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le I’m Taking Revenge, I’ll Take Down The Top Idols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찬 공기를 마시면 조금이라도 가슴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숨이 갑갑했지만, 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았다.
방송에 자주 나가고 인지도가 올라가게 되면서 최근에는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늘어났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바람을 쐬려면 옥상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묵묵히 계단을 오르던 나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굳게 닫혀 있던 옥상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이 바로 얼굴을 덮치고, 좁은 계단 통로만을 비추던 시야가 확 넓어졌다. 하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
고요했다.
자동차의 배기음, 빗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건물이 바람에 울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쏴아아.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꼭 파도가 치는 밤바다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람에 흩어져 엉망이 된 앞머리를 아예 뒤로 쓸어 넘긴 후,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나는 앞머리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달고 다니던 사람이 아니었다. 한승범이 처음부터 앞머리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계속 그렇게 지냈을 뿐이었지. 익숙하게 머리를 넘기자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봤던 한승범의 얼굴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나는 다시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스팔트의 물웅덩이가 신호등의 불빛을 비추고 있는 게 보였다.
신호가 몇 번씩 바뀌고 도로 위의 차들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나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헤집어 보아도 익숙한 종이 갑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제야 뒤늦게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리즘 멤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착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편의점에 다녀올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비에 옷이 다 젖어 버려서 실내로 들어가면 민폐를 끼칠 게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내가 어떤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뒤늦게 자각했다.
‘아, 우산.’
옥상에는 지붕이 없었다.
우산을 들고 왔어야 했는데 그걸 잊어버렸다.
이러다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런 당연한 생각까지 사고가 전개되지 않았다. 그냥 차가운 빗물이 머리를 식혀 주는 것 같아 가만히 난간에 기댄 채 시간을 보냈다.
“…후.”
허전한 입을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머금고, 다시 내쉬자 입술을 스쳐 빠져나가는 온기가 하얀 김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것을 시선으로 좇으며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자 별들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까지 먹구름이 끼면 보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
아침부터 내내 비가 내리더니 도통 날씨가 맑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번개는 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하고 마치 어떤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속으로 계속 다른 생각을 이어 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말자.
깊은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발장구를 치듯 사고를 돌렸다.
‘이 정도 높이는 생각보다 괜찮네.’
무미건조하게 아래를 내려보고 있자 생각보다 마음이 평온했다. 떨어져도 즉사하지 않을 정도의 높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추락하는 느낌만이 거슬렸던 건지. 저번에 놀이기구를 탔을 때처럼 큰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답답하던 가슴이 서늘해져 편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툭, 툭.
속눈썹과 콧날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난간에 떨어져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중, 난간 사이로 검은 우산을 든 사람 하나가 작업실 건물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이웃인가.’
우산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이치세처럼 홀로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세대가 많은 건물이라 이웃은 그리 많지 않않은 편이었다. 내가 오가며 봤던 이웃들은 대부분 저런 행색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 같고. 따라서 이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걸 보면 손님도 아닌 것 같았다.
건물 밖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 이를 보며 의문을 느끼고 있을 즈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드디어 얼굴을 좀 볼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상한 목격담이 돌까 걱정이 되었던 나는 몸을 뒤로 물렸고, 언뜻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던 그는 내가 다시 난간 근처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자리를 뜨고 난 뒤였다.
다시 머릿속의 한 부분이 공백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이 사라진 후,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 네가 아무리 그렇게 발악해 봤자 넌 고작 대체품이야.
–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그런 말투로 말하지 마! 역겹다고!
그러자 남이훤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빠르게 몰아쳤다.
오래된 TV의 채널을 마구 돌리는 것처럼 노이즈가 낀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너 나 괴롭히려고, 어디 한번 죽어 보라고 이러는 거냐?
– …형,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마지막.
– 형 때문이야.
빠아앙!
남이훤의 것이 아닌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자동차의 경적음이 울렸다.
그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난간에 기대 수면 위로 건져 올려진 사람처럼 기침을 뱉었다.
그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경적이 울렸던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아직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 하…….”
순식간이었다.
잠깐 방심한 것뿐이었는데 머릿속으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빨리 의식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점점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집념에 갇히자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게 더 힘들어진 것이다.
이제 와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강박이란 언제나 그런 법이다.
차라리 그냥 정면으로 부딪쳐 처음부터 다시 쌓는 게 효율적일까. 덤덤하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며 알림 소리가 났다.
띠링!
‘…옷이 이렇게 젖었는데 용케 안 망가졌군.’
잠금을 해제하자 태의에게 문자가 온 게 보였다.
