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does the land document of the fantasy Demon Castle belong to? RAW novel - Chapter 1
제1화
* * *
집이라곤 십여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
토지 서류에서도 지워져 영주조차 잊어버린, 세금을 걷으러 오는 징세관만이 악착같이 기억하는 마을의 한 건물에 밤늦게 불이 켜져 있었다.
노파가 근심 어린 눈으로 켜져 있는 등불을 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두덩과 쭈글쭈글한 얼굴이 그녀가 지나온 삶이었다.
등에 기름이 떨어지면 지금 키우는 야채를 내다 팔고 나서야 기름을 보충할 수 있다.
기름이 없으면 밤에 바느질을 못 하고, 그러면 당분간 식탁에 올릴 반찬이 적어진다.
바느질을 하지 않는 밤에는 본래 등불을 켜지 않는다.
하지만 노파는 등불을 끌 수 없었다.
“할머니, 잠이 안 와.”
평소라면 진즉 잠들었을 손자가 눈을 똘망똘망 뜬 채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 가득하던 노파의 표정이 대번에 풀어졌다. 삶의 고민은 삶의 이유보다 우선할 수 없다.
노파는 사랑을 가득 담아 손자를 바라보았다. 전쟁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노파에게 손자는 그녀의 보물이자 삶의 이유였다.
아침에 밭일하고 난 손자는 졸린다며 낮잠을 자더니 밤에 잠이 안 온다고 깨어 있었다.
밤을 무서워하는 손자는 등불이 없으면 울어버리기에 불을 끌 수도 없었다.
“그럼, 이 할미가 이야기라도 해줄까?”
“용사 이야기. 용사님 이야기가 좋아.”
“어이쿠, 그 이야기는 벌써 열 번도 넘게 들어놓고는.”
“그래도 좋은 걸… 용사님 이야기.”
“알겠다. 알겠어. 옛날 옛날에….”
“거짓말. 15년밖에 안 됐잖아.”
“우리 손주 기억력도 좋지. 그래, 15년 전에, 마족이 세상에 나타났단다. 무시무시한 마족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나라를 차지하고, 결국 세상의 반을 자기 것으로 삼았단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마족과 싸웠지만, 그들로는 마왕을 쓰러뜨릴 수 없었단다. 그때….”
“용사! 용사님과 동료들이 나타났어!”
“어이구, 그럼 용사님의 동료들이 누군지도 아나?”
“용사님, 마법사님, 성인님, 그리고 도둑님. 그런데 도둑은 나쁜 사람이잖아. 왜 도둑님이야?”
신나서 떠드는 손주를 보며 노파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이 아이가 있기에 노파는 삶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초라한 삶에 미련을 가득 담는다.
언젠가 자신이 죽고 혼자 남을 손주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할머니, 울어?”
“늙으면 눈이 고장 나, 가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단다.”
“할머니, 아프지 마.”
“할미는 네가 늙어 죽을 때까지 살 거야! 그러니 걱정 말어. 도둑이 왜 도둑님인지 궁금하다고 했지? 도둑은 원래 나쁜 사람이었지만, 용사님이 도둑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었단다. 그래서 도둑님이라 불리는 거란다. 용사님, 마법사님, 성인님, 그리고 도둑님. 네 사람은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여정에 나섰단다.”
검으로 하늘을 가르는 용사.
마법으로 땅을 뒤집는 마법사.
숨만 붙어 있으면 어떤 상처도 고치는 성인.
황제의 보물 창고도 털 수 있는 도둑.
네 명의 영웅은 마족의 땅을 가로질러 마왕성으로 가 마왕을 죽였다.
그리고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마족이 모두 사라졌다.
누군가는 용사의 기적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마법사의 기적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성인의 기도를 신이 들어준 것이라 말했다.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던 마족은 모두 죽고, 세상의 반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단다. 그리고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지금도 사람들은 서쪽으로, 서부로 가고 있지.”
손주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파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서부, 주인 없는 세상의 반.
평민도 노예도 지주가 되고, 영주가 될 수 있는 꿈의 땅.
노파의 아들 내외도 서쪽 저 어딘가에서 흙이 되었을 것이다.
