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Regressed Dirty Spoon Becomes a Golden Spoon RAW novel - Chapter (31)
흙수저가 회귀하면 금수저가 된다-31화(31/405)
“윤슬아. 지난번에 네가 나 줬던 거 그 파데 뭐였지?”
“어? 그거 클린오. 왜?”
“아 좋아가지고. 나 그냥 하나 새로 사려고~”
“뭐야 벌써 다 썼어?”
주현이한테 지난번에 준 협찬 파운데이션이 피부에 잘 맞나 보다. 나한테는 좀 톤이 묘하게 안 맞았지.
주현이랑 SNS에 같이 사진을 올리게 된 후로, 주현이의 미친 듯한 사진 실력 덕에 팔로워도 순식간에 많이 늘었고, 내 SNS에는 알림이 더 잦아졌다.
띠링-
[cleanO official] 안녕하세요. 윤슬님 😀 클린오 담당자님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새로 출시한 파운데이션 전제품을 윤슬님께 협찬 드리고자 연락 드렸어요. 피부 결이 너무 예쁘신데 저희 베스트셀러인 블러셔도 함께 보내드려도 될까요~!띠링-
[prettypetitgirl] 안녕하세요, 뷰티 대행사 프쀼띠걸입니다. 윤슬님께 스와로브스퀸 스완 미니 실버 목걸이 협찬 후 포스팅 요청 드리고 싶어요!이런 메시지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 오고 있다.
사진을 찍은 다음 서로의 취향에 잘 맞는 것이 있으면 그냥 선물로 쥐여 줬다. 이번에도 전 제품을 받은 만큼 주현이에게 줄 파운데이션이 있었는데….
“어, 뭐지?”
평소 바르던 파운데이션이 아니라 사물함에 넣어 놨는데, 있어야 할 자리에서 파운데이션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 물건을 많이 넣어 놓는 편이라 뒤쪽에 쓸려 들어가 있겠지 싶어 나는 보이는 물건을 전부 꺼냈다.
“윤슬이 뭐행~”
가영이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아무리 봐도 파운데이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바보인가 봐. 파운데이션 집에 두고 왔나?”
“울지 마 내새낑~”
“아. 건망증. 나 진짜 바보인가?”
“기죽지 마! 바보 맞으니까 당당하게 굴어.”
“…….”
[스킬: 팩트 폭격 시작합니다! (A)]아, 스킬 나가라고~
* * *
가영은 윤슬을 도와 사물함에 물건을 다시 넣어줬다. 협찬받은 제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윤슬의 사물함은 나름대로의 질서가 존재했다. 빌려달란 얘기를 자주 듣는 제품일수록 앞에 있었다.
‘얘는 참, 사물함 안에 뭐 이렇게 물건이 많아….’
그때, 헐렁해 보이지만 은근히 꼼꼼한 성격인 가영은 이상함을 느꼈다. 미묘하게 물건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다.
‘아닌데, 파운데이션 여기 있던 거 나도 봤는데.’
“윤슬아. 사물함 정리 좀 해야겠다.”
“아 그래야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흘리듯 대꾸하는 윤슬이었다. 대충 물건을 넣은 다음 사물함 열쇠를 걸어 잠근 윤슬은 터덜터덜 자리로 가 앉았다. 가영은 가만히 2분단 뒤편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윤슬이 점심시간이 지난 후 칫솔 컵을 꺼낼 때, 그때 바로 옆에 있던 파운데이션이었다.
“흐음….”
말을 꺼낼까 말까 고민하던 가영은 멍하니 하품을 하고 있는 윤슬을 보며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 상태 피곤해 보이는데, 신경 쓸 것 같은 말은 안 하는 게 낫겠지.’
가영은 그 뒤로 은근히 이동수업 시간마다 그날의 당번과 함께 가장 늦게 반에서 나갔다. 물건이 진짜 없어진 게 아니라 도둑맞은 거라면, 범인은 항상 교실이 빌 타이밍을 노릴 테니까.
“가영~. 가자.”
“좀만 있다가. 종 치면 가자.”
“종 치고 가면 혼나잖아~”
옆에서 비실대며 병아리 무릎담요를 품에 안은 윤슬과 함께 제일 마지막으로.
그런 둘을 뒤에서 조용히 아쉬운 눈빛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 * *
‘이런 걸 어디에 쓰지.’
어제 재언이랑 5,000보를 걸은 이후로 상태창으로부터 받은 보상.
띠링-!
「○소원석 뽑기 Random! ☜ Click!」
이제는 익숙하게 뽑기를 클릭하자 상자 안에 든 종이가 폭발했다. 가득한 흰색 종이와 몇 개의 빨간 종이, 하나의 금색 종이일 줄 알았는데….