[ㅌ: 안녕하세요, 한승범 님. COMA-1 태의입니다. 엊그제 부탁하셨던 것에 관해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아직 활동기가 끝나지 않아 바쁜 와중에도 녀석은 스케줄이 끝날 때마다 내게 이렇게 답장을 주곤 했다.
[ㅌ: 혹시 그 클럽에 대해 파헤치려는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엮여봤자 좋을 게 없는 곳입니다. 한승범 님은 유명인이니 더더욱이요.]작업 중간중간에 태의와 계속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며 강혁우의 클럽에 관련된 정보라든가, 임승훈이나 강혁우의 사적인 장소와 스케줄에 관해 계속해서 정보를 물었더니 어지간히도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다.
평소대로였다면 묵묵히 내 질문에 본인이 아는 한 대답을 해 주었을 텐데, 녀석은 이번만큼은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 클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태의가 그렇게 걱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
나는 태의의 문자에 답장하길 망설였다.
태의는 아군은 아니지만, 협력자였다.
아군이지만, 협력자는 아닌 최적현과 반대로 말이다.
정보를 포기하는 대신 리스크를 0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배신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내가 그 클럽에 연연하는 이유를 털어놓을 것인가. 그 두 가지 갈림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는 게 나 혼자라면 기꺼이 감수했을 텐데.’
프리즘 멤버들이 함께 피해를 볼 수 있으니 결정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화면을 응시하며 고민하던 나는 일단 그 문자에 답장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래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 봤던 사람인가?’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눈여겨볼 만한 게 없었다. 아마 이미 건물 내부로 들어왔거나, 처음부터 내부에 있었던 것 같았다.
“…….”
가만히 그 발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니 남성용 구두 특유의 낮고 딱딱한 굽이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급해서 저런 불편한 신발로 건물을 헤집고, 그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것일까.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듯 작은 소리로 시작했던 그것은 어느샌가 점점 커져 옥상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 의아하여 소리가 들려오는 쪽에 시선을 주자 돌연 철제 문이 거칠게 열리며 장정이 옥상에 뛰어 들어왔다.
벌컥!
“…한승범!”
가슴이 터져라 달려온 그 사람은 남이훤이었다.
분명 술에 취해서 깊게 잠들었을 텐데,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마주한 남이훤의 얼굴에 나는 기대어 있던 난간에서 등을 떼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자 공포에 잠식된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렸다.
“…움직이지 마.”
“네?”
술기운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발을 떼 녀석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술이 깬 거라면 최대한 녀석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배님, 저는…….”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이훤의 금색 눈동자가 요동치며 비명이 날카롭게 흩어졌다.
“안 돼!”
“…….”
“움직이지 마. 그냥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아무것도 하지 마!”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였다.
녀석의 상태가 이상했다.
“내가, 내가 갈 거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한 녀석은 내 움직임을 경계하며 잔뜩 긴장한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됐을 때, 녀석은 낚아채듯 내 몸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나를 잡자마자 다리 힘이 빠졌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아이처럼 몸을 응크리며 형편없이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붙잡은 팔의 힘은 풀지 않아, 나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함께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팔이 매우 뜨거웠다.
녀석의 몸에 열이 나는 건지, 아니면 내 몸이 식은 건지는 모르겠다.
“왜,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춥잖아. …내가 나쁘게 말해서 그런 거야? 힘들어서?”
“…저는 그냥 바람을 쐬러 나온 것뿐입니다.”
내 대답을 들고도 녀석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는지 확장된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드디어 정신이 들었는지 내 멱살을 붙잡은 채 호통쳤다.
“너 미쳤어?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차라리 화를 내, 이러지 말고!”
나는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남이훤이 무슨 오해를 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씁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안 죽습니다. 그냥 정말 바람 쐬러 나온 것뿐이에요.”
“…….”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직전, 손목이 붙잡혔다.
쿵, 쿵, 쿵, 쿵.
맞닿은 피부 위로 내 맥박이 일정한 박자로 뛰는 게 느껴졌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소리였다.
그에 어쩐지 속이 안 좋아져 재차 다리를 움직이려 하자 녀석은 더욱 강하게 손목을 붙잡으며 꺼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너한테 이러고 있는 내가 싫어. 나 하나 숨 좀 쉬자고 형을 배신하는 게…….”
“…….”
“그런데 그냥, 형은 내가 이래도 용서해 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서유태로서 ‘괜찮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녀석이 원하는 대로 옆에 있어 주는 것 외에는 없었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남이훤은 그런 나를 보며 그저 옆에 있으라는 것 외에는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고, 우리 사이의 변화는 딱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시간은 그렇게 흘러 아이돌 스포츠 대전의 촬영일이 코앞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