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Regressed Dirty Spoon Becomes a Golden Spoon RAW novel - Chapter (8)
흙수저가 회귀하면 금수저가 된다-8화(8/405)
얘도 참 타이밍 잘 맞네.
“너 연락 온 것 같은데.”
내 말에 백휘는 잠깐 시선을 내려 핸드폰 화면을 보더니 홀드 버튼을 눌러 화면을 꺼버렸다. 반짝이던 화면은 다시 어두워졌다.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야.”
“답장 안 해?”
“안 해도 되는 거야.”
싱글싱글,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는 백휘의 머리 위에 스킬창이 다시 켜졌다.
「[스킬: 알 수 없지만 (A+)]」
부끄러울 때만 켜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미미하게 웃음에 불쾌한 감정들이 섞여 내비쳐졌다. 몇 겹이나 감싸 놔도 가려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감정들이.
백휘의 핸드폰 화면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 [중요한 일이야, 전화해.]라는 문장이 언뜻 스쳐 보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 * *
내 가방 안에서는 작은 반지갑 하나, 립밤 하나, 틴트 두 개, 쿠션 팩트 하나, 핸드크림 하나, 도장 하나, 마잉쭈 껍질 몇 개와 길가에서 받은 전단지, 그리고 끈 고무줄 삼천 개가 나왔다.
‘아, 씨, 정리 좀 해 둘걸….’
참지 못하고 마잉쭈 껍질을 보며 푸스스 웃은 백휘는 꺼내 놓은 물건들을 단정하게 배치를 해줬다.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는 물건들의 대칭. 물건 길이도 크기도 다 제각각인데 마치 제 자리인 것처럼 두는 솜씨가 제법이다. 얘는 원래도 정리정돈 잘하는 애인 것 같다.
지문이 묻어있는 쿠션 팩트는 자연스럽게 집어 테이블의 냅킨으로 슥슥 닦아 없애고 다시 배치했다.
“카메라 켜 줄래?”
「[스킬: 인생 샷을 찍어줄게 (A+)]」
머리 위 떠오르는 황금빛 스킬.
‘오늘 내가 어떻게든 사진 스탯 올려본다.’
사진을 계속 찍던 도중, 테이블이 다 울리도록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지잉- 지잉-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휘가 표정을 굳히고 싸늘하게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숨을 작게 내쉰 후,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어, 먼저 가. 오늘, 고마웠어.”
“아니, 집에 데려다 줄게. 이 근처지?”
딸랑-
백휘가 잡아주는 카페 문을 나서 느릿하게 보폭을 맞춰 걸었다. 이렇게 바로 옆에 서니까 키가 큰 게 실감이 난다.
흑역사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목구비다.
‘나와 다르게 졸업앨범도 잘 꺼내 보겠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앨범에서조차 최백휘는 완성된 얼굴이었을 것이다.
아까부터 나도 모르게 얼굴 구경을 하다 눈이 마주쳐 이번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면만 보고 걸었다. 옆에서 흔들리는 백휘의 손등에 찍힌 ‘서윤슬인’이라는 도장이 아직 선명하다.
아까 가방을 정리하기 전 이거 잘 찍히냐며 장난삼아 본인의 손등에 꾹 눌렀던 내 이름의 도장. 키키 게스트 계약서에 찍었던 인주가 잔뜩 묻어 백휘의 손등에 새빨간 내 이름이 새겨졌다.
“오늘 말한 거 이해는 쉬웠어?”
“응, 대칭이랑 그림자는 확실히. 그런데 광원은 조금 어려운 것 같더라.”
“대칭은 원래 잘 맞췄으니까.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체크하는 건 시간이 걸리지.”
“넌 사진 찍는 걸 언제부터 좋아했어?”
옆을 살짝 올려다보자, 처음부터 이쪽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버릇처럼 웃으며 발걸음을 맞춰주는 백휘에게서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뜸들임이 느껴졌다.
“그냥… 어릴 때부터? 기억 잘 안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신기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재미라기보다는.”