‘흰색 대신 핑크색이네.’
상태창이 은근히 세심하단 말이지.
이제는 한정판도 낸다. 금색이 아닌 핑크색 종이가 날아와 펼쳐졌음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벚꽃 시즌을 맞이한 연한 분홍색.
「▶[보상: 많이 힘들고 버거워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소원석 획득!]
○♣‘괜찮아질 거야’ 소원석 (등급 중)
폭발할 수 있는 감정을 일시적으로 눌러줍니다. 어떤 감정이라도 말이죠!
축하합니다!
[지금 사용하기] [인벤토리에 넣기]」행운의 소원석도 아니고, 넘어가기 소원석도 아니고, 감정 누르기 소원석이라니. 인벤토리에 넣긴 넣었는데 어째 찜찜했다.
“하아암-”
“윤슬아, 요즘 왜 그렇게 피곤해해~”
옆자리에서 소희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포션을 전부 못 쓰게 됐으니 커피를 먹어 가면서 조금씩 HP를 충전하고, 어제 보상으로 받은 HP로 오늘도 거의 밤새다시피 공부하다 왔으니까.
상태창이 치사하게 몇 등이나 올려야 되는 건지 써주지도 않아서 두려움에 떨며 공부한다. 양심이 있으면 전교 1등 이딴 건 아니겠지?
“나 어제, 예상 문제지 보느라….”
“예상 문제지?”
소희는 뭐, 성적이 진짜 좋아도 너무 좋으니까. 어차피 얘는 이기지도 못한다. 내가 넘어설 수 있는 등수도 아닌데.
“응. 너도 볼래?”
이왕 보는 거 둘이 봐도 나쁘지 않지.
소희에게 문제지를 보여 주려 하자 소희는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거잖아. 너만 봐. 성적 올리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소희는 그래도 쉬면서 하라고 포도 맛 사탕을 쥐여 줬다.
난 너밖에 없어. 소희야.
* * *
“이번엔 수학부터 할까?”
해사하게 날이 갠 주말. 진심으로 웃어 보인 백휘가 말했다.
지난번 윤슬에게 정독도서관은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야기와 간단한 사정을 듣고, 백휘는 바로 여러 가지 루트를 짰다.
‘이왕이면 우리 둘만 공부하면 더 좋을 텐데.’
판을 짜는 뇌가 반짝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수학까지 가르치는 것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백휘는 플랜 C까지 잽싸게 써 내려가던 샤프를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돌머리도 할 수 있다! 똘똘 수학』
샤프 옆에는 며칠 만에 누더기가 된 것처럼 너덜거리는 문제집이 놓여 있었다. 백휘는 문제집을 보며 잠깐 고민에 잠겼다.
“후….”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놀라울 정도로 쪼잔한 ‘윤슬과 둘이서만 놀기’라고 적힌 종이를 찢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직 윤슬에게 수학을 기초부터 가르쳐주기엔 능력의 한계가 있었다.
백휘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왜냐면 본인은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치니 그 까만 머리, 재언이 쓸모가 있다고 생각됐다.
‘그냥 뭐, 누르면 답 나오는… 정답 자판기 같은 거지.’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억울하면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될 일이다. 시험 끝나고 다시 2회독을 해봐야겠어. 기말고사에는 꼭.
‘근데 그놈 올림피아드 출신이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가르치지?’
백휘는 재언을 의심했다.
설마 그 새끼도 나처럼… 기초수학부터 분석하고 있는 건가?
『돌머리도 할 수 있다! 똘똘 수학』을 손에 든 백휘가 또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며 시계를 봤다.
‘아, 아홉 시 반이다.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되네. 장소나 다시 체크해야지.’
* * *
“…형. 곧 열 시잖아. 나 제발 좀 오늘 그만하고 싶어.”
그 시간 재언의 집에서도 시계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 30분을 부풀려서 엄살을 부리는 태언이.
“…형 요즘 복싱 안 간지 좀 됐네.”
‘안 그래도 몸이 좀 찌뿌둥한데, 너 맞고 할래 그냥 할래.’를 다정하게 말하는 둘째 형 재언은 그 시간 중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형이 자꾸 오답 가지고만 물고 늘어지잖아!”
이과 머리를 타고난 첫째 형, 둘째 형과는 달리 수학을 딱 평균적으로 하는 편인 태언은 미칠 지경이었다.
자꾸 문제를 왜 모르겠는지, 어디가 이해가 안 가는지, 공식은 뭐가 가장 외우기 어려운지를 느릿하게 물으며 자신을 옥죄어왔다. 그리고 심지어.