노파가 등불을 후 불었다.
작은 마을이 어둠에 잠겼다.
* * *
길게 늘어진 인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숫자는 수천은 되었고, 말을 탄 사람의 숫자도 천이 넘었다.
개중에는 말에 마차를 맨 사람도 있었고, 말 대신 들소의 뿔에 줄을 건 사람도 보였다.
어쨌든, 대충 그은 줄 하나를 기준으로 수천의 사람과 동물이 뒤엉켰다.
“감자 사세요! 막 구운 감자 있… 으아악!”
소 한 마리가 소년의 감자 바구니에 고개를 처박았고, 배고픈 짐승의 습격에 놀란 소년이 놀라 나자빠졌다.
날아간 뜨거운 감자가 동물들의 머리에 떨어졌고, 성난 말들이 난동을 부렸다.
기수들이 말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수십 마리가 넘는 짐승이 서로 놀라 날뛰는 꼴을 막는 건 개인의 영역이 아니었다.
임시 망루 위의 기사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 지랄을 한 시간을 더 봐야 한다고?”
“조용히 시킬까요?”
부관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놔둬라. 누가 있을지 모르니까. 미친 용병한테 밉보였다간 길에서 칼 맞는다.”
“연합 지휘관을 건드리는 간 큰 놈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미친놈이지. 막말로, 찌르고 저 앞으로 달려가면 누가 잡아 올래?”
부관은 망루 앞으로 뻗은 끝없는 대지를 보았다.
텅 빈 땅은 지평선 저 끝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에는 지금 보이는 것의 수천, 수만 배의 땅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부관이 쓰게 웃었다.
“못 잡겠군요. 살인자 하나를 잡겠다고 세상의 반을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또 모르지. 살해당한 사람이 제국 황제쯤 되면 몰라.”
“기사님, 그거 제가 찌르면 교수형입니다?”
“난 제국 소속 아니다. 그리고 수틀리면, 저 앞으로 달려 버리지 뭐.”
기사는 여상하게 망루 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지를 가리켰다.
“그것도 그렇군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조직에서 차출된 연합의 기사와 부관은 웃음을 터뜨렸다.
망루 아래에서는 여전히 흩뿌려진 구운 감자의 파동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흥분한 말 한 마리가 대충 그어둔 하얀 선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말의 몸통에 꽉 매달린 기수는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웃던 부관이 정색했다.
“기사님.”
“잠깐. 마법사가 먼저 움직였다.”
어디선가 떨어진 불덩이가 말과 기수를 뒤덮었다.
마법사의 불길은 인마를 잿더미로 만든 후에야 꺼졌다. 한 줌 잿더미가 바람에 흩날렸다.
부관이 침을 삼켰다. 기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망루 난관에 턱을 괬다.
“우리는 시간이나 죽이면 되겠군.”
“저… 저게 마법이군요.”
“지휘관급 아니었나? 마법 처음 봐?”
“전략부 소속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책상물림이었죠.”
“하. 그런 놈까지 현장에 투입해? 어디든 급하긴 급한 모양이야.”
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번 코웃음 치고는 하늘을 보았다.
자기 처지가 우스운 건 부관도 마찬가지였다. 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는 기사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저 너머를 시야에 담았다.
“어디든 그렇죠. 제국이든, 공국이든, 성황국이든. 무려 세상의 반이지 않습니까. 기사님은 마족을 보셨습니까? 그 연세시면 당시에도 현역이셨을 것 같은데.”
“봤지. 직접 베어보기도 했고.”
“마족은 어땠습니까?”
기사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는 10년의 세월을 거슬렀다.
그의 고향은 최전선에 인접해 있었고, 그도 한 명의 기사로서 전쟁에 참여했다.
세상의 반을 집어삼킨 마왕, 그리고 마왕이 이끄는 마족과 싸웠다.
기사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지평선 너머까지 검은 마족이 드글거렸지. 아침부터 밤까지 전투가 끊이지 않았고. 모포 한 장을 깔고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끝없이 포성이 들려서 잠도 잘 수 없었어.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었을 거야.”