다시금 핸드폰에 전화가 오듯 진동이 울리는데, 백휘는 무심한 듯 외투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버리며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진 찍고 있으면, 주변이 좀 조용해지잖아.”
“…….”
머리 위로 다시금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킬: 알 수 없지만 (A+)]」
“내가 수줍음이 많아서.”
…거짓말.
띠링-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이해도 +10
이름: 최 백휘
▶이해도: 10/999
▷인물에 대한 이해도 상승은 랜덤으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
“얘기 좀 해.”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
“말을 왜 그딴 식으로 해?!”
고상한 발레리나였던 엄마 입에서 나오는 고성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유학 가 있을 때 잠깐 안 듣고 살았다고 그새 잊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최백휘 한국 들어오건 말건 따라서 입국하는 게 아니었다. 조급한 마음에 따라 나갔고, 조급한 마음에 따라 들어왔다. 물론 최백휘의 동의 따위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우리 두 집안의 일인 거잖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
제인은 좋을 대로 합리화하면서 다시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초조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집안일에 대해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집안 일. 이건 제인과 백휘의 불문율이었다. 자식들을 체스판의 장기 말처럼 여기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집안일이면 아무리 말하기 싫더라도 웃으면서 대화해야 했다. 집안일이면 아무리 보기 싫더라도 웃으면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시끄러운 집에서 나와 혼자 카페에 멍하니 있으면서 하제인은 룰을 어긴 백휘를 생각했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반칙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나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두는 건 반칙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게 만드는 남자였다. 최백휘는.
“너 손등에 그게 뭐야?”
“왜 자꾸 전화해? 그만 좀 해.”하고 날카롭게 말하는 백휘의 목소리에도 안 서러웠는데, 늦게 온 백휘의 손등 위에 찍혀있는 빨간 자국.
불행한 부부에게서 길러진 아이는 필연적으로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다. 제인은 직감했다.
“알 거 없어.”
알 것이 있지만 제인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터벅터벅-
둘은 말없이 걸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이야기에는 대충 듣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최백휘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 백휘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기댈 곳 없고 기대지 말아야 할 제인을 기대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서 윤슬 인’이 빨갛게 찍혀 있는 백휘의 손등은 그토록 싫어하던 엄마의 목소리를 닮고 싶게 만들었다. 잔뜩 화난 째지는 목소리를.
‘서윤슬… 아무것도 아니면서.’
졸부 주제에. 너네 집안도 너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꼴에 그것도 다 말아먹었으면서. 그따위 주제에. 같잖게 명품관은 왜 와서 최백휘를 마주쳐서는.
Vip 라운지가 언제부터 거지같은 것들도 올 수 있는 줄 알고. 이제 더 이상 거기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서윤슬 주제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최백휘의 손등에 찍힌 빨간 글자만이 환하게 밝은 것 같았다. 제인은 엄마를 닮지 않기 위해 속으로 냉정하게 윤슬의 주제를 따져 볼 뿐이었다.
‘그래. 니 주제에….’
목구멍이 뜨거웠다. 언젠가는 윤슬에게 이 비참한 감정을 제대로 알려 줘야겠다고. 몇 배로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밤거리를 걸었다.
넓지만 기댈 수 없는 최백휘의 등을 바라보면서.
* * *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태창이 눈앞에 떠 있었다. 모닝콜도 아니고 뭐야 이거.
띠링- 띠링-
「▶System
【미션: 일반】
▶어-이! 허니 쥬뗌므
외국인 팔로워가 ( 3000 )명에 도달한 당신! 이제 더 큰 세계로 나아갑시다.
외국인 팔로워를 ( 7 )일 안에 ( 500 )명 추가 모집하세요.
보상
○유명세 스탯 상승
수락하시겠습니까?
[ Yes ] [ No ]」‘뭐야….’
어제도 새벽 내내 외국인 해시태그를 타고 다니며 유스타그램 팔로워를 모았더니, 그새 팔로워가 3000명을 넘은 모양이다.
‘보상이 별거 없는데, 그냥 넘길까….’
