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le I’m Taking Revenge, I’ll Take Down The Top Idols RAW novel - Chapter (16)
16화
후다닥 몸을 일으켜 세워 제이에게 뛰어갔다. 지금 퍼질러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놔.”
“앗.”
제이의 손에서 냅다 노트북을 뺏어 메신저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보니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불길하게도.
[포레스트 걸 B조: 한승범, 이단비, 김상중, 박지원, 김호준, 나기 젠, 야마다 하야토.]“얘네 설마.”
“응, 형이 가르쳤던 그 병아리들 몇 명 있어. 일본인들은 연습에도 잘 못 껴서 아마 형이 모를 거고.”
“한 명 있는 S등급은 이단비네.”
‘병아리 1번이군.’
명단 안에 있는 이름들 중 정확히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건 열일곱 살 이단비뿐이었다.
관자놀이 부근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고작 한 명 있는 실력자가 이단비면 조금 곤란한데.’
이단비는 S등급으로 올라왔다고 해도 빠른 성장 속도와 극적인 서사로 고평가된 것일 뿐, 실제 실력은 A등급의 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S등급에서 강등된 백기량이 더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백기량은 너무 소심해서 무대에서 못 써먹긴 하겠지만.’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고 열심히 노력하는 점은 참 기특했지만, 이단비는 피지컬과 목소리에서 어리고 미숙한 티가 났다.
“큰일이다!”
“넌 조용히 해.”
머리를 불쑥 내밀고 말하는 제이를 꾹 눌렀다. 모든 일의 원흉이 아무 생각도 없는 걸 보니 골이 아팠다.
“노래는 정해졌어?”
“포레스트 걸. 몽환적인 콘셉트로 유명한 걸 그룹 노래야.”
“…하.”
산 넘어 산이었다. 뚝딱거리는 놈들을 데리고 몽환 콘셉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애들 데리고 섹시 콘셉트를 안 해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종이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외투를 걸쳐 입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뭘 가만히 보고 있어.”
“응?”
“빨리 나가서 택시 잡아. 지금 네가 운전하는 차 타기 싫으니까. 그리고 노트북 내놔.”
“뭐 하게?”
“럭키 센터 도착할 때까지 안무 다 따고 뭐라도 수를 써 봐야지.”
“나랑 대화한다면서.”
제이가 우뚝 서서 나를 응시했다.
솔직히 놈을 진정시키기 위해 대화를 하자고 꼬셨지만, 사실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동안 강혁우가 니네 인질로 잡고 협박해서 말 못했다. 죄송. 이딴 식으로 말하면 놈이 퍽이나 가만히 있겠는가. 진실을 알고 훼까닥한 놈이 강혁우를 찾아가는 일이 벌어질 바에야 그냥 찔리고 말겠다.
‘…대충 넘기자.’
“네가 이 짓거리 안 벌였으면 대화할 시간이 있었겠지. 지금 조 편성 망해서 연습하기도 바쁜데 그 긴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
제이가 나를 죽어라 노려봤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본인이 벌인 일인데 할 말은 없겠지. 오히려 노려봐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또 난리 치려나.’
들짐승을 대하는 것처럼 양손을 앞으로 펼쳐 적정 거리를 취했다. 그리고 놈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건, 질린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였어.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너희를 귀찮게 여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응?”
“지금도 그 사정 때문에 못 알려 준다는 말이야?”
“응. 그러면 내가 힘들어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강하게 말 못 하는 거 아니까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지.”
“맞아. 그냥 휘둘려 줘.”
내가 힘들어진다는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놈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렸다.
“우리가 싫었던 게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형이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릴게. 기다리는 건 익숙해.”
“고맙다. 이해해 줘서.”
‘휴.’
고비를 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대신 계속 옆에 있어. 살아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저번처럼 사라져 버리면 다 뒤집어 버리고 나도 죽을 거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도끼눈을 뜬 놈이 속사포로 말했다.
‘뒤집긴 뭘 뒤집어.’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놈이 다 뒤집어 버린다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알았어, 약속할게.”
영혼 없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놈은 지갑을 들고 앞장섰다. 한승범은 카드도 없는 연습생이니까.
* * *
제이가 부른 택시를 타고 서둘러 연습실로 들어가 보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개판이었다.
‘볼 만하네.’
