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Regressed Dirty Spoon Becomes a Golden Spoon RAW novel - Chapter (32)
흙수저가 회귀하면 금수저가 된다-32화(32/405)
“여기는 테라스도 있네?”
“아무래도 지어진 지 오래돼서. 여기가 안 답답하고 좋을 거야.”
“자주 와 봤나 보다. 추억이 있는 도서관 뭐 그런 거야?”
“음…. 추억. 뭐 그런 거야.”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는 전통의 도서관. 사직공원을 바로 옆에 둔 종로 도서관은 뒤에는 산이, 앞에는 돌담길이 그리고 옆에는 윤슬을 보여 주고 싶던 벚나무들이 있었다.
“와. 도서관에 추억도 있고…. 어쩐지. 공부 잘할 것 같았어.”
대단하다는 듯 바라보는 윤슬에게 백휘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그래. 추억… 뭐 나름대로….’
윤슬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마 다르겠지만 쓸모없는 추억을 남겨 준 조부에게 아주 조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정치의 무대로 이용되던 전통 도서관이 이렇게 도움 될 줄이야.
유난히 종로를 사랑하는 백휘의 할아버지는 이 일대를 누비며 언론 앞에서 쇼를 하는 게 일종의 취미였다. 그 뻔뻔한 모습에 TV 너머로 경악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일제의 잔재를, 우리나라 자랑스러운 학생들이 형설지공하며 수학하는 곳에 심어두는 게 웬 말입니까!”
[최강묵 의원, 전통을 자랑하는 종로 도서관에 개혁을…]“그래, 벚꽃나무 싸악- 밀고. 거기 가로등 세워 봅시다~. 딱! 예쁘게.”
의원을 할 때는 ‘애국심’ 구슬리면서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벚나무 밀어버리기. 낡은 도서관을 재공사 한답시고 접대 받아가며 국고 빼돌리기. 여기에 전통 좋아하는 시민들의 마음 얻기까지.
“학생들이 진정으로 배움을 만나러 가는 곳이, 이렇게 삭막해서 되겠습니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이 새로운 물결이 흘러나오는 시대에, 우리 학생들에게도 숨 쉴 공간을 줘야 합니다!”
[최강묵 문화부 장관, 삭막한 학생들의 마음에 핑크빛을 심어…]“그래. 가로등 잠깐 뽑고. 거기 벚꽃나무 심어봅시다~. 딱! 예쁘게.”
장관이 되었을 때는 트렌디한 정치인임을 널리 알리기, 또다시 재공사하면서 접대 받아 국고 빼돌리기, 여기에 자식을 둔 부모 마음 얻기까지.
“아, 기력 딸리지도 않나. 이벤트 참 좋아해”
과거, 재겸과 뉴스를 보던 백휘는 정떨어진다는 표정으로 TV를 껐었다. 대체 뭐 하는 낭비인지 모르겠다며 작게 욕을 내뱉었다.
“내일 할아버지 앞에서도 웃어 드려, 딱! 이쁘게.”
할아버지의 말버릇을 따라하는 재겸에게 백휘는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 얄밉게 피한 재겸은 그런 백휘를 보며 또 한참을 웃었었다.
밖에서는 어른들이 평소처럼 모여 교양 있는 대화로 포장한 투기 건에 대해 담소를 나눴다. 백휘는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또 새롭게 단장한 도서관에 끌려갈 생각을 하면 편안히 숨쉬기가 어려웠다.
백휘는 아름다운 정독도서관에서 이 도서관이 다시 열리던 날을 회상했다. 윤슬이에게 했던 말처럼 나름대로 추억이었다.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노동의 기억이었지만.
유서 깊은 종로구의 자랑스러운 뼛골 정치인. 자기가 짜 놓은 판에 맞춰 주변을 부쉈다가 조립했다가를 반복하는 최씨 집안 능구렁이 늙은이.
“자자, 장관님 손자 분-! 여기 보세요~ 찍습니다, 하나. 둘-!”
TV를 볼 때부터 불길했던 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도서관 완공일이 되자마자 백휘는 새벽부터 끌려 나와 강제노동을 했다. 이번에는 청소년의 마음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정치인의 컨셉에 단정한 손자만큼 좋은 게 없었으므로.
휴일에도 교복을 입고 공사 후 오픈을 다시 하는 도서관에서 백휘는 기사용 사진을 찍었었다.
‘하하, 이럴 줄 알았지. 웃기지도 않아서….’
험한 말을 생각하는 머릿속과 다르게 청량하게 웃으면서 백휘는 억지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봤다.
재겸의 말대로 이쁘게 웃어주면서. 속으로는 차라리 책 나르기나 시키라고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적당히 하지….’
찰칵-!
“너무 좋아요. 완벽해. 그레이트!”
소리 지르며 정말 이상적이도록 정갈한 이목구비라고 정치인 앞에서 호들갑 떠는 사진기사도 짜증 났고.
“제 손자가. 저를 닮아 참 인물이 좋지요~. 이 벚나무들과도 참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뻔뻔한 정치인도 짜증 났다.