“그 정도였습니까?”
기사는 자기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부관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 새꺄. 그러니까 용사님께 감사해라. 용사님이 아니었으면 너도 지옥에 던져졌을 거야. 어쩌면… 인류가 이미 없을지도 모르지.”
참전 기사의 경험이 담긴 말의 무게에 부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용사님을 직접 보신 적도 있습니까?”
“딱 한 번.”
긴장했던 부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빛냈다. 그와 같은 세대의 젊은이 중 용사에 대해 환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마족 가득한 대지를 가로질러 마왕을 무찌르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용사와 그의 동료들!
전설로나 전해질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시대였다.
부관은 그 시대를 사는 청년이었고.
“용사님의 일검은 구름을 가르고, 마법사님의 마법은 하늘과 땅을 부린다고 들었습니다. 진짠가요?”
“구름을 가르는 건 못 봤어도, 대지를 가르는 건 봤지. 지평선 너머까지 바글거리던 마족이 일검에 갈라졌다. 저게 같은 인간인지 의심될 정도였어. 신이 내린 사자나 신의 현신이 있다면 분명 용사였을 테야.”
“…그게 진짜입니까?”
“짜샤. 질문한 건 너잖아.”
기사가 부관의 머리를 한 대 후려쳤다. 부관이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날고 기는 기사도 나무나 자르는 게 전부인데, 지평선을 가르다니요.”
“그거, 기사 모독이다?”
“하지만 사실이죠.”
“그것도 그래.”
기사는 나무를 단칼에 자른다. 그리고 보통 그게 기사가 기사라 불리는 기준이고, 또 이유다.
나무를 자른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면 나무꾼이라는 직업이 따로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무꾼은 커다란 도끼를 수십 번씩 휘둘러 가며 나무 하나를 넘긴다. 요령 없는 사람은 도끼를 쥐여줘도 나무껍질이나 자른다.
수십 번의 도끼질에 넘어가는 나무를, 도끼보다 훨씬 약한, 부러지기 쉬운 검으로 한 번에 자르는 사람. 그게 기사다. 그래서 기사는 초인이라 불린다.
용사는, 단칼에 지평선을 가른다.
부관은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지도 못했고, 기사는 10년이 넘어서도 선명한, 그 전율적인 기억을 잠시 음미했다.
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몇 마리의 말이 흥분해 출발선을 튀어 나갔고, 그때마다 어디서 떨어지는지 모를 불길이 말과 기수를 함께 집어삼켰다.
“부지런한 마법사군. 오늘은 재수가 좋아.”
“기사님. 저기.”
“응? 저거 뭐야?”
부관의 손가락 끝에는 주인 없는, 약 한 시간 후면 새로운 주인이 생길 땅이 있었고, 그 땅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감시병들은 뭘 한 거야?”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특별한 재주를 가진 놈인가.”
“쏠까요?”
“안 닿아. 내가 직접 만난다. 이쪽으로 인계하고, 마법사한테도 쏘지 말라고 해.”
“알겠습니다.”
명령은 금방 출발선 전체로 하달되었다.
기사는 눈을 크게 뜨고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청년으로 보였고, 체구는 건장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악기?”
“하모니카입니다. 제 고향에서 유행하던 물건이죠.”
“그걸 왜 불어?”
“저야 모르죠. 부정 출발자일까요?”
“부정 출발자라면 깃발을 지키고 있겠지. 뭐가 됐든 만나보면 알 일이야.”
기사와 부관은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놈이 절대 평범한 놈은 아닐 거라는 것.
남자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시간은 흘렀다.
“기사님, 출발 시간 아닙니까?”
“5분 남았다.”
4분, 3분, 2분.
기사는 품에서 폭죽을 꺼냈다.
망루 위에 있는 기사를 살피던 몇몇 기수가 고삐를 당겼고, 말에게 각성제를 먹이는 사람도 심심찮게 보였다.
말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들에게는 말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토지.
땅.
영주의 것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땅.
마지막으로 기사의 시선은 여전히 하모니카를 불며 걸어오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놈은 죽을 생각인가?”
