이 꺼버린 둘째 형은 창문을 보면서 또 빙긋 웃었다.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다며….
“형, 가니?”
“응.”
“…그러고 가니?”
아무리 옷이라고는 운동복만 가득 찬 둘째 형의 옷장이라지만, 데이트할 때까지 저 꼴로 나갈 줄은 몰랐다. 블랙 컬러의 스포츠 아노락, 세트인 트레이닝 팬츠, 그리고 조든 운동화.
“왜, 이상해?”
게다가 스포츠 더플백까지. 누가 봐도 헬스 하러 가는 차림새였다.
“이거 다 새 건데…. 방금 택 뗀 거야. 그리고 공부를 하려면 편한 옷을 입어야 하니까…. 오늘 공부하러 가거든….”
라고 변명하는 형이 태언은 가엾어 보였다. 둘째 형답지 않게 말을 장황하게 하는 걸 보니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그럴 거면 차라리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던가….’
수많은 여사친과 수많은 연애 경력을 보유한 태언은 잠시 심호흡하다 큰 소리로 외쳤다.
“첫째 형, 일어나!!!”
“헉, 뭐야.”
시험 기간을 맞이해 공대생이었던 첫째 형, 승언은 죽은 듯 자다 막냇동생의 복식 호흡에 화들짝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로 나간 후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러고 가니?”
그때야 재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별로야?”라고 묻는 재언에게 두 형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쫌. 그래 보여.
“이건, 너무 신경 쓴 것 같지 않아?”
“아냐. 이거야.”
“그래, 이렇게 입어야 돼.”
이제야 좀 사네.
키가 맞는 첫째 형 승언의 옷장에서 꺼낸 블랙 컬러의 라이더 재킷은 재언의 까만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공부하러 가는 건데…. 그, 친구가 성적 고민을 하더라고….”
우물쭈물하며 재언이 말하자, 막내 태언은 이를 깨물었다. 아마 윤슬이 지금 태언의 표정을 봤더라면.
‘와, 오징X 게임….’
X발, 기훈이 형! 모두가 아는 그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제발, 재언이 형!”
오징X 게임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자랑하며 동생 태언이 소리치자, 옆에서 큰형 승언은 말없이 재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가라.”
“잘하고 와!”
누가 보면 전쟁을 나가는 것처럼 재언의 도서관 가는 길을 응원하긴 했는데, 진짜 재언은 백휘와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다.
‘나도 그 근처 살걸.’
“집이 근처니까, 윤슬이는 내가 데려다줄게.”
“오늘 고마웠어, 재언아!”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은 재언을 패잔병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대충 벗어 둔 재언의… 아니 승언의 꼬까옷이 구겨졌다.
‘새 옷인데…. 저따위로 벗네….’
저녁임에도 아메리카노를 머그컵에 마시고 있는 재언의 형 승언도 슬퍼졌다.
과제가 좀 덜할 때 놀러 나가려고 사 둔 옷이었는데 어쩌면 못 입고 봄이 지나갈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이 들었다.
승언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교수님이 올려주신 기출문제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