“이건 고1 수학이잖아!”
미쳐버린 형. 이건 중학생 학대야.
태언이 주장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재언은 백휘의 생각처럼 착실한 정답 자판기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한편 백휘는 새 종이를 들고 윤슬이 평온하고 쾌적하게, 피곤하지 않게, 기분 좋게 공부할 만한 장소들을 유려한 필체로 써 내려갔다.
…윤슬은 공부할 때 절대로 평온하고 쾌적하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백휘는 모르고 있었지만, 알게 된 뒤로도 늘 그래왔다. 좋은 장소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와~. 여기 도서관 되게 좋다.”
“마음에 들어?”
백휘는 뒤에서 작고 낮은 소리로 ‘누가 보면 자기 도서관인줄 알겠어.’하고 중얼거리는 재언을 싸늘한 눈길로 돌아봤다.
“응, 여기 이런 데가 있는 줄 몰랐어.”
그리고 윤슬이 말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 보이는 윤슬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벚꽃나무 아래에 있는 윤슬은 유난히 눈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토끼 열쇠고리가 달랑거리고 있는 흰 가방이 백휘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백휘는 핸드폰으로 도서관 좌석 예약 알람을 확인했다. 시험 기간답게 빈자리가 많지 않았다. 며칠 전 학교에서 도서관 어플을 미리 깔아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 *
지잉-
[나 요즘 진짜 공부 열심히 해] [속보: 덕현여고 전교 일등 서윤슬] [이 영광은 모두 예상문제지로 저를 키우신 최백휘 선생님께… 감동의 소감..]며칠 전 그날, 마치 눈앞에 윤슬이 있는 것 같은 연락에 백휘는 그때마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입력: 만나서 같이 공부할까? 모르는 거 있으면 내가 가르쳐줄게.
지난 도서관에서 그 까만 머리와 윤슬의 수학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걸 생각하며 백휘는 대학별 최저 등급을 되새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어와 영어 중점으로 해야 한다.
얼굴에 누가 봐도 ‘어렵다’를 써놓고 있으면서 열심히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윤슬. 제일 기본적인 문제를 풀 때도 어쩔 줄 몰라하던 윤슬.
계속해서 문제를 틀렸을 때의 윤슬은 잔뜩 기가 죽어 있었다. 애 기가 죽어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그냥 수학을 죽여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음, 애한테 계속 그 고생을 시킬 수는 없지.’
가뜩이나 바쁜 애를 힘들게 해야 하나? 수학 좀 못 할 수도 있지.
다소 극단적인 어미 새의 마음이 된 백휘는 학교 근처 공부하기 좋은 카페를 검색했다. 휘핑크림을 천장까지 쌓아 줄 생각이었다.
검색: 돌담길 근처 조용한 카페….
지잉-
백휘는 핸드폰 위에 뜨는 윤슬의 메시지에 다시 검색을 취소했다.
[단독: 서윤슬 눈물의 기자회견…] [막말 파문… 국민 여러분께 죄송함을 전해…] [(울면서 마이크를 들고 소리치는 강아지 이모티콘)] [아직 영어지문을 전부 외우지 못해, 질문 거리 없다며 고개 숙여…] [그래도 만날 때까지는 외워서 물어볼 거 체크해 갈게ㅠ 나 믿지ㅠ]빠르게 꼬리 내리는 모습이 또 실없이 웃게 했다. 백휘는 책상 아래 핸드폰을 잡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윤슬과 있으면 기분이 맑아진다. 머리가 단순해졌다.
“하하… 아, 미쳤다.”
“므츤 근 느그….”
옆에서 졸고 있던 재겸이 미친 건 너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시험 전 자습 시간답게 적막이 깔린 교실에서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교탁 앞에서 경하고의 해병대 국어 선생, 강대엽이 지긋이 광기 어린 눈으로 백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 잘 깎은 복숭아나무 몽둥이를 들고.
‘아… 방금 내가 입 밖으로 꺼냈구나.’
강대엽뿐만이 아니라 반의 학생들 모두 백휘를 쳐다보고 있는 잔잔한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백휘는 바로 눈치를 챘다.
‘볼륨 조절도… 안 했구나.’
조용한 자습 시간 교실이 울리도록 “(귀여움이) 미쳤다.” 소리를 입 밖으로 낸 백휘였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백휘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
“…….”
3초 정도 강대엽 선생님과의 어색한 아이 컨택 시간이 지났을까.
최백휘는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왔다. 그러니까, 자습 시간에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연락을 하다가, 이렇게 걸리는 일 같은 건.