“기사님 말대로, 한가락 하는 놈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출발이 늦으면 저희도 곱게 안 끝날 겁니다.”
“알고 있어.”
시계가 정각을 가리켰다. 기사가 폭죽에 달린 줄을 당겼고, 거의 동시에 몇 군데에서 똑같이 폭죽이 터졌다.
수천 인마가 질주했다.
허름한 거적때기를 입은 사람은 맨발로 달렸고, 탈것을 가진 사람은 그게 뭐든 채찍질해 가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몸싸움에 밀린 말이 쓰러지며 옆에서 달리던 사람을 덮쳤고, 그 위를 다시 말발굽과 마차의 바퀴가 짓밟았다.
사람과 말과 기타 탈것들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들은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역을 넘어 깃발을 꽂을 것이고, 측량사가 측량을 끝내면 자기 땅을 얻을 것이다.
기사와 부관도 가지지 못한 자신의 땅을 가지는 것이다.
“땅이라… 나도 개척자나 될까. 너는 어때?”
“전 절대 개척자는 안 되렵니다. 사람을 뎅겅뎅겅 자르는 기사님과 달리 전 토끼 한 마리 못 죽이는 샌님이라서요. 측량사들이 하는 말의 반만 사실이라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부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궁상떨지 말고 내려가자.”
“아직 첫 번째 깃발도….”
“저놈. 진짜 뭔가 있는 놈인 것 같다.”
기사는 흙먼지 자욱한 땅을 턱짓하고는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흙먼지 사이에서는 여전히 남자가 하모니카를 불며 걸어오고 있었다.
“까딱하면 기사도 밟혀 죽는 난장판에서 살아남아?”
한 손으로 하모니카를 불면서?
부관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기사와 달리 평범한 인간인 그가 망루에서 뛰어내리면 다리 병신 되기 딱 좋다.
느릿한 부관이 도착했을 때 정체불명의 남자는 출발선을 관리하던 병사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의 상사인 기사와 함께였다.
기척을 느낀 기사는 고개를 돌려 부관에게 눈총을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먼지투성이 옷을 입고, 여전히 한 손에는 하모니카를 든 젊은 남자가 있었다.
“제국? 공국? 성황국?”
“공국입니다.”
남자의 입에서 공국어가 흘러나왔다.
마왕은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고, 용사가 마왕을 죽이며 세계의 절반이 빈 땅이 되었다.
빈 땅을 가지기 위해 남은 세계의 절반에서 사람이 몰렸고, 그들은 크게 세 가지 언어를 사용했다.
제국, 공국, 성황국.
그 세 나라 언어가 인종과 문화의 짬통이 된 개척지의 공용어로 쓰였다. 개척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셋 중 하나의 언어는 할 줄 알았다. 아니면 셋 다 어눌하게 구사하거나.
기사의 질문은 어떤 언어를 할 줄 아냐는 것이었고, 남자는 공국어라 답했다.
“통역을 부를 필요가 없어서 좋군. 왜 개척지 방향에서 온 거지?”
“용병입니다. 여기 길드에서 발행한 정식 탐사 허가서.”
“제국어군.”
“길드 표준이니까요.”
“부정 출발자나 그 협력자는 아닌가?”
기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부정 출발자는 서부 개척을 관리하는 연합에서 제법 심각하게 다루는 사안이었다.
경주 시작과 함께 달려가 깃발을 꽂는다. 그러면 그 주변은 자기 땅이 된다.
세세한 규칙은 다르지만, 그게 토지 경주의 가장 큰 골자였다. 부정 출발자는 개척지로 숨어들어 먼저 깃발을 꽂고 옥토를 선점한다.
“15년 전 나타난 마왕이 세계의 반을 삼키는 데 채 1년이 걸리지 않았고, 10년 전 용사가 마왕을 쓰러뜨렸죠. 마왕이 죽으면서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마족들도 모두 증발하듯 사라졌고, 세상의 반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습니까?”
“당사자 앞에서 지식 자랑인가?”