다른 조는 S급 연습생들을 중심으로 연습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는데, 우리 조만 침체된 공기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연습실에 들어온 나를 발견한 아이들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승범 형! 아프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걱정했어요.”
“이제 괜찮아. 늦어져서 미안.”
멤버들의 분위기를 한번 쭉 살펴보니 대충 감이 왔다.
“안녕하세요.”
벌떡 일어난 일본인 B, 나기 젠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까만 마스크 위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사했다.
“…….”
놈의 얼굴을 본 나는 순간 멈칫했다.
솔직한 감상은 이것이었다.
‘야, 야비하게 생겼어.’
이화영에게 뱀같이 웃는다고 했던 말을 전부 취소하겠다.
따지고 보면 이화영은 엘프나 드래곤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진짜 뱀상은 이놈이었다.
‘연습실에서 자고 있으면 등 돌리고 있는 사이에 돌로 내 머리를 내리칠 것 같아.’
머리카락도 요상했다. 아이돌들이 흔히 하는 레몬 옐로우도 아니었고, 이화영 같은 내추럴 블론드도 아니었다. 양아치 옐로우였다, 저건.
‘도대체 머리를 왜 저따구로.’
시커멓게 죽은 검은 눈동자에는 안광이 없었다. 미동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놈에게 대충 고개를 꾸벅 숙이고 시선을 돌렸다. 뭔가 오래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리의 희망은 형뿐이에요.”
“아직 아무것도 진도 못 나갔어요…….”
타이밍 좋게 주위를 둘러싼 한국 병아리들이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무대는 어떻게 한대?”
“편곡은 자유고요. 의상이나 무대 소품 같은 거 희망 사항 있으면 사전에 정리해서 나중에 제작진 분들한테 전달해 달래요.”
“만약에 아무것도 제출 안 하면?”
“원곡자분들 무대 참고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제작진 측에서 준비해 주신대요. 그리고 현장 투표에서 이긴 팀은 베네핏 표를 부여한다고 했어요. 지금은 포지션 정해서 제출하라고 하셔서 일단 저희끼리 대강 써 봤어요.”
이단비의 깔끔한 정리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보여 줘.”
“네.”
[리더: 한승범센터: 한승범
메인 보컬 1: 한승범
메인 보컬 2: 박지원
서브보컬 1: 이단비
서브보컬 2: 나기 젠
서브보컬 3: 야마다 하야토
래퍼 1: 김상중]
‘뭐냐. 이 한승범 파티는.’
포지션 종이를 건네받아 보니 리더도 나고, 메인 보컬도 나고, 센터도 나였다. 댄스 포지션에 대해서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아마 메인댄서도 나일 것이다.
“내가… 많네. 그것도 아주.”
“제가 추천했어요! 잘했죠!”
이단비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니.’
이렇게 혼자 다 해 먹으면 시청자들에게 욕심이 많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포지션을 정하는 과정을 보지 못해 어떤 식으로 편집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동의한 거야?”
“네! 그리고 형이 제일 연장자라 리더는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일본인들도 포지션 오케이?”
손가락으로 O자를 그리며 묻자 두 일본인들이 대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박수를 한 번 짝 치고, 비장하게 말했다.
“좋아. 노래부터 불러 보자고.”
포지션은 웃기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최대한 빠르게 연습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
.
.
“저 하누레 홋씨 다을카.”
“다시. 누가 아니라 느. 입이 동그라미가 아니라 살짝 옆으로 찢어지면서 아래 치아, 이빨이 보이면서 가로로 길어지는 걸 의식해.”
“하느레.”
“그래. 훨씬 듣기 좋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연습을 꽤 진행해 보니 대략적인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일본인 두 명은 창법부터 시작해 뜯어고쳐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도대체 뭐를 듣고 배운 건지 지금까지 내가 들어왔던 J-POP 밴드의 노래들이 전부 구라 같았다.
여럿 있는 문제들 중 가장 심각한 건 일본인 A의 발음이었다.
“혹시.”
“홋씨.”
“아니야. 혀 움직이지 말고. 혹시.”
“혹씨.”
“좋아.”
‘4일 뒤가 트레이너 중간 평가일인데…….’
정말 발음 하나하나 입 모양까지 살펴보며 교정해 줘야 했다.