휘잉-
‘이딴 건 또 왜 이렇게 많이 심어서….’
도서관을 가득 둘러싸고 있는 분홍빛의 벚나무들마저 짜증 났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학생들이 지치고 힘들 때도 찾는 곳이 도서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강묵 장관, 학생들의 새로운 쉼터를 향한 나침반 드나] [최 장관이 원하는 유토피아에 대해 논하다]이따위로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번엔 또 우리 정치인 씨가 돈을 얼마나 차려서 먹이셨을까, 이쁘게. 생각을 했는데.
“테라스에 벚꽃 잎 떨어지니까 너무 좋다~”
놀러 온 것 같아, 신나서 하늘을 바라보는 윤슬을 보고 처음으로 정치인이 괜찮은 일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 최고의 업적이네요. 벚나무 잔뜩 심은 거.’
지금 보니 도서관을 둘러싼 벚나무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흔들리는 분홍빛 나무 사이로 윤슬의 결 좋은 머리카락도 사륵사륵 바람을 탔다.
“윤슬아, 오늘은 수학부터 할까?”
“응!”
“난 잠깐 나갔다 올게.”
지난번의 일을 잊지 않은 백휘는 자연스럽게 아이스 초코를 사러 가기 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까만 머리 놈은 수돗물이나 먹으라고 해야겠다.’
서울시는 수돗물도 안전하니까 뭐 괜찮겠지….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고.
마음대로 결론을 내린 후 백휘는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서 계단을 몇 칸씩 뛰어 내려가듯 했다. 도서관의 출입문을 나서 뛰자마자 차르르, 벚꽃 잎을 싣고 바람이 날려 왔다.
머리에 온통 벚꽃 잎이 묻어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 *
윤슬의 안색이 시간이 지날수록 흙빛이 되어갔다. 처음엔 벚꽃을 보고 그렇게 행복해하더니. 수학을 가르치는 재언의 옆에서 보령 머드축제를 누구보다 즐긴 시민1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불리한 싸움이다….’
한 번도 무언가와의 싸움에서 약한 소리를 해본 적 없던 재언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윤슬의 눈이 절반 이상 감기기 직전이었다. 귀여워서 울 것 같았고, 조금 막막해서 울 것 같기도 한 재언이었다.
“…윤슬아.”
“…….”
“윤슬아.”
“어어…! 나 잠깐 공식, 어. 기억이 안 나 가지고.”
수학 싫어하는 거 여전하구나.
재언은 중학교 일학년 때도 수학 시간만 되면 다섯 번 중 세 번은 졸던 윤슬을 기억했다.
재언은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윤슬을 줄 음료를 사러 갈 생각이었다. 단 걸 먹으면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
“저기….”
그런데 입구를 나서자마자 재언의 눈에 익은 갈색 머리통이 보였다.
“저, 여자친구 없으시면-”
“죄송합니다.”
쟨 참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구나, 하고 재언은 생각했다. 우물쭈물 핸드폰을 내미는 여자 둘을 옆에 내버려 두고 최백휘가 빠른 걸음으로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 새끼… 손에 들린 저거. 아이스 초코 아니야?
재언은 다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낭패다. 이러려고 수학 먼저 하라고 했구나.
재언은 풀이 죽어 한 손으로 목덜미를 벅벅 쓸며 다시 윤슬이 있는 테라스로 갔다.
“야, 잘생긴 값 한다.”
“아니야 진짜 바빠 보였어.”
“까이고서도 왜 이래.”
“아까는 뛰어갔단 말이야.”
백휘가 도서관 건물에서 달려 나갔던 그 순간부터, 다시 도서관 입구까지 오기만을 기다렸던 여성은 아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친절하게 생겨서. 이쪽 한번 보지도 않고 “죄송합니다.” 중저음으로 말하고는 가버리는 것조차….
‘잘생겼어….’
넓은 어깨에 네이비 컬러의 브이넥 니트가 걸쳐진 핏, 그리고 섬세한 턱선. 한 번 잘생긴 남자를 마주치면 도시괴담처럼 10년을 읊조리게 되는 척박한 서울에서 단비와 같은 이목구비를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고 있을 때.
‘어?’
그리고 그 남자가 지나간 자리로, 똑같이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가 있었다. 넓은 등짝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까만 티, 그리고 블랙 진을 입은 긴 다리.
“야, 여기 터 좋다….”
옆에 있던 친구가 넋을 놓고 말했다. 백휘에게 내밀었던 핸드폰을 손에 쥔 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 여기 정기가 맑다.
* * *
“진심, 이제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아.”
백휘가 내민 아이스 초코를 순식간에 절반 마셔 버린 윤슬은 잠깐 찬물로 손이라도 씻어야겠다며 화장실에 갔다.
“아까 봤지?”
윤슬이 자리를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백휘는 재언에게 말을 걸었다. 시야가 넓은 백휘는 아까 낯선 여성들이 말을 걸 때 시야각에 잡히는 까맣고 유난히 커다란 무언가를 봤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재언이를. 본인은 나름 안 보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덩치였다.
“…….”