저 유명세 스탯은 별 쓸모가 없는 것 같다. 정해진 포인트가 되면 열람할 수 있다고는 했는데, 그 포인트가 얼마인지 설명해주지도 않고.
‘그냥 아이템이나 주지 유명세는 무슨.’
뜨다만 눈을 다시 감고 일단 상태창을 다시 접어두었다.
상태창이 내 눈앞에 뜨게 된 지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 상태창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몇 가지 편리한 기능이 있다는 것도.
내가 가진 물건들을 아이템으로 치환시켜 어떤 물건인지 확실한 지표를 제시해 준다. 이를테면.
띠링-
「▼상세 설명▼
[이불 밖은 위험해! 수면 잠옷]23,900 (무료배송)
→착용하자마자 포곤포곤해진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이불을 닮은 잠옷. 컬러가 아이보리라 웜톤에게 잘 어울린다.
▶찰떡지수: 70
특성: 입는 순간부터 1시간에 3씩 HP가 천천히 오른다. (오래 입어 조금 후줄근하다. 목 부분의 레이스가 닳았다. 원래 컬러감은 우윳빛 아이보리였으나 이제 살짝 베이지가 감돈다….)」
이렇게.
모든 물건이 아이템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 것으로 인식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 매장에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어느 정도 기능을 하는 아이템인지 인식이 힘들다.
‘지난번 SPA 매장에서 제품들을 둘러봤을 때, 하나도 특성이 나타나지 않았지.’
한번 시험해보고자 가장 저렴한 양말을 샀더니 결제를 한 그 순간부터 특성이 뜨기 시작했다.
띠링-
「▼상세 설명▼
[무난무난 발목양말]3800
→어디에나 코디하기 쉬운 발목 양말. 자꾸자꾸 손이 가므로 같은 걸 여러 개 사두면 더 좋다.
※ 기본 아이템을 몇 개 더 구매할 시 스킬 포인트가 쌓여 새로운 스킬을 열람할 수 있게 됩니다.
▶찰떡지수: 100
특성: 신는 순간부터 1%. HP의 손실을 막아준다. (화이트와 아이보리 컬러에게 조금 밀려 자존심이 상해하던 블랙 컬러. 주저 없이 바로 집어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직접 구매해야지만 나타나는 특성인지,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이어도 나타나는지 알아야 할 텐데….’
스탯 뿐만 아니라 스킬을 동시에 올리고 싶다. 보상으로 아직 스킬을 얻은 적이 없으니 어쩌면 스킬은 돈을 사용해 아이템을 모아야지만 올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된다.
‘쩨쩨하게 현질을 유도하다니.’
보상으로 만 원씩 주는 상태창 때문에 과금할 돈이 없는 게 한이다. 정말.
* * *
“윤슬님, 저희 다음 달부터 작성될 글말인데요. 일단 이번 신제품들 퀵으로 보내드리려 하는데 괜찮으세요? 첨부파일로 보내는 것 보다 실물로 체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앗 넵. 주소 불러드리면 될까요?”
오랜만에 업무 관련된 통화를 했더니 직장인의 고질병 넵. 병이 나오고 있었다.
혹시 이게 바로 [스킬: 직장인의 마음가짐 (A)]…? 누구보다 빠르게, 적재적소에. 마치 확실히 업무 내용을 숙지했다는 것처럼, 넵.
‘이래서… A급 스킬인 건가?’
“넵 윤슬님. 불러드린 주소로 지금 보내드릴게요. 1시간 후면 퀵 도착할 거예요.”
“넵. 알겠습니다.”
프로 직장인들의 넵 배틀. 어쩌면 병아리 담당자의 머리 위에서도 직장인의 마음 스킬이 반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윤슬님 계약금 내일 입금 될 거예요. 원래 저희 다른 에디터분들은 계약금이 없는데…. 그만큼 윤슬님 믿고 부탁드리는 거 아시죠?”
계약금, 이라는 말에 온 신경이 핸드폰으로 쭉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빠르게 골드를 다시 채울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예상에 없었는데. 전에 없던 애사심이 불탄다.
(돈 더 많이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돈 주는 만큼만) 성실히 하겠습니다.