소속사에서 발음 교정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인지 본인이 노력하지 않은 것인지 일본어에 없는 모음이나 받침의 발음이 거의 안 됐다. 일상 회화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노래를 이렇게 부르면 매우 곤란했다.
어차피 일본인 멤버가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기 때문에 교정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실력을 제외하더라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아, 조금만 쉬면 안 돼요? 힘들어요.”
“시간 없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연습에 따라오는 일본인 B와 다르게 예상치도 못했던 일본인 A가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너무 힘들어. 다 별로라고 지적하는데…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적당히 마무리하고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 너도 그렇지?] [글쎄.]일본어로 말하면 못 알아들으리라 생각한 건지 일본인 A가 심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유감인 점은 일본인 B가 전혀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일본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중하자. 지금 바쁘니까. 잡담 그만하고.”
“맞아요,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단호하게 주의를 주니 슬슬 안무 준비를 시작하는 다른 조를 보며 초조해하던 멤버들이 거들었다. 그러자 일본인 A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나쁘지 않아요. 이 정도면 좋아. 우리가 즐기지 못하면 팬들도 즐기지 못하니까 조금 편하게 가요.”
“…….”
“중요한 건 미소! 매력 어필이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습니다.”
진도가 늦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기적의 합리화를 해 봤자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었다.
‘꼴값 떠네.’
이놈이 답도 없는 놈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팀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이 정도면 팀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연습에 늦게 합류한 입장에서 지적질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은 연습 효율을 낮추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있잖아, 춤도 노래도 제대로 안 할 거면 뭐 하러 무대에 서는 거야?”
그러나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앳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져 나왔다.
“…….”
“…….”
내 옆구리에 뭔가 붙어 있었다.
“아, 형.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긴 속눈썹, 젖살이 덜 빠져 부드러운 볼, 분홍색 티셔츠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릴 정도로 귀여운 외모를 가진 소년. 같은 팀으로 배정된 이들 중 최연소인 이단비였다.
‘신경 안 쓰기에는 지금 내 몸에 붙어 계시는데.’
“J-POP에도 열심히 하고 잘하는 사람들 많아요. 야마토 형이 실력 없어서 나라 망신시키고 다니는 걸 문화 탓하지 마세요.”
나라 망신이라는 말을 듣고 의미를 해석하는 듯 잠시 머리를 굴리던 일본인 A가 뒤늦게 놀라 요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매력 어필도 중요하다고…….”
“어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춤이랑 노래를 못하니까 핑계 대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떡하죠. 내가 볼 때는 그 어필도 못 하는 것 같은데.”
‘워. 공포의 주둥아리인데.’
이게 만약 게임이었다면 정신 공격 크리티컬이 떴을 것이다.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닙니까?”
일본인 A가 발끈하여 벌떡 일어나자 이단비도 따라 일어났다.
“사실을 말하는 건데 심하게 느껴졌다면 본인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죠.”
‘무슨 기린 물어뜯는 토끼 같네.’
얼굴은 무슨 토끼처럼 생겨서 성깔은 제대로였다.
예상치 못한 이단비의 역정에 나는 상대적으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둘이서 싸움이 날 것 같아 상대적으로 작은 이단비의 어깨를 팔로 감아 조금 뒤로 물러났다.
“보여요? 베네핏 하나로 탈락이랑 생존 갈리는 애들이 코피 쏟아 가면서 연습하는 거. 그 거슬리는 태도들 유지하고 싶으면 절박한 사람 인생 말아먹지 말고 나가요. 매력 어필만 해도 먹히는 곳으로 가라고. 가서 해피 스마일 실컷 하세요. 그런데 그런 곳이 존재하기는 하나?”
“이, 이잇!”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일본어로라도 내 말에 반박할 수 있으면 해 보세요. 저는 들어줄 생각이 있어요. 근데 형 못 하잖아요.”
이단비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끝까지 쏘아붙였다. 그러자 일본인 A는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우물거리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야마다의 뒷모습을 감흥 없는 얼굴로 지켜 보던 이단비가 배시시 예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 틀린 말 안 한 것 같은데. 그쵸, 형?”
‘와.’
예쁜 꽃에 가시가 숨어 있다는 것은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깜찍한 소년의 혀에는 빠따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왜 내 옆구리에 붙어서 빠따를 휘두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