“오, 전쟁 영웅이셨군요. 기사님의 용기에 경의를! 아무튼, 욕심 많은 귀족들은 주인이 사라진 세상의 반을 갈라 먹을 궁리를 했죠. 마왕의 공세를 최전방에서 방어했던 나라, 예를 들어 기사님의 조국인 공국에서는 먼저 빈 땅에 깃발을 꽂고 싶어 했고, 후방 국가, 대표적으로 제국과 성황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막아야 했죠.”
“그렇지. 지들은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기사는 점점 남자의 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국이 세상의 반을 홀라당 먹어버릴 테니까요. 사실, 그게 정당한 대가인데 말이죠. 기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 땅은, 적어도 서부 일부는 공국의 것이라고요.”
“개 같은 새끼들.”
기사가 이를 갈았다. 최전방 국가들은 빈 땅을 개척하고 전쟁 난민을 정착시켜 쇠약해진 국력 강화를 원했다.
그 대표가 공국이었다.
세상의 반이 빈 땅이다. 그냥 대륙 반대편이 나올 때까지 토지를 개척하기만 되는 간편한 일이다.
사람의 끝없는 욕심도 잠깐은 풀어질 양이었고, 파격적인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전쟁 참가자인 기사에게도 땅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를 모두 날려 먹은 건 전적으로 제국과 성황국으로 대표되는 후방 국가들의 견제 탓이다.
그들은 군대까지 동원해 가며 공국을 압박했고, 땅을 두고도 가지지 못하는 대치가 이어졌다.
“5년의 치열한 정쟁 끝에 연합이 만들어졌죠. 서부 개척 전체를 책임지는 범국가적 기관. 연합이 정한 법도에 따르면, 경주에 쓰이는 깃발은 경주 사흘 전부터 연합에서 판매를 시작하며, 연합 인증 마크가 없는 깃발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제가 미개척지로 가기 전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만, 그사이 규칙이 바뀌었습니까?”
“아니.”
“그러면 저는 결백하군요. 제가 미개척지로 나간 건 한 달 전이니까요.”
“증거 있나?”
“용병 길드 파푸란, 잡화점 에나. 그리고 길드 단골 술꾼들이 증언해 줄 겁니다. 확인하러 가실까요?”
“아니, 됐다. 가봐도 좋아.”
“수고하십니다. 그런데, 깃발은 어디에서 삽니까?”
“용병 길드 옆에 간이 상점이 섰다. 그런데 지금 출발하려고?”
기사가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이미 선두주자들은 전부 출발했고,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고귀한 분들도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해 저들을 앞질러 땅에 깃발을 꽂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도 꿈은 가져봐야죠.”
“꿈이라… 그래. 꿈꾸는 것까지 방해할 권한은 없지. 용병, 이름은?”
“마르할. 마르할입니다.”
“용병 마르할, 자네 꿈이 이뤄지길 빌지.”
“기사님도 사지 멀쩡하게 은퇴하시길 바랍니다.”
간이 상점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마르할의 등에 대고 기사가 물었다.
“그런데, 그 하모니카는 뭔가?”
“심심풀이용입니다. 황야에서 혼자 걸어 다니면 심심하지 않습니까?”
마르할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숨을 불었다.
제법 능숙한 연주였다. 바람이 퍼 올린 흙이 흙먼지가 되어 날렸고, 마르할은 하모니카의 음색과 함께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괴상한 놈이군. 자네 생각은 어때?”
“저도 동감입니다.”
기사와 부관은 하모니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이나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 *
마르할은 용병 길드를 찾았다. 그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르할의 얼굴을 확인한 접수원이 벌떡 일어났다.
“마르할! 이 미친 새끼! 1년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말했잖아요. 잠깐 볼일이 있다고. 그리고 이거 처리 좀 해줘요.”
그의 입에서 유창한 제국어가 나왔다.
마르할이 내민 건 기사에게 보여줬던 탐사 허가서였다.
허가서를 뺏듯이 받아 간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발행일이 한 달 전? 여기 있지도 않았던 놈이? 이 미친 새꺄, 이거 공문서 위조야!”
“워워. 조용히 합시다. 연합 사람이 들을라.”
몸을 낮추며 쉿. 검지를 입에 대는 마르할을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