재언은 대꾸해주지 않고 수학 문제를 대충 풀어 나가고 있었다.
‘재수 없게… 풀이도 대충 중간 암산으로 때려 박으면서 하네. 저거.’
말도 안 되는 속도감으로 고난도의 수학 문제를 풀어 나가는 재언을 보며 백휘는 혀를 내둘렀다.
재언의 큼지막한 손에 잡힌 샤프가 상대적으로 너무 가련하고 작아 보였다. 큼. 목을 가다듬은 백휘가 다시 말을 걸었다.
“뇌물이니까 그거 먹고 비밀로 해줘.”
수돗물이나 먹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기브 앤 테이크가 몸에 박힌 백휘는 차마 양심상 그러지 못했다.
자기가 마시는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똑같이 사다 줄까 생각하다 본인이 봐도 너무 치졸한 행동 같아서 재언의 몫으로도 아이스 초코를 주문했다.
‘지난번에 내가 한 거 그대로 할 것 같은데….’
재언이 자신의 몫의 아이스 초코를 마시지 않고 윤슬에게 건네면 어떻게 하지.
음료를 살 때 잠깐 고민하던 백휘는 몰래 작은 마카롱도 하나 샀다. 분홍색으로 ‘딸기 맛’이라고 적혀 있는 동글동글한 과자를.
재언이 아이스 초코를 윤슬에게 바쳐버리면 백휘는 더 좋은 카드를 꺼낼 참이었다.
손에 분홍색 마카롱을 든 백휘는 인심 써 재언의 아이스초코에도 시럽을 추가해줬다. 돔 뚜껑 아래의 꾹꾹 눌러 넘치도록 담아낸 흰색 휘핑크림과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초콜릿 시럽이 보기만 해도 끔찍하게 달았다.
“…나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셨는데.”
얕게 인상 쓴 재언이 말했다.
백휘의 예상대로 이번에는 재언이 아이스 초코를 냉큼 줘 버릴 생각이었다. 선수 뺏긴 것도 짜증 나고, 윤슬이 빨대를 입에 대자마자 절반이나 마셔버려 곧 한 잔을 다 마시고 또 먹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
백휘는 재언을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마카롱도 사 왔는데. 줘 보던가.”
재언이 아이스 초코를 양보해봤자 윤슬의 관심은 빠르게 마카롱으로 옮겨질 것이었다. 상황 판단을 한 재언의 짙은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맞은편에 앉은 백휘는 날씨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에는 조금도 웃음기가 없었지만 입꼬리만큼은 시원하게 올라가 있는 반듯한 얼굴을 보며 재언은 작게 감탄했다.
“와… 너는 참… 성격이 안 좋다.”
“너도 좋아 보이진 않는데.”
그러니까 얼른 마셔, 뇌물. 괜히 말해서 윤슬이 신경 쓰게 하지 말고.
여유롭게 샤프를 돌리며 백휘가 영어 지문을 쓱 읽어 나갔다.
“지금 마시면 마카롱은 윤슬이 집 갈 때 준다~”
끝까지 안 준다는 말은 안 하는 백휘였다. 이제야 아이스 초코를 한 모금 마신 재언이 받아쳤다.
“글쎄 뭐… 과연.”
윤슬이가 번호 따일 뻔한 거 신경이나 쓸까? 그런 뉘앙스였다.
‘해보자는 거지.’
재언은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초반부터 철저하게 준비해 온 백휘에게 확실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하. 근데 윤슬이가 신경 쓰건 안 쓰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인데.”
백휘가 환하게 웃으며 비꼬고.
“…있는데, 상관.”
재언이 인상을 쓰고 받아쳤다.
“그만하고 가서 어플 개발이나 하지?”
“…어. 개발은 내가 알아서 하고, 넌 하던 공부나 해.”
느릿하게 말을 하던 재언은 점점 말이 빨라지고, 백휘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행동 똑바로 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플이나 신경 쓰고.”
백휘는 재언이 평일에 윤슬을 찾아가 굳이 같이 벚꽃을 본 것을 알고 있었고.
“허… 내가 차린 어플에 숟가락만 들고 오는 건 어디 사는 누구? 뻔뻔하게 티스푼을 들고 오네….”
“말은 제대로 해야지, 뭐 차린 건 있고?”
재언은 윤슬과 학교가 가까운 백휘 때문에 자꾸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아, 나도 경하고나 갈걸. 무슨 거지 같은 고등학교에 버려져서….
집이 가깝다고 한 치의 고민 없이 1지망을 서기고로 써 버린 재언은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서기고의 강중엽 선생님이 이런 재언을 알면 다시 배트를 휘두를 것이다.
따스한 봄날, 둘의 사이에만 냉기가 돌았다. 윤슬이 있던 때와 다르게 웃음기가 섞이지 않은 테이블에는 컵들이 햇빛을 받아 느릿하게 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집도 먼데 굳이 여기까지 오시고, 어플은 초반 틀만 잡혔고…. 그럼 네가 여기 와야 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닌가? 어플 얘기하신다면서요. 만들고 오셔야죠.”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백휘가 차분히 비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