“넵 그럼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요. 그럼 이따 퀵 보내겠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프로 넵무새들의 대화로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꽉 잡은 상태로 나는 붕붕 손을 흔들었다.
‘해냈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해냈다!’
기쁨의 세리머니 후 귀찮다고 접어놨던 상태창을 다시 펼쳤다. 이번에 들어온 협찬 제품들은 내 아이템으로 뜨는지 확인을 해야 했으니까.
「[현재 아이템]
이불 밖은 위험해! 수면 잠옷
▶찰떡지수: 70
무난무난 발목양말
▶찰떡지수: 100
엄마가 사다 줬어! 곰돌이 팬티
▶찰떡지수: 100
…」
…이것까지 뜨네. 어찌 됐든 찰떡지수가 높으니까 좋은 거겠지.
커다란 우체국 박스로 네 개나 쌓여 있는 박스를 열어 제품들을 하나씩 꺼냈다.
봄 시즌 니트, 원피스, 새로 나온 브랜드의 가방, 그리고 새로운 컬러로 나온 틴트 시리즈, 원데이 렌즈들….
‘아이템 창 안 켜지네.’
진짜 이거 과금을 유도하는 거 아냐?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왜인지 반짝거리는 효과가 보이는 상자에서 립스틱을 열어 꺼낸 순간.
띠링-!
「▼상세 설명▼
[페리페로 립 틴트: 앙큼한 핑크 프린세스]☞당신에게 찰떡콩떡!
10,800
→촉촉한 질감으로 발랐을 때 각질 부각이 되지 않는다. 노란기 없는 차갑고 시원한 채도 높은 핑크 컬러로, 쿨톤에게 잘 어울린다.
▶찰떡지수: 95
특성: 바르는 순간부터 얼굴에 형광등이 켜진다. 보습력이 좋은 만큼 묻어남이 있다. 수시로 덧발라 줘야 한다.
매력: 스탯이 (+7) 늘어난다.」
어? 이게 되네. 잠깐, 나 쿨톤이었나…?
‘지금까지 당연히 웜톤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아 씨. 어쩐지. 별로 전문가 같지 않더라니.’
몇 년 전 퍼스널 컬러 테스트가 유행하면서 나름 유명한 곳으로 가 컬러 진단까지 받았는데…. 어쩐지 후기가 많다 했다.
바이럴 좋좋소 직원이 바이럴에게 당하다니. 이건 수치다.
나는 이를 깨물고 하나하나 포장을 뜯었다. 그때마다 상태창이 열리며 제품의 특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확실해졌다. 내가 돈을 주고 산 제품이 아니더라도 내가 포장을 뜯고, 내 것이라고 인식이 되면 아이템으로 변경되는 듯했다.
‘다행히 현질 유도는 아니네.’
앞으로 있을 수많은 시행착오들을 비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자 위에 반짝거리는 효과들이 있었던 제품들은 모두 찰떡지수가 90 이상이었다.
분명 퍼스널 컬러 테스트를 받았을 땐 빼박 웜톤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웜톤인 줄 알았는데. 내가 톤그로라니, 내가 톤그로라니…! 잠깐.
‘아직 지금 시기는 퍼스널 컬러라는 유행이 없지. 이거 잘하면 퍼스널 컬러를 이용해서 뭔가 해볼 수 있겠는데….’
사람마다 잘 어울리는 색이 찰떡지수로 뜬다면, 한 번에 톤그로를 잡아낼 수 있으니까….
근데 이 아이템 상태창이 타인에게도 적용이 될까?
나는 잠깐 가득 쌓인 협찬 제품들을 보다가, 조용히 핸드폰을 들었다.
-슬아!
“나연아. 혹시 우리 집에 놀러 올 수 있어?”
삼 초 만에 전화를 받고 한 시간 안에 온다던 나연이는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 우리 집 벨을 눌렀다.
* * *
“그러니까, 넌 이제 키키 게스트 에디터라고? 서윤슬이?”
“응. 다음 달부터 정식이야.”
나연이의 호감도가 말을 듣자마자 계속 오르고 있다.