“영어 단어 검색을 했는데, 안 나와서 미쳤다고-”
“마, 거짓말도 즉당히 해라. 유학 가따온 놈이 무슨.”
저벅- 저벅-
직업이 뭐냐는 설문지가 있으면 절대 ‘선생님’이라는 답변은 하나도 없을 만한 생김새의 강대엽이 웃는 낯으로 백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1분단 맨 뒷자리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사채업자의 그것이었다.
“시험 기간에 왜 이르케~, 우리 배키가 풀어져쓰까아?”
“맞아요. 선생님. 이 새끼 정신 좀 차리게 해 주세요.”
“…….”
백휘의 옆자리 재겸이 건들거리며 말을 거들었다. 누구보다 이 교실에서 풀어진 주제에 싱글대며 웃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탁탁.
나무 몽둥이를 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 가볍게 내리치는 폼은 금방이라도 이 학교를 철거하러 온 깡패 같았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공부를 하냐고 물을 것 같은 웃음으로 백휘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차분하게 입꼬리를 올린 상태로 반성하는 표정의 백휘를 한 번 쓸어보던 강대엽은 영단어를 찾고 있었다는 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책상 위에 예상 문제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깔끔한 포스트잇으로 체크를 해 둔 곳들도 있었다.
“…마, 진짜였나?”
“네. 제가 그새 까먹었나 봐요. 왜 이러지. 옆에서 재겸이가 아무리 풀어졌어도 저까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야! 나는 왜 끌고 들어가!”
“마. 니는 쫌.”
복숭아 몽둥이로 아프지 않게 재겸의 머리를 친 강대엽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려 했다. 그때였다. 재겸이 백휘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책상이 움직인 순간.
딩-동-댕-동
“마, 즉당히 하고~”
양쪽 1.5 1.5 현대인답지 않은 시력의 강대엽은 캐치했다. 문제지 위에 작게 ‘덕현여고 1학년 1학기 기말 예상 문제지’가 적혀 있는 것을.
잘 깎은 복숭아나무 몽둥이를 가지고 반을 나서며 강대엽은 주머니 안에서 폰트를 크게 해놓은 핸드폰을 꺼냈다. 강대엽의 감성을 닮은 초코쿠키체가 예쁘게도 빛났다.
[입력: 형아 요즘 고등학생 미쳐따안카나] [첫째 형: 먼데.] [입력: 낭만이 아직 안 죽었따.]로맨스가 살아 있따…. 머릿속으로 어제 본 드라마 OST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가슴이 웅장해졌다.
티 내지 않았지만 말랑해진 시선으로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분홍색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강대엽의 마음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대엽은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로맨스를 잊지 않는 사나이. 줄여서 ‘로잊사’ 명예 회원인 그의 머릿속에 로맨스 소설 명대사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첫째 형: 먼 개소리고.]엥, 쯧쯧. 프로필 사진 봐라. 이러니까 감성이 메말라 있지…. 오랜만에 바꿔놓고 이게 뭐고.
대엽이 클릭한 핸드폰의 프로필에는.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는.. 대어~^^..’
커다란 생선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마초 병에 걸린 형이 있었다.
“메칠 전까지 계속 이상한 벽 사진이드만….”
이제 질렸는갑제.
교무실로 발을 옮기며 대엽은 최백휘가 기말고사까지 준비해주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다.
그의 첫째 형, 강중엽의 보수공사 된 벽의 자부심에 금을 내다 못해 부숴 버린 권재언이 기초 문제지에 수학 풀이를 써 내려가게 하는 사람과 동일 인물인 줄도 모르고.
“나 언제 일어날 수 있냐?”
“피곤해서 헛소리를 막 하던데, 재겸이가.”
“영영 잠들게 하려는 거 아니지? 나 지금 머리가 압축되고 있는 거 같다….”
“더 자. 맘 편히 놓고 더 자.”
백휘는 한 손으로는 아까 헛소리를 한 재겸의 머리를 그대로 눌러 엎드리게 하고 한 손으로는 답장을 기다렸다. 재겸은 실실 웃으면서 뻔뻔하게 ‘배키가 재겨미 머리 쓰다듬어 주는 고야?’라고 말해 결국 뒤통수를 때리게 만들었다.
답장으로는 코피 흘리는 강아지 이모티콘이 왔다.
‘코피까지 흘리면 안 되는데….’
그 작은 손으로 이모티콘을 보낼 윤슬을 생각하면 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열린 창가에 불어오는 봄바람이 유독 단 오후였다. 흰 커튼이 몇 번이나 부풀어 올랐다 꺼졌다를 반복하며 흔들렸고, 영어가 가득 적힌 종이 사이로 햇살이 비치며 글자를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