“야 완전 멋있다~ 진짜 잘됐다~ 이거는 다른 애들한테도 자랑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걸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어? 나였으면 키키 게스트에서 연락 오자마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바꿔놨다. 그리고 이름도 바꿔놓음. 키키 게스트 연락 온 이나연으로.”
신나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나연이를 보고 있다 보니 정말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당분간은 비밀로 할 거야. 전속 에디터 되면 이래저래 말이 많을 것 같아서. 프리로 계약한 것도 있어.”
“흡….”
조용히 나를 지켜보는 나연이의 눈이 어쩐지 감동으로 젖어 있다. 왜지?
나연은 두 손으로 입을 막더니 이윽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리는 비밀이 없는 친구인 거지… 그래서 나한테만 먼저….”
사실은 내가 뒷광고 할 거라 숨기는 거지만.
뒷광고.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에 크게 한 번 터졌던 이슈다. 인플루언서들이 광고비를 받은 후, 광고가 아닌 척. 정말로 좋은 척 앞에서 바람잡이를 하다 걸렸던 사건.
‘이른바 내돈 내산 사기 사건이지.’
제가 직접 사서 썼는데, 너무 좋아서요 = 돈 받았다.
여러분들한테 꼭 추천 드리고 싶어서 = 많이 받았다.
제 친구들도 이거 한번 써보더니 다들 제품명 받아 적어 가더라구요 = 정말 많이 받았다.
광고 절대 아니에요~ = 뒷광고다.
인튜브가 대세 플랫폼이 된 이후로 몇 년 뒤에나 지나서 걸렸으니, 지금은 절대 걸릴 일이 없다. 이 상태로 2~3년만 뭉뚱그려 얼버무리다 보면 되는 거지.
갓 고등학교 입학한 열일곱 살에게 광고를 주는 브랜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지금은 그런 인플루언서에게 광고를 주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니까. 협찬이면 몰라도.
‘하지만 플랫폼이랑 콘텐츠 계약을 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셀카 사진만 찍고 정말 좋아요, 하는 것과는 다르게 플랫폼에 에디터로서 작성할 콘텐츠는 이것저것 비교를 하거나 한 제품만 보여 주지 않고 여러가지를 보여 주거나 한 브랜드의 제품만을 광고하지 않는다면 글 아래에는 이렇게 기재를 해도 상관없다.
[이 글은 키키 게스트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지원이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제품을 협찬받은 것으로만 인식될 거다. 내가 키키 게스트와 협찬 계약을 진행한 이유.
이런 식으로 광고비를 받았다고 공표하는 걸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요컨대, 브랜드에게 1:1로 컨택 하거나, 그 브랜드의 제품만 보여 주지 않으면 상관없다 이거지.’
[이 글은 페리페로의 지원과 소정의 광고비, 캐르쉬의 지원과 소정의 광고비, 샌로랑의 지원과 소정의 광고비, … 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이렇게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편법이지만.
그나저나 발라 봐도 돼? 입어 봐도 돼? 를 하나하나 허락받고 보던 나연이에게는 맞는 아이템 창이 뜨지 않았다.
「▼상세 설명▼
[페리페로 립 틴트: 앙큼한 핑크 프린세스]☞당신에게 찰떡콩떡!
10,800
→촉촉한 질감으로 발랐을 때 각질 부각이 되지 않는다. 노란기 없는 차갑고 시원한 채도 높은 핑크 컬러로, 쿨톤에게 잘 어울린다.
▶찰떡지수: 95
특성: 바르는 순간부터 얼굴에 형광등이 켜진다. 보습력이 좋은 만큼 묻어남이 있다. 수시로 덧발라 줘야 한다.
매력: 스탯이 (+7) 늘어난다.」
‘똑같은 걸 보니 나한테만 되는 건가 보네….’
내 매력 스탯에만 관련되는 건가. 에휴, 좋다 말았네. 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계속 깜박거려서 지금까지 확인하지 못했던 나연의 머리 위 호감도 옆, 자그마한 화살표 표시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눌러보자 아이템창의 글이 변경되었다.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